2. 휘오
지구가 존재하는 개척 지역의 분위기는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떠올리면 얼추 비슷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차원의 개수는 무한하다고 하지만, 사실 창조신의 꿈결을 아무리 항해해도 그 어떤 차원 하나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대서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태평양이라고 해야 할까? 끝도 없을 것처럼 망망하기만 한 창조신의 꿈결을 항해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의 차원을 만나게 된다. 재미있는 건, 일단 하나의 차원을 만나고 나면 금방 세 개, 아홉 개의 차원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차원들은 마치 중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의 대륙과도 같은 무리를 이루었다.
개척 지역은 가장 최근인 150년 전에 발견된 차원단이며, 지구는 그 차원단에서 가장 구석, 오지에 박혀 있었다.
차원 문명들 중에서는 아갈타가 개척 지역과 가장 가까웠기에 큰 수혜를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갈타가 이 지역을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 다양한 차원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날아온 이들이 이룬 차원 도시, 공장, 물류 센터들이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처럼 자치권을 행사하며 난립해 있고, 차원 문명을 이루지 못한 원주민들의 원시 차원들이 그 사이사이 뒤섞여 있는 게 현재 개척 지역의 형세였다. 개척자들과 무법자들의 천국과도 같은 곳.
지금까지는 그랬다.
아갈타가 센타울을 이기고 아갈타의 대군 중 일부가 남아 휘젓고 다니는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다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모양이야.”
휘오오오-
휘오가 나를 위로하듯이 서늘한 바람 소리를 냈다. 내 이름이 시민颸旼(선선한 바람과 가을 하늘)이라서 그런가? 이렇게 시원한 바람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미슈의 전사 소식을 듣고, 또 센타울의 배신 소식을 듣고 부글부글 끓는 마음으로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휘오의 던전으로 찾아온 이유였다.
휘오는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가지 하나를 빌려주고 내 옆에 나란히 앉아 내 푸념을 들었다.
따라온 이는 서민서, 찾아온 이는 무르물랑. 그렇게 넷이 둘러앉아서 속 이야기도 하고 정세 얘기도 나누고 두서없이 떠오르는 대로 생각들을 나누었다.
무르물랑이 물방울을 톡! 튕기며 말했다. 물방울이 휘오의 잎사귀 하나에 탁 맞고 데굴 구른다.
“겁을 먹을 만하지. 센타울과의 전쟁을 통해 아갈타가 얼마나 야만스러운지가 잘 알려졌잖아.”
센타울의 포로들이 풀려나면서 아갈타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졌다.
빌어먹을 아갈타 놈들.
새삼 떠올라서 다시 역겨워졌다.
특히 놈들이 내미슈에게 저질렀다는 모욕은 정말… 생각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서 나는 눈을 감고 휘오의 가지 사이로 몸을 더욱 깊이 파묻었다.
서민서도 뾰족한 목소리로 분노를 토해 냈다.
“센타울도… 정말 실망이에요. 어떻게 자기네 장군이 그런 꼴을 당하는데도… 그딴 놈들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동맹도 맺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 그 말 백 퍼센트 공감이다.
그렇게 모두에게 혐오감을 주는 아갈타였는데, 정작 놈들의 반응은 더 가관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음해 행위를 멈추기 바란다.]
사실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작은 지구 안에서도 문화가 서로 판이한데, 차원 단위로 나가다 보면 정말 아갈타가 귀여워 보일 정도의 엽기적인 문화도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아갈타를 아는 이들은 죄다 코웃음을 쳤다.
정작 아갈타 놈들은 다른 그 누구의 다양성도 지켜 주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무르물랑은 물방울 팍팍 튀기면서 말했다.
“문화적 차이는 개뿔. 정작 지들이 이 인근을 다 점령하고 나면 개척자들한테 꺼지든지 아니면 아갈타의 방식을 따르든지 양자택일을 강요할 거면서.”
서민서가 그 말을 받았다.
“그때 가서 문화적 차이를 존중해 달라고 말하면 자신들 영토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내정간섭이라고 광광 날뛰겠죠.”
“내 말이.”
무르물랑이 흥분해서 사방으로 물방울을 첨벙첨벙 뿌려 댔다. 세계수의 이파리들이 물을 흠뻑 뒤집어썼다. 그런데 그게 휘오의 심기를 거슬렀나 보다. 아니면 재미있었거나.
휘오오오-
싸르르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서 이파리들을 흔든다. 이파리에 묻어 있던 물방울들이 거짓말처럼 날아서 무르물랑의 몸으로 되돌아가 붙었다.
무르물랑이 그걸 보고 움찔하더니 씨익 미소를 지었다.
“뭐야, 꼬맹이. 해보자는 거냐?”
휘오가 답했다.
“나 꼬맹이 아닌데.”
“어디 아닌지 맞는지 한번 보자!”
첨벙첨벙.
쏴아아아-
무르물랑도 스트레스를 받긴 받았나 보다. 휘오와 유치한 자존심 싸움을 하며, 물방을 튀기고 받고 하며 열심히 장난질을 쳐 댔다.
엄중한 이 시국에 되게 생각 없어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게 좋았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욱신거리던 머리가 둘의 장난질을 보며 조금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무르물랑과 휘오의 가지와 이파리들이 서로 물장구를 치고 놀고 그 모습을 서민서가 픽 웃으며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내 옆에 앉아 있던 정령 형태의 휘오가 내게 말했다. 본체가 거대한 세계수라 그런가? 멀티태스킹에 탁월하다.
“시민, 나 근데 그거 알아냈다?”
그거?
“그거 말야, 왜 내 형제자매들은 말을 하지 못하는지.”
맞다. 그런 얘기를 했었다. 얘가 요즘 좀 쓸쓸해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고. 그런데 방법을 찾았다고?
“응. 역시 내 안에 답이 있었어. 시간을 들여 길게 생각하다 보니 원래 알고 있던 지식처럼 불쑥 떠올랐어.”
오, 그 이유가 뭘까? 왜 다른 세계수들은 말을 못 했던 걸까?
“사실 별것도 아니더라. 멸망한 세계의 주민들이 퇴화한다는 걸 알고 있지?”
잘 알고 있다. 초기 인류가 싸웠던 트롤이니 오크니 오우거니 하는 괴물들도 모두 알고 보면 멸망한 세계의 주민들이었다. 인간처럼 지성이 있었고 문명이 있었다. 하지만 세계가 멸망하자 퇴화를 거듭해 본능과 분노만이 남은 괴물이 되고 말았다.
“세계수들도 그와 다르지 않아. 우리도 아득히 먼 옛날에 세계를 잃어버린 난민인걸? 아무리 신의 후예라는 세계수라도 퇴화를 피할 순 없지.”
결국 퇴화해 버린 탓에 세계수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휘오는 어떻게 말을 하는 걸까?
“그건 단지 내가… 조금 더 운이 좋고, 조금 더 특별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 새로운 세계수는 두 가지 방법으로 탄생해. 하나는 가지를 꺾어 꺾꽂이 하는 것. 두 번째는 씨앗을 만들어 떨어뜨리는 것.”
어떤 차이가 있지?
“큰 차이가 있어. 아무래도 가지로 꺾꽂이를 하는 쪽이 최초, 고대신의 후예라는 세계수의 원형과 가깝거든. 그래서 직계라고 볼 수 있는데… 얼마 전에 생각났어. 나는 현재 직계에 가장 가까운 세계수야. 첫 번째 세계수의 가지에서 태어난 두 번째 세계수, 두 번째 세계수의 가지에서 태어난 세 번째 세계수, 그 세 번째 세계수의 씨앗이 바로 나였거든. 나는 본질에 가까웠기 때문에 퇴화를 면했던 거야. 운도 많이 따랐을 테고.”
그간 정말 많이 고민했던 모양이다. 휘오는 자신의 기원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휘오가 특별해서 휘오만이 말을 할 수 있는 거라면…….
“그럼 다른 친구들은 영영 말을 하지 못하는 것 아니야?”
내가 생각할 땐 그게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하지만 휘오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세계수야. 한번 퇴화했다 해도 다시 되돌릴 수 있어. 다만… 환경이 필요해. 최초의 우리가 시작되었던 그곳과 유사한 환경.”
휘오의 목소리는 어딘가 씁쓸했다.
그 유사한 환경이라는 조건이 무척 까다로운 게 분명했다.
“까다로운 정도가 아니라…….”
휘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불가능해. 왜냐면, 세계수는 차원과 차원 사이로 뿌리와 가지를 뻗으며 자라거든. 우리는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차원을 서로 연결하며 숲을 이루고 살았어. 그런 환경을 만든다면 내 형제들은 다시 깨어날 수 있겠지. 그때가 진정으로 우리 세계수가 난민 신세를 벗어나서 부활하는 때가 될 거야.”
휘오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사명감같은 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 이 모든 비밀들을 알아냈듯이 휘오의 본능에는 종족을 되살리라는 열망이 잠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거… 그렇게 수많은 차원을 연결하고 세계수의 숲을 만들면… 흔적이 남게 되는 것 아니야?”
이게 문제였다. 지금 우리는 지구의 존재를, 그리고 휘오의 존재를 최대한 숨겨야 하는 상황. 그런데 거대한 세계수의 숲을 만들어서 사방의 주목을 받는다면 일을 다 망치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다.
휘오가 기운 없이 말했다.
“맞아… 나 혼자 있을 때랑은 달라. 일단 세계수의 숲을 만들기 시작하면 엄청난 영력이 휘몰아치게 될 거야. 그간 흡수한 타키온도 엄청나게 많이 소모하게 될 거고. 멀리서도 이변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어.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말한 거야.”
어깨가 축 처진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찡하다.
촤아아악!
“크윽! 꼬맹이, 제법이구나.”
그 와중에도 정작 잎과 가지는 계속 움직여서 무르물랑과 물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건 좀 웃기지만…….
아무튼 휘오는 진지했다.
후…….
난 한숨을 쉬고 휘오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정말 불가능한가? 그게 꼭… 그래야 하나?
“휘오, 그거…….”
내가 막 휘오에게 말을 하려던 그때.
[단장님! 단장님!]
릭이 황급히 뛰어들어 왔다.
[이거, 이거 꼭 지금, 바로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는 숨을 헐떡이며 아공간에서 잘 포장된 차원강습 시스템을 꺼냈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무언가가 머리를 꽝! 하고 때리는 충격.
물건이… 물건이 너무나 좋았다!
와, 이거 뭐지?
이런 게 있을 수 있나?
여태 내가 ‘차원강습 시스템은 이런 거야’ 하고 나름대로 규정하고 있던 틀을 산산이 깨부숴 버리는 작품이었다. 살이 떨린다. 대체 뭘까, 이 아름답고 위대한 것은……?
내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런데 그런 날 바라보는 릭의 표정에는 짙은 슬픔이 어렸다.
응? 왜 슬퍼하지?
심지어 목까지 메는지 릭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 이랍니다.”
“선물? 누가 이런 귀한 걸…….”
말하다가 말고 깨달았다. 이걸 누가 보냈을지, 왜 릭이 저런 표정을 짓는지.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진다.
릭이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네. 내미슈 장군님이 보낸 선물이라고 합니다. 어쩌다 보니 길이 엇갈려서… 이제 도착했습니다.”
아…….
말이 나오질 않는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걸 어째야 하나.
그러고 보니 선물을 준비한다고 했었… 지? 이렇게 과분한 선물이었다고? 그게, 네가 죽은 다음에나 도착했다고?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처음이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답고 훌륭한 물건을 눈앞에 두고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
서민서가 그런 내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선배.”
녀석이 부르는데도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겨우 눈동자만 굴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녀석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도 유물이라면 유물인데… 우리가 장례라도 치러 주는 게 어때요?”
장례.
그 말이 가슴에 울림을 주었다.
고향인 센타울에서조차 열리지 않은 장례식.
고향인 센타울에서조차 지켜 주지 않은 그의 명예.
모두가 겁먹고 두려워하고 있는 지금.
장례. 그보다 더 적절한 게 뭐가 있을까?
일단 한 번 귀에 들어오자 갈수록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래. 맞다. 치러야지. 센타울이 치르지 않으니까 우리라도 치러 줘야지.
그제서야 딱 달라붙어 있던 입이 떨어졌다.
“그래. 치러 주자, 우리가.”
서민서가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 고작 그 한 마디에.
그제야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확신이 들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휘오오오-
휘오의 바람이 기분 좋게 내 등을 떠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