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자비한
“도련님, 동료들에겐 언제쯤 비밀을 밝히실 건가요?”
“글쎄……? 이 전쟁이 다 끝나고 나서?
“그렇게나 오래요? 저는 도련님이 이제 그만 자유로워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껏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으셨으면 합니다. 이제는 방해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글세. 리디아, 너무 오래 이렇게 살아온 탓일까? 진짜 내 모습이 뭔지 모르겠어.”
“그런 게 어딨습니까? 도련님은 그냥 도련님이지.”
“봐 봐. 너도 그러잖아. 내가 도련님이니, 아가씨니?”
“아, 아니, 그건…….”
“크큭. 알아. 그냥 진짜 나도 모르겠어서 그래. 그러니까… 동료들에게 말하는 건 아마, 내가 누군지 내 스스로 알게 될 때… 그때가 아닐까?”
* * *
밀수업자 고나르의 노예로 생활하며.
가장 괴로웠던 점이 뭐냐고?
그건 ‘내가 없다.’라는 점이었다.
노예의 삶이란 그런 거다.
작업반장 루카르도 가끔씩은 자유로울 때를 떠올리곤 했다. 그래 봤자 고작 15년 전인데 그 기억이 거의 전생의 일처럼 까마득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그땐 루카르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말하곤 했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냥 정말로 그가 그런 사람이라는 듯이.
노예가 되고서야 그는 깨달았다. 그게 얼마나 큰 ‘자유’였는지.
노예는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해 주는 건 언제나 주인님이며 그걸 거스르는 순간 떨어지는 것은 채찍이다.
‘나는 자주 씻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은가? 주인님이 3일간 물을 주지 않고 가축과 함께 자라고 명령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나는 삭막한 건 싫어.’라고 말하고 싶은가? 단 이틀만 잠을 자지 않고 철야 작업을 당하면 어떨 것 같은가? 다른 노예가 저지른 잘못으로 모든 노예가 다 같이 채찍을 맞는 날은 어떨 것 같은가? 누구보다 더러워지고 누구보다 삭막해진다. 주인은 당신이라는 존재를, 당신의 영혼을 마음껏 주무를 것이다.
노예들은 단 몇 번의 트라우마만으로도 쉽사리 자신을 포기한다. 더 이상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감히 말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고자 한다.
물론 자유민들은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렇게 살 바에 왜 살지? 나 같으면 죽어 버리겠다라고.
그러게. 동감이다.
노예가 되기 전의 루카르였다면 분명 그도 똑같은 소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느낀 건 죽음에도 타이밍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유민에서 노예로 추락하고 한 1년에서 3년, 가장 힘들던 그 시기에 어쩌다 보니 죽지 않고 살아 버린 이들은 보통 그 후로도 죽질 못한다. 적응이라는 게 그렇게 무서워서, 노예의 삶에도 적응하고 그냥 또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그래서 다 잊어버린 줄 알았다.
이제는 이런 게 다신 없는 줄 알았다.
두근. 두근.
심장의 고동도, 가슴 떨리는 희망찬 상상도 영영 찾아오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흙더미에 파묻혔을 뿐 사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처럼 이토록 설레는 기분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고나르가 죽었어. 관리인들도 다 죽었어.’
고나르와 관리인들을 제외하면 그의 재산과 시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가 누구겠는가? 노예들이다. 그중에서도 모든 노예를 총괄하는 작업반장, 바로 루카르 본인이었다.
‘기회만 잘 본다면… 한몫 단단히 챙겨서 도망칠 수 있어.’
과연 침묵의 해적단은 노예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최악은 다시 노예로 거두거나 팔아먹는 것.
차선은 특정 기간 무상 노동을 해 주고 면천을 받는 것.
그러나 최선은 해적단이 어떻게 나오든 기회를 봐서 그들이 모르는 시설과 장비를 이용해 탈출하는 것이었다. 고나르의 숨겨진 재산을 들고!
‘그렇게 되면… 지난 15년의 세월을 보상받고도 부유한 여생을 보낼 수 있다……!’
보상! 보상이라니!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했다. 그냥 노예 신세만 면해도 눈물을 쏟으며 행복해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 시절을 보상받고 고나르처럼 호화롭게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물론 재산을 빼돌린다는 원대한 계획은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노예들을 결집시켰다. 전투가 한창이 틈을 타서 고나르의 재산들을 비밀 금고로 옮기고 고나르의 비밀 시설들에 대한 접근 권한을 획득했다.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모든 노예가 이를 악물고 합심했기에 성공적으로 재산을 빼돌릴 수 있었다.
이제 이 난리가 잠잠해지고 적당한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납작 엎드리자. 납작 엎드려서 기다리다가 때가 오면 다 같이 도망쳐서 멋지게 사는 거야.’
박살 나는 고나르의 차원 요새의 내부에서 노예들은 그런 꿈을 꾸었다.
전투가 끝났다.
침묵의 해적단 단장이 작업반장 루카르를 불렀다.
해적단장의 요구에 따라 루카르는 성실하게 고나르의 재산과 시설을 안내해 주고 충성을 다하겠노라고 몇 번이나 굽실거렸다. 침묵의 단장은 일단 보기에는 상식이 있는 존재 같았다. 덕분에 루카르는 조금 더 안심하고 편안하게 설명을 마칠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모든 재산과 시설을 보여 주고 어딘가 호의적인 해적단장을 보며 좋은 예감을 느꼈다.
‘이런 인물이라면… 적당히 안심시키고 있다가 생각보다 빨리 도망칠 수 있겠어.’
하지만 설명을 다 듣고 만족하는 듯했던 해적단장은 돌연 입가에 아주 짙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근데, 지하에 있는 물건하고 시설은 언제 보여 줄 거야?”
섬뜩.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한기가 스친다.
‘서, 설마 비밀 시설들을 알아봤다고? 아냐, 그럴 리 없다. 그냥 떠보는 걸 거야.’
파들파들 떨리려는 입술을 애써서 꾹 다물었다. 목소리 하나 떨지 않고 침착하게 답했다.
“네? 지하에 있는 물건이라…….”
하지만 침묵의 단장은 그 말을 툭 자르며 섬뜩하게 웃었다.
“하하. 우리 그런 장난 치지 말자. 우리 고향에서는 밑장 빼다 걸리면 손모가지를 자르는데… 좀 더럽잖아, 그런 건.”
그 순간 루카르는 무언가가 와장창 깨지는 듯한 환청을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X됐다.’
* * *
루카르와 노예들은 절망했다.
‘침묵의 해적단이 무섭다 무섭다 하더니 정말 귀신 같구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매일같이 이곳에서 일을 하던 노예들은 물론이고 소유주인 고나르 본인과 그 관리인들조차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물건들까지 하나하나 찾아낼 수가 있는 걸까? 지독하다. 아니, 섬뜩하다.
영능학의 발달로 온갖 기적이 가능해진 차원 문명들 사이에서도 이런 철두철미함은 ‘신비’의 영역으로 보이는 무언가였다.
노예들은 순간 헷갈렸다.
고나르가 정말 죽었나? 그 관리인들이 정말 죽은 걸까? 사실은 노예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오히려 더 업그레이드된 관리인을 앞세워서 한판 연극을 벌인 것은 아니었을까?
“잠깐만. 이건 이 부분이 관리가 미흡한 것 같은데? 한번 점검해 봐.”
“저기, 이 시설에는 0.1g의 물의 정수가 들어가야 효율이 최대가 될 것 같은데? 전에는 썼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디 있지? 에? 장난해? 빨리 안 가져와?!”
그 정도로 소시민의 점검은 무자비했다.
노예들은 치를 떨었고 그들의 얼굴은 절망으로 어둑어둑해졌다.
‘아, 더 지독한 놈이 주인이 되었구나.’
희미한 기대도 있었다. 숨겨 둔 재산은 모두 뽀록났지만 그래도 일종의 협상을 통해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되어도 다행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만나자마자 재산 점검을 하고, 심지어 즉석으로 작업까지 시키는 걸 보면서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계속 노예 신세구나.’
오히려 이전보다 더 지독한 주인이 생겼을 뿐임을.
부글부글부글.
새로운 주인은 갑자기 단조 작업을 보고 싶다면서 처음 보는 종류의 금속을 한 무더기 꺼내 놓았다. 영혼 용광로에서 녹아내린 금속은 허공으로 떠올라 회오리를 만든다. 노예들은 밑바닥에 고인 영력까지 쥐어짜서 단조 시설을 가동했다.
콰직! 콰직!
보이지 않는 망치가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허공에서 회오리치던 시뻘건 금속이 이리 찌그러지고 저리 찌그러지며 점점 더 작게 변해 갔다. 10층 아파트 크기의 구가 이리 접히고 저리 접히면서 원룸 사이즈의 구로 작아졌다.
작업반장 루카르는 얼른 설명했다.
“1만 번 접어서 만드는 회로 집적 단조 공정입니다. 금속을 입체적으로 접어 가며 그 내부에 영력 회로를 만듭니다. 일단은 내구성과 탄력성 강화 인챈트가 용이한 형태로 영력 회로를 짜는 게 기본입니다.”
루카르의 설명은 자세하고도 필사적이었다.
모든 희망이 무너진 지금, 루카르에게 남은 희망은 작업반장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밖에는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예는 루카르와는 달랐다.
희망이 무너졌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들의 발걸음은 느릿느릿해졌다.
사실 한계는 이미 오래전에 찾아왔다. 밀수업자 고나르가 몇 달간 노예들을 죽기 직전까지 부렸기 때문이다. 사실 당장 모두 쓰러져서 기절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나마 몸을 움직이게 했던 기대감마저 꺾이자 마음도 같이 꺾였다.
많은 노예가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이번에야말로 기회가 아닐까?’
전에 죽지 못해서 받았던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이야말로 자살을 시도할 최고의 기회가 아닐까? 신이 가련히 여겨서 쉽게 갈 수 있게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 준 건 아닐까?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고나르의 사무실 벽은 점점 빨갛게 물들었다.
그걸 본 소시민이 루카르에게 물었다.
“이건 왜 색이 변해?”
루카르가 답했다.
“아, 사무실에는 노동자들의 영력 패턴을 통해 심리 상태를 읽을 수 있는 장치가 있습니다. 빨간색은 스트레스를 의미합니다. 고나르는 항상 사무실을 새빨갛게 유지하라며 다그쳤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야 좋은 물건이 나온다면서요.”
그 말을 들은 소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
그 소리를 들은 루카르는 역시 똑같은 놈이라면서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지. 루카르라고 했나?”
“예? 예옛!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지목하는 사람 해고해.”
“해, 해고라면……?”
“차용증 받고 여기서 쫓아내라고. 자유민 만들어 주는 건데 몸값 정도는 요구해도 되겠지.”
“……!”
루카르의 눈이 커졌다. 차용증을 받고 쫓아내 준다고? 그거야말로 노예들이 차선으로 생각했던 결과가 아닌가? 최선은 아니지만 두 번째로 좋은 결과 정도는 된다.
‘해고… 해고를 당해야 한다!’
루카르조차 그렇게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소시민이 가리키는 노예들을 본 루카르는 가슴 한편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쟤. 쟤. 저거.”
하나같이 노예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쁜 존재들이었다. 인성이 쓰레기거나 일을 거지같이 못하거나 게으르거나 더럽거나… 하지만 그런 건 같이 생활하며 오래 보아야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고나르와 그의 관리인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노예들 사이의 암적인 존재.
그들끼리 장난으로 했던 말이 있었다. 만약 혁명을 일으킨다면 관리인을 죽이기 전에 먼저 걔네를 죽이고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고. 그런 존재들이었다. 안 그래도 끔찍한 노예 생활을 더 끔찍하게 만들던 악마들.
소시민이 가리키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런 이들이었다.
루카르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아… 아무리 그래도 저 새끼들이랑 똑같은 취급을 받기는 싫은데?’
어쩌면 쓰레기들만 저렇게 쏙쏙 잘 골라낼까? 이 암울한 와중에도 속이 시원해질 정도였다. 그 분위기를 느낀 건 루카르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끌려 나가는 악마들을 보며 노예들도 어리둥절해하면서 묘한 통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자신들이 그래도 일을 잘하는 편이라는 것을 인정받은 것처럼 뿌듯해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그때 루카르는 소시민을 다시 한번 보았다.
‘뭐지? 이 남자는 우리를 데리고 뭘 하려는 거지? 그냥 노예로 부리려던 게 아니었나?’
그런 루카르를 향해 소시민은 말했다.
“좋아. 대충 여기 시설로 뭘 만들 수 있는지 파악했다. 그럼 이제 이 사무실 개조를 시작할 테니까 잠깐 쉬고 있어. 사무실 개조는 우리 종군 기술자들이 할 거니까 공사 완료될 때까지 여기 아무도 접근 못 하게 하고. 공사는 한 시간 정도면 될 거야.”
뜬금없는 사무실 개조가 시작되었다.
루카르의 마음속에는 막대한 두려움과 일말의 기대가 마구 부대끼고 있었다.
아무튼, 일단 쉬라니까 그건 좋았다.
* * *
‘어휴. 그냥 걱정과 불만이 득시글득시글하는구만?’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나도 가슴이 많이 아팠다. 노예들이 숨겨 둔 비밀 재산을 발견할 때마다 급속도로 어둑어둑해지던 그들의 얼굴. 내가 일을 시킬 때마다 살갗에 새겨지는 싸늘한 공포.
[만상공감]으로 감각을 공유하는 만큼 그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절망하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아서 진짜 좀 미안했다.
하지만 나도 양보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데, 골수까지 쪽쪽 뽑아서 보상을 받아야지.’
그래서 굴렸다. 굴리면서 봤다. 누가 쓸 만한지. 누가 방해되는지. 방해되는 노예들은 차용증을 받고 다 풀어 줬다. 감히 침묵의 해적단에게 돈을 떼먹을 배짱은 없을 테니 이건 이거대로 이득. 하지만 진짜 진국은 바로 남은 노예들이었다.
‘아니. 노예가 아니지. 귀중한 우리 기술자님들이지.’
기술자가 부족한 지구를 위한 최고의 인적자원.
좀 미안한 말이지만, 원래 사람은 절망의 구렁텅이를 굴러 봐야 더 간절해지고 더 충실해지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술직 노예들은 완벽하게 준비된 인재들이다.
다만 문제는 그들의 사기가 바닥을 친다는 건데… 뭐, 무르물랑이 인정했듯이 내가 이쪽 방면으로는 자신이 있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감동을 줘 볼까?’
나는 휘오의 가지를 들었다.
- 아, 이제 거기도 끝났나요? 예, 도련님. 그럼 도련님만 잠깐 이쪽으로 와 주세요.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요.
데미안을 호출했다.
‘노예 생활 수십 년씩 했으면 한 번쯤은 대접도 받아 봐야지.’
장담한다. 이곳에 남은 노예들이 쫓겨 나가서 곧장 자유민이 된 다른 노예들을 부러워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나랑 데미안 도련님이 그 증거를 지금부터 보여 줄 작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