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76화 (10권) (176/212)

목차

1. 긍정적인 방향

소름이 돋았다.

소시민이 활시위를 놓는 순간.

그 화살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조신의 꿈결 사이를 그저 날아가는데, 어째서인지 권승리는 목덜미를 타고 온몸에 퍼지는 소름을 느꼈다.

소시민은 활을 딱 세 발을 쏘았고, 권승리는 그때마다 팔을 쓸었다.

쏘아진 화살은 마치 검은 번개와 같았다.

칠흑 같은 밤에 번개가 치면 만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공허한 창조신의 꿈결 속으로 화살이 날아가면 차원 요새의 검은 실루엣이 번뜩번뜩 모습을 드러냈다.

번개는 고요하고 그 이후에 찾아오는 천둥이 요란하듯, 화살은 고요하게 차원 요새로 날아들고 그 후에 거센 진동이 우르르 울고, 차원의 격류가 박살이 나서 권승리가 있는 곳까지 물결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소시민은 말했다.

“차원 요새의 동력부 세 곳을 모두 다운시켰어. 이계 화망이 잠시 침묵할 거야.”

권승리는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체 무슨 수로 저 멀리 있는 차원 요새에서 동력부를 찾고 또 그걸 정확하게 요격을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그녀는 그만 웃고 말았다.

‘그동안 나를 본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한계가 없는 것 같다는 둥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둥 이해는커녕 인지도 못하겠다는 둥… 평생 그런 말을 듣고 살았던 권승리다. 좋아하지 않는 말들이었는데… 이젠 그 말을 고스란히 소시민에게 돌려주고 싶다.

아직도 소름이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름은 단지 이성계의 활이 보여 준 파괴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인가?’

권승리가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공격하는 입장이 되어서 싸워 보는 게…….’

권승리와 아틀라스 클럽 영웅들의 싸움은 언제나 지키는 싸움이었다. 사무치게 지키고 싶었다. 소중한 것들이 더 이상 박살 나지 않기를 바라며, 껴안고 또 껴안으며 지긋지긋하게 지켜 내고 싶었다.

그랬던 권승리에게 지금 이 순간은 우주가 뒤집히는 듯한 충격과도 같았다.

‘그래. 먼저 때리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 그런 수만 있다면.’

계속해서 내 가드 위로 주먹이 떨어지면 쉴 수가 없다. 항상 긴장해야 하고 골이 울린다. 하지만 때릴 방법을 모르니 꿋꿋하게 맞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늘 바라고 있었다. 주먹을 뻗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주먹을 상대의 턱에 꽂아서 상대를 아주 눕혀 버릴 수만 있다면? 적을 눕혀 버리고 기분 좋게 두 다리 쭉 뻗고 자고 싶다.

주먹 내는 방법을 몰라서, 적을 잡을 수가 없어서 미련하게 맞고 또 맞으면서 버티던 영웅의 손에 적의 멱살이 잡혔다. 불끈 쥔 주먹에는 힘이 가득했다. 그게 지금의 권승리였다.

권승리가 말했다.

“이계 화망이 침묵했다고? 그럼… 내가 다 죽여도 되겠네?”

소시민이 답했다.

“그래.”

히죽.

하얗게 웃는 권승리의 양 주먹에는 소시민이 선물한 ‘꿈결의 장갑’이 끼워져 있고, 차원에 간섭하는 ‘꿈결의 장갑’을 통해 주먹 인근의 차원 법칙들이 쉴 새 없이 왜곡된다.

차원의 법칙에 간섭하는 건 아주 까다롭고 난해한 일이었지만, 이 장갑을 끼기 시작한 이후로 그 부담이 월등하게 줄어들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역시 좋은 물건은 좋구나.’

물건에 기대지 않고 오롯이 스스로의 역량만을 키우려고 했던 과거 자신의 방식이 틀렸다는 걸 그녀는 마침내 인정했다.

뛰어난 보디빌더는 역기의 봉이 휠 때까지 쇠질을 하고, 뛰어난 기타리스트의 손에서는 한 달에도 몇 개씩의 피크가 닳아 없어진다.

실력이 늘어난다는 건 어떤 물건을 쓰고 또 써서 아주 닳아 없어질 때까지 쓴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반짝반짝하던 ‘꿈결의 장갑’이 벌써 이리저리 닳을 정도로 사용한 권승리는 이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지에 올라 있었다.

‘고맙다, 소시민.’

속으로 한 번 중얼거리고 그녀는 말했다.

“그거 알아? 차원 격류서 휘오랑 연습하다가 깨달은 건데… 차원이라는 건 일종의 풍선 같은 거야. 이 창조신의 꿈결을 밀어내고 나타나는 빈공간. 그런데 말야…….”

권승리는 하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그 풍선을 바늘로 찔러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휙!

소시민의 화살 세 발로 극심한 혼란에 빠진 차원 요새. 권승리는 단 한 걸음 만에 그 차원 요새의 표면에 바짝 다가서서는 터덕! 암벽등반이라도 하듯 그 경계를 붙잡았다.

사실 그것은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관념 속의 개는 짖지 않듯이 창조신의 꿈결과 차원 사이의 경계 역시 그저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이기에 손에 잡혀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수평선을 만지고 저 멀리 무지개를 잡는다는 것보다도 더 허황된 이야기. 하지만 권승리는 그것을 잡았다.

그리고

“으… 으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힘을 쓰더니 그것을… 뜯었다!

콰지지직!

차원 요새 전체가 구멍 뚫린 풍선처럼, 문이 열린 비행기처럼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차원 요새는 어떻게 보면 하나의 작은 차원과 같다. 그런 차원 전체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차원 내부의 법칙과 질서 속으로 창조신의 꿈결이 흘러 들어가며 무질서와 혼돈을 만든다. 차원 스스로의 복원력이 발동하기는 했지만 그 편린만으로도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받는 충격과 혼란은 재앙 병기 그 이상.

소시민의 공격으로 동력부가 파괴되고 갑작스러운 창조신의 꿈결의 침습으로 해일과 지진 이상의 난리를 겪게 된 차원 요새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이제 적의 방어 체계가 완전히 무력해질 때까지 적당히 기다렸다가 탈진한 적들의 목만 추수해 오는 일만 남은 셈이다.

“아, 속 시원하다.”

권승리는 하얗게 머리칼이 탈색되고 코에서는 방울방울 피를 흘리면서도 여전히 하얗게 웃었다.

무혼권가의 무남독녀.

귀하디귀한 아가씨가 저렇게 예쁘고 살벌하게 웃는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 내가 이렇게 속 시원한데… 데미안은 지금 얼마나 짜릿할까? 그 물건들은… 잘 쓰고 있을까?’

* * *

“아니, 말이 됩니까? 루드비히의 막내아들, 그 귀하디귀한 도련님이 스스로 미끼를 자처한다고요?”

데미안의 작전 계획을 들은 토마스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떠야만 했다.

“그냥 차라리 돌격을 하죠? 저희 같은 놈들이야 언제든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데미안 도련님은 다르죠.”

물론 토마스 역시 귀중한 전력이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강철 기사회 소속의 1급 기사는 결코 허투루 여길 수 있는 자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의 전술적 위치는 기본적으로는 최전선에서 소모되는 것이 전제되고 있었다. 체스로 따지자면 나이트 같은 존재. 반면에 소시민과 함께 간 권승리나 이쪽 전선을 맡고 있는 데미안 같은 이들은 체스로 따지자면 퀸이나 심하면 킹으로까지 간주할 수 있는 귀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가장 앞에 서서 특공을 한다?

토마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소대장님?”

토마스가 까막이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까막이가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음을 알고 있는 토마스였다. 권승리, 데미안 이런 이들과는 태생부터가 다른 밑바닥 인생인 만큼 자신이 느끼는 어색함을 까막이도 당연히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이라는 게 우습다.

밑바닥에서 구르면 구를수록 ‘나야 밑바닥에서 굴러도 되지만 저런 귀한 분들은 안 되지.’라는 이상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왕왕 생기는 것이다. 특히나 그 귀한 이에게 큰 호감이 있을 경우엔 더더욱.

하지만 까막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데미안이 하겠다잖아. 네가 뭔데 데미안의 즐거움을 뺏는다고 난린데?”

짜증이 섞인 거친 반응. 그거야 그렇다 치고 그 말이 토마스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에? 즐거움이요?”

즐거움? 가장 앞에 서서 적의 집중포화를 맞아야 하는 자살에 가까운 그 임무가 즐겁다고요?

“그래. 즐겁겠지. 숨지 않고 정면에서 싸워도 되는 상황이라면 다 좋아한단 말야, 데미안은.”

“그런 걸 좋아한다고요?”

“그래. 억눌린 게 많잖아.”

“도련님이요? 억눌려요?”

토마스는 불신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장갑에 코트에 머플러에… 엄청 비싸다는 각종 장비로 온몸을 칭칭 감고 데미안은 홀로 차원 요새의 사정거리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모습에 토마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뭐가 억눌렸다는 거야? 엄청 비싼 물건들 사고 싶은 대로 다 가지고 있구만. 그나저나… 저걸로도 포격은 어떻게 못 할 텐데 대체 어쩌실 생각인 거지?’

토마스의 눈에 머플러를 코끝까지 올린 데미안의 모습은 어쩐지 긴장되고 두려워 보이는 것이었다.

* * *

하지만 사실 그때, 데미안이 떠올리고 있던 생각은 그저 ‘고맙다.’ 이 한 마디였다.

‘소시민 사령관, 고마워요. 이 모든 것에.’

데미안은 생각했다.

‘난 태어나면서부터 자유가 없었어.’

숨어 살아야 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타고난 성별도, 본래 자신이 가져야 했던 이름도, 자기 몸의 진짜 형태도 모조리 숨기고 살아야 했던 아이는 무슨 수를 써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저것들 때문에.’

피핀 차원의 연출가는 사전에 데미안이 요청한 대로 데미안에게도 방송을 송출하고 있었다.

[네! 데미안! 차원 요새에 접근합니다!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걸까요? 지휘관이 미끼 노릇을 한다? 아니, 설령 미끼 역할을 성공한다고 쳐도 공격은 누가 할 겁니까? 미끼가 있으면 찌를 작살이나 하다못해 낚싯바늘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누가 있죠? 까막이? 그 정도 수준은 그냥 맛있는 지렁이밖에 안 됩니다. 이 따위 전략을 누가 떠올렸는지 궁금하군요!]

연출가는 데미안이 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주 신랄하게 혹평을 쏟아 냈다. 그 나름의 불만 표시였다. ‘아니! 주인공이 죽으면 어쩌겠다는 거야!’ 하면서 이 계획을 극렬 반대했던 게 연출가였다. 물론 그의 의견 따위 관심 없지만.

‘저것들 때문에 숨어야 했고, 끌려다녔고, 그렇게 치욕스러운 평생을 살았지.’

그걸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은 그냥 꿈만 같았다.

‘더 이상은 숨을 필요 없고 숨길 필요도 없어. 그냥 모든 게 내 선택에 달린 것뿐이야. 내 맘대로 해도 괜찮아.’

피핀 차원의 연출가가 뭐라고 하든, 또 누가 뭐라고 하든. 이제 선택은 데미안의 몫이었고, 데미안은 언제나 그 누구보다도 더 나은 선택을 내릴 자신이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보고 왔다고.’

데미안의 능력은, [모이라이 홀덤] 능력은 발동하면 어두운 테이블 위에서 상대와 카드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진행하는 그 카드 게임을 통해 상대가 가진 패가 무엇인지, 그걸 어떤 상황에서 내는지, 그걸 누를 수 있는 나의 패는 무엇인지를 사전에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예지’의 일종.

‘정말 자신 있다고.’

데미안의 웃음이 짙어진다. 그의 몸이 마침내 차원 요새의 포격 사정거리 내로 들어섰다.

그 순간 차원 요새는 불을 뿜었다.

이계 화망의 구성 자체는 이전에 소시민이 돌파한 아갈타의 차원 요새와 비슷했다.

눈앞 가득 뿌려지는 딜레이 샷. 그 사이사이에 숨어 강렬한 폭발로 움직임을 방해하는 스톰 샷. 마치 저격수처럼 초고속으로 쏘아지는 킬 샷 등등등. 단순하지만 강력한 구성.

하지만 데미안은 이미 그 모든 방어 체계가 어떤 순서로 어떤 위력으로 나올지 알고 있고, 그에 충분한 대책을 마련해 왔다.

‘전쟁은… 첫째는 보급 그리고 둘째가 그 보급 물자의 가성비지.’

데미안이 장갑을 벗어 던졌다.

그건 그냥 장갑이 아니다. 방어 결계가 인챈트된 고가의 방어구. 거기에 권승리가 살짝 비틀어 둔 법칙이 첨가되었다.

데미안이 그걸 벗어 던지는 순간 권승리가 비튼 법칙이 촉발되었다. 장갑이 불에 타 소멸되는 대신 주변 일대에 일시적이지만 아주 강력한 방어 결계를 만들었다.

꽈과과광!

전면을 가득 채우던 딜레이 샷이 방어 결계의 폭주와 만나 폭발하거나 궤도가 휘어진다. 그 무엇도 데미안이 있는 곳까지 오지 못했다. 약 10만 타키온짜리 장갑으로 100만 타키온은 할 법한 포격을 무력화하는 마술.

그다음엔 머플러를 풀어 던졌다. 역시나 권승리의 안배가 들어간 머플러는 올올이 풀리며 스톰 샷을 미리 찾아내 부드럽게 감싸고 다시 적에게로 던져 버린다.

계속 그런 식이었다.

하나하나의 기능으로 따지자면 절대 이 막대한 포격을 막을 수 없는 장비들이었지만, 장비들은 소멸하는 대가로 하나하나가 강렬한 위력을 발휘했다.

순서가 조금만 틀리거나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나도 온몸으로 포탄을 뒤집어써야 하는 아슬아슬한 균형잡기의 연속. 하지만 데미안은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입가에는 점점 더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덤벼. 날 봐라. 잡아 보라고.”

타이밍에 딱딱 맞춰 딱딱 맞게 준비한 장비들을 하나하나 벗어 던지며 데미안은 홀로 적의 포격을 2분 동안이나 받아 냈다.

“그런데 보라고, 너희가 나에게 주목하는 동안 누가 너네 요새 내부에 침투했는지.”

때마침 데미안의 귓가로 리디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 도련님, 첫 번째 동력부를 찾아 제압 완료했습니다. 1분 내로 나머지 하나의 동력부도 제압하겠습니다.

[괴, 괴물!]

[끄아아악! 무슨 권능이……!]

[막아! 막으라고!]

통신을 통해 온갖 비명과 함께 리디아의 보고가 이어지고, 차원 요새의 맹렬한 포격도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귓가로 경악한 연출가의 목소리도 들렸다.

- 뭐, 뭐야, 저 여자는? 방금… 별빛 강기를 얼려서 깨뜨… 렸어? 강기를 잡아먹는 권능이라고?

- 어, 어디서 나타났죠? 예? 데미안이 소환했다고요? 아니 잠깐만, 데미안한테 저런 무지막지한 괴물이 따라다니고 있었다고요? 대체 언제부터?

연출가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으며 데미안은 속으로 낄낄 웃었다.

역시 연출가는 리디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루드비히 가문이 가진 최강의 무력이 바로 데미안을 24시간 쫓아다니는 수신 호위, 리디아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던 막내딸에게 미안했던 한 아버지의 집념. 최악의 최악의 순간이 닥쳐서 피핀 차원의 연출가가 계약의 대가로 데미안을 요구할 때 그녀를 지킬 최후의 보루.

그렇기에 그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도 늘 데미안 곁에 숨어 있어야만 했던 리디아가, 마침내 속박을 던지고 나왔다.

그녀가 있었기에 늘 숨어 사는 심정이었던 과거에도 가끔씩은 ‘안전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순간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데미안이 쥔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되었다.

물론…….

[끄아아악! 뭐야! 영력도 아니고! 이 원시적이고 흉포한 힘은 뭐냐고!]

[이 권능은 뭐야! 영력이! 영력이 얼어붙는다! 차원 밖으로 탈출할 수도 없어!]

마누스를 쓰는 리디아의 존재는 외부엔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 그래서 상황을 이미 다 만들어 두었다.

그때쯤 데미안은 조끼도 벗어 던지고, 반지도 풀어 던지고, 도련님 구두도 벗어 던져 맨발이 되었다.

셔츠의 단추 두 개쯤 풀고, 바지는 밑단을 단정하게 접어서 하얀 발목을 드러내고, 맨발 차림에 두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녀는 명령했다.

“전멸해. 단 한 명도 살려 놓지 마.”

데미안이 시선을 끄는 사이 움직인 건 리디아뿐만이 아니다. 어느새 적의 차원 요새를 물샐틈없이 포위한 화랑단과 크르으랑의 가신들이 데미안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예!”

[밥상을 이만큼이나 차려 주셨으니 다 죽이고 오겠습니다.]

후…….

살기등등해서 차원 요새로 진입하는 화랑당을 보며 데미안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휴식을 얼마나 취했을까? 데미안의 귀에 소시민의 통신이 들어왔다.

- 다른 세 군데는 함락 끝났는데, 거긴 어때요?

데미안은 피식 한 번 웃고 답했다.

“여기도 곧 끝나요.”

- 오, 잘됐군요. 제가 금방 다른 곳들 전장 정리하고 거기도 정리하러 들르겠습니다.

“고마워요, 사령관님.”

- 뭘요, 다들 고생했는데.

“아뇨. 그게 아니라 고맙다고요.”

- 예?

“하여튼 고마워요, 진짜루.”

그렇게 말하며 데미안은 머리를 쓸어 올리고 웃었다.

전투가 시작될 때만 해도 코트에 머플러까지 꽁꽁 싸매고 있던 옷가지들을 다 내던지는 바람에 셔츠 차림이 참 시원해 보였다. 머리를 묶었던 끈도 던져 버려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칼은 갓 샤워를 하고 나선 것처럼 신선해 보였다.

막 싸움을 일단락 짓고 귀환하던 까막이와 토마스가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얼어붙었다.

“어… 제가 이상한 건가요? 우리 도련님 되게 이뻐 보이시는데?”

하지만 까막이는 대답이 없었다. 토마스가 이상해서 돌아보니 까막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빠져 있었다.

데미안은 아직 제천대성의 터럭을 이용한 둔갑을 풀지 않았지만… 뭐랄까.

점점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무척 긍정적인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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