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기분 좋은 승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이야기가 있다.
도망친 말 한 마리가 가져다준 불행과 행운을 보며 어떤 사건이 내게 좋은 일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긴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알 수 있다는 이야기.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가는 건 아틀라스 클럽 영웅들과의 오해, 심지어 반목까지 갔던 그 상황들이었다.
당시에는 그게 답답했다. 힘을 합쳐서 영력을 키워야 하는 이 시기에 뭘 하고 있나 싶었지. 그랬는데… 문득 요즘에는 당시에 그랬던 게 좋은 일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권승리 탓이다.
권승리와 여러 영웅이 보여 준 어처구니없는 성장 탓이었다.
우우우우웅-
권승리의 몸에서 영력인지 [법칙왜곡]인지 알 수 없는 아우라가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게 대체……?]
수군거리는 센타울인들.
놀랍지? 나도 그랬어.
영력을 몰랐기에 영웅들은 자신들의 초능력에 몰두했다. 초능력과 마누스를 결합하는 방법에 몰두했고, 나아가 초능력 자체를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영웅들은 이 우주의 누구보다도 권능(초능력)을 다루는 데 있어서 깊은 경지까지 나아갔다. 그런 그들이 그걸 다시 영력과 접목했다. 그 순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시너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건 내가 영력을 다루는 방식과도 비슷했다. 선천적인 영력 지배력이 바닥이었던 나는 언제나 영력을 그 자체로 사용하기보다는 [만상공감]이라는 초능력을 더 강력하게 사용하기 위한 ‘먹이’로써 사용해 왔다.
내가 걸었던 그 길을 다른 영웅들도 걷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타고난 영력 지배력으로.
하지만 그중에서도 권승리는 독보적이었다.
[법칙왜곡]이라는 초능력은 영력이라는 법칙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법칙왜곡]이 영력을 왜곡하면 왜곡된 영력은 [법칙왜곡]에 힘을 더하고, 그러면 더 강해진 [법칙왜곡]이 다시 영력을 더 깊이 왜곡하고… 그 끝없는 순환과정 속에서 이제 권승리의 영력과 초능력은 서로 구분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 새옹지마다.
만약 그녀가 회귀 초반부터 영력을 알았더라면… 그래서 지금과 같은 초능력의 이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과 같은 놀라운 성취까지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회귀하여 바닥에서부터 뼈를 깎아 가며 다시 초능력을 수련한 경험이 있기에 지금의 경지에 닿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권승리는 온몸에 [법칙왜곡]과 영력을 함께 두르고 즐겁게 말했다.
“요즘 많이 궁금했습니다, 지금의 나는 태양 강기와 어떻게 싸울 수 있는지. 오늘에서야 그 궁금증을 풀겠군요.”
맛있는 요리를 앞둔 사람처럼 정말 즐겁고 설레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 권승리에게 리길 아카데미의 마스터 리카로는 이런 대답을 돌려주었다.
[기권.]
“…에?”
권승리의 표정이 무너지는 게 보였다.
[아, 아니! 기권이라뇨!]
화가 난 건지 즐거운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안절부절 승부를 지켜보던 의장도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하지만 마스터 리카로는 아예 뒤로 훌쩍 빠져나가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제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기지 못할 걸 알면서 싸워야 하는 때도 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닙니다.]
의장이 발작하듯 반발했다.
[마스터 리카로! 아무리 그래도 리길 아카데미의 자존심인 당신께서……!]
하지만 마스터 리카로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리길 아카데미의 자존심이라니요. 지나친 과찬이십니다. 승부는 격이 맞는 사람들끼리 보아야 하는 법. 리길의 자존심… 이라는 말이 훨씬 더 어울리시는 분이 힘 빼지 말고 직접 상대하고 싶다 하셨으니 의장님도 노여움을 푸시죠.]
[네? 그게 무슨… 어, 서, 설마? 우왁!]
의장이 무언가 깨달은 듯 외마디 비명을 지른 후에 다들 그 말뜻을 뒤늦게 알아차렸는지 갑자기 사방이 왁! 하고 시끄러워졌다가 돌연 고요해졌다.
그 찰나의 순간 그들 사이로 지나간 말소리들을 나는 뒤늦게 종합해 보았다.
중구난방으로 들리던 그 이야기들은 결국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
센타울 차원에도 7명밖에 없는 그랜드 마스터.
그중 리길 아카데미의 사조를 제외하면 현역으로서는 최강이라 불리는 자가 권승리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 의미를 파악하고 나자 의장을 포함해서 모두가 입을 다물고 고요해진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가 싸우는 건 거의 볼 수가 없는… 굉장한 이벤트.’
그랜드 마스터 중 셋은 너무 연로하기도 하고 상징적인 스승과도 같은 이미지였고, 나머지 넷은 현역이지만 각자 너무 바쁘고 지위가 높기 때문에 맞수와 싸우는 모습 같은 것은 보기 어려웠다. 설령 그런 이벤트가 있더라도 자기들끼리 조용히 겨루지 이런 공개 석상까진 나오지 않는 게 일반적.
그렇기 때문에 센타울 차원에는 그랜드 마스터의 대전이 있었던 날을 기리는 축제까지 있을 정도라고 했다.
센타울인인 이상 모두 입 닫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끼이익-
리길 아카데미 중앙에, 절대 쓸 것 같지 않은 크기만 크고 아주 오래된 대문이 스르르 열리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후끈!
그의 등장만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센타울인 특유의 노랗고 파란 눈동자들이 나선을 그리며 빙글빙글 돈다. 센타울인들 특유의 열대 과일처럼 향긋한 체향이 훅! 끼쳐 왔다. 극도의 흥분. 기대.
[그랜드 마스터……!]
[그랜드 마스터 켄타로스…….]
[리길 최강의 검……!]
그랜드 마스터 켄타로스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올 때마다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사방이 뜨거워졌다.
켄타로스와 권승리가 마주 섰다. 둘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차르르륵! 각자의 차원강습 시스템을 착용했다.
켄타로스는 검을 들었다. 그 검은 내가 로랑 대좌에게서 빼앗은 일출보다 좋으면 좋지 빠지지 않는 보물이었다.
권승리는 주먹을 쥐었다. 주먹에는 내가 선물한 ‘꿈결의 장갑’이 끼워져 있다.
그렇게 마주 본 둘의 입가에 동시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샤아아아아-!
4중창의 구동음과 함께 켄타로스의 검에서 태양빛 강기가 쭈욱! 뻗었다.
새하얀 그 강기를 쳐다보면 눈이 멀 것만 같다.
‘덥다…….’
하지만 땀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실제 더위가 아니었다. 영혼이 느끼는 부담감이 땡볕처럼, 불가마처럼 아프게 전해지는 것이다.
우와아아아-!
센타울인들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완전한 태양 강기다!]
[영혼이 타 버릴 것 같은 이 열기……! 전설이 진짜였어!]
[아아, 내 생애에 이걸 보다니……!]
평의회 의장마저도 체면을 잊고 황홀한 표정으로 공손히 태양 강기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건 그 열기를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는 권승리도 마찬가지였다. 헬멧 속에서 그녀는 환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것처럼 환하게.
그랜드 마스터 켄타로스가 말했다.
[친선 대련이기도 하고…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우니 딱 한 번의 공방으로 승부를 보는 게 어떨까? 승부가 나면 나는 대로, 나지 않으면 나지 않는 대로. 공방을 주고받다가 떨어지면 거기서 끝내는 걸로.]
“에? 겨우 한 번요?”
아이고, 승리야.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너무 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켄타로스의 목소리에도 웃음이 깃들었다.
[그러니 아쉽지 않을 최고의 공방을 펼쳐야지.]
복싱 경기를 보면 이리저리 스텝을 밟고 잽을 던지면서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붙었다가 떨어졌다가를 반복하면서 싸운다. 켄타로스의 제안은 지금 그런 걸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다. 거리를 딱 정해 놓고, 두 발을 땅에 딱 붙인 채로 하는 주먹싸움처럼. 한 번 붙었을 때, 어느 한쪽이 못 버티고 물러설 때까지 힘과 힘, 기술과 기술을 정면으로 맞부딪쳐서 한 차례 싸우고 그걸로 마무리 짓자는 이야기.
권승리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나름 생각이 있었는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후회 없이 붙어 보죠.”
[그럼… 시작해 볼까?]
켄타로스가 권승리에게 검을 겨눴다.
아… 태양 강기의 영력에 온 세상이 녹아내리는 것 같더니, 빛으로 샤워하는 듯한 환상적인 기분이 덮쳐 오고 이내 쾌청해졌다. 그저 끝없이 맑은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너무나 거대해서 감히 싸울 엄두 같은 건 나지 않고 그냥 즐기고 싶은 자연이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저건… 너무 강한데?’
유물을 쓰지 않는다면 나도 좀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권승리가 당해 낼 수 있을까?
졌지만 잘 싸웠어 정도가 노려 볼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그만큼 켄타로스의 경지는 놀라웠다.
한 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단련하고 단련해서 맞이할 수 있는 지고의 경지가 저런 것일까?
강기라기보다는 하나의 맑은 하늘과도 같은 것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아아아!]
이 광경을 구경하는 센타울인들은 이제 열반에라도 들 것처럼 황홀한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맞서는 권승리는…….
쿠르르르-
‘미친……!’
미쳤다!
미쳐 버렸다!
대체… 무슨 짓을?
지금 이 자리에서 권승리가 뭘 하는 건지 이해한 사람이 있을까?
켄타로스조차 뭔가 위화감을 느낀 듯 고개를 갸웃했을 뿐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뭘 어떻게 해야 저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차원 격류를 끌어왔어?’
권승리는 지금 두 주먹으로 차원 격류를 휘어 감았다.
차원 격류.
그것은 창조신의 꿈결이 차원 밖의 경계면을 휩쓸며 생겨나는 거센 흐름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차원 밖에 있는 거지 차원 내부에 있으면 안 되는 거다. 그런데… 권승리는 지금 그걸 끌어와 자기 두 주먹에 감았다.
[…무기는 들지 않나?]
차원 내부로 끌어들인 창조신의 꿈결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본디 무언가가 되지 못한 가능태可能態에 불과한 것. “3+0”을 해 봐야 다시 “3”이 되듯이, 이미 가능성을 꽃피워 ‘존재’하고 있는 차원 내부에 덧씌워 봐야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때문에 그랜드 마스터 켄타로스조차 권승리가 두 주먹에 감은 흉악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권승리는 악동같이 웃었다.
“네. 준비 완료했어요.”
[흠…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어디?]
켄타로스가 칼자루에 꾸욱 힘을 주고, 태양 강기의 빛이 온 세상을 덮을 듯 청명하게 밝히는 그 순간.
쿠르르르릉!
권승리는 주먹을 뻗었다.
차원 밖에 존재해야 하는 차원의 격류가 쏟아져 켄타로스의 태양 강기를 덮쳤다.
그제야 이변을 눈치챈 켄타로스의 표정이 굳었다.
[이, 이건……!]
권승리가 말한다.
“그거 알아요? 창조신의 꿈결은 가능성이라는 거. 달리 말하면… [법칙왜곡]을 잘 적용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지점토 같은 게 바로 차원 격류다… 이 말입니다!”
우르릉! 쾅!
쿠르르르르
치이이이이이익!
들리지 않았다.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느꼈다. 천지가 뒤흔들리고, 세상이 어두워지더니, 폭우가 쏟아진다. 태양조차 적셔 버릴 만큼 끝도 없는 비가 쏟아진다. 아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는데… 마치 정말 벌어진 것처럼 모두가 느꼈다.
권승리가 휘두르는 차원 격류가 그런 이미지를 만들고 그런 기운을 쏟아 낸 것이다.
태양조차 식혀 버리는 폭우를.
‘미쳤는데?’
권승리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같이 수련도 많이 했으니까.
그런데… 이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이렇게 강했다고? 권승리가?’
지금 권승리와 내가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 항상 이긴다고 생각해 왔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쏴아아아아-!
차가운 물의 이미지를 가득 담은 차원 격류가 청명하게 타오르던 태양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더위를 초월해서 그저 대자연처럼 포근하던 느낌은 이제 사라지고, 물에 푹 젖은 것 같은 으슬으슬한 감각이 몰려온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터억!
권승리는 켄타로스의 검을 한 손으로 받아 냈다.
치이이이…….
마지막 남은 열기가 맥없이 빠져나가고, 켄타로스의 태양 강기는 완전히 차게 식어 버렸다.
쏟아지는 차원 격류를 맞으며 권승리는 켄타로스를 자신만만하게 올려다본다.
[허…….]
켄타로스의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광란의 콘서트 현장에 비가 쏟아져서 갑자기 중단된 듯한, 먹먹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숨소리조차 손으로 틀어막는 듯한 고요함.
그 사이로 켄타로스가 말했다.
[내가… 졌다. 방금 자네가 공격을 했다면 막지 못했어.]
하지만 권승리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자신만만하게 올려다보다가… 아, 이런!
스르르-
나는 재빨리 달려가서 쓰러지는 권승리를 받쳐 안았다. 얼마나 무리를 한 건지, 새하얗게 탈색된 머리칼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 멍청이가! 아니, 제대로 쓰지도 못할 기술을 왜 다짜고짜!
뭐라고 야단이라도 치려고 입을 여는데, 권승리가 먼저 말했다.
기운을 너무 소진해서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오는 주제에, 들뜬 어조로, 힘이 빠져서 축 늘어진 다리를 어린애처럼 까닥이며 말했다.
“신나… 너무 신나! 신난다고, 소시민!”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니…….
야단을 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나는 표정을 싹 고치고 돌아서서 그랜드 마스터 켄타로스에게 말했다.
“패배 선언 이후에 쓰러졌으니까 권승리가 이겼습니다.”
켄타로스가 난처하게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패배 선언을 안 하고 조금만 더 견뎠으면 권승리가 알아서 자멸했을 거라는 걸 깨달은 그였지만, 이 정도는 기분 좋게 져 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래. 내가 졌네.]
“맞아… 내가 이겼어.”
품 안에서 권승리가 나를 보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진짜 못 말리겠다.
녀석의 주먹에 내 주먹을 맞혀 주며 말했다.
“그래, 인마. 네가 이겼다.”
우와아아아아-!
그제야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센타울인들은 상무 정신이 투철하다더니 과연 그랬다. 승패보다도 얼마나 귀한 승부를 보았느냐가 그들에겐 더 중요한 모양. 7 대 6으로 우리에게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이긴 것처럼 우레 같은 환호를 보냈다.
내가 이긴 건 아니지만…….
아.
거 기분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