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모욕
아갈타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들의 포로 대우가 영 좋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때문에 센타울의 군인들은 항복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특수 임무자나 간부들은 속으로 고문까지도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그들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10명씩 들어가 공동생활을 하게 되는 감방.
지구에선 흔히 팬옵티콘이라고 불리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따위는 조금도 존중되지 않는 감옥의 형태. 고립감…….
뭐 이런 건 예상 범주 내였다.
하지만 센타울인들이 예상하지 못한 건 아갈타의 배급 시스템이었다.
아갈타의 간수는 말했다.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는 자는 먹을 자격이 없다. 살 가치도 없다.]
[너희 센타울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곳 아갈타는 이렇다. 이곳에선 아갈타의 방식을 따라라.]
그래서 매일매일 ‘경기’가 열렸다.
방식은 간단했다.
감옥은 가장 중심부에는 높은 감시탑이, 외곽에는 감방이 둥그렇게 둘러서 있다. 그 사이는 도넛 형태의 공터였다. 그 공터가 일종의 콜로세움이었다.
많은 아갈타의 군인들이 날마다 감시탑으로 몰려와 ‘경기’를 관람하며 먹고 마시며 내기하고 소리를 질렀다.
‘경기’는 매일 열렸다.
모든 감방은 매일 1명의 출전자를 내보내야 했다.
경기 방식은 무제한 난투전.
난투 끝까지 서서 버티거나 홀로 여러 명을 때려눕히며 관중의 호응을 끌어내면 그 출전자가 소속된 방에는 더 많은 음식과 생필품이 보급되었다. 반대로 초반에 맥없이 쓰러져 버린 출전자들이나 오래 버텼어도 도망만 다녔던 출전자의 방에는 한참 부족한 보급이 이루어졌다. 출전을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에는 최소한의 생명 유지를 제외한 모든 보급이 끊겼다.
센타울의 군인들은 처음에는 반항했다. 아갈타 놈들의 광대 짓을 위해 전우를 때릴 수는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생명 유지를 제외한 모든 보급’, 그러니까 기본적인 위생을 위한 보급조차 끊긴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무서운 일이었다. 감방 안은 똥과 오줌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먹을 것이 없어서 예민해진 병사들은 매일 한 번 주어지는 ‘영양 주사’를 먼저 맞겠다고 서로 주먹질을 해 댔다. 기다리기만 하면 순서대로 주사를 놔 줄 텐데, 그새를 못 참을 정도로 괴롭고 조급해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경기에 출전해 우승한 감방으로 막대한 음식과 새 옷 그리고 ‘욕조’, ‘샤워기’ 따위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다들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그다음부터는 매일 혈전이 벌어졌다. 문자 그대로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 죽일 필요는 없었는데도… 누군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일이 예사였다.
매일매일이 지옥이었다. 매일매일이 서로에 대한 애정을 잃어 가는 나날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센타울의 외무 장관은 크게 항의를 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너무 지나친 처사 아니오! 아무리 포로라지만 어떻게 가장 기본적인 존엄을……!]
하지만 아갈타의 외무대신은 되레 모욕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 무슨 말씀이시오? 우리가 고문이라도 했소? 지금 이 프로그램은 아갈타의 모든 이가 받는 기초 군사훈련과 정확히 동일한 프로그램이오. 그런데 너무하다고? 기본적인 존엄이 없다고? 그럼 우리 아갈타인들에겐 기본적인 존엄이 없기라도 하다는 말이오? 심히 무례하군!]
말이 통하지 않았다. 센타울 외무 장관은 ‘그래! 네 새끼들 하는 꼬라지를 보니 존엄이 없구나! 야만스러운 새끼들!’이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의 정세에서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빨리 포로 석방 절차를 진행하시오.]
[안 그래도 당장 내일부터 시작할 것이오. 본인이 귀환을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모두 돌아가게 되겠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하지만 다음 날이 되었을 때 센타울의 외무 장관은 치미는 분노와 욕지기를 또 한 번 내리눌러야만 했다.
그래, 분명 센타울-아갈타의 협정에 그런 내용이 있기는 했다.
‘내미슈는 오만했고 자기 분수를 알지 못했기에 패사敗死했다. 이게 우리의 공식 입장이오. 첫째, 그것을 받아들이시오.’
그래서 받아들였다. 아갈타가 공식적으로 내미슈를 비방하고 고인을 모욕해도 센타울은 한 마디 반박 성명도 내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차원의 이익을 생각해 자존심과 미안함을 버리고 협정문에 사인을 했던 센타울 외무 장관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죄책감을 이길 수 없었다.
센타울 포로들의 석방 절차는 단순했다. 지정된 석방로를 따라 주욱 걸어 나가서 좁은 문을 열고 한 명씩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통로 끝 바닥에 내미슈의 시신이 든 관을 깔아 두었다는 것이다. 석방되고자 하는 자는 내미슈의 관짝을 밟고 나가야 했다.
관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만한 내미슈,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날뛰다 참수당해 이곳에 묻히다. 만인이 짓밟고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어야 하리라.]
그리고 좁은 문은 내미슈가 입고 있던 최고급 차원강습 시스템, 라리사의 진격 세트를 쪼개서 누덕누덕 기워 만든 문이었다. 문밖으로 나가려면 누더기가 된 내미슈의 그 차원강습 시스템을 밀치고 나가야 하는 구조였다.
자신들이 존경하고 따르던 군단장의 시신을 밟고 그의 장비를 밀치고 나가라는… 끔찍한 능욕.
[미친 것 아니오! 어떻게 고인을 이렇게……!]
[본래는 시체를 걸어 두려던 것을 센타울의 체면을 생각해 많이 참았소이다?]
아갈타는 끝까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지옥을 탈출하는 심정으로 신이 나서 석방로를 따라가던 센타울의 병사들은 내미슈의 관 앞에서 망연자실 주저앉았다. 어떤 이는 엉엉 울기까지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들에게 센타울의 외무 장관은 이를 악물고 본국의 명령을 전했다.
[개척 군단의 군인들은… 살아 돌아오라. 그것만을 생각하라.]
개척 군단의 군인들은 앞을 보고 또 뒤를 돌아보았다. 저 좁은 문을 나서기만 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는다면 다시 아군끼리 매일매일 싸워야 하는 지옥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결국 대부분은 명령을 따랐다.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합니다, 장군님.’ 하면서 내미슈의 관을 밟고, 그의 장비를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어떤 이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악물고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끝끝내 내미슈를 밟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 우루스가 그랬다. 그는 울지도 않았다. 석방로 끝에 놓인 관을 보는 순간 두 팔을 벌리고 관을 향해 허리를 조아렸다. 극상의 존경을 의미하는 센타울의 인사법이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뒤돌아 자신의 감방으로 돌아갔다. ‘경기’에도 참여하지 않고 그냥 자리에 앉아 매일매일 야위고 더러워지며 두 눈을 꾹 감고 지냈다.
* * *
사실, 전쟁이 이렇게 빨리 끝날 거라는 건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때문에 내미슈의 부관, 리아센은 ‘직접 선물을 전달하라’라던 당시 내미슈의 명령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침묵의 해적단이 활동하는 개척 지역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길이 엇갈렸다. 그때 소시민은 휘오의 힘을 빌려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센타울에 도착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부관은 다시 센타울로 되돌아갔다. 어차피 동맹 협정을 맺는 데까진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니 돌아가면 충분히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침묵의 해적단이 그랜드 마스터 켄타로스까지 꺾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이어서 내미슈가 동맹을 채근하는 바람에 동맹도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졌다. 부관이 센타울로 돌아왔을 때, 침묵의 해적단은 벌써 동맹을 맺고 전선으로 떠난 상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군단장님 옆에 있는 게 나았잖아?’
투덜투덜거리며 다시 내미슈에게 합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목적지는 전쟁터. 이런 귀한 물건을 가지고 이동하기엔 좋지 않았다.
‘군단장님이 직접 전달하라고 하셨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
그래서 타키넷에 있는 현상금 사냥꾼들의 이름 없는 주점을 찾아갔다. 그곳에 상주하고 있는 침묵의 해적단의 연락책 릭을 만났다.
그간 혼자 임무를 수행하느라 내미슈의 부관 리아센은 여전히 그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예? 선물이라고요?]
릭은 리아센이 꺼낸 물건을 보고 기절초풍할 듯이 놀랐다.
[이거……! 모블란사社의 한정판 차원강습 시스템이잖아요? 이런 걸 선물로 준다고요?]
1년에 딱 한 개의 한정판 차원강습 시스템을 만드는 회사. 맞춤 제작은 아니지만, 사용하는 대로 길이 들고 커스텀도 자유자재로 가능해서 최종적으로는 맞춤 제작보다 더 잘 맞게 된다는 전설의 차원강습 시스템이었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다는, 예술 작품과 진배없는 차원강습 시스템이 리아센의 손에 들려 있었다.
릭은 환호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이게 어디서 온 선물인지 묻기도 전에 찬사를 내비치기 바빴다.
[와! 미쳤어! 이걸 제가 실물로 볼 줄은 몰랐습니다! 우와! 침묵의 해적단이 된 건 역시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야!]
부관 리아센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보물을 줘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지루하고 짜증 난다. 반면에 이렇게 보물을 알아보고 기뻐하면 주는 쪽에서도 신이 나기 마련이었다.
[이거 제어 코어 넘버링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잠깐! 잠깐 말하지 마세요. 제 본업이 감정사입니다. 제가 맞혀 볼게요. 오! 영력을 밀어넣었을 때의 이 반발력! 이 손맛! 와… 미쳤다, 진짜. 오오오! 진동! 와! 이거… 설마 4,000이 넘습니까? 그런 건 박물관에서나 봤는데! 그것도 모조품으로!]
[네. 진품을 만져 본 소감이 어때요? 4,100넘버링 코어입니다. 코어 자체만 해도 100퍼센트 수제작으로 만들어진 예술품 그 자체죠.]
예술품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단가가 맞지 않아서 상품으로는 제작되지 않는 물건. 4,000넘버가 넘어가는 코어는 그저 우연이 빚은 기적과 장인의 불타는 창작열이 맞물려 태어나는 그런 작품이었다.
[와! 와! 미쳤습니다! 잠깐, 이거 외장갑을 형성하는 슈트도 장난 아닌 것 같은데요?]
[예리하시네요. 그건…….]
[창세로를 이용한 자연 슈트!]
[가짜 창세를 이용한 자연 금형!]
릭과 리아센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둘이 사용한 단어는 달랐지만 내용은 같은 내용이었다.
자연 진화 슈트는 단조 슈트처럼 땅땅 때려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차원이 탄생하고 그 안에서 자연이 스스로 그러하게, 자연自然하게 탄생해 진화하듯이, 원하는 재료를 창세로에 집어넣고 잘 세팅을 해서 가짜 창세를 일으키면 낮은 확률로 완벽한 슈트가 마치 자연처럼 스스로 나타나곤 했다.
엄청나게 비싸지만, 마치 살아 있는 생태계처럼 주인에게 적응하고 변해 가는 그 성질과 기우거나 떼운 자국 하나 없이 완벽하게 짜인 구조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슈트와는 비교 자체를 거부했다.
릭은 자신의 뺨을 슈트에 댔다. 하나의 우주가 담긴 것만 같은 그 복잡한 감촉에 행복한 신음을 내며 말했다.
[아…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우리 단장님은 좋겠다, 이런 게 자기 물건이라니. 하아아… 대체 어떤 분이 이런 대단한 물건을 선물로 보내 주시는 겁니까? 저도 친하게 지내고 싶네요. 그런데 진짜 이거 주는 것 맞습니까? 와… 이건 돈 있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리아센은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주변에는 다들 구경꾼뿐이었다. 안 그렇겠는가? 전설처럼만 들어 본 전 차원계 최고 수준의 차원강습 시스템이 눈앞에 실물로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게 선물이라니. 받는 사람도 부럽지만 주는 사람이 누군지도 궁금했다.
리아센은 기분이 좋았다. 웅성거림 하나하나가 내미슈 장군에 대한 찬사처럼 들렸다.
사실 자신은 아깝다고 생각했다. 이 대단한 물건을 선물이라니… 하지만 지금 드는 생각은 역시 내미슈 장군님의 도량은 자기 같은 일반인이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넓다는 생각뿐이다.
리아센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실 장군님이 모블란사의 전속 모델이시기도 하고, 모블란사의 경비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셨어요. 그래서 이렇게 한정판 모델을 구하셨지요. 그것 아세요? 이건 단순한 장비가 아니에요. 그 자체가 모블란사와의 거래권이기도 해요. 모블란에 가서 등록하면 모블란과 거래를 틀 수 있어요. 그러면 이제 침묵의 해적단도 자체적으로 거신병까지 제조할 수 있을걸요? 이제 그만 밀수꾼 생활 청산하라는 장군님의 뜻이에요.]
그런데, 그녀의 그 자랑스러운 말에 훈훈하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 장군님이요?]
릭은 화들짝 놀랐다. 장군님이라니? 설마……?
릭은 물었다.
[혹시 어디서 오셨습니까?]
[네? 아, 내 정신 좀 봐. 아직도 소개를 안 했네요. 너무 돌아오느라 정신이 없었나 봐요. 늦게 인사드립니다. 저는 내미슈 장군의 부관 리아센입니다. 이 선물은 내미슈 장군님이 침묵의 해적단 단장님에게 보내는 선물이에요.]
그 소개가 끝나는 순간 사방이 고요해졌다. 시끌시끌하게 풍덩주를 풍덩풍덩 마시던 현상금 사냥꾼들도 입을 딱 다물고 리아센의 눈치를 살폈다.
[에? 왜들 그래요?]
릭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말은 해 줘야 했으니 억지로 입을 열고 물었다.
[혹시…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네? 무슨 소식이요?]
[그게…….]
잠시 뒤, 리아센은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항상 빙글빙글 도는 눈동자의 파랗고 노란 나선이, 딱 얼어붙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미슈가 죽었다.
그 사실을 그녀는 꼬박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