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일해라
지금 지구는 태평성대다.
적은 물러났고, 지구를 양분하는 두 세력은 손을 잡았다.
마족들과의 전쟁을 거치며 단련되고 또 단련된 능력자 전력 덕에 지구에 나타나는 던전쯤은 가볍게 씹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22년 전, 대격변이 시작된 이래로 인류가 이토록 여유가 있던 적이 있었나? 어리둥절할 정도로 가슴 떨리는 평화.
하지만 이런 날이 계속될 거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알고 있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다음 시련이 닥쳤을 때 새로운 성적표를 받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지금 지구에는 수련 열풍이 불고 있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어떻게든 수련에 힘을 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후우우우.”
요즘 나의 수련은 계속 새 물건을 사들이고 그걸 길들이고의 반복이다. 잠깐 쉬는 동안에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천일시장 명품관의 카탈로그를 본다.
근데… 이젠 여기도 살 게 없네. 슬슬 다음 시장으로 넘어갈 때가 된 건가?
“다음 시장으로 넘어가면 지출이 얼마나 커지려나. 지금 내 잔고가…….”
일단 초도 물량 6,000자루의 성검 시스템의 밀수에 성공하면서 당장 여유는 꽤 있는 편이었다.
‘2억 타키온 정도?’
잠시 희망이 생겼다. 이 돈이면 상위 시장에 가서 또 새 무기를 사들이는 데 아무 지장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게 곧 어림도 없는 소리라는 걸 깨닫는다.
‘안 되지… 이 돈은 재투자해야 되잖아.’
지구에, 인류에게 재투자해야 하는 돈이었다.
그래. 아틀라스 클럽과 손을 잡은 것은 좋았다. 하지만 그건 말하자면 남북통일 비슷한 것이었다. 당연히 좋고 당연히 추구해야 하지만, 당장은 눈알이 빠지고 어깨가 박살 날 정도의 막중한 부담을 짊어지는 것.
대격변으로 북한이 갑자기 무너지고 나서 북한 영토에 눈독 들이는 중국보다 앞서 북한을 수복하기 위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피똥을 쌌다고들 하던가? 당시는 대괴수 전술이 자리 잡기도 전이라 군인들은 처음 보는 괴물들을 꺾고 꺾으며 북진을 거듭해 실전 속에서 전술을 갈고닦아야 했다. 당시 군 생활을 했던 어른들은 지금도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나는 PTSD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게 지금의 내 처지였다.
식은땀이 난다.
‘와… 잠깐만. 계산을 해 보자.’
아틀라스 클럽과 손을 잡으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지구를 개화할 수 있게 되었다.
자, 그럼 뭐부터 해야 할까? 일단은 인류 전체에 기초 영능학을 전수해야 했다. 그래야 영능학의 산업 역군들이 생겨날 테니까.
그런데 대격변 후 여태까지 살아남은 인구가 무려 30억. 30억 명에게 영능학을 가르치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까? 그건 바로 당장 수련에 필요한 기초 도구들이었다.
나는.
농구 코트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벤치프레스조차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농구공은 있어야 농구 꿈나무가 자라고, 최소한 아령은 있어야 헬린이 꿈나무라도 자라는 법.
그런데 인구수가 문제였다.
농구공이나 아령쯤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수련 도구들조차 10억 개쯤 구해야 한다면? 뭐, 필요한 건 직접 만든다고 쳐서 개당 10타키온만 해도… 100억 타키온?!
오, 세상에…….
그런데 이조차도 사실은 ‘기초’일 뿐이다.
진짜 내 계획대로 지구가 차원 문명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려면 이런 기초 도구가 아닌 중급, 아니 고급의 도구와 시설들까지 필요하다. 예전에 화랑단을 훈련시킬 때 썼던 악몽의 시간 같은 것을 전 세계에 보급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시설비까지 고려하면? 그 비용은 이젠 계산 자체가 안 된다. 적어도 조 단위는 되지 않을까?
…조 단위.
다시 보니 나에겐 여윳돈이 하나도 없었다.
2억 타키온? 그게 돈인가?
거기에 우리 최종 목표인 신살 병기까지 만들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돈과 자원과 인력이 필요한 거지?
아, 이래서 무르물랑도 연출가도 다들 확률만 보면 무척 낮다고 말했던 거구나?
그게 숫자로 직접 드러나니 눈물이 쏙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꽉 깨문다.
‘해야지. 뭐 어쩌겠어.’
이제 와서 우는소리 할 수는 없다.
지구를 닫지 않고, 아갈타에 항복하지 않고 우리 힘만으로 자주自主 자강自强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을 때부터 내 앞에 예정되어 있던 그런 도전이었다.
무일푼 거지로 시작해서 어쨌든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이 어마어마한 숫자는 달리 생각하면 오히려 목표가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앞이 보이지도 않던 캄캄한 미로를 헤치고 헤쳐 마침내 어둠이 걷히고 저 멀리 올라야 하는 높은 산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벌자. 벌어 보자.”
일단은 100억 타키온부터. 그러고나서 내 자신에게 선물을 하듯 새로운 시장에 가서 쇼핑을 또 한번 하는 거다. 한 1억 타키온 정도. 시원하게.
* * *
결국 최종적으로 필요한 건 신살 병기였다. 그걸 위해 지구의 개화가 필요했다.
신살 병기의 제조에 비하면 인간이 달에 가는 것이나 맨해튼 프로젝트 같은 건 어린아이 소꿉장난에 불과하다. 한 차원의 영능학적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어 무수한 연구자와 기술자를 보유해야 한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수많은 차원에서 자원과 시설을 공수해 와야 했다.
차원 단위의 영능학적 능력은 물론 경제적 역량과 외교적 역량까지 총동원해야 이룰까 말까 한 목표.
무르물랑은 내게 그 정확한 조건을 알려 주었다.
“신살 병기를 만드려면… 지금부터 내가 써 주는 게 다 필요해.”
*(단 하나의 신살 병기를 만들기 위한) 핵심 재료: 귀령용액 10톤, C등급 이상의 던전 코어 500개, 꺼지지 않는 태양 강기 등.
*핵심 시설: 영자 가속기, 강기 토카막, 창세로 등등.
*기타 재료 및 인프라: 터무니없이 많은 양의 순혼純魂, 500만 타키온, 각종 부대시설 등등등.
실제로는 수천 종의 재료, 수백 개의 시설이 필요하지만, 그중 제일 중요한 것만 뽑아도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그런데 무르물랑이 적어 준 리스트에서 눈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순혼? 이게 뭐지? 왜 이것만 양을 안 써 주고 그냥 ‘터무니없이 많은’이라고 쓴 거지?
무르물랑이 답했다.
“순혼은 영원한 에너지, 영혼의 가장 순수한 엑기스야. 지구의 석유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차원 문명은 사실상 순혼을 기반으로 해서 세워져 있어. 의식주, 무기, 방어구, 일용품. 그 모든 것에 순혼이 관계되어 있거든.”
그래서였다.
“그래서 신살 병기를 만들 때도 ‘터무니없이 많이’ 들어갈 거야. 그 구체적인 뜻은 그냥 네가 구할 수 있는 만큼 되는대로 구해 오라는 거야. 그래도 턱없이 부족할 테니까.”
아…….
그때 난 깨달았다, 만약 우리의 삶이 컴퓨터라면 나는 이제 막 ‘지구 스스로 서기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받는 것에 성공해서 ‘설치’ 버튼을 누른 상태라는 걸. 아마 ‘설치 중…….’ 막대는 지금 0.1퍼센트 정도를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설치가 끝날 때까지 아갈타가 문을 쾅! 열고 들어오진 않을까, 갑자기 전기가 끊겨 버리거나 컴퓨터가 뻑 나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에 몸을 오들오들 떨며.
자꾸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무르물랑에게 물었다.
“그래서, 순혼은 다 사야 되는 거야? 우리가 만들 수는 없나? 잠깐, 영혼의 엑기스라고 했으니까… 설마?”
“아, 너무 끔찍한 장면은 상상하지 않아도 돼. 물론 그런 식으로 순혼을 모을 수도 있지만 효율이 나쁘니까. 특히 지구는 사실 순혼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이야.”
무슨 소리야? 방금 전까지 내가 아무리 순혼을 구해도 부족할 거라 해 놓고…….
“이곳엔 터무니없이 많은 유물과 유해가 있잖아? 다른 문명들 눈에는 그냥 땅에 석유가 강처럼 흐르고 있는 거야. 유물과 유해를 분해하는 정제소만 만든다면 우리가 쓸 양을 다 충당하고도 철철 남아서 그걸로 떼돈도 벌 수 있지. 물론… 우리는 아갈타 눈을 피해야 하니 대량 판매는 불가능해. 밀수로 조금씩만 해야지. 순혼은 모두가 주목하는 자원이라서 시장에 큰손이 나타나면 그 배후를 샅샅이 조사당하거든.”
마음껏 팔지 못한다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어쨌든 자체적으로 순혼을 구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이게 전부일까? 지구에 순혼이 많다. 그게 전부였다면 무르물랑이 괜히 순혼 구하기 힘든 것처럼 날 겁줬을 리 없다.
“맞아. 큰 문제가 있지. 순혼 정제소를 건설해야 돼. 그게 비용이 많이 들어.”
얼마나?
“500억 타키온 정도?”
아, 요즘 타키온 단위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무르물랑이 손바닥으로 내 어깨를 찰랑! 쳤다.
“미안하지만 나로서도 아갈타가 언제 박살 낼지 모르는 이런 차원에 그렇게 큰 금액을 투자할 수는 없어. 그만한 자본을 함부로 들여오다가는 오히려 지구가 발각될 수도 있고. 그래도 난 널 믿는다. 일단 시드 머니 10억 타키온은 내가 어떻게든 구해서 정제소 건설을 시작할게. 넌 그 뒤를 이어 줘! 서둘러야 돼. 신살 병기를 만들려면 순혼 확보 역시 최우선 과제니까.”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게 참 많았다. 인류의 영능학 교육도 최우선 과제인데, 이젠 순혼 정제소 건설까지?
그럼… 일단 벌어야 하는 타키온이 600억인가?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론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 * *
윤희정 장인. 27살의 젊은 나이에 업계의 중진들과 전설적인 원로들이 포진한 중정 공방에 들어간 천재.
마누스와 영력을 잇는 브릿지 이론을 정리한 업적과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이론과 소재가 쏟아져 나오는 드래곤힐동에서, 누구보다 빠른 적응력으로 쌓아 올린 공로가 차곡차곡 쌓여서 이젠 명실공히 가장 영향력이 강한 장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녀는 항상 긴 머리를 높이 동여매고 턱 끝까지 내려오는 다크서클을 굵은 뿔테 안경으로 가렸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염동력]을 이용해 수많은 테블릿을 띄워 놓고 읽으며 공방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녀가 지나갈 때면 장인들은 모두 경의를 표하며 그녀에게 살뜰한 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녀 역시 바쁜 와중에도 일일이 묵례를 보냈고.
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달랐다.
그녀가 지나가도 아무도 인사하지 않았다. 아니, 거리의 장인들은 모두 넋이 빠져서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공방 거리는 폭탄을 맞아 무너진 폐허처럼 어수선했고, 장인들은 아포칼립스를 맞이한 세상의 좀비들처럼 그르럭거리며 맡은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벅저벅.
윤희정 장인의 분위기도 평소와 달랐다. 그녀도 그 누구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고 그저 분노가 가득한 발걸음으로 직진 또 직진할 뿐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여러 난관을 이겨 왔다고. 거의 포기할 뻔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고 그대로 무너질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 이겨 내고 여기까지 왔다고.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여태 이런 지옥은 본 적이 없었다.
문득.
그녀가 향하는 방향을 눈치챈 장인 몇이 윤희정 장인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죽어 가는 눈동자에 미약한 희망이 깃든다.
쾅!
윤희정은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사무실 안쪽에 앉아 있는 물덩이가 보였다. 무르물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빌어먹을 이계 물덩이!
“어, 희정이 왔어?”
태연하게 손을 흔드는 무르물랑에게 윤희정은 다짜고짜 언성을 높였다.
“무르물랑 님! 이거! 이거 뭡니까! 순혼 정제소 연구&건설 프로젝트! 이거 대체 뭐냐고요!”
“아, 그거? 이번에 새로 추진하는 프로젝트야. 지금 하고 있는 영력 응집 팔찌랑 영력 자극 필드 생산하고 같은 최우선 프로젝트니까 인력하고 자원 좀 내려 봐.”
“아니, 무르물랑 님!”
윤희정이 활짝 열린 문 너머 사무실 밖을 가리켰다.
“저기 기술자들 모습이 안 보이세요? 흐느적흐느적 다 죽어 가는 것 안 보이시냐고요! 여태 저희가 불평한 적 있습니까? 필요한 일이란 걸 아니까 그냥 다 했잖아요. 하지만 이건 아니죠! 여기서 어떻게 인력과 자원을 더 쪼개요!”
윤희정의 눈에서 희번덕한 살기가 흘렀다.
하지만 그 직후 돌연 분위기가 바뀌었다. 피로로 빨개진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은 슬픈 모습이었다.
분위기가 갑자기 변하니 더 귀기스럽고 무섭다.
“무르물랑 님… 아무리 능력자들이라도 한계가 있어요. 저희 팀 애들 지금도 벌써 3주째 집에 못 갔어요. 하루에 다 합쳐서 1시간 쪽잠도 못 자고 있다고요…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게 있잖아요… 사람이라는 게 한계가 있는 거잖아요. 저희 능력이 여기까지밖에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요… 이건, 이건 정말 더 못 해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틀라스 클럽 장인들도 교육 하나 못 시키고 방치만 하고 있잖아요…….”
무르물랑은 생각했다.
‘아, 얘가 진짜 한계구나.’
그리고 또 생각했다.
‘어쩌지? 그래도 해야 되는데.’
소시민이 세운 계획. 지구가 스스로 차원 문명이 되어 당당하게 개방하는, 그 미래를 위해선 반드시 지금 순혼 정제소 건설이 시작되어야 했다. 아무리 인력이 부족하고 자원이 부족해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어떻게든.
“무르물랑 님?”
하지만 무르물랑은 지금 반쯤은 희번덕거리고 반쯤은 울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윤희정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저건 진짜다.
장인들 중 제일 독하고 성실한 윤희정이 저럴 정도면 진짜 한계에 부딪힌 거다.
무르물랑에겐 그런 장인들을 격려하고 독려할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메시지 주문을 보냈다.
- 소시민.
- 응? 무르물랑?
- 어, 빨리 내 사무실로 좀 와.
- 왜. 나 바빠.
- 더 바쁜 일이니까 빨리 와.
그녀는 그녀가 아는 한 멘탈 케어 분야에 있어서는 전 차원 제일인 존재를 호출했다.
그간 객관적이고 면밀하게 지켜본 결과.
지칠 대로 지친 사람을 설득하고 케어해서 다시 빡세게 굴리는 데에는 소시민을 따라갈 존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