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센타울 차원
급변. 그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세상에 점진적인 변화가 얼마나 있을까?
고요한 나무조차 사시사철 동일한 속도로 자라지 않는다. 겨울에는 성장 속도가 극도로 제한되었다가, 봄이 오고 비가 내리는 그 순간 양분을 빨아들이며 급격한 성장을 이룬다. 성장이 없는 시기에서 급격히 성장하는 시기로의 전환은 칼로 자른 듯 갑작스럽게 이루어지고 그 불연속적인 변화는 나이테라는 형태로 나무줄기 속에 영원한 흔적을 남긴다.
모든 게 그랬다. 한 톨 한 톨 쌓이던 모래알은 특정한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급변을 일으키고 그 후에 다시 한동안 평온하게 톡톡 모래가 쌓인다.
영원할 것 같았던 아갈타의 횡포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센타울이라는 맞수 앞에서 흔들리고, 차근차근 성장할 것 같았던 지구는 그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치솟거나 역풍을 맞아 고꾸라지리라는 기로에 선다.
급변은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 순간의 대처는 10년, 심지어 100년의 미래를 가름하는 법.
그러니.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 하며.
당황하지 말아야 하며.
마침내 그 순간이 왔을 때는 자기 자신을 믿고 한 발짝 훌쩍 깊이, 용감하게 뛰어들어야 한다.
나는 그래서 센타울과 아갈타의 전쟁이 한창인 지금 센타울 차원을 방문해 보기로 결심했다.
* * *
“휘오, 이번에는 꽤 멀리 가야 돼.”
- 멀리? 얼마나 멀리?
“대략 크레아 차원의 20배 정도? 개념이 완전 달라질 정도로 먼 거리야.”
- 굳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빨리 가야 되나 봐?
와… 우리 휘오가 많이 컸다. 이제는 대화가 되는 걸 넘어서 행간의 의미까지 쉽사리 읽어 낸다. 정령으로서의 겉모습은 여전히 연두색 머리의 어린아이지만, 그 눈빛과 말투에서 이제는 지혜마저 느껴졌다.
한층 더 세계수다워졌달까?
“응. 센타울에 방문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더니 가장 빠른 수송선을 보내 준다는 거야. 그래서 해적 체면에 남의 배를 타고 갈 순 없다고 알아서 가겠다고 했거든.”
- 얕보이지 않으려면 적어도 그 수송선보다는 빨리 가야 된다?
“우리 휘오 다 컸네!”
- 아, 뭐래.
자식이 이제 컸다고 반항도 한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은 씨앗이던 시절부터 반항기가 넘쳤었다. 이 자존심 강한 녀석과 이토록이나 가까워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꽤나 만족감이 들 정도로.
- 방법은… 있어. 원래는 보통 가지가 뻗은 곳까지만 차원 이동이 가능한데… 가지의 탄성을 이용해 아주, 아주 멀리까지 날려 버릴 수도 있거든. 다만 이건 형제자매들의 도움이 필요해.
휘오의 형제자매들. 그건 그동안 싹틔운 새로운 세계수들을 의미했다. 허묵의 세계수도 있었고, 루드비히가를 비롯해서 명문가들에게 동맹의 대가로 분양해 준 세계수들도 있었다. 아틀라스 클럽이 세계수를 없애는 작업을 하는 바람에 그 수가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 합치면 휘오를 제외하고도 7그루의 세계수가 있었다.
“오, 그러면 며칠 만에 갈 수 있을까?”
- 나흘이면 충분해. 체감으로는 순간일 테고.
센터울 차원이 지구에서 상당히 떨어진 차원이라는 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대단한데? 형제자매들 힘까지 빌리면 그 정도까지 할 수 있다니.”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하지만 정작 내 칭찬을 들은 휘오는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 글쎄……? 형제자매들에게 의식이 있었다면 훨씬 더 빠르게 가능했을 거야.
아, 이건 허묵에게도 들어 본 적 있는 주제였다. 휘오는 씨앗이던 시절부터 의사를 표현했고, 발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부터 간단하게나마 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허묵이나 다른 명가에 분양해 준 세계수들은 상당히 성장한 지금에도 말문이 터지지 않았다.
‘하긴… 그러고 보면 휘오의 정령화도 무척 빨랐지.’
그러고 보면 휘오는 특별한 점이 많았다. 던전에서 처음 휘오의 씨앗을 데리고 나올 때도 괴물들의 반응부터가 무척 특별하지 않았던가? 그때 그 과일처럼 생긴 그린블러드들이 얼마나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던가? 그렇게 개거품을 무는 괴물은 살면서 본 적이 없고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어쩌면 휘오는 세계수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세계수일지 몰라.’
전부터 가져 온 생각에 조금 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은 휘오 역시 느끼는 것 같았다.
-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꼭 이뤄야 하는 어떤 사명이 있다는 생각. 왜 형제자매들은 여전히 말을 못 할까? 그 대답을 내가 알고 있는 것만 같다는, 그래서 뭔가 해야만 한다는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
그렇게 말하는 휘오의 목소리는 묘하게 쓸쓸했다.
- 이상하지? 요즘 들어 부쩍 외롭고 그렇다?
어? 자식이… 갑자기 맘 아프게…….
그러고 보면 휘오도 기구한 운명이었다. 세계수가 탄생한 고향 차원은 이미 멸망한 지 오래. 세계가 멸망하면 그 세계에 속한 권속들은 퇴화를 겪으면서 한낱 던전 괴물로 전락할 뿐이었다. 하나 휘오는 그 시간을 견뎌 냈다. 신성을 간직한 씨앗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퇴화를 견뎌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어쩌면 다른 씨앗들이 아직 말문을 트지 못한 건 휘오와 달리 그 퇴화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멸망한 세계의 유일한 후손.
동족이 그리운 건 어쩌면 본능 레벨에 새겨진 감정일 것이다.
“휘오.”
- 응?
“혹시나 뭔가 떠오르거든 바로 말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아낌없이 도울 테니까.”
- 고마워, 시민.
보드라운 잎사귀 하나가 내려와 내 뺨을 비볐다. 귀여운 녀석.
나도 휘오의 연둣빛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 말했다.
“그럼 뜸 들일 필요 없지. 바로 출발하자.”
- 오케이. 아주 정확히, 아주 멀리 날려 줄게! 아, 다만 조심해. 좀 어지러울 거야.
일행은 단촐하다.
싸우러 가는 게 아니니까. 크르으랑, 서민서, 데미안, 권승리 등의 간부들과 화랑단과 크레아의 정예들까지 해서 서른 명 남짓한 사절단을 꾸렸다. 배도 전투함이 아닌 기파랑호를 골라 탔다.
“준비 완료!”
그렇게 선언하고 기다리다 보니 어느 순간 휘오의 가지가 구부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구에 뿌리내린 또 다른 세계수들도 하나둘 가지를 구부린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여러 겹의 활시위처럼 기파랑호를 강하게 붙든다.
그러자 하얀 게이트 하나가 기파랑호 중심에서 자라나 이내 모든 공간을 삼켰다. 그리고 동심원을 그리며 또 다른 게이트가 중심에서 자라나 다시 모든 공간을 삼켰고, 또 삼켰고, 또다시 자라나 또 삼키고… 그렇게 수십 번이나 중첩되는 게이트가 우리를 휩쓴 후에.
“와… 이건 미쳤다. 공간과 차원을 다루는 데 제법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차원이 다르네…….”
서민서의 감탄이 우리의 귓가를 간지르고.
파아아아앙-!
우리는 창조신의 꿈결 속으로, 아득한 속도로 튕겨져 나갔다. 나흘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그 속도만큼의 멀미가 우리 뒤를 쫓아왔다.
* * *
우웨에에엑!
웩!
웨에엑!
사방이 구역질로 가득했다.
실력이 얼마나 좋든 상관없이 죄다 토악질을 해 댔다.
그리고 그 모든 감각이 나에게 전해져서 나 역시 토악질을 안 할 수 없었다. 와. 미치겠다. 서른 명분의 멀미를 받으니 진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웩! 웨엑!
그나마 기파랑호의 자체 정화 기능이 토사물을 바로바로 소멸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라면 더러운 토사물을 보고 두 배, 세 배로 더 토악질을 할 뻔했다.
그렇게 다 같이 토악질을 하고 나서야 파리해진 얼굴로 일어나 앞을 바라보았다.
느껴졌다, 창조신의 꿈결 너머에 존재하는 거대한 차원의 존재가. 엄청나게 삼엄하다. 만 개의 눈이 우리를 노려보는 듯했고,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우리를 먼지로 만들 압도적인 무기들이 감각에 잡혀 들었다.
통신이 걸려 왔다.
- 정지! 이 앞은 센타울 차원의 영역이다. 누구냐? 용무는?
나는 뒤집힌 속을 다시 한번 가라앉히고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침묵의 해적단. 내미슈 준장의 초대를 받고 방문했다.”
내미슈가 말을 잘해 둔 모양인지 곧장 밝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 아! 침묵의 해적단이군요. 환영합니다. 이곳은 센타울 차원. 당신들의 친구입니다. 어……? 그런데 정말 빨리 오셨네요. 놀랐습니다. 과연 침묵의 해적단! 실제가 오히려 명성보다도 대단하군요!
뭐…….
일단, 센타울을 놀랬다.
이 첫인상만으로도 구역질은 충분히 감내할 가치가 있었다.
* * *
센타울 차원은 거대한 박물관과도 같았다.
[저 옆은 아르누스 차원의 양식으로 조성된 거리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은 핀-헤어리 차원의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핀-헤어리 차원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조공을 시작했던 때, 그러니까 3,200년 전에 최고의 기술자들을 보내 조성한 거리지요.]
역사가 오래되고 강대한 차원이라는 말은 누누히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본 풍경은 명성 그 이상이었다.
그냥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안목이 높아지고 새로운 감각에 자극받은 영혼이 성장을 한다.
나는 여태 타키넷이 가장 다양한 차원의 물건을 볼 수 있는 곳이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센타울 차원에선 적어도 내가 도달한 타키넷의 천일 쇼핑몰보다 더 다양하고 더 고급의 물건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이상의 것을 보려면 아마도 타키넷에서 더 상위의 시장으로 진출해야 가능하겠지.
‘그러고 보니 현재 내 구매자 등급이랑 판매자 등급이 어떻게 되지?’
그간 정신없이 사들였다. 또 테라에서는 정신없이 판매하고 있다고 나타르의 보고를 들었다. 확인할 때마다 등급이 바뀌어 있어서 뭐라 의미 부여도 못 하고 어영부영 지나가 버렸다.
그래서 아직도 기억 속 내 등급은 ‘땅을 가꾸는 벌레’ 등급에 머물러 있었다.
과연, 이제는 벌레를 벗어나 어디까지 갔을까?
‘시스템! 내 등급 좀 알려 줘.’
마음속으로 타키넷의 시스템을 부르자 타키넷 시스템이 응답했다. 이렇게 접속하지 않았는데도 시스템이 보조해 준다는 것에서부터 내 등급이 많이 올랐음을 알 수 있었다.
[사용자 소시민 님의 구매자 등급은 ‘우주에 사는 신비한 동물’입니다. 소시민 님의 판매자 등급은 ‘지상에 사는 거대한 동물’입니다.]
와… 벌레였던 내가 동물이 됐다. 그중에서도 구매자 등급은 어딘가 있어 보이는 ‘신비한 동물’이다. 아, 감격스럽네.
잠깐 짠한 마음이 되어서 내 등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구매자 등급이 판매자 등급보다 상당히 높았다. 아무래도 정식 루트로 판매하는 수익보다 밀수로 얻는 수익이 훨씬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
‘그래도 생각보다 등급이 높아.’
두 등급을 합산해 계산해 보니, 이제 최상위는 아니더라도 바로 그 아래까지는 진출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등급이었다.
‘센타울, 아갈타의 전쟁 경과를 지켜보면서 다음 시장 진출 각을 잡으면 되겠다.’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도 잡으면서 느긋한 마음으로 센타울 차원을 구경했다.
센타울에서 안내인으로 붙여 준 사람의 계급은 무려 대령. 센타울 차원이 침묵의 해적단을 중요한 파트너로 생각한다는 게 대번에 느껴지는 인선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좀 무리하더라도 빨리 오길 잘했어.’
센타울 차원을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더 확실해졌다. 이곳은 파트너로 삼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다. 부유하고 강력하다. 이들이 마음먹고 커버를 쳐 준다면 아갈타도 감히 엉겨 붙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곳이야.’
센타울 차원은 수많은 차원을 아우르는 제국이었다.
박물관과 같은 거리와 호화스러운 집기들이 이 차원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증명했다.
그리고 탐욕스러운 이들은 아무에게나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서로 주고받을 게 확실한 만큼, 딱 그만큼의 친절을 베푸는 게 탐욕의 특징.
그렇기에 이 방문은 단순히 내가 센타울 차원의 저력을 확인하는 자리만이 아니었다. 반대로 센타울 차원이 침묵의 해적단의 효용을 가늠해 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여기서 잘만 한다면…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동맹을 맺는 게 가능하겠지.’
급변 사태는 언제 어떤 식으로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당장 오늘 내미슈가 아갈타를 대파하고 지구 근처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할 수도 있는 일.
그렇게 강성해진 센터울과 유리한 조건으로 동맹을 맺는다면 무르물랑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목표는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우리 앞에 펼쳐진 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소용돌이 같은 미래.
내가 할 일은…….
‘대비하고 성큼 나아가는 것.’
그래서 나는 여유를 가장해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내가 미리 말해 뒀기에 서른 명의 사절단 모두가 나와 같은 상태였다. 우리는 예리하게 벼려진 검처럼 센타울이라는 강력한 차원을 놀래고 그 호감을 받아 내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센타울은 그런 우리에게 멍석을 깔아 준다.
[센타울 차원은 무武를 숭상하는 차원입니다. 곳곳에서 영력을 단련하고 강기를 수련하는 수련관을 찾아볼 수 있지요. 마침 이 근처에 평의회 의장님이 수련을 하는 수련관이 있습니다. 거기 들러서 의장님께도 인사드리고 친선 대련도 한번 하는 게 어떨까요?]
무를 숭상하는 차원에서의 대련.
제안을 하는 대령의 목소리는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사실 그 내용까지 상냥할 리는 없었다. 아마 높은 위치에서 우리를 가늠하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말로는 대등하다고 하지만, 이 대단한 차원이 한낱 해적을 진짜로 대등하게 여길 리는 만무.
그저 손바닥에 놓고 훤히 내려다 보며 우쭈쭈쭈 써먹기 좋은 말 정도로 여기고 있겠지.
‘그딴 포지션이 될 바에는 동맹 안 하지.’
결국 믿어야 하는 건 우리 자신의 힘이다.
힐끗, 나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크르으랑, 데미안을 보좌하는 리디아 그리고 권승리…….
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든든한 조합.
가슴속으로 호승심이 피어오르고, 얼른 내 자랑스러운 동료들을 자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그래. 이 대국大國 놈들아, 어디 한번 깜짝 놀라 봐라.’
자신이 있으니 입가론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나오는 목소리는 저절로 시원했다.
“좋습니다. 재밌겠네요.”
그렇게 아갈타와 센타울의 대회전을 앞둔 어느 날, 침묵의 해적단과 센타울 사이의 친선 대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