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여우
‘같이하자.’
난 분명 권승리에게 그렇게 말했다.
윤희정도 그렇다.
그녀를 보는 순간 견적이 딱 나왔다.
오늘은 윤희정에게도 그 말의 의미를 알려 줄 것이다.
* * *
윤희정은 갑자기 나타난 소시민을 보고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사령관님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믿고 따르는 분이고, 마음의 빚도 있고, 존경도 하지만, 그래도 이건 양보 못 한다.
그녀는 생각했다.
‘팀원들을 생각해야지.’
오늘 윤희정이 이끄는 팀원 몇몇이 엉엉 울어 버렸다. 몇몇은 미친 듯이 화를 냈고, 나머지는 죽어 버린 것처럼 무기력하게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사실 영력 기초 수련 도구인 ‘영력 응집 팔찌’와 ‘영력 자극 필드’의 생산은 몸도 고되지만 마음도 그만큼 고된 일이었다.
장인들도 다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소시민과 아틀라스 클럽이 손을 잡은 뒤 세상에는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그간의 모든 상식이 뒤집혔다.
‘마누스는 틀렸다. 영력이 옳다.’
‘영력은 초능력을 타고나지 않은 일반인도 느리게나마 수련할 수 있다.’
‘착실히 공부한다면, 영력을 직접 다루는 건 서툴러도 영능학을 이용하는 기술자로 우대받을 수 있다.’
초능력자와 일반인의 개념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발표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지구는 몸살을 앓았다. 대체 영력이 무엇인가. 영력을 알려다오!
영력에 대한 한 줄 정보만을 가지고도 고튜브 채널에는 몇만 개의 영상이 올라갔고, 모든 블로그에는 온갖 낚시성 정보글이 넘쳐났다.
영력이 뭔지도 모르는 이들이 영력을 가르쳐 준다며 고액의 수강료를 받고 클래스를 열기 시작했다. 일부 보급된 영력 팔찌와 영력 자극 필드가 도난당하거나 강도짓까지 당하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불안과 집착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다들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음 환란이 찾아왔을 때 영력을 몰라서 비참하게 쓸모없이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발 영력을 가르쳐 달라.
제발 쫌! 영력 좀 가르쳐 달라.
이를 악문 난장판에서 다들 눈물을 글썽이며 아우성쳤다.
윤희정과 그 팀원, 아니 드래곤힐동의 모든 장인은 이 상황에 책임을 느꼈다.
‘우리가 더 빨리 생산을 해야 돼!’
이 혼란을 가라앉히는 유일한 방법.
공식 채널에서 나오는 공식 수련법이 빨리 보급되어야 사람들이 안심할 테니까. 그래서 자진해 기본권도 다 반납하고 하루에 한 시간도 못 자면서 계속 기초 수련 도구를 생산해 온 것이다. 심지어 만들 재료가 똑 떨어져도 밑 작업을 미리 해 두면서까지 밤을 샜다. 재료가 오자마자 생산하려고, 밤새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을 사람들에게 보내 주려고.
그런데, 그런데 새로운 프로젝트? 여기서 인원과 자원을 쪼갠다? 대체 우리가 해 온 노력은 뭐가 되는 거야?
저절로 엉엉 눈물이 날 만큼 분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건 그냥 핑계일지도 모른다.
실은 어떤 식으로든 윤희정과 팀원들은 이미 한계를 맞이한 것이다.
무르물랑이 던진 새로운 프로젝트는 이미 가득 차서 찰랑찰랑한 소주잔에 떨어진 마지막 한 방울과도 같은 것.
여기서 어떻게 더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울부짖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다른 일을 할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지구에 꼭 필요한 일을 찾아내는 무르물랑의 지시를 무시할 수도 없고, 그냥 아무것도 못하겠고, 숨이 막힌다.
‘한계를 맞은 거야.’
윤희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지구를 지키겠다는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만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 마침내 누구는 화내고 누구는 울고 누구는 죽은 듯이 무기력해진 것이다. 윤희정은 더 이상 그 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나선 길이었다. 소시민이 와서 달랜다고 넘어갈 것 같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다.
‘오늘은 전투 모드다. 적어도 정제소 프로젝트는 보류시켜야 돼. 기초 도구 보급이 안정될 때까지만이라도. 당장은 새로운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
팀원들이 늘 말했다. 전투 모드의 윤희정 장인님은 무섭다고. 무표정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이건 이거다, 저건 저거다 팀원들이 최소 1주일에서 한 달을 씨름한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틱틱 까 버리는 냉정 철혈의 모드.
윤희정은 존경하는 소시민 앞에서 가면을 쓰고 전투 모드에 들어섰다.
하지만 정작 소시민은 그녀의 모진 각오를 무색하게 했다. 애초에 그 주제로는 말도 꺼내지 않은 것이다.
“오늘은 소속 바꾸세요. 오늘 하루만 저랑 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자, 따라오세요.”
“네? 말도 안 돼요! 지금 생산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오늘 하루만 제 비서로 보직 변경합니다. 그리고 드래곤힐동 장인들 전부 오늘 반차입니다. 윤희정 장인은 저 따라다니고요.”
“사령관님! 잠깐만요! 저희 지금 일이……!”
소시민은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곤 자기 집무실로 향해 버렸다. 윤희정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윤희정은 소시민이 일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 * *
“아, 쫌… 아틀라스 클럽이 힘 좀 내 줘요. 네?! 아니, 생산이 빨리 안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도구 없다고 그냥 손 놓고 있게요? 지금 확보된 물량으로 공원에 집단 훈련 시설이라도 만들 수 있잖아요. 교관 파견하고요. 그럴 인원이 없어도 해야죠! 아니, 왜 그래요? 아틀라스 클럽이 왜 약한 소리예요! 권승리 바꿔요!”
수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싸우고 실랑이를 하던 소시민은 한숨을 쉬며 수화기를 내렸다. 그리고 윤희정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됐어요. 아틀라스 클럽에서 질서를 좀 잡고, 사람들이 돌아가면서라도 기초 훈련을 할 수 있게 트레이닝 시스템을 짜 놓는다고 약속했으니까 이제 좀 질서가 잡힐 거예요. 오늘 반차 내서 생산성이 떨어지더라도 큰일 안 나요.”
윤희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식의 해결 방법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게 시작이었다. 다음 통화는 무르물랑이었다.
“그러니까… 코어가 부족하다고?”
- 그래. 순혼이 석유라면 코어는 배터리랑 칩을 합친 개념이야. 역시 안 들어가는 데가 없다는 뜻이지. 정제소에도 500넘버링 코어 10,000개는 필요한데, 밀수로 팔아 치울 성검을 만드는 데는 그 이상이 필요하고 심지어 영력 응집 팔찌랑 영력 자극 필드에도 필요해.
“그런데 요즘 아갈타가 지랄하는 바람에 밀수 루트가 막혀서 코어를 그렇게 대량으로 구매할 수가 없게 되었다?”
- 그래. 그렇다고 타키넷에서 너무 많은 양을 사면 그것 역시 감시 대상이 되어 버린다는 말이지.
“골치 아프네… 알았어.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을게.”
- 빨리 찾아. 희정이 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도 더 속상할 거야. 걔네는 어떻게든 빨리 기초 훈련 도구들을 만드려고 하는데, 코어 때문에 작업이 중단될 때가 여러 번 있었거든. 그때마다 퇴근도 안하고 사전 작업 다 해 놓더라. 어쩌면 이번 정제소 프로젝트 반대하는 것도 코어가 부족하다는 걸 알아서 그런 걸 수도 있어. 어차피 안 될 거 한쪽이라도 제대로 하자는 거지.
무르물랑의 목소리에는 측은함이 묻어났다. 윤희정은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아, 알고 계셨구나…….”
그녀가 입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소시민이 알게 모르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는 사실을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 후로도 소시민의 통화와 텔레파시는 쉼 없이 계속되었다. 그중에서도 윤희정의 뇌리에 인상 깊게 남은 것은 이계 감정사 릭과 루드비히가의 막내 도련님 데미안, 사령관의 동생을 자처하는 까막이가 이룬 ‘영업 팀’의 활약이었다.
* * *
타키넷, 탑골시장의 상점 테라.
열심히 물건을 팔고 있던 릭은 휘오의 가지를 통해 전해진 소시민의 텔레파시에 응답했다.
[네, 릭입니다. 네. 네. 아… 그러니까 타키넷에서 코어를 구해 달라고요? 추적되지 않을 만큼… 한 500넘버링이상 3,000개, 1,000넘버링은 200개까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네. 네? 타키온을 보내신다고요? 아아, 그러지 마십쇼. 저희 지금 돈 없지 않습니까? 필요한 자금은 저희가 팔아서 마련하겠습니다. 아아, 걱정 마십시오. 그건 사령관님이 감정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순식간에 팔아 치웁니다.]
텔레파시를 마친 릭이 까막이와 데미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까막이가 매의 눈을 번쩍이며 벌떡 일어섰다. 근처를 지나가는 손님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아, 손님, 손님. 딱 봐도 성검 사용자시군요?
[아니? 어떻게 알았지?]
상대가 쓰는 무기를 파악하는 것. 회사에서 암살법을 배울 때 익힌 재주였다. 까막이는 활짝 웃었다.
“저희가 성검 사용자분들이 쓰기에 딱 좋은 액세서리를 가지고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액세서리?]
…하며 자신도 모르게 까막이가 인도하는 대로 몇 발자국 상점 쪽으로 다가오면 게임은 끝이었다. 상점까지의 유인이 까막이의 역할. 그다음은 데미안이 이어받는다.
“어서 오십시오.”
데미안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가게 안으로 안내하면 손님들은 열이면 열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기 바빴다.
[어엇. 겉보기보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상점이구만. 이국적이면서도 아늑하고… 여기 이런 가게가 있었나?]
상점 테라는 데미안이 특유의 귀족적인 취향으로 인테리어를 새로 한 상태였다. 지구의 인테리어 방식이야 차원 문명 사이에선 촌스럽고 원시적일 뿐이지만, 데미안은 다르다. 소시민이 인정한 센스를 가지고 있는 데미안은 벌써 차원 문명의 트렌드를 모두 분석해 자신만의 귀족적인 취향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저희 테라는 흔히 볼 수 없는 진귀한 옛 물건들을 수집해 손질하고, 그걸 다시 딱 맞는 인연에게 찾아 주는 가게입니다. 물건을 사는 곳이 아니지요. 나와 딱 어울리는, 마치 잃어버린 친구와도 같은 물건을 운명처럼 만나는 곳이지요.”
그것은 마법이었다. 이곳에서 물건을 사는 게 뭔가 그럴듯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인상을 남기게 해 주는 주문.
그와 동시에 데미안은 소시민을 흉내 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손님을 살피는 것이다. 시선의 이동, 시선이 머무르는 장소와 시간, 손끝의 움직과 발끝의 방향, 호흡의 규칙성… 그런 정보들을 토대로 스르르 지나가는 손님의 시선 속에서 그가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본 물건을 찾아낸다. 상대가 인간형 종족일 때 성공률은 더 올라갔다.
“가령… 저는 이걸 추천해 주고 싶네요. 손님과 딱 어울리는 것 같은데.”
데미안이 성검에 매달 수 있는 빨간 장식 술을 꺼내 들자 손님의 눈에 이채가 어린다. 안 그래도 눈여겨봤던 물건을 딱 꺼내니 흥미로운 것이다. 그러면 이제 릭이 나설 차례다.
“잠시 성검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호오? 이건 강력한 힐링이 인챈트된 성검이군요.”
[오오, 알아보시는군요.]
이쯤 되면 손님의 말투에 존중이 깃들기 시작한다.
릭은 온갖 전문적인 말을 써 가며 붉은 술에 깃든 능력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손님의 성검과 딱 어울리는 한 쌍으로 만들어 준다.
그러면 손님은 활짝 웃는 얼굴로 붉은 장식 술을 쓰다듬으며 최소 5,000타키온에서 때론 3만 타키온까지도 하는 거액을 마다하지 않고 지불하고 나가는 것이다.
“소중히 다루어 주십시오.”
귀족적으로 인사하며 고급스러운 포장을 하는 데미안의 마지막 인사가 대미였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까막이가 또다시 새로운 손님을 데리고 가게로 온다. 쉴 틈도 없이 계속 그 반복이었다.
* * *
[네, 사령관님. 휘오를 통해 500이상 넘버링 삼천 개랑 1,000이상 넘버링 이백 개 보냈습니다. 아, 그리고 아침에 가져온 오파츠 다 팔았습니다. 아틀라스 클럽에 더 달라고 요청해 놓은 상태입니다.]
“예? 그걸 벌써 다 팔아요? 아침에 한 700개는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합이 착착 맞아서 장사가 잘됩니다. 한 번에 수십 개씩 사 가는 큰손들도 있습니다.]
“얼마쯤에 파시는 거죠? 그, 대충 기능만 보면 하나에 한 1,000~3,000타키온에 팔리지 싶었는데…….”
[아, 5천에서 3만에 팔고 있습니다. 오늘 오전 매출은 대충 1,000만 타키온쯤 됩니다. 너무 적어서 안타깝군요.]
“네?! 그렇게 잘 팔린다고요? 그거 어차피 아틀라스 클럽이 지구 던전에서 발견한 오파츠들이라 타키온도 안 드는 건데… 그걸 그렇게?”
[네. 좀 잘 팔릴 만한 놈들로 골라서 잘 팔리게 포장해 놨습니다. 아, 또 손님이 오셔서. 얼른 팔고 또 더 팔겠습니다. 아직은 작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규모도 늘리고 직원 채용해서 자동화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원래 맡고 있는 감정 및 품질 감독 작업은 이거 금방 다 팔고 얼른 돌아가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텔레파시가 끊겼다.
“허어…….”
소시민이 감탄했다.
“와아…….”
옆에서 듣던 윤희정도 감탄했다.
‘저게 본업이 아니었다고?’
소시민의 말에 따르면 각자 자기 일도 바빠 죽겠는 사람들이 돈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자기들끼리 쿵짝쿵짝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라고 했다.
윤희정은 생각했다.
‘다들 이러는 걸까?’
지구는 비상사태고… 누구 하나 자기 몸을 아끼는 사람이 없다. 지금 당장 눈앞의 소시민 사령관부터 그렇지 않은가? 윤희정은 기억한다, 바로 얼마 전 사령부 앞에서 벌어진 살벌한 싸움을. 하지만 소시민은 그런 싸움을 거치고도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소시민을 바라보는데, 소시민이 막 다른 차원에 연락을 마치고 활짝 웃는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윤희정 장인!”
“네, 네에?”
“인원이 부족해서 힘들었죠?”
“아… 아, 네. 아무래도 아틀라스 클럽에서 차출된 장인들 교육도 못 하던 실정이라.”
소시민이 히죽 웃는다.
“그 교육, 걱정 말아요.”
“예?”
“르누아 차원과 크레아 차원에서 사람들 보내 준대요. 영능학의 기초와 영능학 공예의 기초 정도는 충분히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이제 맘 놓고 일하셔도 돼요. 아, 아틀라스 클럽에도 연락해야겠다, 영력 기초 수련 교관들이 생겼다고.”
윤희정은 할 말을 잃었다.
두 가지에서 뭉클했다.
다른 차원에서까지 이렇게 지원이 이어진다는 사실에.
그리고 소시민이 다른 차원에 부탁을 할 정도로까지 이렇게 자신과 장인들을 챙겨 준다는 사실에…….
‘신기하게… 숨통이 좀 트이네.’
‘한계’라고 생각했다. ‘이 이상 어쩔 수 없다.’라고 여겼다.
그런데 전혀 생각도 못 한 방식으로 조금쯤은 개선이 되어 간다.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말도 안 되기는 해.’
그건 맞다. 여전히 절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힘이 나는 이유는 왤까? 보다 상황을 낙관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이 거대한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게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이가, 심지어 다른 차원에서까지도 땀을 뻘뻘 흘리며 같이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태 그걸 몰랐다.
‘이래서… 오늘 따라다니라고 하셨구나.’
윤희정 장인은 어쩐지 씁쓸하면서도 설렜다. 또 신세를 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고 말하자.’
윤희정 장인이 소시민을 보며 입을 떼려던 그 순간, 소시민은 또다시 새로운 연락을 받았다. 정말 쉴 틈도 없이. 그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뭐? 그게 정말이야, 람시르? 아… 그러니까 밀수 네트워크의 큰손들이 날 시험하려고 한다? 함정일 수도 있다? 아, 그것 말고. 그래서 임무가 뭐라고? 그치! 그거! 코어! 코어 생산 공장에서 코어를 확보해라! 그거! 딱이야! 내가 그거 한다. 어디라고? 위치 불러! 크르으랑! 크르으랑! 배 챙겨!”
폭탄이라도 터진 듯이 와다다 떠든 소시민이 서둘러 장비를 챙기며 윤희정에게 말했다.
“아,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이제 퇴근해도 돼요.”
그러곤 집무실 문을 활짝 열고 달려 나가다 말고 빼꼼 돌아보며 덧붙였다.
“기대해요. 오는 길에 코어 잔뜩 가져올 테니까.”
악동처럼 웃고 사라지는 그 모습에 윤희정은 그만 혼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끅끅 소리가 날 때까지 시원하게 웃어 젖힌 윤희정은 이내 표정을 싹 지우고 허리를 폈다.
고작 반나절 만에 그녀는 마음을 거꾸로 바꿔 먹었다.
‘팀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다들 이렇게까지 하는데… 더 이상 우는소리 할 수는 없지. 신규 프로젝트든 뭐든 오라 그래.
윤희정은 ‘전투 모드’로 발걸음을 돌렸다.
“고맙다는 말은… 결과로 보여 줄게요. 사령관님이야말로 기대해요.”
윤희정의 입가에 달콤하고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린다.
* * *
어두운 구석, 불쑥 못생긴 프랑켄슈타인 인형이 걸어 나왔다. 피핀 차원의 연출가였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떠들기 시작한다.
[보십쇼, 형님들.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소시민의 능력은 싸움보다 다른 데서 더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보여 준다니까요?]
연출가가 과장되게 팔을 흔든다.
[아니, 못 느끼셨어요? 소시민 저거 말하는 어조, 타이밍, 그게 다 계산된 거라니까요? 제가 아까 생체 분석기랑 같이 대조해서 보여 줬잖아요. 소시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윤희정의 생체반응하고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지! 그러니까 저렇게 껌뻑 넘어가는 겁니다.]
연출가가 소시민의 책상 위로 기어 올라간다.
[얼마나 무섭나 보세요. 소시민이 이리저리 애쓰긴 했지만, 그래 봤자 윤희정의 부담을 한 10퍼센트나 줄여 줬을까요? 근데 그랬더니 짜란! 어떻게 됐습니까? 윤희정이 갑자기 자진해서 200퍼센트의 부담을 더 진다고 그러죠? 와… 이게 무서운 겁니다. 진짜 지구는 어쩌면 스스로 서기에 성공할지도 몰라요. 진짜라니까요.]
연출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윤희정이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소시민 저거 여우예요, 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