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92화 (192/212)

17. 몰입 그리고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단지 죽겠다는 각오만 가지고 싸움에 임했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에 정말 죽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필사必死’만으로는 ‘즉생卽生’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 사이에 들어가야 하는 건 최고 집중력, ‘몰입’이었다. 까마득한 절벽 사이의 외줄을 타는 심정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걸어가는 집중과 몰입.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걷다가 어느새 돌아보면 절벽을 건너 있는 것. 뒤늦게 어? 살았잖아? 하고 느끼는 그런 몰아沒我의 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우리에게도 그랬다.

- 혀, 형님! 너, 너무 빨라요! 저희 주, 죽어요!

까막이가 통신으로 죽는소리를 해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속도를 늦추지도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최선의 속력과 최고의 집중. 모두가 각자의 앞을 봐야지, 옆이나 뒤를 돌아보는 순간 조각조각 전멸하는 길밖에는 남지 않는다.

나는 녀석의 목소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줌의 힘에, 녀석의 예민하게 살아 있는 감각을 믿을 뿐이다.

“안 죽어! 버틸 수 있으니까 버텨!”

창조신의 꿈결 속을 헤엄치는 것은 그 자체로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체력적, 정신적 부담을 가져다준다. 아무리 차원강습 시스템이 보조를 해 준다고 해도 10분이 넘고 20분이 넘으면 그저 악몽 속을 허우적거리는 듯 패닉이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헤엄치고 끝이 아니라, 적이 장악한 수송선에 몰래 잠입해 들어가 적을 모두 암살하고 배를 조용히 장악해야 하는 임무까지 더해지면 정말 죽을 맛이겠지. 그 짓을 무려 스물일곱 번을 해야 한다면 그냥 울면서 때려치우고 싶어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만상공감]으로 보고 있다. 내가 선별한 대원들이라면 이 끔찍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했다. 그럼 해 줘야 한다. 오늘의 싸움은 그런 싸움이었다.

- 혀, 형님! 대원들이……!

두 번째 수송선을 장악하고 또 쉬는 시간 없이 곧바로 입수를 명령하자 까막이가 절박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떠들 힘 있으면 그 시간에 자맥질을 한 번 더 해!”

힘들다는 걸 안다. 그간 호되게 수련해 오고 더 호된 실전을 겪어 온 화랑단이 우는소리를 하는 건 정말 한계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다. 화랑단이고 까막이니까 이만큼 버티는 거지, 일반 헌터들이었다면 벌써 멘탈이 나가서 낙오하고 대량으로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파도를 타고 미끄러지는 중이고, 파도는 우리 바로 뒤에서 우리를 잡아먹을 듯 쿠르릉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멈춰서도 늦어서도 안 된다.

웨에에에엥-!

[적이다! 적습이다!]

세 번째를 지나 네 번째 수송선을 장악하고 있을 때 아갈타의 호위 함대가 이변을 눈치챘다.

나는 반사적으로 외친다.

“서민서!”

- 예입!

파아아앙-

차원을 뛰어넘어 그녀가 적진 한복판으로 나아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그런데…….

쩌어엉-!

뭔가 잘못됐다.

그녀의 머리를 강타하는 충격이 느껴진다.

쩡! 쩌저적! 드드드득!

심지어 한 번이 아니었다.

단단한 벽을 맨살과 뼈로 부수고 나가는 것처럼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이 몸을 감싼다.

아팠다. 오금이 저리고 이빨이 다 갈리도록 아팠다.

내 몸이 다 부들부들 떨렸다.

‘…방비가 되어 있었어?!’

하긴, 아갈타 놈들이 서민서가 떨어뜨리는 재앙 병기에 당한 게 제법 여러 번 되지 않았던가? 방어 대책이 생겨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 멍청한 새끼!’

내가 [만상공감]으로 그걸 미처 파악하지 못한 건 잘못이었다.

여기까지 숨어드는 데에, 또 몰래 수송선을 장악하는 데에 지나치게 많은 심력을 쏟아서 [만상공감]의 영역 군데군데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걸 놓칠 수가 있어!’

가슴이 서늘하다.

차원을 넘을 수 없게 방해하는 결계라니! 그걸 이제 눈치채면 어쩌자는 거야?

“민서야!”

간절하게 서민서를 불렀다.

하지만 서민서는 이를 꽉 깨물고 “크… 윽!” 하는 신음 한 번을 내며 그 모진 고통을 견뎠다.

“민서야, 그만……!”

그만해도 된다고, 지금이라도 물러서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오히려 가속한다.

쨍-!

기어코 맨살로 유릿장을 깨듯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결계를 뚫고 뚫어 나갔다.

그녀의 외침이 [만상공감]을 타고 내 귀에 닿는다.

“무시하지 마! 적어도 이거 하나만큼은……! 아무한테도 안 진다고!”

쩌어어엉-!

마침내 그녀가 마지막 결계를 뚫고, 차원을 넘어서서.

재앙 병기를 투하했다.

……!

창조신의 꿈결 속에 소리 없는 폭발이 일어난다. 그것은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에 일어난다는 빅뱅을 닮아 있었다. 창조신의 꿈결은 재앙 병기가 떨어진 자리에서부터 밀려 나가며, 그 중앙에 공백이 생기고, 그 공백 속에서 온갖 헛것들이 태어나 잠깐의 거짓 역사, 거짓 우주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내 그 거짓된 세상을 뒤덮으며 다시 창조신의 꿈결이 꾸륵꾸륵대며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사이 우리가 미리 장악했던 수송선 세 척이 전속력으로 급발진해서 적의 주요 전투선과 충돌, 2차, 3차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적들이 혼란에 빠졌다.

- 선배, 난 그냥 내 일 한 거예요. 몸도 멀쩡하니까… 얼른 선배 일이나 해요.

꽤 다쳤지만, 서민서도 안전했다.

나는 이를 악문다.

그래. 지금이 기회다. 서민서가 몸 바쳐 만들어 준 기회.

거대한 폭발에 창백하게 긴장한 화랑단원들을 향해 외쳤다.

“이제 은밀 기동은 집어치운다! 전속 전력으로 모든 수송선을 탈취 또는 파괴해서 이곳을 빠져나간다!”

콰우우우우우-!

이제 더 이상의 은밀함은 필요 없다. 화랑단원 모두가 전력을 다해 차원강습 장비를 운용한다. 수백 개의 단조 슈트가 후드드 진동을 일으키며 괴성을 뿜어낸다.

아까부터 죽겠다고 우는소리를 하던 까막이도 이제 완벽한 몰입에 들어갔는지 아무 말 하지 않고 고요하게 기세를 올릴 뿐이다.

나는 그 모습을 흘깃 한 번 살펴보곤.

끼리릭!

이성계의 활을 당겼다. 스르르르- 새카만 영력이 부드럽게 펼쳐져 내 온몸을 휘감는다. 마치 옷처럼, 날개처럼 나름 감싸고 흔들거리는 영력.

화르르-!

이성계의 활에서 타오르는 아우라는 빈틈없이 하얗다. 100퍼센트 내게 길이 든 이성계의 활은 이제 나에게만은 강아지처럼 온유해졌다.

하지만.

그르르르릉-!

적에게는 늑대처럼 난폭하고 집요하다.

이제 권승리가 리미트 해제를 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의 전력을 발휘하는 이성계의 활이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화살촉 끝으로 검고 흉악한 영력을 끝도 없이 밀어 넣었다.

“이젠 알아서 잘하네. 그럼 나도……!”

옆에서 권승리가 나를 지켜보다가 꿈결 장갑을 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제 보니까 재앙 병기랑 내 능력이 상성이 좋다? 저렇게 창조신의 꿈결이 요동치고 있으면 일이 더 쉬워지잖아?”

이 근처는 차원이 없다.

차원이 없는 곳에는 차원 격류도 없다.

하지만 권승리의 손끝에서부터 창조신의 꿈결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차원 격류가 없는 이곳에 격류를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서민서가 전력을 다했듯이 권승리도 전력을 다했다.

그게 우리의 전략이었다.

단순하다.

단숨에 모든 화력을 쏟아부어서 적을 완전히 혼란에 빠뜨리고, 그 틈에 우리는 수송선을 탈취해서 빠져나가는 것.

구와아아아앙-!

내가 입은 차원강습 시스템 만월이도, 권승리가 입은 차원강습 시스템도 모두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거대한 소음을 쏟아내며 삐걱거렸다. 100퍼센트, 그 이상의 출력을 낸다.

* * *

[다음!]

[다음!]

내미슈는 이미 몇 번의 파도를 넘었는지 기억도 하지 못한다. 아니, 자신이 아갈타의 군세를 헤치고 또 헤치며 나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마저 잊었다.

모든 것이 그저 단순해졌다.

다가오면 벤다.

더 다가오면 밀치고 벤다.

너무 강하면 비껴 내면서 벤다.

하여튼 벤다.

틈이 보이면 찌르기도 한다.

톡! 토독!

뺨에 떨어지는 게 피인지 땀인지 빗물인지 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르릉! 구우웅!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울어 대는 차원강습 시스템에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지금의 집중 상태에서는 팔이 떨어지거나 다리가 떨어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끼긱! 끼기긱! 검이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그저 악착같이 베면서 나아갔다. [위협파악]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계속계속 그렇게 몰입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능력에 잡히는 위협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파도와 부딪치며 당장이라도 뒤집힐 듯이 삐걱이던 배가 마침내 폭풍우의 영역 밖으로 빠져나가듯이, 하늘이 점점 밝아지고 파도가 점점 낮아지듯이.

정작 내미슈는 깊이 몰입해 있어서 그걸 의식하지도 못했지만, 그저 본능처럼 저 앞에 밝아 오는 평온한 햇볕과 바람을 찾아내며 그렇게 마지막 파도를 넘었다.

…라고.

생각했다.

[권능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가장 취약한 곳을 기가 막히게도 찾아 내는구나. 그래서 내가 미리 와서 기다렸다.]

분명 파도가 잦아들고 햇빛이 내리고 있었는데, 마지막 파도 너머에 있는 건 다른 파도를 모조리 끌어 내리며 홀로 까마득하게 높이 솟은 해일海溢.

바다를 통째로 기울인 것 같은.

대군세를 통째로 한 점에 압축한 것 같은.

압도적인 위협감이 그 너머에서 내미슈를 기다렸다.

[…전군 정지.]

탈출을 감행한 이래 처음으로 개척 군단이 진격을 멈추었다.

그런 내미슈와 개척 군단을 바라보며 해일과 같은 존재감을 가진 남자가 말했다.

[그대는 명예롭다. 기어코 나를 직접 움직이게 했으니.]

일반 병사의 3배는 될 듯한 거대한 생체 슈트였다. 구불구불 이어진 뿔은 천년의 고목을 떠올리게 하고, 길게 뻗은 꼬리는 산맥을 연상하게 한다. 주변의 모든 영력을 실개천으로 만들며 홀로 출렁이는 바다.

체구는 3배가 크지만 그 존재감은 그보다도 훨씬 더 까마득하게 큰 거인. 그가 말했다.

[아갈타의 최고 원수 아케르다. 저승에 가서 내게 죽었다 자랑하거라.]

그랜드 마스터 우루스는 황급히 내미슈의 표정을 살폈다.

하나 이 위기에도 헬멧을 벗는 내미슈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걸 본 우루스는 안심을 하며 생각했다.

‘그래. 싸우세. 죽을 땐 죽더라도 명예롭게 싸우세.’

하지만 그는 이내 내미슈가 천천히 눈을 질끈 감는 모습을 보았다.

‘아…….’

우루스는 내미슈의 결심을 눈치챘다. 내미슈는 분명 처음에는 싸울 작정이었을 거다. 하지만 마음을 바꿨다. 그게 얼마나 내미슈의 심장 한구석을 찌르는 아픈 결정인지 우르스는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쿵 하고 가슴 한켠이 무너지는 기분. 우루스는 이게 자신의 기분인지 아니면 내미슈에게 감정을 이입한 탓인지 알지 못했다.

문득 우루스와 눈이 마주친 내미슈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습니다. 결국 저는 센타울인이니까요.]

개척 군단은 ‘역대급’이라는 단어로 형용된다. 그 말은 이곳에 센타울 최고의 기재들이 다 모여 있다는 뜻. 그들을 허무하게 잃는 것은 센타울의 미래를 통째로 무너뜨리는 것과도 같았다. 내미슈는 그런 미래를 원치 않았다.

내미슈는 생각했다.

‘그저 스포츠 같은 전쟁이 될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선 ‘모든 상황에 대비한다.’라고 떠들어 댔던 자신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쓰라린 심정으로 마침내 돌아선 내미슈가 크게 외쳤다.

[전원… 무장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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