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 이상이죠
혹시 간절히 바라는 꿈이 있다면 꼭 기억하시기를.
꿈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은 그 꿈을 통째로 암기하는 것임을.
그래서 난 머릿속에 직소 퍼즐을 만들었다.
신살 병기를 만들고 지구의 자주와 자존을 확립할 때까지의 그 머나먼 과정을.
만 피스쯤 되는 직소 퍼즐처럼 하나하나 세어 머릿속에 통째로 집어넣었다.
그렇게.
아직 그림으로 맞춰지지 않고 그저 흩어져 있는 퍼즐이, 내 머릿속에 있다.
* * *
람시르는 믿음직스러운 친구였다.
그는 밀수 네트워크의 큰손들이 내게 제시한 의뢰를 자신이 개인적으로 조사한 내용까지 덧붙여 전달해 주었다.
[목표는 심플해. 차원강습 시스템을 몰래 생산할 수 있는 밀수 네트워크를 만드는 거야.]
하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차원강습 시스템에 쓰이는 재료는 수백, 수천 가지. 심지어 하나의 원재료를 두고 100차, 200차 가공까지 나아가는 복잡한 밸류체인 중간중간에 차원 문명의 단속마저 존재했다. 그러니 차원강습 시스템을 밀수 네트워크에 포함한다는 이야기는 단속을 피해 완전히 새로운 밸류체인을 짜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건 거의 하나의 문명을 건설하는 것처럼 어렵고 복잡한 일.
[그래서 단번에 차원강습 시스템을 만들어라! 하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아. 차근차근 순서대로 진행할 예정인가 봐. 처음 임무는 우선 여분의 코어를 확보하는 거야. 매달 3만 개 이상. 차원강습 시스템에 적용되는 코어는 특히나 더 예민하게 만들어지니까 꼭 양질의 코어를 확보해야 되지.]
밀수 네트워크의 큰손들과 나의 현재 관계는 물주랑 해결사 같았다. 밀수 네트워크에 편입하기에 적당한 실력과 은밀함을 가진 플레이어들을 큰손들이 찾아 준다. 그를 포섭하기 위한 비용도 큰손들이 마련해 준다. 그러면 내가 가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을 써서든. 그렇게 한 건을 처리할 때마다 큰손들은 나에게 짭짤한 의뢰비를 안겨 준다. 타키온으로 받아도 좋고 원하는 시설이나 자원으로 받아도 좋다.
[이번 의뢰에 성공하면 5,000만 타키온 또는 그에 해당하는 현물이나 시설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하네.]
5,000만. 요즘 하도 억 단위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살다 보니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한 번의 임무로 얻을 수 있는 액수라 생각하면 나로서도 꿀맛 같은 보상이었다.
근데… 그래서 그 큰손들은 이런 임무를 몇 개나 준비해 둔 거지?
[내가 조사한 바로는 당장 준비한 1차 과제가 5개. 그리고 2차 과제는 아직 선정 중이라던데, 그중 10개 정도는 내가 미리 확보했어.]
크으… 그걸 또 확보하다니. 람시르와 친구가 된 게 최근 들어 제일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요즘이었다.
* * *
햇살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언덕 꼭대기에 그리스 신전처럼 생긴 하얗고 거대한 건물이 있다.
건물 위로 하얗게 부풀어 오른 구 형태의 ‘조립실’이 보이고, 여러 가지 설비가 궤도식 빌드를 따라 둥둥 떠다닌다. 설계와 건물의 배치, 사용된 건축 소재 등을 따지면 우리 드래곤힐동보다는 못했다. 하지만 작은 공장치고는 지나치게 좋은 설비와 빌드가 아닐 수 없었다.
이곳이 바로 이번 의뢰의 목적지인 코어 조립 공장이었다.
1,500넘버링의 상급 코어까지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작지만 강한 기술력을 자랑한다.
월간 출고량은 30만 개 정도로 규모는 아주 작았다.
“하지만 큰손들의 조사에 의하면 실제 생산 능력은 200만 개에 달한다는 거지? 꿀이네.”
내 말에 크르으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지. 현재 출고되는 양이 적으니 차원 문명들의 단속 밖에 놓여 있을 테고, 그런데 실제 생산 능력은 크니… 생산량 속이고 밀수 네트워크에 물량을 풀기에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큰손 놈들, 잘도 이런 곳을 찾아내는군.]
“하지만 설득이 쉽지 않겠지.”
그건 시도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미 찔러 볼 사람들은 다 찔러 봤을 것이다. 하지만 넘어오질 않으니 나에게 돌아온 거겠지.
그리고 공장장을 만나 대화를 하는 순간 그 사실은 확연해졌다.
[신고하기 전에 꺼져. 이미 잘만 팔고 있는데 자꾸 밀수를 하니 마니 헛소리하고 있어! 꺼져! 난 내 상표도 못 붙이는 도둑 거래엔 관심 없다 몇 번을 말해!]
공장장은 이런 제안이 지겨워 죽겠다는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그는 거대한 살덩이에 파묻힌 악마처럼 살벌하고 징그럽게 생긴 작자였다. 하지만 나는 느낀다, 바짝 날이 서 있는 그의 ‘장인 감각’을.
이 공장장은 사업가가 아니었다. 물건의 완성도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더 나은 물건을 만드는 보람으로 업을 이어 가는 흔치 않은 진짜 장인이었다.
내 [만상공감]에는 공장에서 코어를 조립하는 과정이 다 걸려들었다. 기술자들 교육도 꼼꼼히 했는지 조립 공정 하나하나가 비틀린 구석 하나 없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쾌감이 들 지경이었다. 200만 개를 생산할 수 있는데 30만 개만 생산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닌 품질 관리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똑같은 1,500넘버링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만들면 다르지.’
당장은 몰라도 5년, 10년쯤 쓰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 공장에서 나온 코어로 만든 물건은 동급의 다른 물건들과 뭔가 확실히 다르다는 사실을.
[…웃어? 내 말이 우스워?]
공장장이 살덩이를 푸들거리며 발작하려고 했다. 아, 내가 웃었나? 하지만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멋진 물건들이 앞에 있는데.
물론…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그건 지금 말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다신 오지 마! 그땐 정말 차원 경찰을 보게 될 거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공장장을 뒤로하고 돌아 나왔다. 크르으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득을 해야지. 그냥 이렇게 돌아서면 어떡해?]
나는 크르으랑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크르으랑의 오늘 역할은 내 호위.
오늘은 그냥 날 따라와 보쇼.
“아까 람시르가 1차 임무 5개랑 2차 임무 10개를 알아왔죠? 총 15개.”
[그렇지… 잠깐? 너, 설마 여기 안될 것 같다고 그냥 넘기려는 거야? 어이, 그러면 안 돼! 둘 다 하는 거면 몰라도 정작 시킨 걸 안 하고 다른 걸 하는 건 문제의 소지가 있다. 자칫하면 일만 하고 돈도 못 받아!]
나는 또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다 둘러보고 생각할게요. 오늘은 그냥 따라와요.”
[아니, 대체 뭘 본다고…….]
* * *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명덕철明德鐵을 가공하는 자원 가공 공장이었다.
그곳은 어둡고 구름이 가득한 바닷가에 세워져 있었다. 쏴아아 밀려왔다가 쿠르르 멀어지는 바다가 거대한 짐승 같다.
캉캉캉캉!
슥삭슥삭슥삭.
저 짐승 같은 바다가 품고 있는 텅 비고 신령한 허령철虛靈鐵을 찾아다가 두드리고 갈고 닦아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올 때까지 작업을 하는 공장. 어두운 바닷가를 배경으로 갈고 닦을수록 빛이 나는 철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림의 한 장면으로 나올 것처럼 인상적이다.
이곳의 공장장은 삐쩍 마르고 아주 예의 바른 인간형 종족이었다.
[아, 예예. 무슨 말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희에게는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공장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옆의 창고를 가리켰다. 문이 활짝 열린 창고에는 터질 듯이 들어선 철이 보인다. 명덕철과는 다른 물건이었다.
[사실 명덕철은 이미 수요가 폭주하고 있는 물건 아닙니까, 그걸 굳이 밀수까지 할 이유는 없죠. 그 시간에 저는 차라리 저기 저 혼철魂鐵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더 고민하겠습니다.]
혼철. 아주 특이한 성질을 지닌 철이었다.
[예. 예. 저거 아주 별난 물건입니다. 저 어두운 바다에 사는 귀신조개는 떠다니는 바다의 혼을 잡아먹고 조개껍질 안에 순혼純魂을 만듭니다. 그런데 그때 명덕철을 같이 먹이면 이렇게 딱딱하고 둥근 혼철이 만들어지죠.]
공장장의 얼굴에 답답한 미소가 어렸다.
[기능으로 따지면 명덕철을 압도합니다. 하지만 약한 내구성과 비싼 가격이 약점이 돼서 팔리지를 않네요. 하아… 선대께서 명덕철을 어마어마하게 바다에 뿌려 버려서 지금도 혼철이 계속 나오는데, 처리도 못 하겠고 죽겠습니다.]
그러면 혼철을 수거 안 하면 되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럼 귀신조개들이 순혼도 축적하지 못한다고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맞다. 순혼이 차원 문명의 석유 같은 거라고 했지? 그걸 여기서는 귀신조개라는 걸 통해 수급하는 모양이다.
“뭐, 알겠습니다.”
나는 공장장과 인사하고 돌아 나왔다. 크르으랑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듯 눈과 입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본다. 뭐랄까… 주인 발 냄새를 맡은 고양이가 지을 법한 표정이라 좀 웃겼다.
나는 곧장 다음, 또 그다음, 큰손들이 임무로 내릴 공장들을 미리 찾아가 둘러봤다. 아니나 다를까, 밀수를 하겠다는 공장이 하나도 없었다.
10번째 공장은 번쩍! 하고 내려치는 찬란한 벼락으로 자원 성형과 코팅 등 마감 처리를 한 번에 끝장내는 화끈한 공장이었다. 공장장은 자신들이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단가가 높아서 고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밀수를 거절하는 이유는 차원강습 시스템 밀수 밸류체인에서 벼락 치기 마감법이 필요한 부분이 너무 적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벼락 한 번 내리치는 데 순혼과 타키온이 얼마나 많이 드는 줄 알아? 근데 고작 그만한 물량 치고 말 거면 안 하고 말지. 기껏 밀수라는 리스크까지 지는데 말야. 물량이 적어도 두 배는 돼야 돼.]
“네, 알겠습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또 인사하고 멀어졌다. 크르으랑은 이제 아예 관심을 끄기로 했는지 시선을 멀리 두고 꼬리를 흔들며 콧노래나 부르고 있다.
그러고도 계속 순방을 계속해서 마침내 15군데의 공장을 모두 확인했다.
계속 딴짓을 하던 크르으랑은 그제서야 내게 물었다.
[다 봤는데 이제 어쩔 거야? 뭐 성공한 곳이 한 군데도 없잖아? 아니지, 애초에 설득할 마음 자체가 없어 보이던데 왜 그런 거야?]
“설득할 마음이 없긴요. 다 설득하려고 그런 건데.”
[그래서 어쩔 건데?]
“문제를 확인했으니 문제를 해결해 줘야죠.”
나는 크르으랑을 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길 다시 왔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혼철이 쌓여 있던 공장이다.
[엥? 또 왔습니까? 거, 제가 분명…….]
인상을 찌푸리는 삐쩍 마른 공장장에게 나는 말했다.
“혼철, 구슬 단위로 팔죠? 구슬 하나당 얼마입니까?”
공장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 사시게요? 그, 하나당 50타키온입니다.]
곤두선 감각이 느껴진다. 저건 바가지 씌우는 느낌이 아니다. 그보다는 최소가일 것이다. 최소가임에도 불구하고 비싸다는 소리를 하두 많이 들어서 저렇게 눈치를 보는 것이겠지.
흥정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혼철 구슬 하나당 50타키온으로 쳐서 1만 개를 샀다. 그렇게 많이 사도 창고는 여전히 혼철로 그득했지만 공장장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렸다.
[또 오십쇼!]
공장장은 가는 길까지 마중 나와 주었다.
그다음에 찾아간 곳은 벼락 치기 마감 공장.
[아니. 내가 물량 부족해서 안 한다니…….]
“밀수 아니에요. 그냥 이것만 좀 성형하고 코팅해 주세요.”
[아, 네. 거기 앉으세요. 이거 1만개 맞습니까?]
“네. 이런 모양으로 강도가 좀 높아지게 벼락 코팅을 두 번 빡세게 부탁합니다.”
[아, 예. 성형 10만, 코팅 1회당 10만, 총 30만 타키온입니다.]
1만 개의 혼철 구슬에 벼락이 내린다. 꽈릉! 하면 혼철 구슬이 팝콘처럼 크게 부풀고 속이 비어 버린다. 콰릉! 한 번 코팅이 되면 까맣게 탔고, 콰릉! 두 번째 코팅에서는 오히려 투명하게 빛이 났다. 표면을 따라 물결 같은 것이 일렁일렁 움직이는 게 보였다.
30만 타키온을 건네자 공장장이 나를 호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괜한 말이 아니라 우리 마감이 끝내줍니다. 물량 있는 대로 가져오시면 진짜 끝장 나게 해 주겠습니다.]
공장장은 가려고 하는 나를 붙들고 10분을 더 떠들었다.
그렇게 총 80만 타키온을 썼다.
이쯤 되자 크르으랑은 미간을 좁혔다. 혼철을 이용해서 벼락 치기법으로 뚝딱 만들어 낸 제품의 정체를 간파하곤 입술을 핥았다.
탑골시장에서 안목으로 알아주던 호랑이라 그런지 이 물건의 진가를 금세 알아보는 눈치.
[너, 그거… 설마?]
나는 그런 크르으랑에게 웃음을 보여 주었다.
“맞아요. 고스란히 돈이 되고 뇌물이 될 소중한 상품입니다.”
[그 정도나?]
“그 이상이죠. 지켜봐요.”
그렇게 세 번째 목적지는 코어 조립 공장이었다.
코어.
밀수꾼들에게도 필요하고 지구에도 꼭 필요한 그 중요 자원이 생산되는 귀중한 공장에, 나는 혼철로 만든 1만 개의 반짝반짝한 상품을 들고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