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68화 (168/212)

11. 만 개 중의 일곱 개

이곳의 코어는 완벽했다.

1,500넘버링 코어의 품질로서는 그 한계에 닿아 있다고 확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달리 말하면 ‘한 끗 차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1,500넘버링 수준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이게 RPG 게임이라면 16레벨의 요구 경험치가 100,000exp.인데 99,999exp.에 머물러 있는 상태.

그래서 준비했다.

내가 80만 타키온을 투자해서 혼철로 만들어 온 이 물건은 그 ‘1exp.’를 채워 주고도 남을 만한 물건.

하지만 다시 찾은 공장에서 공장장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가쇼! 아까 공장장님이 하신 말씀 못 들었남?]

“아니, 공장장님도 이걸 보시면…….”

[보시고 자시고 간에! 꺼지쇼! 공장장님이 꺼지라 했으면 꺼지는 거야!]

정문에서 마주친 장인 하나가 길을 막아섰다. 커다란 머리를 가진 그가 그 커다란 얼굴에 주름을 자글자글 만들면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자기 직분이 수문장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까지?

답답해 죽을 노릇이었지만 이 우직함의 화신 같은 인간에겐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허, 참… 그 공장장에 그 기술자네.’

우직하고 충직하다. 잔꾀 없이 정면 승부를 추구한다. 그건 엄청난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벽에 막힌 것이겠지.’

해서 내가 직접 해결책을 가지고 왔건만! 공장장을 만날 수가 없었다.

[아, 쫌! 가시라고! 우리 공장장님 요즘 안 그래도 얼마나 머리 빠지게 고민 중인 줄 아쇼? 1,600번대의 그 빌어먹을 벽을 깨부수려고 정말 애쓰시는 중이니까! 쓰잘데기없는 소리로 정신 시끄럽게 하지 말고 좀 꺼지시라고!]

시끄러운 건 본인 아닌가… 하는 지극히 당연한 트집거리가 떠올랐지만, 다행히 그걸 들먹이며 말싸움을 벌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목청이 큰 기술자 덕분이었다.

저 멀리에서부터 공장장이 온다.

화가 잔뜩 난 기색이었다. 전신의 살덩이에서 혈관이 일어나 출렁출렁, 꿈틀꿈틀 악몽 같은 리듬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아까 뭐라 그랬더라? 차원 경찰을 부른다고 그랬지?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직접 나를 파묻을 기세였다.

[어엇? 공장장님?]

[어, 수고했어. 이 새끼들은 나한테 맡기고 자네는 가서 일 봐.]

[옙!]

거대한 살덩이의 공장장은 내 앞에 서서 날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스르르-

그의 전신에 예고도 없이 실금이 그어졌다. 출렁이던 살덩이 사이로 생겨난 빗금들이 일제히 벌어지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수천 개의 눈이 서서히 떠진다. 아직은 흐린 초점으로 나를 향해 움직이는 수천 개의 눈동자…….

아마도 지독한 저주 계열의 능력. 저 눈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 역시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눈앞에 내가 만들어 온 상품을 불쑥 내밀었다.

둥근 구형에 속이 비어 있다. 어두워 보이지만 속이 비치고, 빛과 같기도 하고 밤바다 같기도 한 무언가가 구의 표면을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혼철로 가공하고 벼락 치기법으로 마감한 ‘혼철 코어 케이스’.

[…어?]

공장장이 눈을 깜빡였다. 살벌한 기세로 뜨인 수천 개의 눈동자도 내가 아닌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코어 케이스로 향한다. 뒤룩뒤룩 굴러가는 눈동자에 진한 호기심과 감탄과 충격이 번갈아 깃든다.

‘미치겠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공장의 코어에서 유일하게 느낀 아쉬움이 바로 ‘케이스’였다.

내부 부품은 이미 1,500대를 뛰어넘을 정도로 좋은 재료들을 가장 잘 호환되도록 끝장 나게 조립한 상태. 그런데 왜 1,600넘버링의 코어가 되지 못했던 걸까?

그게 바로 케이스 탓이다.

본질에 충실하고 본질을 키우고자 했던 공장장은 외관을 소홀히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

‘내부는 이미 날아오를 준비를 마쳤는데 껍데기의 격이 그걸 따라가지 못하면 표출될 것도 표출이 안되는 거지.’

물을 아무리 많이 부어 봤자 컵 자체의 크기를 키우지 못한다면 결국 담기는 물의 양은 똑같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았다.

‘그렇지만 이건 단순히 좋은 케이스 그 이상이다.’

사실 기존의 케이스도 나쁜 건 아니었다. 무난했다.

다만 코어는 인간으로 따지자면 심장이자 뇌에 해당하는 핵심 중의 핵심. 만약 그런 곳의 케이스를 비어 있고 신령하며 어둡지 않은 명덕철로 만들었다면 이곳의 코어는 이미 딱 부족했던 1exp.를 얻고 1,600번대 넘버링 생산에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공장장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잔꾀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는 기어코 내부 구조의 혁신을 통해 1,600넘버링을 달성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명덕철도 아닌 혼철 케이스이다.

명덕철이 가진 모든 장점을 가졌으면서 순혼純魂이 섞여 들어가 스스로 혼을 가졌다. 아우라가 깃든 물건이 특별한 물건이 되듯이 혼을 가진 혼철 케이스로 코어를 마감하는 순간 그것은 특별한 코어가 된다. 단순히 1,600넘버링이 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1,600넘버링 중에서도 특별한 명품이 되는 것.

다만 혼철의 유일한 단점이 내구성과 가격이었는데, 내구성은 무려 이중의 벼락 코팅으로 해결되었고 가격은… 이 우직한 공장장 앞에선 단점이 아니다.

그저 이미 좋은 재료로 꽉꽉 찬 1,500번대의 코어에 최후의 깊은 맛을 더하는 비장의 소스일 뿐.

공장장이 그걸 느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단순한 케이스가 아니다. 그의 상상력의 한계를 훌쩍 넓혀 주는 깨달음 그 자체와도 같았다.

구르르르르.

공장장의 살덩이가 흔들렸다. 수천 개의 눈동자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린다.

그 눈동자들이 케이스를 봤다가 나를 봤다가 공장 뒤를 봤다가 혼란스럽게 오간다.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 그에게 케이스를 건네주었다.

“뭐, 한번 조립해 보십쇼. 어떻게 될지 저도 궁금하네요.”

우리는 함께 공장으로 들어가 모든 부품을 케이스에 담는 마감 작업을 함께했다.

[오오, 오오오! 오우! 후우! 후우욱!]

그리고 나는 천 개가 넘는 눈깔이 일시에 눈물을 흘리는 꼴을 볼 수 있었다.

뭐, 역시 물건 좀 볼 줄 아시네, 우리 코어 공장장님.

* * *

[전부 다 팔게.]

“뭐, 그러죠. 하나당 500타키온만 받겠습니다.”

[좋아.]

1만 개의 케이스를 모두 넘기고 500만 타키온을 수령했다. 이거 만드는 비용이 80만 타키온이었으니… 10배도 안 되는 가격에 판 셈이다.

‘양심적이었네.’

10배가 안 되다니… 너무 양심적이었나 싶지만, 사실 이건 그저 메인 메뉴를 먹기 전의 전채 요리 같은 거니까 적당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자, 그럼 이제 계약으로 넘어가죠.”

[그러지.]

오늘의 메인 메뉴는 공급계약이었다.

공장장은 꾸준히 많은 양의 혼철 케이스를 제공 받고 싶어 했고, 나는 그 대가로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요구했다.

우리는 상당히 빠른 시간 만에 합의에 이르렀다. 물건을 제공 받고 싶다는 공장장의 의지가 아주 강력했기에 어려울 게 없었다.

<합의 내용>

소시민은 매달 코어 공장장에게 혼철 케이스 40만 개를 판매한다. 그 대가로 공장장은 소시민에게 매달 코어 10만 개를 판매한다. 혼철 케이스 가격은 개당 500타키온, 코어의 가격은 개당 1만 타키온으로 정한다.

합의에 도달한 이후 공장장은 내게 말했다.

[아까는 미안했네. 내가 귀인이 온 줄을 몰랐어. 오늘 자네가 나에게 해 준 건 그냥 좋은 재료를 찾아 준 수준이 아니였어. 덕분에 오래 고민하던 화두의 답을 찾았거든. 내 이건 빚으로 생각하고 있겠네.]

역시… 충직하다. 장사꾼이라면 빚이니 뭐니 그런 말은 안 할 텐데.

나로서는 그저 가슴이 찡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더 할 말이 있었다.

“저기…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여기 이 공급 계약서는 하나로 쓰지 말고 5만 개짜리로 두 개 써 주세요. 아, 그리고 이게 제가 밀수업자다 보니까 이면 계약서도 필요해서… 이면 계약으로다가 이거 하나 또 부탁해요.”

우직한 공장장은 내 개수작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왜 굳이 이런 귀찮은 짓을?’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역시나 우직하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그렇게 공장장과는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당장 좀 필요하다고 부탁했더니 1,500넘버링의 코어 10,000개를 그 자리에서 밀수로 팔아 주는 통 큰 모습도 보였다.

아주 배 터지게 먹은 거래가 그렇게 끝났다.

이 과정을 다 지켜본 크르으랑은 혀를 내둘렀다.

[이걸 이렇게 해결할 줄이야…….]

그러곤 음흉하게 웃었다.

[대박이구만?]

크큭. 그렇지. 대박이지.

[하루 만에 엄청난 소득이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진가?]

하지만 이번엔 잘못 짚었다. 여기까지라니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인데.

내 반응에 크르으랑이 고개를 갸웃한다.

[…다 끝난 거 아닌가? 뭘 시작한다는 거야?]

왜 그래요, 호랑이 아저씨.

“이제 이 계약서 들고 혼철 공장에 가서 재고 싹 처리해 줄 테니까 밀수 계약 맺자고 해야죠.”

혼철 공장에서 필요한 건 재고 처리. 혼철 케이스를 매달 40만 개나 만드니 재고는 얼마든지 처리해 줄 수 있다.

[……!]

“그러고 나면 번개 치기 마감 공장에 가서 수량 늘려 왔으니까 밀수 계약 맺자고 하고요.”

번개 치기 마감 공장에서 원했던 것은 보다 많은 일거리. 마찬가지로 물량이 40만 개면 차고 남는다.

[……!]

“그러면 한 팀 끝나는 거고 그다음 팀 돌아야지.”

[그, 그리고 또, 또 있다고?!]

* * *

[며, 몇 개를 해결했다고요?]

통신을 통해 들어오는 큰손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소시민은 최대한 심드렁하게 단답형으로 짧게 답했다. 침묵의 해적단은 원래 말이 많지 않기로 유명했으니까.

“일곱 개.”

[세, 세상에…….]

[저, 저기, 이권은 얼마나 양보했습니까?]

“…3억어치.”

[아… 적진 않군요.]

[그래도 얻은 것에 비하면…….]

[아, 3억 타키온이라고 해도 무려 일곱 군데를 뚫었다는 게 놀라운 일이지. 거기 사람들이 어디 돈으로 움직일 사람들이었나?]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

소시민이 대답하지 않자 큰손들은 알아서 상황을 유추했다.

‘말로 먹힐 이들이 아니었다.’

‘한 손에는 타키온을, 다른 손에는 칼을 쥐었겠군.’

‘돈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칼을 받을 것이냐. 저 무시무시한 침묵의 해적이 그런 선택을 강요한다면 달리 방법이 없었겠지.’

‘과연… 두려운 이들이다, 침묵의 해적단.’

‘장난칠 생각도 없었지만… 정산만큼은 칼같이 해 주는 편이 좋겠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그들은 바로 정산으로 넘어갔다.

[그, 그렇다면 그 3억 타키온은 어떤 식으로…….]

“계약서.”

[아, 계약서에 적혀 있군요. 침묵의 해적단이 우선 지불하는 형식이었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즉시 3억 타키온을 이체하겠습니다.]

소시민의 계좌에 3억 타키온이 들어왔다.

[그리고… 임무 보상금을 드려야겠군요. 앞으로 드리려고 했던 임무까지 미리 해결했으니 한 번에 정산해서 드리겠습니다. 코어 조립 공장 건이 좀 크고 나머지는 좀 작습니다. 다 합쳐서 보상금이 1억 5천만 타키온입니다.]

다시 소시민의 계좌에 1억 5천만 타키온이 들어왔다.

씰룩. 소시민은 찢어지려는 입꼬리를 애써 누른다.

[아, 그리고 이 계약서들에 이제 저희 명의로 사인을 해야 하는 거죠? 제일 중요한 게 코어 확보인데… 어디 보자. 아, 맞네요. 월간 5만 개에 개당 1만 5천 타키온. 딱 적당하게 잘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대금은 여기 적힌 계좌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계좌는 크르으랑의 계좌였다. 소시민과 맺은 계약에 따라 1만 5천 타키온 중 1만 타키온은 자동으로 코어 공장장에게 가고, 소시민에게 4천, 나머지 1천을 크르으랑이 갖는다. 잠깐 호위를 선 것치고는 지나치게 짭짤한 수익이었지만, 그건 여차할 때 전쟁을 함께 치러 줄 동맹에게 보여 주는 소시민의 성의였다.

소시민이 파악한 크르으랑은 신의를 아는 남자였으니까.

그렇게 정산이 끝났다.

[다음 임무는 정해지는 대로 또 전달드리겠습니다. 이번엔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음에도 지금 같은 활약 부탁드립니다.]

“얼마든지.”

소시민이 짧게 대답하고 통신이 끊겼다. 소시민은 잠시 말이 없이 서 있었다.

툭. 툭.

소시민의 옆에 나란히 서 있던 크르으랑이 꼬리를 슬쩍 움직여서 소시민의 등을 쳤다. 소시민이 크르으랑을 돌아보았다. 소시민의 입가에도 크르으랑의 입가에도 참을 수 없는 진한 웃음이 그려진다.

사실 소시민은 이번 계약을 하면서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를 해결해 주며 2,000만 타키온 정도를 벌었다.

하지만 이권을 내주어서 겨우 계약을 맺었을 거라 생각한 큰손들은 의심 없이 3억을 내주었다. 거기에 보상금까지 더해지니 단숨에 들어온 현금만 4억 5천만 타키온.

소시민은 생각했다.

‘아, 배부르다.’

거기에 초도 물량으로 당장 지금 지구에서 써야 할 코어 1만 개도 챙긴 상태였으니…….

‘배 터지겠다.’

입이 절로 귀에 걸릴 수밖에.

* * *

소식을 알리고 지구로 가는 길.

- 네? 코어가 1만 개나요?

윤희정의 밝은 목소리가 휘오의 가지를 통해 경쾌하게 흘러나왔다.

- 정말? 4억 5천 타키온이나? 심지어 코어 대금을 삥땅 쳐서 꾸준히 매달 2억 타키온씩 들어올 거라고?

무르물랑의 생기발랄한 목소리도 함께 흘러나온다.

- 와… 선배, 임무 일곱 개를 한 번에? 어떻게 그래요?

임무 처리 과정을 전해 들은 서민서가 놀라워하는 목소리도 달콤했다.

하지만.

‘아직 멀었어.’

나는 들뜨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냥 짧고 단 휴식일 뿐이야.’

간절히 바라는 꿈이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 꿈을 통째로 외우는 것.

내 머릿속에는 지구가 자주, 자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A부터 Z까지 모조리 들어 있었다.

그래.

내 머릿속엔 일만 피스의 직소 퍼즐이 있다.

그중에서 이제 겨우 일곱 조각을 맞추었을 뿐이다.

완성률.

0.1퍼센트 미만.

그러니.

눈을 감고 생각한다.

어떤 퍼즐과 어떤 퍼즐이 어울릴지. 어떻게 해야 최대한 많은 퍼즐을 한꺼번에 처리할지.

그리고 또 상상했다.

이 퍼즐들이 다 맞추어지고 나면 대체 어떤 멋진 그림이 드러날지.

두근. 두근.

겁이 나기보단 도리어 가슴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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