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73화 (173/212)

16.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

쿠르르르르-

아갈타 방위성은 지금 흔들리고 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총 원수 아케르가 뿜어내는 분노가 거대한 방위성 전체를 흔들었다.

[이, 무슨……! 이 무슨!]

불명예不名譽. 그 한 마디가 아케르의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 단어로는 부족하다는 실감 때문이었다.

보통 아갈타에서 ‘불명예’라는 단어는 가장 끔찍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불명예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하지만 이번에 소시민에게 당한 치욕은 고작 ‘불명예’ 정도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최상급의 치욕을 의미하는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다.

아케르는 입술만 퍼들퍼들 떨며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자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1억 타키온.

다른 누구도 아닌 아갈타의 총 원수에게 현상금이 걸렸다는 게.

그게 고작 1억이라는 게.

그 액수가 아갈타가 침묵의 해적단 두목에게 내건 액수와 동일하다는 게……!

그 모든 사실 하나하나가 참을 수 없는 수치요, 모욕이요, 분노였다.

하지만 진짜 큰 문제는 이게 그냥 기분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침묵의 해적단이… 우리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공을 단숨에 나락으로 떨어뜨렸구나.]

세상의 이치는 다 같았다.

사회에 처음 나간 신입에겐 그의 스펙이 얼마나 대단하든 ‘이 일에는 경험이 전혀 없으니까…’, ‘배운다 생각하고…’라는 식의 연봉 후려치기가 들어가듯이.

기존 세력이란 언제나 신흥 세력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아갈타는 차원 문명으로 인정받기 위해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자원과 노력을 투여해야만 했다.

들개처럼 달려들던 해적들이 아갈타라는 이름에 겁을 먹고 정규군 대우를 하게 만드는 데까지 수십 년이 걸렸고, 살 때는 가격을 후려치고 팔 때는 바가지를 뒤집어씌우는 닳고 닳은 차원 장돌뱅이들에게 역으로 가격을 후려치고 외상 거래를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또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으며, 깐깐하게 굴며 따돌리고 사소한 일에까지 불이익을 주던 차원 문명들과 대등한 거래를 하기까지는 그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아갈타는 다른 차원 문명들과 대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공을 들이고 또 들이고 있던 ‘아갈타’라는 이미지가 침묵의 해적단이 벌인 희극 한 편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케르는 노여움으로 얼굴을 떨었다.

[이제 저 무법 지대의 해적들과 상인들이 우리 아갈타의 이름을 얼마나 우습게 여길 것이냐! 저 차원 문명의 잡것들이 이걸 빌미로 얼마나 딴지를 걸고 넘어지겠는가!]

분위기. 그건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한 번 걸릴 시비를 두 번 걸리고, 한 번 당할 무시와 협잡을 세 번씩 당하면 이 살벌한 차원 문명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란 한없이 팍팍해진다.

빠드드득!

그렇기에 아케르는 이를 갈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모든 아갈타 사회에 똑똑히 알려라. 그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물러서지 말아라. 혹시 한 대를 맞거든 두 대 세 대로 갚고, 두 대를 맞으면 죽을 때까지 물어뜯어라. 이쪽이 죽든 저쪽이 죽든 세 번째는 없게 만들어라.]

여기서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 세상은 두 걸음, 아니 세 걸음, 다섯 걸음을 밀치며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당장 그 빌어먹을 수배서를 뜯어서 불태우고, 그 단검은 그 자리에서 짓이겨 고철로 만들어라.]

아케르의 입에서는 뚝뚝 끊기는 명령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이 수모를 갚아야 한다. 차원 병원을 습격한 일 때문에 병력을 동원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우회적으로라도 갚아! 침묵의 해적단과 적대하는 모든 세력을 무제한 지원해서라도! 놈들을 무너뜨려라.]

아케르의 분노는 방위성을 넘어 아갈타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기억해라! 결국 세상은 패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를 비웃는 모든 자를 패배시켜라! 적의 패배는 우리의 승리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절대 잊지 마라! 그것만이 이 유례없는 몰명예沒名譽를 극복할 방안임을!]

아갈타의 모든 구성원은 심장에 손을 올리고 그 추상 같은 명을 받았다.

* * *

나는 가슴을 쥐고 생각했다.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들뜨지 말자, 시민아. 들뜨지 마.’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 쏟아지는 박수갈채는 그저 외줄 타기 묘기로 받아 내는 찬사와 같았다. 바로 다음 순간 머리부터 땅으로 고꾸라진다면 박수를 치던 이들은 그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겠지.

‘아갈타 놈들은 이대로 물러설 놈들이 아니야. 지독한 놈들이라는 걸 잘 알잖아?’

보통 놈들이라면 지금처럼 여론이 나쁠 때는 움직임을 멈추고 눈치만 살필 것이다. 하지만 아갈타는 그런 놈들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눈치 보는 척하다가 어느 순간 더더욱 악독한 암계와 더 대담한 악행으로 이전의 악명 따위는 새 악명으로 덮어서 씻을 놈들이 바로 아갈타였다.

그러니 지금은 냉정하게 대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틀림없이 아갈타는 밀수 네트워크의 배신자들을 지원한다. 그러니까… 그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내가 어필해야 돼.’

그래서 나는 전쟁을 앞둔 와중에도 새로운 밀수 거래를 성사하려 다른 차원에 나온 것이다.

분명 어렵겠지만 성공만 한다면 분명 더 많은 큰손이 나를 믿고 나와 함께 배신자들과 전쟁을 치를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전쟁은 보급으로 하는 것.

차원강습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수많은 자원과 기술들은 쓰기에 따라서는 고스란히 다른 용도의 전쟁 물자로도 사용될 수 있다. 그러니 새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면 맡은 임무를 완수하는 신뢰감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물론이고, 전쟁에 필요한 보급까지 튼튼히 하는 믿음직한 모습 역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난해하기 짝이 없는… 없어야 했던 임무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혹시 밀수 계약을…….”

[호, 혹시 침묵의 해적단?]

몇 마디 하기도 전에 상대가 나를 먼저 알아보았다. 요즘 공격적으로 밀수 계약을 맺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

침묵의 해적단은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법이었다.

원래라면 예의 바르게 계약 의사를 타진하려 했던 나는 얼른 침묵의 해적단에 걸맞은 콘셉트로 갈아탄다.

“…….”

끄덕.

[오오오오오! 영광입니다! 이번 아갈타 놈들 엉덩이를 차 준 건 정말 멋있었습니다! 계약? 계약이요? 영광입니다! 수량은 얼마나 맞추면 되겠습니까?]

분위기라는 것.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생생하게 느껴지는 숨결과도 같은 것!

오, 세상이란 본디 이렇게 온화하고 말랑한 것이었던가?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계약을 성사하기 위해 그렇게 발품을 팔고 고민을 해결해 줘야 했던 거래처들이 지금은 이름을 대기만 해도 계약을 맺는다.

[내 평소에 침묵의 해적단을 흠모해 왔소! 계약합시다!]

내가 손을 착! 하고 들면 모두가 나를 우러르며 오옷! 저 손끝의 각도를 보아라! 하며 찬양이라도 할 것만 같은 기세였다.

[침묵의 해적단… 드디어 나를 찾아왔군… 흐흐. 그래, 같이 세상을 뒤집어 보자고… 바로 계약을 진행하지… 크흐흐흐]

내가 옆에 슬쩍 앉기만 해도 두근반세근반하며 결혼까지 꿈꿀 것만 같은 표정들이었다!

이것은.

이것은 마치!

‘아니, 아니 아니지. 정신 차려라, 시민아!’

나는 가슴을 쥐고 생각했다.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들뜨면 안 돼. 들뜨지 마! 절대!’

그렇게 반나절 만에 정확히 마흔일곱 군데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고 지구로 돌아와 보면 반나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건물이 용산구 상공에 둥실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르물랑은 항상 기쁘게 소식을 전해 왔다.

“하하! 어때? 순혼 정제소가 이제 30퍼센트는 완공됐어!”

“…오늘 아침에는 25퍼센트라며. 반나절 사이에 5퍼센트나 더?”

그러면 무르물랑이 물방울을 폭죽처럼 튕기면서 말한다.

“아니! 어느 집 복덩이가 젤 중요한 코어도 빵빵하게 사 왔지, 매일매일 구하기 어려운 소재며 기술이며 밀수망에 새로 추가하지! 그러는데 이걸 못 하는 게 이상한 것 아니겠어? 음하하하!”

처음에는 첫 삽을 언제 뜨나 싶던 순혼 정제소였는데… 벌써 기초가 완성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것도 그렇고, 사실 요즘 장인들이 순혼 정제소 쪽으로 대거 지원을 해 와. 그래서 속도가 더 빨라진 것도 있지.”

“장인들이? 처음에는 순혼 정제소 반대하지 않았어?”

“그게… 영능학 교육 쪽은 아틀라스 클럽에서 잘 처리하고 있는 데다가 요즘 네 덕분에 월은장도를 미친 듯이 찍어내고 있거든. 그 단순 반복 작업에 질려 버린 장인들이 순혼 정제소 쪽을 선호하게 된 거지.”

“음? 그러면 월은장도 생산은?”

“말했잖아, 아틀라스 클럽이 교육을 참 잘하고 있다고. 덕분에 단순반복 작업에 투입할 정도의 소양을 가진 노동자들이 벌써 나오기 시작했어. 그래서 장인들도 여유가 생긴 거지.”

무르물랑은 온몸에 기포를 부글부글 만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아니 근데, 내가 지구인들의 피지컬이랑 재능이 미친 수준인 줄은 진작 알았지만… 이번엔 진짜 놀랐어. 특히 그 아틀라스 클럽이라는 애들 무서울 지경이더라.”

회귀한 영웅들의 영능학 흡수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며 무르물랑은 물결을 일렁거렸다.

사실 그건 당연했다.

하늘이 내린 재능. 천재天才의 발현은 제대로 된 배움에서 시작하는 법.

정규교육을 한 번도 못 받았어도 수학의 천재는 단 1년, 단 몇 달 만의 제대로 된 가르침만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할 증명과 풀이를 쏟아 내는 법이었다.

아틀라스 클럽의 회귀자들 역시 그저 제대로 된 영능학 교육이 필요했을 뿐이다.

‘괜히 내가 전생에서부터 그들에게 타키넷과 영능학을 알려 주고 싶어서 몸이 달았던 게 아니라고.’

그런 회귀자들이 앞에서 끌어 준 덕분에 지구의 고질적인 문제인 ‘인력 부족’이 해소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와… 정말 일이 잘 풀리네?’

두근. 두근.

모든 게 기대 이상이었다. 이 속도라면… 어쩌면 이 기세라면……!

‘아니, 아니 아니지, 시민아.’

나는 얼른 가슴을 쥐고 생각했다.

‘아직 0.1퍼센트야, 시민아.’

벌써 들뜨면 안 된다. 가야 할 길은 멀고, 그 앞엔 치명적인 위험들이 매복해 있다. 항상 생각해야 한다, 이제 겨우 0.1퍼센트라는 걸.

‘근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제 0.1퍼센트는 넘지 않나?’

그러고 보니… 이제는 목표까지 영 점 삼… 아니, 0.5퍼센트는 넘었을 것 같은데? 벌써?! 이건 혹시……?!

‘아냐! 정신 차려, 시민아!’

아직 1퍼센트도 이루지 못한 주제에 마음을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당장 아갈타가 지원하는 밀수 네트워크의 배신자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될지 견적도 안 나왔다.

최악의 상황에는 화랑단과 크르으랑의 군대만 데리고 그 많은 배신자 전부를 상대해야 될 수도 있는 것.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헤헤거리며 웃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휘오의 가지가 울었다, 불길하게.

- 아, 들리나? 크르으랑이다.

크르으랑이 타키넷의 소식을 전했다.

- 아갈타가 그 주점에 나타났다. 네가 붙여 둔 현상금 공고문을 떼어 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아, 올 게 왔구나.

아몬이 심혈을 기울여 인챈트 한 도난 방지 주문이 걸려 있는 만큼 어중이떠중이들은 건드리지도 못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아갈타가 마음을 먹고 뽑아내려고 하면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겠지. 역시 아갈타 놈들… 몸을 사리지 않는다. 이걸 뜯어내는 건 그저 경고일 뿐, 이제부터 엄청난 반격을 개시할 게 분명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 그런데…….

크르으랑의 목소리가 떨렸다.

긴장했나?

하지만 그다음에 터져 나온 건 호탕한 웃음이었다.

- 크하하하! 놈들 물먹을 것 같다! 거기 있던 구경꾼들은 물론이고 현상금 사냥꾼들까지 나서서 왜 우리 의뢰서 뜯어 가냐고 막아서고 있어! 크하하하! 아갈타 놈들 죄다 얻어터지게 생겼는데? 인마! 너도 빨리 와서 구경해!

어?

뭐라고?

- 우리한테 얻어터진 놈들까지 죄다 우리 편을 들고 있다고! 분위기가 완전 뒤집혔어! 크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생각보다 우리 편이 많다! 엄청 많아!

아.

들뜨면 안 되는데.

나는 얼른 표정을 굳히고 입꼬리를 강제로 내리눌렀다.

고작 타키넷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일 뿐이다.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지.

그런데.

히죽.

어우씨… 입꼬리가 자꾸 탈주를 한다.

“헤… 금방 갈게!”

아오… 목소리가 왜 이렇게 명랑하게 나오지?

- 얼른 와! 크큭.

호랑이 놈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에 뚜렷한 웃음기가 담겨 있다.

아…….

곤란하다, 곤란해.

히죽.

케흠!

아무튼, 현장의 분위기를 보고 직접 파악해야 할 것 같다. 우리 편이 얼마나 많은지, 그중에 진짜 우리와 같이 싸워 줄 전사들은 몇이나 될지.

부우웅~!

기분 탓인가?

휘오가 열어 주는 게이트도 오늘따라 어쩐지 더 경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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