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잘됐어, 정말
스타십 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있다.
거기에 나오는 인간족은 유닛 하나하나의 힘은 아주 약하지만 뭉쳐서 진지를 구축하면 접근조차 하기 어려워진다.
그런 인간족을 무너뜨리기 가장 좋은 방법은 놈들을 넓은 곳으로 끌어내고 미처 자리 잡기도 전에 사방에서 덮쳐 단번에 싸잡아 먹는 것.
그게 지금 우리의 상황이었다.
독이 오를 대로 올라서 섬멸 태세를 갖추고 있는 아갈타와 바로 싸우는 건 곤란했다. 먼저 놈들을 끌어내고 최대한 먼 거리로 도주해서 놈들의 진형을 흐트러뜨린 다음 우리에게 유리한 장소에서 싸운다. 유인과 매복이라는 유서 깊은 전술.
이 전술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유인을 맡을 미끼였다.
미끼는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해도 괜찮을 만큼 전체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티가 나서는 안 된다. 겉으로 보기엔 혹은 순간 전투력만이라도 적이 주 전력이라고 착각할 만큼 그럴듯해야 놈들도 진형을 허물고 죽자 살자 따라올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빨리빨리 작업 마쳐!”
“아니, 아저씨! 거기는 도색 안 해도 돼요! 은신망토 같은 개인 장비로 쭉 까는 편이 더 해적 같아 보인다니까요?”
“한 번 쓰고 버릴 엔진이야! 속도만 잘 나면 되니까 호환성 생각하지 말고 추력만 키워!”
“포는 이쪽에 설치하면 될까요?”
“그래. 처음에 서너 발만 쓰고 땡이니까 탈착이 쉽게 박아 둬!”
그게 지금 용산 제2지역구와 루드비히 본가에서 차출된 장인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작업을 하고 있는 이유였다. 별빛이 끌고 온 차원 선단이 뚝딱뚝딱 해적선으로 개조되고 있었다. 알맹이를 보면 뗏목과 다름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하루 쓰고 버려야 하겠지만 순간속도만큼은 빠르도록.
“화랑단! 무장은 1번 무장으로 한다! 혼동하면 안 돼! 너희의 작은 실수 하나가 전 지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3,000만 타키온을 뿌려서 무장을 다변화한 화랑단. 아갈타에게 꼬리를 잡히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기 때문에 실수가 나지 않게 상황에 따라 바로바로 장비를 교환하는 훈련을 철저히 했다.
화랑단은 기파랑호와 크르으랑이 파견해 준 함대까지 총 3척에 나누어 타고, 나는 별빛과 함께 미끼 함대에 올라탄다.
별빛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같이 가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얘가 나를 뭘로 보고. 동맹 혼자 사지에 보낼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그리고 내가 미끼로 참여하는 것이 필수인 이유도 있었다.
“제가 지휘를 해야 그럴듯하게 보이죠. 창조신의 꿈결에 처음 나와 보는 분들이 어버버하다간 유인은커녕 순식간에 전멸당할 겁니다.”
나는 [만상공감]에 [자유]까지 펼쳐서 미끼 함선 5척을 모두 내 감각 안에 넣어 보았다.
‘잘되네…….’
잘되기는 하는데, 긴장이 가시지는 않는다.
이번 작전에서 제일 중요한 건 결국 나의 역할이다.
미끼라곤 하지만 고작 다섯 척이다. 원래라면 접근하기도 전에 먼저 탐적당하고 더 긴 사거리의 포로 먼저 얻어맞아서 창조신의 꿈속으로 가라앉는 게 당연한 싸움.
‘내가 변수를 만들어야 돼.’
[만상공감]으로 적의 사각을 찾고 [자유]로 최선의 길을 찾아내서 적의 탐적 시스템을 최대한 오래 속이며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만상공감]을 이용한 장거리 포격으로 보통이라면 맞힐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적을 때려야 했다.
긴장이 안 될 수가 없다. 벌써 어깨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래도 해야지. 해내야지.
몇 명의 목숨이 여기 달려 있는 건지 계산도 안 나올 지경인데… 해내야지.
그렇게 출정 준비가 막 끝났을 때 람시르가 내게 다가왔다. 아주 걱정스러운 얼굴로.
[괜찮겠어? 한판 붙으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이야. 너무 서두르는 것 아냐? 바깥 보니까 전력이 장난이 아니던데. 아무리 너라고 해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임무, 아갈타의 차원 요새에서 밀수선 스스피크를 구출해 오는 임무에 성공한 게 나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건 람시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이 그때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긴. 그때는 기습으로 물건을 탈취하는 임무고 지금은 결국 각 잡고 한판 붙자는 거니까.’
사이즈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어쩌겠나. 해야만 했다. 지구를 위해서도, 르누아 차원을 위해서도.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람시르는 결국 한숨을 푹 쉬며 아공간을 열었다.
“아오… 그렇다고 스스피크를 다시 빌려줄 수는 없고… 그래도 널 그냥은 못 보내겠다. 이건 너무 귀한 거라 나도 그냥 줄 순 없어. 안 쓰고 남으면 돌려주거나 쓰게 되면 나중에 꼭 갚아. 엄청 엄청 비싼 거다 진짜. 꼭 갚아. 이자는 안 받을게.”
그가 건넨 건 복잡하게 잠긴 십이면체의 상자였다. 람시르는 딱 한 번,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 상자를 여는 법을 시연해 보였다. 아주 복잡한 구조였다. 위에서 한 번 비틀고 오른쪽 각을 내리고 당기고 뽑고. 그렇게 열 단계가 넘는 조치를 취한 뒤에야 십이면체 상자가 열렸다.
딸깍!
휘리릭!
람시르는 상자가 살짝 열리자마자 열었던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다시 상자를 잠갔다.
다시 잠긴 상자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재앙 병기야. 진짜 전쟁에 쓰이는 물건이지, 운 좋게… 적진 한복판에 터뜨릴 수 있다면 엄청난 타격을 줄 거고, 그냥 위험할 때 놈들 쪽으로 던지기만 해도 추격을 따돌릴 순 있을 거야. 폭발에 정신을 못 차릴 거거든.]
재앙 병기?
눈이 저절로 크게 떠졌다.
‘이렇게까지 해 준다고?’
이건 좀 감동인데…….
진정한 친구가 되겠다는 람시르의 저의를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또 그는 실제로도 그 어떤 친구보다 더 헌신적으로 내 일을 돕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것까지 내줄 줄은 몰랐다.
나는 람시르를 가만히 바라봤다. 왜 이렇게까지 잘해 주는 건데?
람시르는 코를 쓱 닦고는 등을 돌렸다.
[아직 한참 남았어, 내가 너한테 진 빚을 갚으려면. 그러니까… 꼭 이기고 돌아와. 아, 그래도 그건 꼭 갚아라? 먹튀 하면 나 파산하는 거야!]
말은 파산한다고 걱정 가득한데, 정작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쿨하게 손 흔들고 가는 람시르였다.
나는 이 재앙 병기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보아하니 적진에서 정확하게 폭발시키는 게 중요한 병기.
‘그렇게 치면 이걸 다룰 사람은 한 명밖에 없는데…….’
하지만 나는 주저했다. 이건 너무 위험한 임무였다. 그 녀석에게 맡기고 싶지가…….
탁!
하지만 나랑 람시르의 대화를 다 들은 그 녀석은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재앙 병기를 내 손에서 채갔다.
“선배! 이건 내가 쓸게요. 놈들 머리 위에 정확하게 떨어뜨려 줄 자신 있어요.”
서민서였다. 이 녀석은 이게 뭔 줄 알고 그렇게 해맑은 얼굴인 거지?
“야, 너……!”
“괜찮아요. 나도 그동안 많이 늘었어.”
화르르-
서민서가 주먹을 드는데, 하얀 연기 같은 영력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내 눈이 커진다.
“구름 강기?”
인류 최초의 강기가 내 눈앞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서민서는 씩 웃었다.
“[점멸]은 훨씬 더 늘었어요.”
강기가 타오르는 손으로 엄지를 척! 치켜든다.
하얀 강기가 마후라처럼 서민서의 뺨을 간지르며 너울거린다.
“정확하게 놈들 정수리 위에 떨어뜨릴게요.”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나서는데 믿지 못하는 것도 우정은 아니었으니까.
“민서, 다 유인했다 싶으면 타이밍 봐서 크게 한 방 터뜨려. 그래야 미끼조가 전열을 재정비하는 거니까. 잘 부탁해. 내 목숨이 네 손에 달렸다.”
서민서가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겠다고 한 것 아니에요.”
탁! 서민서가 내 어깨를 쳤다.
왤까?
어쩐지 안심이 된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가 조금은 내려가고 말랑해진다.
* * *
창조신의 꿈결은 아주 고요하고, 동시에 아주 소란스럽다. 극도의 고요도 끝없는 소란도 모두 보통의 사람이 오래 감내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 두 가지 극단을 정신없이 오가는 이곳은 훈련이 아주 잘 된 사람이 아니라면 맨 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운 장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누아의 전사들은 침착을 유지하며 소시민의 명령을 기다렸다.
다섯 척의 함선을 아갈타의 차원 함대 쪽으로 천천히 몰아가던 소시민은 어느 순간 조종대를 놓고 함포 조준석에 섰다. 다섯 척 함선의 인원들이 일제히 숨을 멈춘다. 침묵. 침묵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와글! 하고 창조신의 꿈결이 소란스러워지던 바로 그 순간.
뻐어어어엉-!
함선이 후드드 흔들리며 강렬한 빛이 창조신의 꿈결 한구석을 찢어 놓는다.
“명중!”
소시민이 소리쳤다.
“전함! 자유 사격 하며 360도 회전! 3번 항로로 나선을 그리며 빠져나간다!”
소시민은 재빠르게 지시를 내리고 다시 한번 함포를 쏘았다.
뻐어어어엉-!
“명중!”
백발백중.
다른 함선에서 쏘는 포들은 허망하게 창조신의 꿈결 사이를 가를 뿐이지만 소시민의 포는 빗나가질 않는다.
끼익.
끼이익.
함포의 반동으로 인해 르누아의 차원 선박이 창조신의 꿈결 속에서 휘청거린다. 르누아의 전사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차원멀미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거나 버럭버럭 화를 내던 그 순간에도 소시민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세 번째 포를 또 쏘았다.
“명중! 이제 우리는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빠져나간다!”
재빨리 달려가 함선의 조종대를 쥐는 소시민. 그와 동시에 창조신의 꿈결을 흔들며 수십, 수백의 아갈타 함포가 날아들었다.
-!
--!
온 세상이 악다구니를 쓰는 것 같다.
그대로 모든 게 멸망할 것만 같은 싸늘한 공포가 주위를 가득 채운다.
하지만 소시민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설프게 회피 기동 하지 말고 그냥 밟아! 이대로 전속력으로 이탈한다! 아, 4번함은 좌회전! 다시 우회전!”
소시민의 지휘가 쉴 새 없이 떨어진다. 르누아의 전사들이 그 지휘를 최대한 따르려고 하지만, 이제 처음 차원 함선을 몰아 보는 그들이 제대로 운전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꽈릉-!
도시 하나가 무너져 내리는 감각이 온몸에 엄습하고. 3번함이 자취를 감췄다. 소시민은 이를 악물었다. [자유]를 통해 무려 10개의 평행 차원에서 최선의 결과만을 뽑아 봤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도 모두를 살릴 방법은 없었다.
누군가는 죽어야 다른 누군가가 살아남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르누아의 전사들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별빛 님! 저희가 다 죽어도 별빛 님은 사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별빛 님은 아직 ‘찬연燦然’도 피워 내시기 전이지 않습니까?]
찬연은 르누아 차원의 주민들에게 찾아오는 인생의 절정기라고 했다. 몸에서 활기가 꺼지지 않고 모든 재능과 가능성이 개화하는 황금기.
그 시기와 지속 시간은 사람들마다 모두 달랐다. 누구는 10살에 1개월, 누구는 20살에 6개월, 또 누구는 60살에 3년.
지구인들에게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안쓰러워하는 문화가 있었듯이 르누아의 주민들은 찬연을 맞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안타까워했다.
[빛의 후손이시니 분명 누구보다도 밝고 오래 빛나는 ‘찬연’이 찾아올 겁니다. 부디 그날 우리 르누아를 이끌어 주소서.]
어느 순간부터 르누아의 전사들은 소시민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설레고 기쁜 목소리로 통신을 보내며 아갈타 쪽을 향해 차원 선단의 방향을 틀었다. 무차별적으로 쏘아 대는 함포 때문에 아갈타의 진격이 살짝 늦춰지고, 가끔 마구잡이로 쏘아 낸 포탄이 아갈타의 함선을 때릴 때면 침몰하는 르누아의 선박에선 도리어 환희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렇게 한 척, 두 척 자꾸만 침몰했다.
매복 장소까지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르누아의 선박은 겨우 두 척에 불과했다.
이 모든 광경을 보면서도 별빛은 입술을 꾹 물었을 뿐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누군가 죽어야 다른 누군가가 살아남는 법.
별빛은 그저 자신이 살아남은 게 누군가의 희생 덕분임을 잊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지구에서 권승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후퇴? 왜 갑자기?”
오늘이야말로 방어선이 뚫리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피해를 한정하기 위해서 이미 수십 개 도시의 주민 대피도 이루어졌다.
그저 피해를 상정 범위 안으로 줄이기 위해 꺼져 가는 투지를 억지로 사르고 사르던 헌터들.
그런데 방어선이 무너지기 직전, 아갈타군은 갑자기 후퇴했다.
- 퀴니세인의 흉수로 추정되는 해적 발견! 고도의 명중률을 갖춘 차원 간 탄도포로 무장하고 있다! 전 병력 추격하라! 절대 놓치면 안 돼, 이 새끼들아!
무려 아갈타의 준장이 육성으로 내리는 무전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지만, 아갈타어를 모르는 권승리로서는 그저 눈만 끔뻑거리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권승리는 하늘을 한 번 보고 땅을 한 번 봤다.
얼결에 승리해서, 살아남아서 기뻐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권승리의 얼굴에 떠올랐던 의문은 차차 가라앉고, 대신 그 자리에 미소가 찾아왔다.
“잘됐다.”
그녀가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됐어, 정말.”
권승리로서는 되게 오랜만에 짓는, 기분 좋은 웃음이 입꼬리에 달라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