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64화 (164/212)

7. 억울해서 못 참겠다

순간순간이 즐겁다.

그냥 감각적으로 즐겁기만 한 게 아니다.

권승리는 짧은 시간 내에 여러 가지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그녀의 그 ‘신과 같은 감각’을 느끼며 성장하는 중이었고.

딱딱하던 권승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내 얼굴도 그렇다.

하지만 어느 순간 권승리는 12시를 맞이한 신데렐라처럼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곰곰이 고민에 빠져서 점점 침잠하던 그녀가 문득 말했다.

“하지만… 소시민, 넌 틀렸어. 이건 틀린 방식이야.”

그녀가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소시민 사령관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우리 지구를 얼마나 부강하게 만들었는지, 차원 문명이라는 게 얼마나 매혹적인지 충분히 이해했어.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침략자들을 당할 수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권승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는… 봤어. 어떤 던전에서 봤다고. 이차원의 존재들이 다루는 악마 같은 병기들의 위력. 지구를 빵조각처럼 으깨 버리거나 우리 차원 전체를 가루로 날려 버릴 수 있는… 신도 죽이고 세상도 멸하는 그런 병기를 말야. 지구를 아무리 빨리 발전시켜도 절대 그런 병기에 대항할 수는 없어. 그저 지구 차원 전체를 틀어막고 이계에서 완전히 잊히길 바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단 말야!”

권승리가 말하는 건 분명… 신살 병기와 멸세 병기에 관한 것이었다.

아, 회귀자들은 거기까지도 알고 있었구나.

그리고 권승리는 자신들이 준비하는 대계가 어떤 것인지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모든 것을 그녀에게 이야기했듯이 그녀도 내게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대계의 핵심은 유물과 권승리 자신이었다.

그녀는 이미 내게 유물의 법칙을 비틀어 폭탄처럼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준 적 있었다. 그것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바로 아틀라스 클럽이 회귀까지 해 가면서 이루고자 했던 대계의 실체.

그 개요는 이렇다.

유물을 모으고 모은다.

유물을 1만 개쯤 모으고 나면 권승리가 그걸 모두 비틀어 에너지로 뽑아낸다.

뽑아낸 에너지를 이용해 차원 격류를 [법칙왜곡]으로 조종한다.

그렇게, 그 어떤 대단한 문명도 파고 들어올 수 없는 강력한 차원 격류를 되살린다.

그러니까 예전, 지구에 이능이 싹트고 던전이 생겨나기 전, 지구의 차원 격류가 상상 초월로 강해서 그 어떤 이계인도 침범할 수 없고 내부의 모든 이능마저 얼어붙었던 그때로, 철과 화약으로 움직이던 문명, 그 블랙홀 같은 시대로 되돌리겠다는 계획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이네.’

1만 개의 유물을 한 번에 비틀어서 에너지를 뽑아내겠다고? 이성계의 활 하나 다루겠다고 내가 그 지랄을 했는데?

그리고 그걸 휘둘러서 차원 격류를 가속해? 깨어난 이능조차 다시 얼어붙을 수준으로?

신이나 계획할 법한 구상.

그런데… 그걸 혼자 한다고?

아틀라스 클럽은 1만 개의 유물을 모으고 권승리가 성장할 때까지 지원하는 역할에 불과하고, 결국 가장 중요한 부분은 권승리 혼자 다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물었다.

“권승리, 그럼 너는?”

“뭐가?”

“그 대계. 그걸 해내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 맞아? 아닌데. 너, 갈가리 찢겨서 죽어.”

있는 그대로의 평가였다. 대계가 성공해도 권승리는 죽는다. 그녀가 얼마나 미친 재능을 가지고 있든,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하든 그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답했다.

“살 만큼 살았어.”

아.

진심이구나.

그녀는 내가 회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한 건 부지불식간에 가슴을 빠져나온 진심이었기 때문일 터.

그래서 슬펐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너무 잘 알아서.

‘살 만큼 살았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미래에 더 이상 기대하는 게 없는 사람이다. 아름다웠던 것들은 이미 다 과거에 죽어 버렸으니 기대할 게 없다. 그렇기에 싸울 뿐이다. 사랑하는 것은 이제 없고 미워하는 것들만 남아서 싸우고 싸우는 삶. 그게 나의 지난 생이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결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던.

권승리는 15살의 얼굴로 지쳐 빠진 웃음을 지었다.

기껏 회귀해서까지 지난 생의 증오와 상실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그 얼굴.

나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뭐라도 먹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뭔데?”

약 다섯 시간 뒤.

권승리는 길몽吉夢국수 앞에서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신살과 멸세 병기에 대해서 이야기한 이후로 계속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다.

“아니, 국수 하나 먹겠다고 부상자를 그렇게 끌고 다닌 거야?”

아… 그것 때문이었어?

생각해 보니까 이 국수를 찾기 위해 발품을 좀 오래 팔기는 했지. 하지만 그 시간이 절대 아깝지 않다.

이건 그냥 국수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의 권승리에게 딱 필요한 한 그릇. 그녀의 오감과 육감이 찾는 줄도 모르고 찾고 있는 것. 마치 영혼의 반쪽처럼 탐하게 될, 딱 그 상태로 삶아진 인생 한 그릇.

[만상공감]으로 아주 까다롭게 고르고 골라서 찾아냈다. 나로서는 다섯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찾아서 다행이다 싶을 뿐이다.

“일단 한 입 잡숴 봐.”

권승리가 날 뚱하게 쳐다본다. 아, 거, 먹으라면 먹을 것이지.

나는 국수 그릇을 그녀의 앞으로 슬쩍 더 밀어 넣는다.

“먹어 봐. 죽여줄걸?”

말하고 보니 마약이라도 권하는 듯 음흉했던 내 목소리지만… 뭐, 사실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좋을 거다, 이게.

권승리는 한숨을 팍 쉬고 짜게 식은 눈초리로 깨작 국수 가락을 집어 입에 넣었다.

후룩!

순식간에 면발 하나가 사라진다.

활짝 커진 동공이 지진을 일으킨다.

그치? 미美. 미味. 그치?

권승리가 손을 떨며 면발을 잡는다.

후룩! 후루루룩! 후룩! 후루룩!

무섭게 사라지는 면발.

그래. 맘껏 먹어라. 그거 유니콘의 눈물을 갈아 만든 밀가루에 좋은 꿈을 꿀 때 흐르는 영력을 부어 반죽한 면발이다. 국물은 100명의 성자에게 축성을 받아 행복하게 죽은 게으름소를 고아 만들었고. 재료만 한 20개 차원에서 공수해 왔다고 하던가? 한 그릇에 2,000타키온.

말도 안 되게 비싼 만큼.

몸에도 좋고 마음에도 좋은 국수다.

후룩!

꿀꺽꿀꺽.

탕!

“저기…….”

국물까지 다 마시고 더 시키려는 권승리를 말렸다. 이건 지금 딱 한 그릇이 좋다.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빈 그릇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나는 그제야 말했다.

“왜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해?”

대계에 관한 말이었다.

그녀가 또렷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배불리 길몽국수를 먹은 탓이다. 아까처럼 살 만큼 살았다는 둥 하는 흐리멍덩한 표정은 없었다. 그 대신 오히려 욱하는 성질이 올라오는 표정이었다.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옳지. 드디어 본심이 나오는구만.

“다들 약해 빠진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나 말고는 이 지구가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는데… 그냥 무시하고 죽으라고 냅두고 나 혼자만 행복하게 살아? 내가 어떻게 그래. 어떻게 내가 그래!”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길몽국수를 먹으면 좋은 꿈을 꾸며 잠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되는 건 좋은 꿈을 방해하는 나쁜 것들을 다 쏟아 내는 것. 그러니까 권승리가 지금 이렇게 갑작스럽게 감정을 폭발시키는 건 길몽국수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원래라면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부상도 당하고 감정이 요동치던 상태였으니까.

“나도… 씨… 나도 너처럼 성검도 쓰고! 비싼 물건도 막 사고! 이렇게 맛있는 국수나 먹으면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고!”

쾅!

테이블을 쾅! 치면서 소리를 치는 권승리.

그 순간 내 온몸의 감각이 외쳤다. 지금이다. 지금 타이밍이 바로 권승리의 마음을 꺾을 절호의 순간!

나는 말했다. 최대한 심드렁하게.

“근데, 너 나보다 약하잖아.”

성질 부리던 권승리가 우뚝 멈춰 선다.

“나보다도 약한 게 왜 혼자 다 짊어지려 그래?”

“그, 그게 무슨…….”

끼긱끼긱 오작동이라도 일으키는 듯한 그녀에게 나는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약한 주제에 오바하지 말고, 같이해.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지구를 강하게 만들어서 아갈타의 침략을 이겨 내겠다는 내 전략은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아니 모든 지구인과 그 동맹들까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될지 안 될지 내가 보증할 수가 없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건 내 책임이라기보다는 모두의 책임.

반면에 권승리의 대계는 권승리 혼자만 잘하면 되는 일이었다.

실패한다면? 그건 권승리 한 명의 책임. 그러니까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성공해야만 하는 길.

좋게 말하면 영웅의 길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자신의 생활이 없는.

지독히 불쌍한 어린아이의 길이었다.

아틀라스는 개뿔. 하늘을 들어야 한다면 다 같이 들자고. 손오공도 원기옥을 쓰는데.

권승리가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쥐어짜 내듯 간신히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대계를 멈출 순 없어.”

“괜찮아. 대계는 대계대로 진행해. 그것도 꼭 필요하게 될 거야.”

물론 지구는 닫지 않는다. 하지만 대계는 필요하다.

그런 계획을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대계를 듣자 바로 떠올랐던, 아직은 어설프지만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계책.

그걸 다 듣고 그녀는 멍- 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되나? 정말 되나? 그런 표정이다.

되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된다는 게 이상하고… 다시 생각해 보자… 어라, 되나? 아니, 다시… 계속 그런 표정이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장소를 옮겼다.

가자, 직접 한번 보자고.

권승리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녀는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여긴 또 어디야?]

[르누아 차원의 외곽.]

모든 것이 존재하면서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창조신의 꿈결.

어설픈 정신을 가진 존재는 맨몸으로 이곳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리겠지만, 나와 권승리는 맨몸으로도 끄떡없다.

사실 권승리는 창조신의 꿈결에도, 차원 격류에도 직접 몸을 맡겨 본 적이 없었다. 지구엔 차원 밖으로 나가는 기술이 없었으니까. 차원 격류를 움직인 것도 그냥 차원 내부에서 법칙만을 움직인 것이다. …생각할수록 미쳐도 보통 미친 능력이 아니다.

아무튼.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권승리를 이곳에 데려왔다.

“봐, 르누아 차원을. 지구와 연결되어 있어. 앞으론 이런 곳이 점점 늘어날 거야. 아갈타라는 공통의 적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고, 반대로 지구에는 애정과 고마움을 가진 차원이 별처럼 많아질 거라고. 이건 우리 모두의 싸움이야.”

일단 첫 번째로는, 잘만 하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설득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리고 이게 차원 격류야.]

내가 설명한 계획을 몸으로 체감시켜 주기 위해.

[알겠어? 놈들은 이런 곳을 통과해서 지구로 와. 그걸 이용할 거야, 너희의 대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만 해도 아는 [만상공감]과 달리 권승리의 [법칙왜곡]은 체험하고 연구해야 알 수 있는 힘. 그렇기에 그녀를 이곳에 직접 데려와서 가르쳐 주고 싶었다.

[자. 여기서는 조금 더 힘을 빼고, 지금! 방향을 바꿔서! 어때, 그런 식으로 해 보는 거야.]

내 조언을 따라 이리저리 차원 격류를 움직여 보던 권승리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곳은 시각이 통하지 않는 곳이니 그녀가 내게 집중했다라고 말하는 게 옳겠다.

그녀가 말했다.

[알겠어. 대충 알겠어. 근데 잠깐, 지금 안 보여서 조금 답답하니까…….]

짝!

권승리가 박수 치자 풍경이 변했다. 아무것도 없는 창조신의 꿈결과 차원 격류가 하얀 백사장을 파도치며 흐르는 강의 풍경으로 변한다. 쏴아아… 강물이 파도치는 소리는 바닷소리와 달라서 잔잔하고 깊다.

이게 뭐지?

“별것 아냐. 그냥 법칙을 뒤틀어서 시각화, 청각화를 해 봤어. 이 백사장이 꿈결이고 저 강물이 차원 격류야.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이젠 텔레파시가 아닌 목소리로 그냥 들린다.

…미친. 이런 것도 된다고?

슬슬 그녀의 성장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적을 일으켜 놓고도 별것 아니라는 듯 그저 멍한 눈길로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정말, 될지도 모르겠네. 다 같이 싸워 보는 그 계획이, 정말… 잘만 하면.”

“응. 다 같이 노력하면 더 좋은 결과가 올 수 있어. 솔직히 지구를 닫는 거는… 임시방편 아닌가? 차원 격류는 언제든 또다시 약해질 수 있는 거니까. 그때는… 네가 없잖아?”

권승리가 강물 앞에 동그마니 쪼그려 앉아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하지만 네 방법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 그만큼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그리고 너는… 너는 몰라. 얼마나 암울한 미래가 우리 앞에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걸 잃게 될지, 잃었는지… 얼마나 큰 희생을 해서 지금을… 돌아와서도 회복할 수가 없는 상실이……! 아무튼! 넌 모르니까!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실패만 떠올려도……!”

오, 그러니까 너는 이미 멸망 직전의 지구를 보셨다 이거지?

그거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그래서 말해 주었다. 오늘은 정말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 거니까.

“네 생각에는… 이번 생이 더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아? 내 생각은 반대인데. 훨씬 훨씬 더 잘 싸우고 있는데, 우리. 지난번보다 이대로라면 가능성이 더 커지지 않겠어?”

처음에 권승리는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그녀의 눈이 크게 떠진다.

나는 계속 말한다.

“그때 바벨의 탑 앞에서 누군지 모르겠는 사람이 그러더라, 나도 회귀시켜 주겠다고. 인과에 미친 영향이 너무 작아서 공짜나 다름없으니 껴 주겠다고.”

벌떡!

권승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두 주먹을 꽉 쥐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본다.

너, 너, 너……! 너 여태!

한참을 말도 못 하고 삿대질만 하는 그녀에게 나는 말했다.

“뭐, 다시 소개할게. 전생에는 날 몰랐죠? 지금은 사령관이 된 소시민입니다. 한 번쯤 뵙고 싶었습니다, 흑색전선의 권승리 님?”

권승리가 눈을 깜빡이고 기막혀하고 손을 떨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그녀는 한참을 그러다가 겨우 입을 뗐다.

어쩐지 한결 더 부드러워지고, 어딘가 그립고, 따뜻한 목소리로.

“그래서… 그와 대화를 했어? 그가 또 뭐라고 그랬어?”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뛴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 나를 과거로 돌려보낸 그 사람은 함께 돌아오지 못했구나.

‘하긴, 그가 돌아왔다면 영웅들이 나를 몰랐을 리가 없었겠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유언이라도 전해 주듯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정확하게 그의 말을 전달한다.

“그때 그가 그랬어, 내 마음껏 살아 보라고. 어쩌면 그게 세계를 구할지도 모른다고.”

아.

한숨 소리 같은 탄식을 내며 권승리의 어깨가 축 내려갔다.

손바닥으로 눈을 덮고 잠시 무언갈 생각하던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리오 얀센이 널 예비했구나.”

아, 그 사람 이름이 리오 얀센이었나?

고개를 끄덕였더니 권승리가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눈을 똑바로 떴다.

하얗게 탈색된 눈동자가 더 이상 흔들림이 없이 만년빙설처럼 똑바로 나를 바라본다.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리오 얀센은 그녀에게 확고한 신뢰를 얻었던 사람이다.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못하고 있던 그녀의 마음속 저울에 묵직한 추 하나를 새로 얹어 줄 만큼, 깊은 신뢰를.

그녀의 목소리는 오늘 들어 본 것 중 가장 맑고 뚜렷했다.

“그렇다면 걸어 볼게. 리오 얀센이 널 믿었다면 나도 그러겠어. 아틀라스 클럽은 이제부터 소시민을 따른다. 한번, 같이해 보자.”

아.

드디어.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아틀라스클럽과 내가 손을 잡는다.

이렇게 권승리의 대계가 끼어들면 이번 전쟁의 승산은 대폭 올라갈 것이다.

입꼬리가 바짝 당겨져 올라간다. 나는 권승리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

그리고 인삿말을 끝내기도 전에 풍덩! 푸르른 강물로 형상화된 차원 격류에 처박혔다.

와! 이거 아찔하네.

겉보기에는 강물이지만, 여전히 차원 격류라서 예고도 없이 처박히니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모든 감각이 뒤틀렸다.

어푸어푸 벗어나려는데, 풍덩! 권승리가 나를 따라 뛰어들어 나를 누르고 격류의 물살을 튕기고 난리가 났다.

그녀가 외친다.

“같이하긴 하는데! 왠지 억울해서 가만 못 두겠다!”

하지만 권승리는 한 가지 사실을 잊었다. 그녀는 창조신의 꿈결도 차원 격류도 오늘이 처음이지만 나는 이미 이런 곳에서 치열한 전투까지 치렀다는 것. 아루카의 날개를 펴고 한 번 내리쳐서 그녀의 허리를 잡는다.

“또 한번 해보자는 거냐!”

조그만 녀석을 번쩍 들었다가 격류 깊은 곳에 처박았다.

“아악!”

소리를 지르며 격류에 휩쓸려 데굴데굴하던 그녀가 [법칙왜곡]까지 써서 자세를 바로잡으며 반격해 왔다.

“부상자한테 뭐 하는 짓이야!”

“쌩쌩하기만 하구만!”

창조신의 꿈결이 이리저리 날리고 차원 격류가 계속 물보라를 만든다.

그날은 그렇게 놀다가 지구로 돌아왔다.

돌아왔더니 서민서가 어쩐지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보세요, 사령관님. 명문가 아가씨를 그렇게 외박시켜도 돼요?”

그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아, 밤새 놀았구나?

좋네.

아마 지금쯤 권승리는 집에 가자마자 뻗었을 거다. 길몽국수도 배불리 먹었으니 벌써 좋은 꿈을 꾸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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