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몸은 솔직하잖아?
반짝.
권승리는 무혼권가의 병실에서 눈을 떴다.
깜빡.
눈을 뜨자마자 눈을 깜빡이며 본능적으로 지난 결투를 복기했다.
‘단련이 부족했어.’
생각지도 않게 소시민과의 결투에서 배운 점이 많았다. 특히 마지막에 쏟아지던 공격에서 느낀 멀미는… 차원의 격류를 조종할 때 느끼는 울렁거림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걸 극복한다면 분명 차원 격류의 조종도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야. 단순한 왜곡으로는 부족해. 더 광범위하고 세밀한… 왜곡하다 못해 법칙을 새로 만드는 듯한… 그 정도가 되어야 소시민을 이길 수 있어. 그리고 그걸 차원 격류에 적용하면…….’
새로운 수련법에 대한 아이디어가 샘물처럼 퐁퐁 솟아났다.
이렇게 수련한다면 분명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아예 차라리 소시민한테 수련을 도와 달라고 할까? 그렇게 되면 대계를 훨씬 더 앞당길 수…….’
대계를 앞당길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생각을 이어 가던 권승리는 문득 깨달았다.
‘아…….’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잠깐, 내가 졌다고?’
등골에 소름이 오싹하게 돋았다. 잘 몰랐다. 사실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여태 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계획조차 세워 놓지 않았다.
하지만 패배했다. 그것도 가혹한 조건이 걸린 결투에서.
‘그럼… 대계는 어떻게 되는 거야?’
포기할 수 있을 리 없다. 무려 시간을 되돌려 회귀를 하면서까지 추진해 온 계획. 그것을 위해 모두가 여태까지 어떤 희생을 해 왔는데……!
‘내가 져서… 내가 지는 바람에…….’
권승리는 언제나 인류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졌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패배란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고, 언제나 늘 이겨 왔다. 그런데… 이번엔 졌다. 권승리가 졌다. 그럼 이제 난 누구지? 여전히 나에게 자격이 있는 건가?
권승리의 마음속에 격랑이 일기 시작했을 때 리프 얀센이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 일어나셨습니까?
‘어? 어어, 응. 일어났어.’
- 혼란스러우실 것 같습니다. 저희도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누워 계신 동안 나름 의견을 모아 보았습니다. 결심에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마 마찬가지시겠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대계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내줄 수 있는 것들은 내주더라도, 그게 대계에 지장을 준다면 전면전을 벌여서라도 지켜야 합니다. 특히나 만약 그가 마족과 관련이 있다면……!
리프 얀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구체적인 암살 계획과 전력의 차이를 이용한 초전 필승의 전략까지 벌써 세세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아…….’
그 조언을 듣다 보니 권승리는 오히려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전면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족과의 관련? 그건 따져 봐야 하는 문제지만 어쩐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리프 얀센의 말에 틀린 말은 없었다. 여태까지 추진해 온 대계를 생각하면 전면전도 암살도 실은 모두 고려해 마땅한 말이었다. 하지만 권승리는 어째서인지 반감이 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복잡하던 마음이 단순해졌다.
‘알겠어. 조언 고마워. 하지만 당장 너무 많은 계획을 세우지 말자. 일단은 소시민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보고 그다음에 결정하자. 그래야 실수가 적을 거야.’
그래. 먼저 소시민을 만나자. 그다음에 고민하자.
- …네. 알겠습니다. 다만 언제나 잊지 말아 주세요. 당신은 구원자입니다. 한 번의 패배가 그 사실을 바꾸지 않습니다.
리프 얀센의 텔레파시가 끊겼다. 권승리는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때 똑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미처 들어오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시민이었다.
점령군처럼 거칠 것 없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그는 의자를 끌고 와 권승리의 침대 옆에 털썩 앉았다.
앉자마자 하는 소리가 이렇다.
“많이 괜찮아졌네요? 아, 그런데 우리 결투 조건 말인데요. 승자가 모든 권리를 가지는 것 맞죠?”
권승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려고?’
부상이 낫기도 전에 이렇게 서두른다고? 어쩐지 불안했다.
대체 뭘까… 뭘 요구하려고? 그게 우리 아틀라스 클럽과 공존이 가능한 걸까?
‘…전면전.’
불길한 생각을 떠올리며 권승리는 애써 긴장되는 심경을 감췄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시민이 씩 웃는다.
“자, 그럼 승자로서의 첫 번째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권승리, 우리 이제부터 서로 말 놓자, 아까 싸울 때처럼. 우리 반말도 꽤 느낌 좋은 것 같아.”
그러곤 그게 전부라는 듯 가만히 권승리를 바라본다.
에? 설마 그게 다야? 반말?
소시민의 말투와 표정은 권승리의 각오와는 다르게 너무나 친근하고 호의가 가득했다. 마치 친구처럼.
권승리는 혼란스러웠다.
…뭐지?
화전양면전술?
* * *
권승리, 넌 정말 모를 거다.
내가 이걸 얼마나 너에게 보여 주고 싶었는지.
얄팍한 마음이 아니다. 지난 생에 처음으로 타키넷에 입성하고 그 밑바닥에서부터 심부름하며 구르고 구르다가 겨우 쓰레기 거리 한편에 내 자리를 마련했을 때, 차원 문명이 무엇이고 영능학이 무엇인지 간신히 감을 잡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내 마음 한편에 묵직하게 자리 잡았던 바람.
그건 바로 인류의 영웅들에게 타키넷의 진면목을 알려 주고 차원 문명과 영능학을 소개하고 싶다던 꿈이었다. 고작 2류에 머물렀던 지난 생에는 언감생심 엄두도 내지 못한 소망.
이 자리에 최치국이 있었다면 좋겠지만… 그가 목숨 바쳐 따르던 권승리 역시 모자람이 없다.
“승리, 넌 타키넷이 뭔지 알지?”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세계수를 통해 갈 수 있는 음습하고 기괴한 던전.”
그래. 너희는 쓰레기 거리까지밖에 못 가 봤지?
이해한다.
원시인이 뉴욕 한복판에 떨어져 봐야 노숙인 신세거나 정신병원 신세일 수밖에 없듯이. 음습, 기괴, 이딴 소리 외에 뭐가 나오겠어?
하지만 앞으론 다를 거다.
“가자. 오늘 내가 제대로 보여 준다. 내가 세계수를 통해 무얼 하고 있는지. 너희가 마족의 기술이라고 부르는 걸 어떻게 익혔는지. 그리고… 타키넷이 어떤 곳인지.”
“아직 몸도 다 안 나았는데…….”
“그래도 걸을 순 있잖아. 시간이 많지 않아. 당장 가자.”
손을 뻗었다. 권승리가 내 손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부우웅- 눈앞으로 하얀 게이트가 열렸다. 타키넷으로 연결되는 게이트.
권승리와 손을 잡은 채로 게이트에 손을 대니 타키넷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
- 사용자 소시민이 방문자 권승리를 에스코트합니다. 이동 가능한 시장에는 천일시장(에스코트비: 5,000타키온), 탑골시장(1,000타키온), 등불 시장(800타키온), 조각시장(900타키온), 갯펄시장(100타키온)이 있습니다. 어느 시장으로 가시겠습니까?
“우선 탑골시장으로.”
첫 번째 목적지는 탑골시장이었다. 나와 나타르의 가게가 있는 곳.
“읏! 여긴!”
게이트를 넘자마자 권승리는 내 손을 뿌리치고 두 주먹을 꾹 쥔 채 자세를 낮췄다. 작고 꼬리가 긴 육식 짐승처럼 눈을 날카롭게 뜨고 주변을 경계한다. 그리고 사방에 가득한 이계인들에게 투지를 불태운다.
그래도 쓰레기 거리는 가 봤다고 ‘괴물! 죽어라!’ 하면서 문답무용으로 주변 이계인들을 향해 레이드를 시작하지 않은 걸 천만다행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나는 말 한 마디 없이 신경만 곤두세우고 있는 그녀를 이끌고 서둘러 우리의 가게 ‘상점 테라’로 향했다.
솔직히… 내내 부끄러웠다.
하아. 늑대 소녀니? 원시인 티가 너무 많이 나잖아. 지나가는 이계인들이 불편해하는 게 느껴지지 않는 거니?
그렇게 겨우겨우 권승리를 상점 테라로 데려갔다.
[여, 소시민. 오랜만이군.]
사막발굽인 나타르는 긴 쌍꺼풀에 커다란 입을 가지고 하루종일 뭔가를 씹듯이 입을 우물거리고 있다.
[못 보던 인간인데?]
나타르가 질겅거리며 커다란 눈으로 권승리를 바라보니 권승리의 경계심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이계인이 이렇게 친절하고 느긋하게 말을 걸다니?’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쓰레기 거리에선 이런 대접 못 받아 봤을 테니까. 거기는 강도 짓을 ‘인사’라고 부르는 무법 지대이기도 했고… 또 본인 잘못도 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야 한다. 만약 서울 한복판에 원시시대의 무기로 무장한 꾀죄죄한 야만인이 나타나서 잔뜩 주변을 경계하면서 눈을 부라리고 있다면? 그럼 어떻게 하겠는가? 친절하고 호의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뭐, 그런 거.
하지만 나타르는 나와의 관계가 있으니 내가 데려온 권승리를 그렇게 박하게 대하지 않았다. 원래부터가 좀 열려 있는 사막발굽인이기도 했고.
씨익.
나타르는 권승리의 모습이 재밌는지 크게 미소를 베어 물고는 컵을 들어 자신의 불룩한 혹등에서 누런 물을 쪼르르 받아 낸다. 그리고 그걸 권승리에게 내민다.
[난 나타르. 이것 마실래? 시원할 거야.]
권승리가 자세를 낮췄다.
아… 우리 승리, 정말 놀랍고 한결같은 친구군.
보통은 혹등에서 누런 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걸 보면 비위가 상해서 인상을 찌푸리는데, 이 친구는 그런 게 없었다. 그저 아주 주의 깊은 눈으로 그 비위 상하는 장면을 샅샅이 살피며 경계를 더할 뿐. 쓸데없는 감정은 배제한 그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타르도 비슷한 생각인지 혹등물이 든 컵을 즐겁게 흔들었다.
[이런 반응은 또 신선하네. 안전하니까 마셔 봐.]
나타르가 거듭 청하자 권승리가 내 눈치를 슬쩍 본다. 내가 ‘마셔.’라고 작게 말하자 그제야 천천히 혹등물을 받아서 냄새를 킁킁 맡고는 입술만 살짝 축였다가 한 모금,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긴장되었던 그녀의 어깨가 스르르 내려가는 걸 보니 맛이 맘에 드는 모양이다. 보기와 달리 깨끗하고 달고 시원하고 몸에도 좋은 혹등물이니까 당연하다. 없어서 못 먹는 귀한 것.
어느덧 물을 다 마신 권승리가 컵을 나타르에게 돌려주었다. 아까보다 한결 편해진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참 맛있네요.”
그게 권승리가 타키넷에 와서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 * *
나는 오늘 권승리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제는 그래도 될 때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일단 우리가 판매하는 성검을 보여 주었다.
“이게 드래곤힐동에 있는 그 거창한 설비로 만들어 내는 무기야. 성검 시스템이라고 부르지.”
“성검… 시스템.”
권승리는 내가 인도하는 대로 검을 쥔다. 그러고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 특별한 건가?”
평생 마누스라는 원시 기술만 단련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영능학 기반의 성검에서 뭔가를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아무런 기반 없이 홀로 성장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가령 아무리 아인슈타인이나 폰 노이만 같은 천재라도 석기시대에 태어났다면 그저 한 명의 원시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상대성이론이나 현대 컴퓨터의 기초 같은 건 아무런 기반 없이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권승리 같은 천재도 멍청한 얼굴로 성검을 휘적휘적 휘두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천재는 어떤 영감이나 가르침이 전해지는 순간 진가를 발휘한다. 작은 실마리 하나를 쥐고 하늘 끝이라도 닿을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천재天才.
나는 [만상공감]으로 그녀의 감각을 섬세하게 지켜보며 조언을 주었다.
“잠깐만 마누스를 잊어 봐. 그러니까… 너의 [법칙왜곡]으로 마누스를 해체한다는 느낌으로. 해체하고 또 해체하고 또 해체해서… 그 마지막에 남는 게 뭐가 있나 그걸 찾아. 그걸 찾았다면 네 손의 성검과 공명해.”
키아아아아앙-
이런 거다.
그냥 말로 몇 마디 길만 제시해도 하늘을 뚫어 버리는 재능. 다른 곳에서는 천재라 불리는 화랑단원들도 며칠간 피똥을 싸던 그걸,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성공시켜 버리는 미친 짓거리.
권승리가 쥔 성검에서 이글거리는 블레이드 오러가 쭉 뻗어 올랐다. 미치긴 미쳤네. [만상공감]도 없는 인간이 이런 적응력이라니.
[뭐여… 야만인 아니었어?]
나타르의 눈이 굴러떨어질 것처럼 활짝 커졌다.
“야만인인데… 천재예요.”
내 입가에는 미소가 씩 그어진다.
권승리는 어딘가 몽롱한 표정으로 성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잘 알겠다. 지금 황홀하구나?
실은 나도 그렇다.
권승리의 감각이 확장하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법칙을 느끼고 왜곡할 수 있는 그 신과도 같은 감각이, 여태 알지 못했던 새로운 법칙과 조우하며 게걸스럽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 짜릿한 포만감.
나는 미소 지으며 권승리에게 은근하게 묻는다.
이보세요.
이 고집불통 위정척사파의 수장 나으리.
“…좋지?”
움찔! 권승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는 권승리에게 온갖 신문물을 체험시켜 주었다. 예전 같으면 쳐다도 보면 안 된다고 경기를 일으켰을 꼬장꼬장한 쇄국주의자가, 지금은 내가 시키는 대로 다 체험해야만 한다.
‘승자의 권리’가 최고다!
그래. 내가 이날만을 기다렸다고, 이 고집불통 영웅 아가씨야.
우리 가게 물건을 다 체험시킨 다음엔 천일 쇼핑몰 명품관을 찾았다. 내 얼굴을 본 팔이 여덟 개 달린 직원은 생글거리며 뛰어나와 물건을 소개해 준다. 내 옆에 누가 봐도 야만인인 권승리가 있지만 조금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자세가 된 장사꾼이다.
[손님, 이번엔 이 물건이…….]
“아니 그것 말고, 옆의 장갑 좀 줘 보세요. 네. 그거.”
아, 그건 참으로 아름다운 장갑이었다.
제품명은 ‘꿈결의 장갑’. 이름도 이쁘다.
[역시! 손님! 안목이 있으십니다. 이게 바로 창조신의 꿈결 속에서 희귀하게 발견되는 타키온 섬유를 짜서 만든…….]
그래. 그런 물건이었다. 타키온이란 자고로 차원의 근간이 되는 물질. 그런 타키온과 유사한 타키온 섬유를 짜서 만든 이 장갑에는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잠재력이 숨어 있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드는 건 이 장갑에 인챈트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치만 인챈트가 하나도 안 되어 있네요?”
[아, 네. 요즘 또 미니멀리즘이 인기를 끄는 중이어서 그저 극한의 품질 하나로 승부하는…….]
어쩌고저쩌고 이야기를 하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인챈트가 되어 있는 물건의 절반 가격 정도에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인챈트가 안 되어 있다는 건 사실 도구로써는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돈이 썩어 나는 부자가 아니라면 이딴 물건은 사지 않을걸?
나한테도 그렇다. 물건에 부여된 힘을 증폭해 쓰는 내게 인챈트가 없는 순정 물건은 계륵같이 먹기 애매한 물건.
하지만 권승리는 달랐다. 그 손끝으로 법칙을 구부리고 접을 수 있는 권승리에겐 사실 그 어떤 인챈트도 불필요했다. 오히려 불순물 하나 없이 그저 차원의 근원과 닿아 있을 뿐인 이 장갑이 권승리를 만나면 몇 배의 시너지를 일으킬 것.
“그거 이리 줘. 넌 뭐 이렇게 낡을 때까지 쓰냐.”
나는 권승리의 손에서 프로스트 듀를 빼냈다. 낡아 빠진 장갑이 최치국의 낡은 신발을 떠올리게 해서 잠시 마음이 아팠다. 진짜 우리 영웅들은 왜 이러고 사는지.
“이건 내가 우리 장인들 시켜서 더 끝장나게 수선한 다음에 돌려줄 테니까 일단 이거 껴 봐.”
권승리가 속절없이 빼앗긴 자신의 장갑을 보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치욕이라는 듯이 내가 건넨 ‘꿈결의 장갑’을 손에 끼운다.
그녀의 손톱이 장갑 손가락 끝에 딱 맞닿는 순간, 그녀는 쩌저적! 얼어붙었다.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죽이지?”
귀까지 새빨개진 권승리가 입술을 꾹 깨물며 망설이다가, 망설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크큭. 거봐, 몸은 솔직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