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59화 (159/212)

2. 빌어먹을 예쁜 자식

이를 악물었다.

‘이제 정말 코앞이다.’

후드드드드.

끼기기기긱!

무르물랑이 매복지로 찍었던 차원 군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가 탄 차원 선박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저 망할 아갈타 놈들 발을 묶어 놓고 쓸어버릴 수 있겠지.’

그게 우리 전략이었다. 충무공처럼 적을 격류 속에 발 묶어 놓고 잘라 먹기.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최적의 전략.

그래서 한편으로는 투지가 타올랐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가 팍 질려 버렸다.

“근데 차원 격류가 이 정도라니… 진짜 장난 없네.”

우리가 탄 선박을 침몰이라도 시킬 듯이 흔들고 있는 이 힘이 바로 차원 격류였다.

이곳은 여러 차원이 몰려 있는 ‘차원 군도’였고, 각 차원에 존재하는 차원 격류가 서로 합쳐지고 공명을 일으켜 하나의 지옥을 만들고 있었다. 무르물랑, 정말 기가 막힌 장소를 찾아 줬네.

[이, 이거 괜찮은 거겠죠?]

별빛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배가 침몰할까 봐 무섭다기보다는 아갈타와 싸우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네. 오늘은 괜찮을 겁니다.”

물론 배가 엉망이기는 했다.

사실 르누아의 기술은 원시적인 수준이라 그들의 차원 선박은 뗏목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그걸 다시 개조하긴 했지만, 그래 봤자 큰 뗏목에 합판으로 벽을 치고 모터를 달아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해적선을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하루만 이곳에 방치해도 침몰하고 말겠지. 하지만 오늘은 괜찮다, 오늘은.

그럼 됐다.

“그나저나… 정말 차원 격류 너무 강력하네. 지구도 이런 격류에 휩싸여 있으면 방어하기가 좀 더 쉬우려나.”

내가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더니 휘오의 가지가 갑자기 부르르 떨렸다.

- 시민! 지구의 차원 격류 본 적이 없지?

“응?”

그러고 보니… 지구의 차원 격류를 본 적이 없다. 나는 항상 세계수 휘오를 통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고, 심지어 오늘의 차원 함대들도 세계수 휘오의 가지가 멀리 뻗은 곳에서 합류한 것이었다. 그래야 아갈타의 이목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휘오가 말했다.

- 지구는 보통 이거의 세 배는 넘는데? 요새는 웬일인지 한 다섯 배는 더 격하게 흘러!

다섯 배? 이거의?

끼기기기기! 우르르르!

흔들리는 차원 선박과 그로 인해 눈앞으로 떠오르는 온갖 환각을 본다. 가능성 그 자체인 창조신의 꿈이 이렇게 격류를 만들면, 그 안에선 온갖 것이 순간적으로 만들어졌다가 흩어지는 거품이 생겨나고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헛것과 진짜를 구분 못 하고 미쳐 버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흔들림의 다섯 배라고?

지구의 차원 격류가 강력하다는 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그 정도였어?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 그래서 회귀한 영웅들이 세계수를 다 없애려고 했던 거구나.’

내가 여태 지구의 차원 격류가 그렇게 강한지도 모르고 살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휘오 덕이었다. 르누아의 차원 함대가 뗏목처럼 엉성한 주제에 지구로 올 수 있었던 것도 훨씬 전에 휘오가 가지로 먼저 접선을 한 덕이었다.

세계수는 차원 곳곳으로 은밀하게 가지를 뻗고, 가지와 줄기를 순식간에 연결해 버린다. 신화 그 자체와도 같은 종족.

마치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가에도 끄떡없이 배를 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항만과도 같다.

‘정말 유용하고 정말 위험하구나.’

달리 말하면 세계수는 여차할 때 최고의 침략 루트가 될 수 있다는 뜻.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상상이다.

‘첫째도 보안, 둘째도 보안. 절대 휘오가 노출되면 안 돼.’

절로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게 된다.

그런데…….

“잠깐. 그러면 아갈타는 이 격류보다 다섯 배나 거친 격류를 뚫고 지구를 침략하고 있다는 거야?”

- 응. 근데 지구는 격류 방향이 일정해. 여기 차원 군도의 격류처럼 이리저리 방향이 막 바뀌지는 않아서 그런 점에서는 나을걸? 음… 그래도 유속이 다섯 배나 되니까… 역시 지구가 더 어렵기는 할 거야.

망할. 그러니까,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우리의 차원 선박과 달리 아갈타의 차원 함선은 여기서도 잘 버틸 거라는 소리였다. 마음이 급해진다.

“이제 다 왔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치 마! 속도를 높인다!”

[네!]

정말 그랬다. 정말 코앞이었다. 무려 세 척의 차원 선박을 잃으며 달려온 길. 이제 조금만 더 깊숙이, 차원 군도 안쪽으로 아갈타 놈들을 유인한다면 임무는 120퍼센트 완수하는 것.

하지만 마라톤의 마지막 1km가 그렇듯, 군 생활의 마지막 100일이 그렇듯 그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 항상 어렵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꽈과광!

아갈타의 포가 꼬리를 때렸다. [자유]까지 동원해서 어떻게든 회피 기동을 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차원 군도 깊숙이 들어온 탓에 조종이 쉽지 않다. 피할 수 없는 포탄이었다.

그리고.

크드드드득!

차원 선박은 그대로 빙글빙글 격류를 따라 휩쓸려 가기 시작했다.

- 잡아!

- 다 죽여!

- 저 새끼들만 잡으면 휴가받고 복귀할 수 있어!

아갈타의 통신이 섞여 들어온다. 그만큼 가까워졌다.

격류에 휩쓸려 빙글빙글 도는 시야. 하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조종대를 놓지 않았다.

격류에 보다 잘 휩쓸리도록, 그래서 아갈타 놈들이 가장 이상적인 위치까지 들어올 때까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운전을 계속했다. 그래, 침몰하고 있는 게 아니다. 아직도 이 배는 격류를 따라 항해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 닿았을 때 품에 넣어 둔 휘오의 가지가 울리고, 이번엔 서민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이제 됐어요?

나는 대답했다, 기쁨을 담아.

“됐어.”

파아아앙-!

저편에서 공간을 넘는 감각이 전해진다. 아니, 공간이 아니다. 차원이다. 이젠 저걸 [점멸]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 않을까? [점멸]은 분명 단거리 공간 도약을 의미하는데… 서민서는 이제 하다 하다가 차원을 뛰어넘어 버린다.

그녀의 자취가 저 멀리, 아갈타 놈들이 득실대는 곳까지 이어진다. 굉음을 울리는 폭격기처럼 그녀가 뛰어넘은 자리들이 일렁거린다.

그리고…….

꽈아아아앙-!

재앙급 병기가 창조신의 꿈속을 뒤흔들었다.

정확히 적의 중심부를 때렸다.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온갖 감각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나는 그 거대한 감각의 해일을 거스르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며 지시를 내렸다.

“전 함선! 반전! 지금부터 내 지시에 따라 포를 쏜다!”

살아남은 미끼선 두 대가 반전해 포를 쏜다. 그와 동시에 매복해 있던 매복선 세 척이 튀어나와 압도적인 화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100문의 포가 창조신의 꿈속을 꿰뚫는다. 사전에 훈련시킨 대로 내 지시대로만 쏘게 하니 백발 중 구십 발이 맞는 미친 명중률이 나온다.

“쏴! 계속 쏴!”

우리의 허접한 차원 선박이 버티지 못할 때까지 포탄을 쏟아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갈타의 함대는 변변한 반격 한 번을 날리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차원 군도의 험난한 차원 격류를 헤치며 우리를 바짝 뒤쫓던 중에 대열 한가운데서 재앙 병기가 터졌다.

차원 격류가 밀려나며 거대한 거품을 만들고, 원시 차원 몇 개가 만들어졌다가 사멸할 정도의 막강한 위력. 그 주변에 있던 이들도 지금 살아도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닐 것이다.

지휘 체계는 날아가고 함선들은 격류를 따라 표류한다. 그런 와중에 뻥뻥 터뜨리는 우리 측의 차원 간 탄도포. 한 발 쏘아질 때마다 선박 하나에 구멍이 뻥뻥 뚫리는데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맨 정신이어도 허둥댈 수밖에 없는 격류 속에서 정신이 나가 버렸다면 어쩌겠는가? 계속 맞아야지.

“다 죽여 버려!”

포를 다 쏘고 나서는 무기를 빼어 들었다. 이번엔 특히 좀 많이 여러 개를 빼어 들었다.

후우우웅-

지난번 영혼의 고양을 느꼈던 이래로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모든 감각이 새롭다. 더 넓고 더 세밀하다.

내게 길든 모든 무기가 부르르 울리며 허공으로 떠오른다. 거인창, 파도, 악몽사슬, 어스퀘이커… 그게 끝이 아니다. 이번에 새로 산 무기들도 줄줄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구매한 이후 매일같이 휘두르고 닦고 만져 준 나의 무기들. 길들이기 단계는 이제 30퍼센트 될락 말락 안정 단계에 지나지 않지만, 무기 자체에 비행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공명해 웅웅 울며 내 손짓을 따라 떠올랐다.

귀여운 것들.

창처럼 길쭉한 것, 칼처럼 날카로운 것, 빔을 만들어 내는 것, 총처럼 쏘는 것, 방패처럼 넓은 것, 야구공처럼 둥근 것… 온갖 형태의 온갖 종류의 이세계 명풍 무기들이 내 손짓을 따르며 새하얀 아우라를 뿜어낸다.

48개의 명품 무기. 그 감각은 등골이 저릿한 충족감을 준다.

더 이상 포를 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진격! 백병전이다! 함선 하나씩 하나씩 확실히 몰살한다!”

쿠쿵!

다시 격류 속으로 달려든 우리 편 차원 선박들이 우왕좌왕하는 아갈타 함선의 옆에 가서 충돌한다. 강제로 게이트를 열고 그 안으로 달려든다.

“다 죽여!”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 48개의 무기를 동시에 다루고 내 손에 든 반월이로 적의 지휘관을 갈라 죽이면서도, 나는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리고 또.

서민서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무사할지…….

그 생각밖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 * *

“민서! 민서야!”

나는 허둥지둥 달렸다.

“민서야! 민서!”

하얗다. 벽도 복도도. 마음이 어지럽다. 생각할수록 불안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앙 병기의 파괴력이 너무나 엄청났다. 그 한 방으로 싸움이 결정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적들은 완전 정신이 나가다시피 했고 우리는 그 틈을 노려 일방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괴멸적인 타격을 준 재앙 병기를 떨어뜨린 서민서는 어떻게 되는 걸까?

“민서야!”

“네… 선배, 나 여깄어요. 머리 아파… 소리치지 마요.”

“민서……!”

이 자식…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근데 보고를 안 했어?

“다들 싸우느라 바쁜데 무슨 보고를 해요. 아후… 선배, 근데 그 피 칠갑을 하고서 지금 병문안을 온 거야? 미쳤어요?”

나는 서민서 앞에 섰다. 녀석이 뭐라고 조잘거리든 말든, 피 묻은 손으로 녀석의 머리를 헝클고 꽉 안아 주었다.

서민서, 이 빌어먹을… 예쁜 자식!

“미쳤다! 네 덕분에 대승을 해서 미쳐 버렸다!”

못해도 2개 연대에 해당하는 병력을 몰살했고, 3개 연대에 해당하는 병력을 반파했다. 물경 6,000에 이르는 적을 단 하루 만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상상도 못 했던 대승. 이제 자신할 수 있다. 이런 패배를 한 아갈타가 지구나 르누아에 관심을 둘 수 있을 리 없다. 이제부터 미쳐 버려서 정체불명의 해적 꽁무니를 찾아다니겠지. 해적으로서의 우리 활동은 더 빡빡해지겠지만…….

“이제! 분위기가 바뀔 거라고!”

지구와 르누아의 운신 폭은 상상을 초월하게 늘어나게 될 것이다. 아갈타는 지구와 르누아 인근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상실했다.

새 시대의 개막이었다.

* * *

고요하다.

권승리는 벌써 1주일째 이어진 평화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호륵.

이렇게 집에 앉아 차를 마시는 게 얼마 만인지.

가만히 차를 마시던 권승리는 문득 창밖을 보았다.

아니, 창밖의 하늘, 하늘 너머의 우주, 그보다도 더 멀리 어딘가를 보았다.

“…뭔 일이 벌어진 거겠지? 저 너머에서.”

마족들의 갑작스러운 퇴각과 1주일 넘게 이어진 뜬금없는 평화는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권승리는 궁금했다.

“저기에 뭐가 있길래…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소시민 사령관이라면 알고 있을까?”

왠지, 어쩐지, 소시민이 그렇게 기를 쓰고 지구 밖 다른 차원을 기웃거리는 이유를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고, 권승리는 그런 생각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