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75화 (175/212)

18. 일주일

출정을 나서는 중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장 강력한 후원자의 연락을 안 받을 수는 없었다. 람시르의 중계를 받아 우리는 센터울 차원의 젊은 준장 내미슈와 잠시 통신을 나누었다.

내미슈는 아까 타키넷에서와는 다르게 허세 하나 없는 진솔한 성격이었다.

[와아… 아까는 속으로 쫄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아니, 준장씩이나 되는 인물이 거기서 자결을 하다뇨? 그렇게 실력도 뛰어난 양반이.]

노란색과 파란색의 나선이 그려진 내미슈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긴, 승부가 금방 난 것은 내미슈의 역량이 에르하무스를 압도해서라기보다는 에르하무스의 살의殺意가 너무나 강한 탓이었다. 큰 한 방을 노리려는 자는 반대로 큰 한 방을 카운터로 맞을 수도 있는 법. 실제 실력으로 따지면 내미슈와 에르하무스의 차이는 그렇게까지 크진 않았을 것이다.

[본성에서도 엄청나게 당황했어요. 준장이 죽었잖아요? 아갈타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건 전면전을 벌여도 이상한 일이 아닌데… 설마 그런 모욕 좀 당했다고 전면전까지 불사하겠다는 건 아니겠죠? 어후, 미치겠습니다. 하여튼… 너무 위험한 놈들이에요. 지나치게 극단적이네요.]

이마에 솟은 노란색 뿔로 하늘을 찌르듯이 방방 뛰는 내미슈. 침묵의 해적단의 팬이라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가오 하나 없이 친근한 태도였다.

하지만 관계는 언제나 호혜적이어야 하는 법. 내미슈도 우리에게 바라는 게 없진 않았다.

[그래서 부탁이 있습니다. 아갈타가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면 이쪽의 전력이 압도적이라는 걸 과시해야 합니다. 미친놈들이긴 하지만 여태 취해 온 행보를 보면 더 강한 힘 앞에서는 양보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거든요.]

내미슈의 요구는 심플했다. 세력 과시의 일환으로 차원 문명들 간의 대리전이 된 밀수꾼 네트워크의 전쟁을 빨리 끝내 달라는 것.

[그래도 침묵의 해적단이라면 한 달 안에는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요? 부탁 좀 드리고 싶습니다.]

당연히 들어줘야 하는 그 요청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예에?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는 좀… 일단 이걸 좀 보시죠. 저희 측 정보원들이 파악한 내용입니다. 적들은 지금 아갈타의 대폭적인 지원을 얻어서 강력한 차원 요새를 만들고 틀어박힌 형국입니다. 일주일 안에 끝내려면 병력을 분산해야 될 텐데 그건 너무 위험…….]

나는 내미슈가 보내 준 적들의 정보를 쭉 읽어 보았다.

‘뭐, 예상 범위 안이네.’

아갈타가 지원을 해 줄 것이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충분했다. 1주일이면 다들… 잘해 줄 것이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어야 지금의 분위기가 유지됩니다. 지금 한 컵의 피를 흘리면 나중에 한 양동이의 피를 아낄 수 있습니다.”

기세라는 게 있다. 모두가 내 편을 들고 아갈타를 우습게 여기는 지금의 기세를 이어 가려면, 그에 알맞은 성과를 계속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패배자의 편을 들지 않으니까.’

아갈타를 더 빠르게 더 크게 패배시킬수록 우리 편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아갈타의 입지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러니 1주일의 정벌 일정은… 분명 만만치 않은 희생을 예고하는 일정이지만 충분히 그걸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동료들을 믿었다.

결국 내미슈도 내 말에 동의했다.

[…해내실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겠지요. 불을 지펴 주시면 장작은 저희가 대겠습니다.]

초전박살에 성공하면 그 소식을 다시 전 차원에 떠들썩하게 퍼뜨려 주겠다는 약속. 아갈타를 흔들고 아군을 모아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곧 승전 소식을 들고 다시 통신을 나누죠.”

[예입!]

내미슈는 이마에 난 노란 뿔을 한 손으로 가리고 내게 공손히 묵례했다.

나는 그가 무척 호흡이 잘 맞는 동맹이라고 생각했다.

* * *

아갈타와 손잡은 밀수꾼의 차원 요새에서는 매일같이 신음과 비명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저기… 마스터, 어제 이계 화망을 건설하던 100번대 기술자 중 스물세 명이 과로로 사망했습니다. 이 이상 일정은 맞추기가…….]

짜악!

작업반장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밀수업자 고나르의 꼬리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가시가 달린 꼬리가 그의 뺨을 찢어 바닥에는 피가 후드득 떨어진다.

“읍……!”

하지만 작업반장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물고 비명을 참아 냈다. 고나르 밑에 있는 모든 기술자는 사기를 당했든 납치를 당했든 빚에 팔려 왔든 모두 노예 신세였다. 작업반장인 그 역시 노예 신분인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다른 노예들보다 월등히 안락한 대우를 받는 작업반장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우선은 비명을 잘 참아야 했다.

밀수업자 고나르는 ‘근성 없는 것’들을 싫어했으니까.

[기술자가 다 죽었어? 내가 뭐라 그랬어.]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작업을 하라고 그러셨습니다.]

[근데?]

[…죄송합니다.]

[똑바로 해! 침묵의 해적단이 오고 있다고! 내 전 재산이 걸린 일이라고!]

[죄송합니다.]

[꺼져!]

[예.]

작업반장은 고나르에게 오체투지를 하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뚝뚝 떨어지는 피는 늘 가지고 다니는 수건으로 감싸서 막고, 이미 떨어진 핏물은 오체투지를 하고 일어서면서 닦아 말끔하게 만든 상태였다.

천천히 물러서던 작업반장은 고나르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침묵의 해적단 이 멍청한 새끼들. 적당히 합의를 봤으면 우리도 사과하고 보상해 주고 끝났을 텐데 이걸 끝장 보자고 달려들어? 이러면 이제 우리 사재까지 다 털어서 싸우는 수밖에 더 있어? 이런 멍청한 계산을 봤나! 니들은 실수한 거야. 니들처럼 요새 잘나가는 놈들이 뭘 하려고 물러설 곳이 없는 밀수업자를 건드려? 후회할 거다. 싸움은 결국 절박한 놈들이 이기는 거니까.]

작업반장의 생각도 비슷했다. 덕택에 그들 신세만 더 각박해졌다. 그리고 그만큼… 기술자들의 목숨으로 쌓아 올린 방어 태세의 엄중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에.

‘만의 만의 하나라도 마스터가 패한다면……?’

모든 재산과 정보를 통제하며 자신들을 노예화한 고나르가 몰락한다면? 그래서 그가 일군 이 거대한 제국의 통치자가 사라진다면?

작업반장은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생각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된다고.

어쩌면 이건 다시없을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 * *

밀수업자들의 방어 태세는 가시를 두른 고슴도치처럼 물샐틈없어서 힘과 능력이 맞부딪치는 정직한 일전 외에는 꼼수를 부릴 틈이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도 소시민은 화랑단과 크르으랑의 부대를 총 네 개로 나누어 각기 다른 요새로 출진시켰다. 일주일 내로 놈들을 모두 정리하려면 병력을 분산하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첫 번째 부대는 서민서와 박민희, 강전구 등 화랑단의 주요 소대장들과 크르으랑이 가장 신뢰하는 가신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구의 지휘관들과 달리 크르으랑의 가신들은 이번 작전에 자꾸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걸… 정말 뚫을 겁니까? 우리만의 힘으로?]

규모가 훨씬 작긴 했지만 지난번 아갈타의 차원 요새를 생각나게 만드는 삼엄한 이계 화망이 펼쳐져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런 방어 태세를 갖추다니, 쏟아부은 돈이 얼마일지 상상도 가지 않는 모습.

크르으랑의 가신들은 저런 삼엄한 요새를 쪼개진 전력으로 들이받아야 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위험하게 싸워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좀 더 시간을 들여 안전하게 공략하면 안 되는가? 크레아인들은 도무지 이 전략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구의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민서가 대표로 말했다.

“해야죠. 그래야 아갈타를 위축시킬 수 있으니까.”

그녀는 생각했다.

‘초기 던전 브레이크에도 아갈타의 역할이 컸다고 그랬지?’

처음 아갈타가 지구를 발견했을 때는 지구의 차원 격류가 지금보다도 더 강했었다. 그리고 아갈타 측에서도 지구에 더 큰 차원 상륙 장비를 들여올 필요성을 못 느끼던 때였고.

그때의 아갈타 측량병들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지구로 흘러드는 부서진 세계, 즉 던전과 그 던전 안의 괴물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괴물과 함께 탐사 장비를 보내서 지구를 염탐하는 작전을 실행한 것이다.

그런데 지구는 그 염탐 행위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어 버렸다.

‘개자식들…….’

물밀 듯이 터져 나가던 던전들. 시가지를 점령한 괴물들. 대비도 못 하고 학살당한 무수한 사람들.

서민서의 아버지도 그때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민서는 행운아였다. 어머니가 아직도 살아 계시니까.

서민서는 기억한다. 10살 때였나 11살 때였나, 대전쟁 중에 임시로 꾸려졌던 어느 천막 교실에서… 그때 아이들 중 어머니라도 살아 있던 아이는 서민서뿐이었다. 마흔 명도 넘는 아이들이 전부 고아였고, 그 아이들은 서민서를 따돌렸다. 부러웠기 때문이다, 서민서에게 아직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그때 서민서는 자신을 따돌리는 그 아이들이 너무나 미웠지만, 커서 다시 생각하면 그저 슬플 뿐이었다. 그 아이들이 불쌍했고, 그런 아이들에게 상처받았던 자신도 또 불쌍했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하염없는 분노가 그녀의 가슴속에 타오르곤 했다.

특별한 분노가 아니다.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증오.

그녀에게 전쟁 준비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평소엔 짊어지기 너무 어려워서, 또는 살아남기 위해서 꼭꼭 숨겨 두었던 그 분노를 꺼내어서 그저 활활 타오르게 내버려 두는 것.

그러면 두려울 게 없고 하지 못할 게 없었다.

서민서의 눈동자에 불꽃 같은 영력이 깃든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타깃 온.”

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달라진다. 지구인들에게선 야수와도 같은 살기가 충천한다. 그걸 보고 크레아 차원의 전사들도 서둘러서 분위기를 맞추었다.

‘어후… 무슨 기세가.’

‘귀신이 따로 없어.’

호랑이의 모습을 지닌 크레아 차원의 전사들이 도리어 주눅이 들 정도로 살벌하고 흉포한 기세. 뒤늦게라도 분위기를 맞출 수 있는 것도 그나마 그들이 호전적인 크레아차원의 전사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전투 준비를 마친 그 순간.

꾸그그그그극!

서민서의 주변으로 차원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주위를 흐르던 창조신의 꿈결도 함께 뒤틀렸다. 그리고 곧 새빨간 사슬이 나타나 적의 차원 요새와 서민서를 함께 이중, 삼중으로 칭칭 감았다.

그 모습을 본 크르으랑의 가신이 경고했다.

[으음… 역시 공간 이동과 차원 이동을 제한하는 결계가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서민서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만 매달릴 뿐이다.

“그까짓 결계.”

툭.

투둑.

서민서의 코에서 피가 방울져서 떨어진다. 그녀의 눈이 충혈된다. 공간과 차원이 휘어진 유릿장처럼 당장이라도 깨어질 것처럼 불길한 소리를 낸다. 붉은 영력의 사슬이 끊길 듯 흔들렸다. 이중, 삼중의 결계를 오로지 본신의 능력으로 비집고 들어가려는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덤덤하게 바라보는 화랑단.

크르으랑의 가신들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전쟁에서 패배해 못 볼 꼴을 많이 본 크레아 차원의 전사들로서도 지구인들의 한과 분노는 감히 측량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열었다.”

서민서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그려지고.

투우우웅-!

그녀의 몸이 차원을 뛰어넘어 적의 요새 한복판에 떨어졌다. 그리고.

꽈아아아앙-!

사위를 뒤흔드는 건 비싸디비싼 재앙 병기의 폭발.

직후 박민희가 외쳤다.

“돌격!”

재앙 병기의 폭발로 완전히 혼란에 빠진 차원 요새로 화랑단과 크르으랑의 가신들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 * *

쿵!

쿠우우웅!

창조신의 꿈결에선 그런 거대한 소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금 우리 함선이 적들의 강렬한 포격을 얻어맞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똑똑한 놈들이네. 일부러 사정거리를 속여서 우리를 거리 안으로 끌어들였어.’

적들이 이런 장거리포까지 준비했다는 건 내미슈의 보고서에도 적혀 있지 않던 사항.

‘다른 데도 이렇게 철저히 준비를 했으려나? 그래도… 다들 잘하고 있겠지?’

하지만 계략이라면 계락에 빠진 현재 상황에도 나는 그저 다른 동료들을 걱정할 뿐이었다. 전반적인 숫자와 전력으로 보면 동료들이 데려간 전력이 더 압도적이었고 상대해야 하는 차원 요새의 전력도 내가 있는 곳이 가장 막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은 걱정하지 않았다.

- 아, 시민! 좀 빨리 좀 해! 힘들어!

여기에는 나랑 권승리가 있었으니까.

쿵- 쿠쿵!

쉴 새 없이 쏘아지는 포탄 중 그 어느 것도 기파랑호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권승리가 휘두르는 [법칙왜곡] 앞에서는 그 어떤 종류의 포탄도 그 폭발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 리미트는 아까 해제해 줬잖아! 빨리 쏘라고!

내 손에는 검은 영기를 물컹물컹 쏟아 내고 있는 이성계의 활이 있다.

길들이기 진척도 91퍼센트.

권승리의 예측이 맞았다. 신의 사념을 깨우고 그 힘을 오롯이 발휘하게 된 활을 다루면서 정체되어 있던 길들이기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아직 한 발 한 발의 위력은 재앙 병기에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만상공감]에 잡혀 드는 차원 요새의 모든 요소요소를 꿰뚫어 보며 천천히 활을 들었다.

사람의 목숨을 끊는 데 꼭 개작두나 용작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때론 예리하게 벼려진 작은 메스 하나로 톡, 하기만 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차원 요새도 다르지 않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활의 시위를 잡았다.

두근, 두근, 고대신의 사념이 깨어난 활은 그 시위조차 살아서 맥동했다.

끼긱! 시위를 조금 당기는 순간 새까만 영력이 나를 집어삼킨다. 이 짓도 하다 보니 익숙하다.

나는 오히려 [만상공감]을 더욱 강하게 발현해 그 어둡고 어두운 ‘무한’을 직시했다.

의식과 감각이 무한대로 확장되는 그 아찔한 상승감 뒤에 나는 깨닫는다.

지금 내가 ‘신神’의 그림자 정도는 붙잡았다는 사실을.

“소시민! 알지? 너무 깊이 빠져들지 마……! 통제하라고!”

권승리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린다. 지극히 하찮고 사소해 보이지만 나는 그 말에 귀 기울인다.

그래. 조심해야지. 이 힘에 취하지 말아야지.

끼릭!

그렇게 생각하며 시위를 잔뜩 당기고 활을 겨눴다.

-10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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