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69화 (169/212)

12. 시도는 좋았다

상식을 뛰어넘는 무언가는 언제나 격변을 가져오는 법.

소시민의 일 처리에 밀수업계를 주무르던 큰손들은 계산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질주하는 소시민의 등에 올라타고 싶어 했다.

[그릇이 달라. 우리 네트워크 수준에서 담을 수 있는 자가 아니야. 무조건 그 뒤를 따라야 돼.]

[난… 그와 맞설 자신이 없다.]

[올라타야지! 무조건 상승해! 하늘 뚫는다니까? 다음 시대는 침묵의 해적단이야!]

하지만 그들이 내뿜는 에너지는 아직은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대세가 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 아직은 몇 단계가 더 필요했다. 각 조직의 운명이 달린 일이었다. 하다못해 소시민이랑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사우나까지 으이? 하고 나야 한 배를 타든 말든 이야기가 진전될 것이 아닌가?

반면에 지금 당장 움직이려고 하는 세력도 있었다.

[싹을 잘라야 해요.]

[위험한 놈이오.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자가 아니오. 먹히기 전에 먹어야지.]

[벌써 머저리 같은 놈들은 침묵의 해적단 휘하로 들어가는 걸 고려하고 있다고 하더군.]

[별로 어렵지도 않아. 아갈타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으니 슬쩍 정보만 주면 우린 손도 안 더럽히고 해치울 수 있다고. 이걸 안 하는 건 머저리 짓이지.]

[현상금이 1억 타키온이나 되지 않습니까?]

이들의 결정과 행동은 빨랐다. 원래 미래의 수익 추구보다는 당면한 위협을 피하는 행동이 더 재빠른 법이었으니까. 심지어 쉬운 수단과 좋은 대가까지 마련되어 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다음 임무가 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밀수꾼 네트워크의 일부 큰손들은 그렇게 뜻을 모으고 음산하게 웃었다.

* * *

다음 임무가 떨어졌다.

[밀수로를 안정시켜 주십시오]

당연한 수순이었다.

새로운 밀수망을 뚫는 건 단순히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차원이라는 것은 무한하게 많고, 창조신의 꿈이라는 이상한 가능성 속에는 복잡한 길과 은신처가 끝도 없이 생겨났다. 그렇기에 단속을 피해 밀수가 가능했던 것이지만… 동시에 그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불법적인 길목을 다니는 건 밀수꾼만이 아니었으니까.

“밀수로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안전한 루트를 확보하라? 그거야 우리 주특기지.”

[전투 임무인 만큼 임무 달성금 1억 타키온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부상자가 발생 시 저희가 책임지고 최고의 치료를 위한 비용과 절차를 밟아 드리겠습니다.]

보물이 움직이는 자리에는 도적이 있는 법.

새로운 밀수망을 자리잡게 하기 위해선 제대로 된 청소가 한번 필요했다.

지원도 빠방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크르으랑과 소시민의 함대가 출함했다.

기함은 무려 1억 타키온을 들여 인수하고 개조한 ‘유신호’였고, 호위선은 전에 쓰던 기파랑호다.

그사이 화랑단은 아틀라스 클럽 출신을 받아들여 3기를 모집해서 총 인원이 1,200명으로 늘었다.

크르으랑 역시 소시민을 따라다니며 떡고물을 많이 주워 먹어서 종래에 3척이었던 함대의 규모가 5척으로 늘어났다.

본래에도 정규군과 당당히 맞서는 전력이었던 그들이 한층 더 전력 상승을 해냈으니… 사실 인근의 해적들 사이에서는 감히 비견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침묵의 해적단이 나타났다는 소식만 들어도 꽁지를 말고 도망쳐야 했다. 원래는 그래야 옳았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흐.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일 줄은 몰랐군.]

[뭐, 상대가 상대니까. 하지만 막상 모여 보니 정말 굉장하군. 좀 불쌍하네, 침묵의 해적단.]

일대를 네 등분 해서 다투고 있던 대형 해적단의 두목 넷이 연합을 결성한 것이다.

[침묵의 해적단… 흐, 건방진 놈들. 영원히 침묵시켜 주마…….]

[그 달빛 강기를 쓴다는 호랑이 두목은 내 몫이다.]

[엥? 이길 수 있겠냐? 달빛 강기인데?]

[시끄럽다. 내 그림자 강기에는 등급이 없다. 다 이길 수 있어.]

일렁일렁.

새하얀 백골이 훤하게 드러난 해적 두목이 성검을 치켜들자 음산한 그림자 형태의 강기가 칼날을 타고 일렁거렸다. 다른 두목들이 감탄했다.

[역시… 죽음 해적단의 데쓰…….]

[하, 저 빌어먹을 강기에 당한 내 부하가 몇이었더라? 하지만 오늘은 반갑군그래?]

그리고 그렇게 호탕한 해적단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역시 호걸분들이시군요. 저희는 여러분만 믿고 가겠습니다. 자, 제가 술 한 잔씩 올리겠습니다.]

[크하하하! 그래요. 거기서 구경하다가 약속한 잔금만 확실히 치루시라고! 으하하!]

살짝 잿빛이 도는 피부색. 아갈타의 정보원은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연습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해적 두목들에게 술을 돌렸다.

그렇게 먹구름과도 같은 전운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 * *

쏟아지던 포화가 그치고 하늘이 다시 맑아졌다.

[뭐야, 이 허접한 새끼는? 왜 딴 놈들 다 피하고 나한테 달려든 거냐. 내가 우스워 보이냐? 앙?!]

콱! 콰직!

크르으랑의 큼지막한 주먹이 새하얀 백골에 연달아 틀어박힌다.

[컥! 큭! 아, 아닙니다! 제발 컥! 자비를… 으컥!]

[다시 말해 봐. 죽음 해적단의 데쓰? 뭐? 그림자 강기? 미친 놈이 어디서 변형 별빛 강기를 가지고 와서는 앵겨, 앵기기를……!]

콱! 콰직! 콱! 콱! 쩍!

[으갸아아아아아!]

[아, 깨졌네?]

크르으랑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두개골에 금이 쩍 간 데쓰를 옆에다가 휙 던져 버렸다. 데쓰는 그러고도 죽지 않고 버르적거리며 크르으랑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해적들은 다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적은 아무리 봐도 아갈타의 정예로 보이는 일단의 병력뿐.

크르으랑은 코웃음을 쳤다.

[시도는 좋았어, 시도만. 함선으로 화력전 하지 않고 우리가 차원 하나에 정박한 사이에 물량으로 백병전을 유도한 것도 좋았다고. 하지만 우리는 과소평가하고 쟤네는 과대평가한 거, 그게 너희 패인이지.]

소시민이 그 말을 받았다.

“해적으로 우리 발목을 잡고 본대를 끌고 온다는 계획도 나쁘진 않았지. 이런 작전이 아니면 내가 잡힐 리 없으니까.”

소시민의 [만상공감]은 창조신의 꿈결 속에서는 현존하는 그 어떤 차원 탐적 시스템보다도 뛰어난 감지 범위와 능력을 자랑했다. 무턱대고 뒤를 쫓아서는 절대 소시민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럼 뭐 해, 발목을 못 잡는데. 어쩌냐. 지금 달려오고 있다는 본대, 너희 시체만 보겠네?]

타키넷 상위 시장에서도 악명을 떨치는 전설적인 해적단들이라면 모를까, 고작 이런 촌구석에서 어깨 펴고 다니는 해적들이 소시민과 크르으랑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계획은 좋았지만 소시민과 크르으랑의 전력이 그사이에 훨씬 더 성장했음을 알지 못한 게 아갈타의 패인이었다.

부상자는 있어도 전사자는 하나 없는 깔끔한 승리.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최소한 너희 발목은 잡아 줄 줄 알았는데… 뭐, 이런 쓰레기들을 믿은 내 무능력이 문제겠지…….]

아갈타의 정보원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래. 문제 알았으면 그만 죽자.”

소시민이 그의 목을 치려는 찰나.

[그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아갈타의 정보원은 되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소시민에게 덥석 달려들었다. 그의 몸이 빠르게 팽창하더니 0.01초도 지나기 전에 빵! 하고 터져 버렸다. 그를 향해 칼을 내리치던 소시민을 향해 피와 살점들이 쏟아졌다.

소시민은 기민하게 아루카의 날개를 휘둘러 피를 쳐 내고 몸을 뒤로 빼냈지만, 끝내 피 한 방울이 어깨에 닿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빨갛고 진득한 것 한 점이 방어구를 녹이고 살에 닿았다.

* * *

“윽! 더러워…….”

처음에는 더럽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에 찾아온 것은 기묘한 열감이었다.

“…뜨겁네?”

핏물이 방어구를 녹이고 살갗을 파고들었다. 확인해 보니 붉은 반점 같은 게 어깨에 생겨났다가 스르르 사라진다.

[빌어먹을… 고작 한 방울이라니…….]

옆에서 지켜보던 정보원의 부하 놈이 나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다가.

콰직!

크르으랑의 도끼에 머리가 쪼개져서 넘어간다.

크르으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겠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문제없어.”

[…널 믿는다만, 그래도 일단 뭔지는 내가 알아봐 놓을게. 아무래도 저주 같은데…….]

“괜찮대도.”

[만상공감]이 있는 이상 그 무엇도 내 통제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도.

아무튼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고 할 만큼 하기도 했으니, 전장은 이쯤에서 정리하기로 했다. 나는 이성계의 활을 꺼내 들었다.

남은 적이라고 해 봤자 고작 서른 명. 이 정도는 이제 화살 한 개로도 처리할 수 있다.

“다들 비켜!”

미리 경고를 해 주고 화랑단과 크르으랑의 수하들이 빠지는 틈을 노려 시위를 쭉 당겼다가 놓는다.

[성 위에 일흔 살을 쏘시어 일흔의 낯이 맞으매 개가로 돌아오시니].

[아기살 하나에 섬 도적이 놀라니…….]

시커먼 영력이 영험한 글자들을 허공에 아로새기고- 쏘아진 화살은 벼락처럼 궤도를 틀며 사방을 휩쓴다. 살이 닿지 않아도 그 영력의 폭풍만으로 대기가 날아가고 영혼이 아스라진다.

섬 도적 같은 아갈타 놈들은 해일에 삼켜진 것처럼 시체 한 줌 남기지 못하고 스러졌다.

푸른 하늘 아래로 적막이 남고, 곧 불어온 시원한 바람에 적막마저 씻겨 나갔다.

“끝! 전장 정리!”

다들 흩어져서 전리품을 찾고, 그사이에 나는 사로잡은 해적 두목들 앞에 섰다. 놈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만상공감]을 최대로 발휘한다. 내가 찾는 건 우리를 가장 두려워하는 놈.

나는 손가락을 들어 한 놈을 찍었다.

[이놈?]

크르으랑은 내가 손가락을 들기 무섭게 도끼를 휘둘러 그놈의 머리를 쪼갰다.

털썩.

쓰러지는 돼지 머리의 이계인.

안타까워라… 나는 혀를 차고 말았다.

“아, 그놈 말고 옆의 놈인데.”

[아, 미안.]

콰직!

털썩.

돼지 머리 옆에 있던, 기린처럼 목이 긴 놈도 쪼개져 죽었다. 목이 길든 목이 짧든 똑같이 쪼개는 신들린 도끼질.

덜덜덜.

말도 없이 두 놈을 죽였더니 유독 몸을 떠는 녀석이 있었다. 머리에 금이 간 새하얀 백골 녀석이다. 반면에 인간형의 여자 두목은 눈을 파랗게 뜨고 우리를 노려보길래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크르으랑이 처리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백골.

나는 쭈그려 앉아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눈을 마주치고 [만상공감]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이 녀석이 맞다.

덜덜덜더덜.

“그렇게 무서워?”

내가 묻자 죽음 해적단 두목 데쓰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대답을 하고 싶지만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는지 극, 그극… 하면서 몸을 떤다. 아까 크르으랑한테 좀 많이 맞는 것 같더라니. 쯧쯧.

덕분에 일이 편하게 되었다.

‘이 정도로 두려워한다면 다른 마음을 먹는 건 쉽지 않겠네.’

[만상공감]으로 전해지는 감각은 세포 차원에 새겨진 극한의 공포.

아주 만족스러웠다.

나는 말했다.

“여기 이 밀수로, 잘 지키면 목숨은 살려 줄게. 우리가 맨날 여기 올 수 없으니까 여기에 다른 해적들 못 들어오게 잘 지키라고. 너, 나름 별빛 강기도 쓰는 엘리트 해적이잖아. 그치?”

[네, 네네… 알겠습니다. 지, 지키겠습니다.]

덜덜 떨며 대답하는 데쓰.

“우리 다시 안 보려면 잘하자?”

턱턱.

나는 녀석의 매끈매끈한 두개골을 두드려 주고 일어섰다.

그렇게 전장 정리까지 다 끝냈을 때, 내 오른팔 팔꿈치에서 삐쭉!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새빨갛고 여리여리한 나뭇가지 하나가 머리를 내밀었다.

따갑고 가렵다.

[이게 아까 그 저주 같은데?]

크르으랑이 부하들을 불러 몇 가지를 탐문하더니 금세 그 정체를 밝혀 냈다.

저주, ‘가시꽃’.

숙주의 살과 피와 영력을 먹고 숙주가 죽을 때까지 자라는 지독한 저주였다. 숨어든 뿌리를 찾기 어려워서 해주에도 많은 시간이 걸리는 저주.

[그래도… 한 방울만 튀어서 이 경우엔 그리 어렵지는 않겠어. 초기에 잡아야 쉬우니… 지금 당장 큰손들한테 병원을 부탁하자고.]

“그래. 간만에 좀 쉬자. 부상자들도 있으니 다 같이 가자.”

연락을 넣으니 얼마 안 있어 큰손들의 심부름꾼이 달려왔다. 그는 어쩐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해적들이 연합을 형성할 줄이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주를 입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최고급 차원 병원으로 즉시 이송해 드리겠습니다.]

큰손들은 일 처리가 빠르다.

심부름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우웅-

눈앞으로 게이트가 열렸다.

지이이이잉-

오, 그런데 이런 건 난생처음 봤다. 세상에…….

일단 게이트가 투명했다. 그 대신 게이트의 테두리에 장식이 수놓이기 시작했다. 마법진처럼 온갖 기하학적이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문양이 하얗고 까맣게 무채색 계열로 그려지고 황금빛이 포인트로 얇은 선을 둘렀다.

나는 [만상공감]으로 알 수 있었다.

‘저 테두리, 정말 아무 기능도 없다.’

정말 순수한 장식일 뿐이다. 게이트 장식.

굳이 막대한 비용을 더해서 차원 간 게이트에 치장을 한다?

누가 이런 아까운 짓을 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선명한 증거였다.

‘정말 최고급이구나?’

차원 게이트에까지 돈을 들이는 정신머리 없는 병원.

한 방울의 저주 덕분에 그런 곳에 발을 다 내디뎌 보게 되었다.

하루 입원에 25만 타키온이나 한다는 최고급 차원 병원, ‘아리드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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