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나쁜 소식
그것은 일종의 순례 행렬이었다.
최상위 차원에서 최하위 차원까지, 온갖 차원에서 온 수많은 이가 타키넷의 이름 없는 주점 앞에 길게 줄을 섰다.
주점 주인은 관람료를 받고 그들을 순서대로 입장을 시켰다.
[오오! 저게 그 월은장도라는 건가?]
[월은越銀. 그간 많이 쓰이지 않았는데 요즘은 진은眞銀보다도 좋은 것 같다는 소문이 있더라.]
[일단 때깔을 보라고! 저 신비한 은색!]
[겉모습만이 아냐. 그 의미를 봐야지, 의미를. 이건 우리 생에 다시 보기 어려운 일대 사건이라고.]
주점 안은 여전히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백 명이 넘는 현상금 사냥꾼들이 나자빠졌던 난장판 그대로 와장창 박살이 나 있는 내부 풍경. 그리고 그 벽면 한쪽 보호 주문 속에 전시되어 있는 단검 하나와 공고문 하나.
관람객들은 그 살풍경한 풍경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요즘 어딜 가도 시끌시끌하던 그 이야기의 현장에 직접 와 봤다는 사실이 그들을 한껏 흥분시켰다. 감수성 예민한 이들 중에서는 훌쩍훌쩍 우는 이까지 있을 정도.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아갈타의 군인들이 들이닥친 것은.
[이, 이봐! 당신들 뭐 하는 거야! 여긴 내 가게야! 줄 서서 입장료를 내라고! 어어? 뭐야! 악!]
단 며칠 사이에 평생 모은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던 주점 주인이 요란하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곤 문이 부서지고 1개 소대 병력, 32명의 아갈타인이 완전무장을 하고 나타났다.
[뭐, 뭐야? 전쟁 났어?]
[와… 저거, 로로스의 귀신 세트 아냐? 3,600넘버링 코어가 들어간 하이엔드 차원강습 시스템! 개당 1억 타키온에 납품한다던 그 미친 물건 같은데?]
[와… 돌았다. 제일 안 좋은 장비가 2,100넘버링이 넘는 코어가 들어간 거잖아?]
[아갈타? 아갈타 놈들인가?]
아갈타의 군인들이 거칠게 밀고 들어와 관람객들을 밀어내 버렸다. 관람객들은 무척 불쾌해했지만,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일단 그들이 입고 있는 고가의 차원강습 시스템에 벌써 기가 질리고 만 것이다.
아무리 태고의 보호 주문이 있는 타키넷이라고 해도 저런 자들에게 함부로 대들었다가는 늘씬 얻어터지는 수가 있었다.
‘아냐… 무려 3,600넘버링 코어잖아?’
‘자칫하면 그냥 얻어맞는 게 아니라 영구적인 장애를 입거나 재수 없으면 죽을지도 몰라.’
3,600넘버링이란 그런 숫자였다. 절대적으로 보이는 태고의 주문마저 깨뜨릴 수도 있는 출력.
관람객들은 그저 침을 꿀꺽 삼키며 아갈타의 군인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아갈타의 군인들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치고 들어와서는 보호 주문을 깨뜨리고 벽에 꽂힌 단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으음……!]
2,700넘버링 코어를 장착한 최상위 라인의 차원강습 시스템을 걸친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만큼 지구의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케사리니 아몬이 꼼꼼히 인챈트 한 ‘도난 방지 주문’의 위력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우우우웅-!
아갈타 군인의 손에 찬란한 별빛 강기가 맴돌기 시작하자 월은장도의 저항도 소용이 없었다.
까가가각!
천천히, 벽에서 빠지기 시작하는 단검.
아…….
아아…….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다른 차원의 인물들을 하나로 묶어 준 일생일대의 사건. 즐거움을 품고 타키넷으로 향하던 그 낯선 경험.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증표가 지금 그대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버렸다.
다들 마음속으로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누구 없나?
이걸 이렇게 무력하게 지켜봐야 하나?
내가 나서야 하나?
하지만…
마음은 들끓지만 눈앞에 보이는 압도적인 장비들 탓에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던 그때였다.
한 청년이 나섰다.
[야이, 깡패 새끼들아! 작작 좀 못 하겠냐?]
앞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걷는 사이에 그 청년의 몸을 차원강습 시스템이 뒤덮는다. 타는 듯이 붉은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와! 저거! 라리사의 진격 세트잖아? 3,500넘버링 코어에 1,800소울의 영력 증폭기를 단 괴물!]
아갈타의 군인들이 갑자기 나선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전혀 쫄지 않고 당당하게 그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두근두근두근.
수많은 차원에서 온 서로 다른 종족. 심장 소리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래도 다 함께 뛰고 있었다.
한 명이 나섰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심지어 나선 이가 아갈타인들의 저 압도적인 무장에 결코 뒤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결국 침묵을 깨고 두 번째 사람이 나섰다.
[새끼들아! 우리 현상금 사냥꾼들이 받은 임무를 니들이 뭔데 맘대로 뜯어 가려고 하고 지랄야?]
그러자 곧장 세 번째가 나선다.
[왜? 너네도 그 임무 수행하고 싶어? 그럼 X발, 외워서 가! 어디서 뜯어 가고 X랄이야, X랄이.]
우르르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나섰다. 성검으로 무장한 이들도 있고, 차원강습 장비로 무장한 이들도 있다. 전체적인 무장 수준은 아갈타 쪽이 훨씬 나았지만, 그들은 다 합해 봐야 고작 서른두 명. 수백, 수천의 관람객이 기세를 피워 올리자 태산을 마주한 듯한 압박감이 아갈타의 군인들을 짓눌렀다.
그러자 여태 말없이 서 있던 남자가 나섰다. 3,600넘버링 코어가 들어간 로로스 귀신 세트를 걸친 남자였다.
[나는 아갈타의 준장, 에르하무스다. 공무 수행 중이니 방해하지 말고 꺼져라.]
준장.
그 계급이 주는 무게감에 움찔 놀라는 관람객들.
하지만 제일 처음 나섰던 청년은 아무런 동요 없이 에르하무스의 위협을 받아쳤다.
[아, 그래? 나랑 계급이 같네? 나는 센타울 차원의 준장, 내미슈다. 내가 볼 때 니들은 공무 수행 중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중이니 이쯤 하고 꺼지는 게 어떨까?]
청년의 자기소개에 좌중의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다.
[내미슈!]
[센타울의 별!]
내미슈는 그런 남자였다.
이 넓디넓은 차원 문명들 사이에서도 자기 이름을 알릴 정도의 천재. 고작 19살의 나이에 태양 강기에 입문을 하고 24살인 지금은 완숙한 태양 강기를 선보인다는 천재 중의 천재.
하지만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아갈타의 군인들은 젊은 천재의 이름값 정도로 기죽지 않았다. 에르하무스가 헬멧을 벗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이, 이런 데서 생사투라도 벌이겠다는 건가? 우린 진지하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비키는 게 나을 거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세 대로 갚아 주라던 아케르의 명령대로 더욱더 세게 도발을 하는 에르하무스.
그러자 내미슈도 헬멧을 벗었다. 이마에 노란색 뿔을 달고 푸른색과 노란색이 빙글빙글 나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눈동자를 또렷이 뜨고, 내미슈는 에르하무스를 상큼하게 비웃었다.
[지금 내 목숨을 위협한 거야?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그냥 성하게는 못 보내 주는데?]
꿈틀.
인상을 찌푸린 에르하무스는 아무 말 없이 다시 헬멧을 썼다. 내미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꽈아아앙-!
둘이 맞붙었다. 후끈-! 터져 나가는 열기. 눈부신 태양 강기를 두르고 두 장군이 검격을 나눈다.
쾅! 쾅! 콰아앙!
충돌의 순간마다 공간이 출렁이고 타키넷의 일부가 노이즈를 일으키며 붕괴 조짐을 보였다.
- 경고! 경고! 강력한 에너지의 충돌로 가상 차원에 과부하! 지금 즉시 대피를!
타키넷의 시스템 메시지가 시끄러운 알람을 울려 댄다.
[으윽! 도망쳐!]
[와… 이게 태양 강기인가……?]
[저게 하이엔드급 차원강습 시스템…….]
다들 기겁을 해서 도망을 치려던 그 순간, 모두를 얼어붙게 만든 낭랑한 목소리가 사위를 꿰뚫었다.
[민폐니까 이만 끝낸다?]
쓰컥!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고.
[아…….]
에르하무스의 오른팔이 허공을 날다가 털퍽, 땅에 떨어졌다.
의외로 순식간에 결판이 나 버린 것이다.
내미슈가 말했다.
“너희 아갈타의 검술은 너무 단순해. 영능학 수준은 제법이지만… 역사가 짧아서 그런가? 활용이 너무 뻔하다고.”
피식, 에르하무스를 비웃었다.
툭툭.
내미슈는 장검의 면으로 에르하무스의 뺨을 두세 차례 때리고 말했다.
“꺼져, 이 이상 쪽팔림당하기 싫으면.”
에르하무스는 수치심에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세등등하게 자신들을 노려보는 수많은 이가 보였다. 그는 더 싸워 봤자 더 추하게 얻어맞는 미래가 남아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뿌드득!
에르하무스는 이를 거세게 갈아붙이고 태양 강기를 두른 발로 땅에 떨어진 자신의 오른팔을 짓밟았다.
화르르!
충분히 다시 붙일 수도 있는 오른팔을 굳이 불태워 없애 버리고, 원독이 가득한 눈빛으로 내미슈와 침묵의 해적단의 공고문을 한번 노려본 에르하무스는 등 뒤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철수한다.]
그의 명령을 들은 아갈타의 소대가 충! 하고 군례를 올리고 자리를 떠났다.
와아아아아-!
꺼져, 새끼들아!
퉤! 꼴좋다!
떠나는 그들의 등 뒤로 조롱이 쏟아진다.
하지만.
[센타울 차원의 내미슈, 아갈타는 오늘의 수모를 잊지 않을 거다.]
에르하무스 준장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오는 듯한 음습한 목소리로 경고를 날리고.
쓰컥!
스스로 자신의 목을 쳐서 자결을 한 직후.
푸스스스, 털썩.
목이 없는 에르하무스가 피를 흩뿌리며 그 거대하고 비싼 차원강습 시스템이 땅바닥에 나자빠지고 이어서 자폭 시스템의 발동으로 콰아아앙-! 폭발을 했을 때는.
[…….]
[아…….]
[미친……!]
다들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타키넷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아갈타의 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중 삼중 충격적인 그 장면에 한껏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그때 다시 나선 건 내미슈였다.
[뭐, 쪽팔림이 뭔지는 아는 놈이었네. 얼마든지 와라. 센타울의 내미슈, 그 어떤 도전도 마다하지 않으니까.]
이 충격적인 장면 앞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내미슈가 당당하게 외치자 얼어붙었던 이들의 마음이 봄볕을 맞은 눈사람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우와아아아! 내미슈!]
[센타울의 별!]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내미슈는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내미슈는 모두의 중심에서 그렇게 화답하다가 벽에 꽂힌 단검과 공고문을 가리키며 외쳤다.
[하하하. 혹시 침묵의 해적단 보고 있으십니까? 저 여러분 팬입니다! 제가 목숨 걸고 여러분 단검과 공고문을 지켰어요! 나중에 만나면 꼭 아는 체하셔야 합니다?!]
그 여유와 능청에 관람객들은 열광을 더했다.
[침묵의 해적단!]
[내미슈!]
[침묵!]
타키넷에서 이런 광경을 볼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 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종족들이 어깨에 어깨를 걸고 한마음 한뜻으로 함성을 질렀다. 침묵의 해적단이라는 이름 아래서 순수한 기쁨을 함께 나눴다.
[주인장! 여기 풍덩주 내와! 내가 산다!]
[예잇!]
어떤 성격 좋은 부호가 외친 그 한마디와 함께 훗날 침묵 축제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 시끌시끌한 축제가 그 첫 시작을 알렸다.
* * *
람시르가 그 소식을 전해 온 것은 한창 이렇게 분위기가 달아올라 있을 때였다.
- 밀수 네트워크의 70퍼센트 이상이 침묵의 해적단을 지지하기로 했어!
지금 타키넷도 비현실적인 열광으로 가득한데, 람시르가 전해 준 소식은 훨씬 더 비현실적이었다.
갑자기? 70퍼센트나?
냉정하게 말하면 밀수 네트워크의 배신자들의 전력이 나보다 더 강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놈들 뒤에는 아갈타가 있는 게 분명했으니까.
그랬기에 아군을 만드려고 내가 이리저리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그런데 30퍼센트, 40퍼센트도 아닌 70퍼센트? 그 말은 배신자 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이 내 편에 서서 전쟁을 치르기로 했다는 뜻인데… 이게 말이 되나?
하지만 내 혼란은 람시르가 전해 준 한마디에 바로 정리가 되었다.
- 아갈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차원 문명들이 우리 측에 지원을 약속했거든! 전세가 완전히 뒤집혔어! 특히 오랜 강호로 꼽히는 센타울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아, 센타울 차원?
내 시선이 저절로 내미슈에게 향한다.
‘어쩐지, 저런 거물이 왜 마침 여기 있나 싶었다.’
내미슈는 우연히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다 기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갈타에게 큰 망신을 주기 위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센타울 차원이 이번 기회에 아갈타를 누르려고 하는구나?
‘흥미진진하네.’
분명 첫수는 내가 놓았지만 그다음 수, 또 그다음 수는 저절로 놓인다.
내가 풍덩 빠뜨린 돌덩이가 큰 파문을 만들고 그 파문이 점점 더 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
아갈타. 그리고 아갈타를 탐탁지 않아 하는 차원 문명들. 밀수꾼 네트워크 내에서의 대리전, 센타울… 점점 더 혼란에 혼란을 더해 가는 이 정국은.
‘아주 만족스럽다.’
내가 바라던 것 그 이상이었다.
나는 단검과 공고문에 다시 시선을 던졌다.
공고문 아래로 풍덩주에 빠진 사람들이 흥청망청 붙이는 명함이 보였다.
‘침묵의 해적단!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시오.’라는 의미에서 호기롭게 붙인 명함들. 내게는 그게 다 퍼즐 조각으로 보였다. 지구가 자주 자존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완성해야 하는 그 퍼즐을 이루는 무수한 조각들.
그게 벌써 저렇게 많이 모이다니…….
그래.
이젠 그만 인정할 때가 되었다.
‘최고였어, 지금까진.’
지난번에 놓은 수는 내가 기대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이젠 그걸 뒤로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때가 되었다.
예상보다 빠르지만 나는 준비되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
우릴 아갈타에 팔아넘긴 밀수꾼 네트워크의 일부 큰손들을 완전히 축출하는 것.
문득 내 옆에 서 있는 크르으랑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크르으랑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다, 이 녀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그래. 전쟁에 임하는 눈빛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미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나와 크르으랑은 동시에 명령을 내렸다.
- 전군 전투태세로. 즉시 출함 준비를 마친다.
- 화랑대, 임전 태세로.
쿵쿵쿵!
전쟁을 앞두면 심장이 미리 알고 그 박동을 달리한다.
타키넷에서 침묵의 해적단을 기리는 축제가 깊어지고 있을 때, 정작 우리는 축제를 끝내고 출정을 준비했다.
오늘 아갈타는 에르하무스 준장의 개죽음과 함께 또 하나의 나쁜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