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친선 대련
센타울 정치의 한 축인 평의회.
그곳의 의장은 정치인답게 노련하고 정중했다.
뭐 그건 좋은데, 그 노련하고 정중한 계획을 [만상공감]으로 다 엿들어 버린 탓에 나는 오히려 짜증이 솟구친다.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대령과 의장이 나눈 대화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오, 침묵의 해적단과의 친선 대련인가? 흠… 뭐 실력이야 있겠지만 해적은 한계가 있어. 이곳은 센타울의 양대 무파武派 중 하나인 리길 무파의 총본산인 리길 아카데미가 아닌가? 제대로 수련한 실력자들이 나서면 싸움이 되질 않아. 그런 그림은 곤란하지.]
[그야 그럴 것 같습니다. 이곳의 마스터들은 장군들도 한 수 접어 줄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럼 마스터 밑의 바첼러급 정도면 어떨까요?]
[글쎄… 그래도 손님인데 너무 누르면 좀 그렇지 않겠어? 바첼러 등급만 해도 좀 버거울 것 같은데? 한 번이나 겨우 이기려나?]
[그렇다면 씨커 등급이면 되겠군요.]
[그래. 씨커 중 가장 실력 좋은 이들로 해적 간부들을 맡기고 그 아래의 어프랜티스들까지 꾸려서 좋은 승부를 만들어 보자고. 아갈타랑 같이 싸워 줘야 할 친구들인데 기죽여서 좋을 거 없잖아?]
[네. 그럼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이런 예의 바른 접대 계획을 들으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센타울의 접대는 대련 준비 중에도 계속되었다.
[아, 침묵의 해적단은 직접 가져온 장비를 사용하십니까?]
“이번에 저희가 자체 생산한 차원강습 시스템을 씁니다.”
그렇게 말하며 우리 장비의 스펙까지 모두 알려 줬다.
그러자 살짝 놀란 표정으로 감탄했다.
[헛, 첫 생산인데도 훌륭한 미들급 스펙이군요. 대단합니다.]
하지만 뒤에 가서는 또 자기들끼리 예의 바르게 논의했다.
[스펙이 생각보다 뛰어납니다.]
[역시 내미슈 장군이 극찬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래도 효율은 한 80~90퍼센트 정도 아니겠습니까? 첫 생산인데.]
[응. 잘 만들었다는 가정하에 그렇겠지. 좋아, 그러면 우리도 예비 장비로 무장해서 나가자고, 이쪽이 장비발로 이기면 곤란하니까. 아무튼 오늘 목표는 기분 좋게 져 주는 거라고.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거슬린다.
이자들은 우리를 완전 눈 아래로 깔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건 말로 하면 할수록 구차할 뿐이다. 우리가 한낱 차원 해적이고 신생 세력인 게 잘못이지 누구 탓을 하겠나?
‘억울하다면 실력으로 보여 줘야지.’
[친선 대련이니 룰을 몇 가지 정하겠습니다. 승리 조건은 먼저 일곱 번을 이기는 것입니다. 자세한 규칙은…….]
형식적인 말이 조금 이어지고 마침내 첫 번째 대진이 잡혔다.
리길 아카데미의 어프랜티스 한 명이 먼저 나섰다.
어프랜티스. 3단계의 수련생 중에서는 제일 높은 등급이라곤 하지만, 그래 봤자 사범이 아닌 수련생에 불과했다.
나는 정말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이것들이… 차원계 전역에 명성을 떨친 침묵의 해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럴 땐 분노도 느꼈지만 또 동시에 현실을 자각할 수도 있었다.
이름 없는 주점까지 와서 침묵의 해적단을 칭송한 이들은 그저 소수의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무한한 차원계에서 우리에게 가장 우호적인 한 줌의 존재들이 거기에 다 모여 있었던 것뿐이다. 최종 조립 공장의 공장장과 가드들도 그랬고, 지금 눈앞의 의장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냥 운 좋게 이름을 날린 해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 이름값을 높이기 위한 어필이 계속 필요하다.
나는 토마스를 바라보았고, 토마스는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조언대로 창을 쥔 이후로 실력이 일취월장한 토마스.
고작 예비 장비를 쓰는 수련생을 상대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단원이었다.
훙- 후웅-!
토마스는 내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았는지 창을 소리 나게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강렬한 인상. 그래.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다.
차르르르-
토마스의 걸음걸음을 따라 차원강습 시스템이 온몸을 감쌌다. 초능력과 영력으로 땅땅 단조해서 만든, 단조 슈트의 영롱한 무늬와 색깔이 사방을 물들인다.
[오…….]
센타울 측에서 탄성이 나왔다.
감탄의 표정들. 이번엔 접대용이 아니었다. 진짜로 딱 봐도 훌륭하게 마감된 단조 슈트의 외관에 살짝 놀란 것이다.
쩡!
하지만 진짜 놀람은 토마스가 단 일 합에 리길 아카데미의 어프랜티스를 쓰러뜨렸을 때에서야 시작되었다.
[허……! 권능과 영력의 조화라니? 강기도 못 쓰는 자의 전투력이 심상치 않다.]
수군거리고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토마스는 역시 자기 어필을 제대로 했다.
창 한 자루를 비껴 차고 상반신은 우락부락하게 [야수화]한 상태. 붉은 털이 단조 슈트 사이로 갈기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바람에 날리니 포효하는 짐승처럼, 그림 같은 한 장면이었다.
기이이이잉-
콰콰콰콰-!
제트엔진처럼 굉음을 내는 차원강습 시스템.
그 뒤로는 두드려 맞고 기절을 한 어프랜티스.
그제서야 의장이 우리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예의 바르게 반달 모양으로 싱글거리던 눈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권능도 권능인데… 그보다 저거 뭐지? 분명 차원강습 시스템을 다루는 솜씨는 3급 오퍼레이터야. 그런데 출력이 심상치가 않다. 저거 자체 제작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군요. 제 눈에도 최상급 수준의 효율로 보입니다. 최소 130퍼센트 이상…….]
[대단하군… 시작부터 최정예를 보낸 건가? 이대론 상대가 안 되겠어. 씨커 등급을 내보내게.]
[네.]
[아, 장비도 예비 장비 말고 A급으로 챙기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친선 대련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씨커 등급부터는 미약하게나마 구름 강기를 사용했다.
때문에 의장은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권능을 성검의 블레이드 오러와 조화시킨다는 발상은 좋아. 하지만… 결국 강기를 못 쓰면 반쪽짜리에 불과하지. 그게 정식으로 수련하지 못한 해적의 한계겠지만…….]
그래?
하지만 우리가 싸워 온 아갈타군에는 구름 강기를 쓰는 장교와 부사관이 참 많았다. 화랑단원들은 한 명, 한 명이 그들을 상대로 싸웠고, 승리했고,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물론 토마스는 강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콰콰콰콰!
[야수화]로 증폭된 힘과 영력은 창끝에 집중되어 블레이드 오러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겹겹이 겹쳐진 천과 같은 것이었다.
구름 강기가 바늘이라면 블레이드 오러는 천이다. 원래라면 바늘이 천을 뚫는 게 당연하지만, 겹겹이 겹쳐진 천은 오히려 바늘을 휘게 만들기도 한다.
꽈지직!
그게 첫 번째 씨커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구름 강기는 토마스의 창끝에 생겨난 소용돌이를 꺾지 못하고 거꾸로 휘어 버렸다.
쩡!
토마스는 상대를 배려해 창을 찌르지 않고 창두를 흔들어 씨커의 몸통을 후려쳤다. 그 한 수로 승부가 결판 났다.
뻐억! 머리를 맞은 씨커는 그대로 기절.
“후……! 좋아!”
2연승을 이룬 토마스는 기분 좋게 기세를 올렸다. 그 모습을 본 센타울의 의장은 눈을 끔뻑였다.
[하……? 구름 강기를 꺾었다고? 강기도 없이?]
당황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누가 볼세라 금세 지우긴 했지만 내 [만상공감]에는 이미 걸려들었다.
‘아, 이제 속이 좀 시원하네.’
의장이 체면도 잊고 입을 쩍 벌리는 그 순간은 답답하던 가슴을 팡! 하고 시원하게 풀어 주는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의장은 아직도 예의를 다 버리지 못했다.
[아냐, 뭐… 그래. 이런 시작도 나쁘진 않겠지. 어차피 씨커 등급 내에서는 실력의 편차가 크다. 이쯤에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상위 씨커를 내보내는 것도 방법이지. 상대도 정예 중의 정예를 내보낸 모양이니까.]
상위 씨커라더니, 과연 두 번째로 나온 씨커는 달랐다.
쩌적!
빙산이 쪼개지는 듯한 청명한 소리와 함께 한 줄기 구름 강기가 토마스의 창끝에 매달린 회오리를 반으로 쪼갰다.
“큭……!”
토마스의 단조 슈트마저 조금 찢겨 피가 찍! 하고 튀었다. 토마스는 기세에 밀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 토마스의 목 위로 구름 강기를 두른 검 하나가 드리워진다.
“…졌습니다.”
두 번째 씨커는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이기는 게 당연하다는 투였다.
[와아아아!]
처음으로 얻은 승리! 리길 아카데미아의 분위기가 기분 좋게 출렁였다.
센타울의 의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사범을 맡고 있는 씨커들이 쉬이 질 리가 없지. 아까는 상성이 나쁜 것도 있었다. 흠… 그런데 흥분하는 바람에 너무 초장부터 강한 이를 내보낸 건 아닌가 걱정되는군.]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다음으로 나타난 에른스트를 보고 또다시 균열을 일으켰다.
“토마스 놈… 쓰러진 건가? 하지만 토마스는 우리 중에서 가장 약한 존재! 자, 어디 나도 한번 쓰러뜨려 봐라, 씨커!”
“뭐, 뭐, 인마?! 누, 누가 약하다는 거야!”
뒤에서 토마스가 왁왁 소리를 질렀지만 노래 군단 출신인 에른스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그저 에페가 가볍게 춤을 췄다.
창! 차창! 휙! 휘익!
에른스트의 움직임은 춤을 추듯 날렵하다가도, 공격을 몰아칠 때는 태풍과 번개처럼 거칠고 폭발적이었다.
[크으으윽! 이딴 발재간에……!]
상대편 씨커는 온 힘을 다해 구름 강기를 휘둘렀지만 끝끝내 에른스트의 털끝 하나 스치지 못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무기이든 닿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에른스트는 구름 강기가 몸에 닿기 전에 블레이드 오러가 깃든 살벌한 에페를 상대의 목젖 앞에 올려놓았다. 씨커 등급으로서는 에른스트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 주는 깔끔한 압승이었다.
[이런 망할……!]
오, 드디어! 의장의 입에서 상소리가 튀어나왔다.
적당히 우리를 이기게 해 줄 작정이었던 모양인데, 그런 관대함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통제하에 있을 때나 보여 줄 수 있는 거였을까?
대련이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니 예의 바르던 그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반달 같던 눈은 이제 바늘같이 얇아졌고, 느긋하고 나긋하게 움직이던 손은 휙! 휙! 빠르고 거칠게 휘둘러졌다.
[바첼러를 보내! 바첼러부터는 별빛 강기를 쓰니 저런 잔기술은 먹히지 않는다!]
[네, 네? 하지만 적당히 져 주라고…….]
[아, 몰라. 아무튼 보내 봐! 리길 아카데미라고! 우습게 보이면 안 된단 말야!]
정치인들이 말을 뒤집는 건 지구나 여기나 매한가지인 모양. 예상보다 강한 화랑단의 활약에 리길 아카데미 측에서는 진짜 실력자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바첼러 등급부터는 별빛 강기를 썼다. 에른스트는 최선을 다해 버텼지만 별빛 강기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다음 주자는 이오닌 칼츠가 사정사정을 해서 나서게 되었다.
난 솔직히 이오닌이 질 줄 알았다. 소대장급을 제외하면 화랑단원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게 이오닌이긴 했지만, 별빛 강기는 아직 무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꾸우우웅!
[폭발]의 초능력을 지닌 칼츠는 그걸 자신의 영력 그리고 성검의 블레이드 오러와 기가 막히게 조화시켰다.
그의 무식하게 큰 워해머, 디스트로이어의 중심에서 시작한 영력의 폭발은 별빛 강기를 정확하게 상쇄했다.
꽈아아아앙!
망치와 별빛 강기가 마주칠 때마다 볼살이 뒤로 밀려날 정도의 충격파가 우리를 감쌌다. 손끝이 저릿하다. 기가 약한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면 영압에 혼이 밀려나 그대로 유체 이탈을 경험했을 것이다.
쩡! 쩌정!
이오닌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 내가 저 기분 알지. 별빛 강기를 때려 부수는 그 손맛은 별사탕을 으깨는 것처럼 중독적인 손맛이다.
쩌저정!
그리고 결판이 났다.
“크윽…….”
[꺽……!]
무식하게 별빛 강기를 부수던 디스트로이어는 뒤로 완전히 휘어 버렸고, 이오닌 칼츠의 어깨와 팔꿈치는 박살이 났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달려들어 [폭권]을 바첼러의 가슴팍에 때려 박았다.
둘 다 전투 불능. 처음으로 나온 무승부.
현재까지 전적은 4 대 3.
의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입가에 호전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
[랭커! 바첼러 중에서도 넘버를 받은 랭커들만 보내!]
[아, 아… 네!]
센타울의 의장은 과몰입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바첼러의 랭커는 달빛 강기를 사용했다. 달빛 강기 하면 크르으랑.
[간만에 제대로 놀아 보겠군.]
이를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선 크르으랑은 도끼를 열 번 휘두르기도 전에 가볍게 상대편 랭커를 쓰러뜨렸다.
달빛 강기의 극에 이른 크르으랑의 도끼에서는 크고 맑은 강기가 보름달처럼 뚜렷한 윤곽선을 그리며 떠올라 있었다.
이제 의장은 화가 난 건지 재미가 있는 건지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웃으면서 쿵쿵 뛰는 심장으로 발을 쾅쾅 구르며 외쳤다.
[마스터를 보내! 끝까지 해보자고!]
마스터부터는 태양 강기를 쓰는 바람에 크르으랑은 분전 끝에 패배. 스코어는 이제 5 대 4. 두 번만 더 이기면 우리의 승리.
‘슬슬 내가 나가 볼까?’
태양 강기를 쓰는 마스터의 존재는 확실한 부담이었다. 침묵의 해적단에서는 나를 제외하면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크르으랑도 마스터를 이기지 못했으니까.
‘강한 인상을 주러 와서 여기서 지고 끝낼 수는 없지.’
그러니 내가 나서서라도 억지로라도 이기는 게…….
…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내 어깨를 작은 손이 꾸욱 눌렀다. 손은 작은 주제에 힘은 무슨 괴수 같다.
“저쪽 대장도 안 나왔는데 우리 대장이 나서면 안 되지.”
권승리였다.
그녀가 하얗게 탈색된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나를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와…….
나도 모르게 잠시 소름이 끼쳤다.
그녀의 그 표정, 익숙했기 때문이다.
지난 생, 그녀가 아틀라스 클럽에 가입하기 전에 무투 집단 흑색전선을 이끌던 그 시절.
그때 가끔 파파라치 컷으로 흘러나온 그녀의 얼굴이 딱 저랬다.
그러니까… 권승리는 지금 피가 끓고 있었다.
아, 맞네. 이제 침묵의 해적단엔 권승리도 포함되었지? 갑자기 엄청나게 든든한 기분.
나는 권승리를 바라보았다.
그때랑 달리 아직 어린 나이라 그런가? 살벌한 와중에도 좀 귀여운 인상이다.
근데… 햐……!
내가 ‘그 권승리’랑 친해지다니!
왠지 이제야 실감이 나고.
새삼 감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