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51화 (151/212)

13. 살려 주십시오!

어린 시절엔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때가 다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당신에게 무관심하다. 당연히 될 거라고 기대했던 많은 것이 실패와 거절이라는 결론에 부닥친다.

우린 그렇게 서서히 한계를 배웠다. 천천히, 오랫동안 배운 것이기에 ‘한계’는 어느 순간 절대 넘어설 수 없는, 그리고 넘어서려고 시도하는 것조차 위험한 금기로 여겨지게 된다.

하지만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아, 진짜 한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먼 곳에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때.

그럴 때 사람은 감동한다.

신기록을 경신하는 올림픽 선수를 보며.

위기의 순간, 한계를 넘나들면서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기 할 일을 다 해내는 영웅들을 보며.

살면서 몇 번 맛보기 힘든 깊은 감동을 맛본다.

지금 소시민을 보고 있던 수백 명의 화랑단과 천여 명의 크레아 차원 주민들이 그랬다.

두쿵! 두쿵!

그중에서도 크르으랑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커다란 눈이 글썽거려서 크르으랑은 얼른 자기 눈을 손으로 덮었다. 그는 귀족이었고 감정만으로 움직이면 안 되는 자리에 있었다.

감정과 이성이 모두 납득을 했으니 이 자리에 온 거지만, 지금 소시민의 제안대로 배 한 척을 버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대단하다. 대단해. 그건 분명 인정한다. 하지만… 저기서 배를 끌고 나오는 건 다른 문제야. 설령 내가 배 한 척을 희생하면서까지 퇴로를 열어 준다고 해도 그 큰 배가 저 이계화망을 뚫고 나온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맨몸으로 포화를 뚫고 들어가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거대한 밀수선을 달고 그 포화를 다시 뚫고 나온다는 건 훨씬,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다가는 퇴로를 열던 이들과 함께 나란히 전멸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계획.

하지만…….

하지만……!

소시민은 그 위험천만한 계획을 위해 홀로 뛰어들었고 심지어 돌파를 성공하기까지 하지 않았나?

크르으랑이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따라온 가신과 부하들이 보였다. 다들 눈시울이 붉었다. 뜨거운 눈빛으로 크르으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거친 호흡과 곤두선 털이 보였다.

크르으랑은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내가 뭘 고민하고 있냐.’

귀족이란 응당 현실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역시 귀족이기 이전에 크레아 차원의 주민.

‘여기서 물러서면 크레아의 호랑이가 아니지.’

[3번함! 돌격 준비! 우리도 요새 내부로 진입한다! 추락을 감수하고 들이받아 버려! 착륙 즉시 주변 대공포를 박살 내고 소시민의 탈출을 돕는다! 내가 직접 3번함으로 간다!]

동시에 화랑단이 타고 있던 기파랑호에서도 통신이 왔다.

- 화랑단 총원 307명. 합류합니다. 3번함으로 가면 됩니까?

[빨리 와라.]

크르으랑은 으르렁거리며 그 자신도 서둘러 3번함으로의 이동을 준비했다.

* * *

서민서가 휘오의 가지를 통해 보고했다.

- 선배-! 크르으랑과 함께 돌격 중입니다. 최대한 많은 대공 포대를 박살 내고 있을 테니까 나갈 때 잊지 말고 우리 다 챙겨서 가요? 선배가 안 챙겨 가면 우리 죽는다는 건 알죠?

“오,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네? 크르으랑 아저씨 역시 뜨거워. 알았어! 금방 끝내고 갈게! 수고 좀 해 줘!”

직접 보여 주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아서 일단 몸부터 던지고 봤는데, 이렇게나 빨리 반응해 줄 줄은 몰랐다.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오래 기뻐할 시간은 없었다. 차원 요새 내부로 진입했다고 해도 여전히 적의 저항은 거셌으니까. 차원 바깥을 겨누고 있던 딜레이 샷이나 스톰 샷, 킬 샷 같은 것들은 이제 없지만, 비교적 소형 화기로 쏘아 내는 랜덤 샷은 오히려 더욱 예리해진 정확도와 압도적으로 늘어난 물량으로 나를 압박했다. 광역시 크기만 한 지름을 가진 거대한 성 전체에서 나를 향해 랜덤 샷이 쏟아진다.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광주광역시의 시민 전원이 벌컨포 하나씩을 끼고 하늘을 향해 대공화망을 구축하는 것과 같았다. 그 정도면 최신예 스텔스기라도 쪽 한 번 못 쓰고 격추되고 말 것이다.

‘물론 나는 격추되지 않지.’

난 고작 최신예 스텔스기에 비할 바가 아니니까.

물론 놀라긴 했다. 아니, 대체 아갈타 놈들은 보급 인원이나 민간인 하나도 없는 건지… 차원 요새에 수용 가능해 보이는 모든 인원이 전원 랜덤 샷을 쏘아 버리는 느낌이라 당혹스러웠지. 하지만 그걸로도 나를 막을 수는 없다.

“읏… 차!”

날개 한쪽을 접는다. 빙글 뒤집히는 시야. 그리고 날개 끝을 살짝 튕기면 파아아앙! 하고 땅을 향해 가속하는 몸. 앞을 가로막는 건 파도가 알아서 가르고, 거인창이 꿰뚫고, 어스퀘이크가 날리고, 그러고도 남는 건 반월이로 갈라 버린다.

쿵-!

그렇게 짧은 비행 끝에 나는 마침내 땅을 밟았다. 마침 차원강습 장비를 걸친 정규군 하나가 보이길래 착지와 동시에 반월이를 휘둘러 두 조각을 냈다.

[힉! 히이이익!]

[꺄아아아악!]

그리고 나는 정말 생소한 풍경을 보았다.

‘아갈타 놈들이 겁에 질려 도망간다고?’

한 놈 한 놈이 명예욕에 잡아먹힌 괴물들이고, 전체를 위해 자기 목숨 하나 초개처럼 버리는 데 아주 주저함이 없는 놈들 아니었나?

‘아니 잠깐… 설마 쟤네 민간인인가?’

랜덤 샷을 쏘아 내기 위한 무장은 했지만, 아갈타의 정규군이라면 누구나 착용하고 있는 차원강습 시스템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얼른 도망치는 아갈타인 하나를 사로잡았다. 살짝 잿빛이 도는 피부색. 전형적인 아갈타인의 모습을 한 남자였다.

잡아서 무기를 다 뺏고 주저 앉혀 놓자 벌벌벌 떤다. 하지만 휙! 하고 두 조각이 나 죽은 아갈타의 병사를 볼 때와 다시 휙! 하고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강렬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그제야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아갈타 놈들한테 아무리 민간인이라고 해도 뭘 기대한 거야? 이제 차라리 죽이라고 악을 쓰겠군.’

정보를 좀 빼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갈타 놈이 고문을 한다고 쉽게 입을 열 리도 없고… 그냥 죽이고 빨리 지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사로잡힌 아갈타 남자는 독기를 가득 담은 눈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 이 요새에 대해 궁금하신 건 없습니까? 제가 다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어, 어어?

탕탕!

아갈타 남자가 바닥을 거칠게 두드렸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저랑 제 친구들이 만들었습니다. 부역에 끌려다니느라 안 가 본 곳이 없습니다. 왜 여기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잘 안내할 수 있을 겁니다. 살려 주십시오.]

“…너, 아갈타인 맞아?”

그제야 남자는 악을 썼다.

[아갈타인 맞습니다! 군부 개자식들에게 짐승처럼 부림받고 사는 평범한 아갈타인 맞습니다! 그러니 살려 주십시오!]

두 가지에서 놀랐다.

하나는 아갈타인이 목숨을 구걸했다는 사실에.

둘째는 목숨을 구걸하는 주제에 초보 강도처럼 독기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에.

* * *

강철기사회 소속 1급 기사이자 화랑의 일원이 된 토마스는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저거 민간인이지? 차원강습 장비 없이 독한 표정으로 랜덤 샷 쏘고 있는 놈들.”

지독한 싸움이었다.

무슨 외계 전함 같았던 거대한 차원 함선으로 그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차원 요새를 들이받았고, 결국 벌집이 되어서 불시착했고, 화랑단과 크르으랑의 부하들은 그 와중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차원 요새 내부에서 백병전을 시작했다.

이것만 해도 지독한데, 아갈타 놈들은 이 지독한 적들에게 맞서서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또다른 지독함을 보여 주었다.

토마스는 혀를 찼다.

“진짜 독하네. 민간인은 민간인대로 끝까지 항전하고, 군인들은 군인들대로 이 와중에도 끝까지 민간인들을 지키고.”

전황이 불리해지면 잠깐 전선을 뒤로 뺄 수도 있는 건데, 아갈타 놈들은 그러질 않았다. 끝까지 제자리를 고수하다가 전멸했다. 처음에는 왜 무식하게 저런 짓을 하는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런 때마다 그 후방에 민간인들이 밀집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런 게 진짜 기사도지.”

강철기사회의 1급 기사로서 적이지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훈훈하게만 넘어가기엔 전황은 너무나 좋지 않았다.

“그나저나 끝도 없이 쏟아지네…….”

간신히 하나를 베어 넘기면 또 다른 하나가 나타난다. 여태 가장 치열했던 전투에서도 토마스가 죽였던 적의 수는 최대 3명. 그런데 벌써 3명을 죽이고 또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심지어 그 뒤에 또 다른 하나가 더 보였다. 이미 지친 상태에서… 좋지 않았다.

꾸우욱-!

토마스는 바스타드 소드 형태의 성검을 두 손으로 꾹 쥐었다. 그의 팔이 부풀며 야수화를 일으킨다.

‘일격에 죽인다.’

영력을 많이 소모하겠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놈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결코 꺾이지 않는 신념!”

강철기사회의 비기를 영능학적으로 재해석한 기술. 솟구치는 블레이드 오러가 차원강습병의 외장갑을 찢으면 쭉- 뻗는다. 하지만.

‘큭! 얕았다!’

너무 지친 탓일까? 그 찰나의 순간에 아갈타의 차원강습병이 반응했다. 외장갑을 찢고 치명상을 입혔지만 곧장 전투 불능이 되지는 않았다. 뿔 세 개가 달린 슈트를 입은 차원강습병은 눈에서 붉은 광망을 터뜨리며 토마스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같이 죽겠다는 결의가 느껴진다.

‘아, 안 돼!’

다행히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노래 군단 출신의 에른스트가 나타났다.

푹!

얇은 에페가 그 끝에 극도로 응축된 블레이드 오러를 품은 채 아갈타 병사의 목에 담겼다가 빠져나온다. 꿍! 차원강습병은 도축된 소처럼 턱부터 땅으로 엎어져 일어서지 않는다.

토마스는 고맙다고 인사하기도 전에 외쳐야 했다.

“조심해! 뒤에 쫓아오는……!”

하지만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쫓아오는 뭐?”

꾸우우웅!

쫓아오는 적이 있었는데… 없었다.

강렬한 폭발과 진동. [폭발]의 초능력을 휘두르는 이 남자는 단 한 번 워해머를 휘둘러 쫓아오던 차원강습병 하나를 으깨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에른스트가 눈을 깜빡이곤 말했다.

“이오닌이 1등. 내가 2등. 토마스가 3등.”

토마스가 발끈했다.

“내가 왜? 양념 다 해 놨더니 와서 주워 먹은 작자가 있던 것 같은데?”

“살려 줘도 난리네.”

그렇게 서로를 타박하며 잠시 전우애를 과시하던 셋은 다시 심각한 표정이 되어 서로서로 등을 기대고 삼각 진형을 이루었다.

적들이 또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엔 다섯이다. 문제는 이쪽이 다들 지친 상태라는 것이다. 안 그래도 지쳤는데 토마스를 구하겠다고 힘을 단번에 쏟아 내는 바람에 이젠 어깨가 들썩이고 칼끝이 흔들릴 정도로 지쳐 버렸다. 어쩌면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세 사람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입으로는 셋 모두 하나같이 웃었다.

“자, 와라!”

토마스가 화랑의 기백을 담아 외쳤을 때.

크르허어어어어엉-!

그 기백을 단숨에 뭉개 버리는 거대한 사자후… 아니, 호랑이의 울음이 전장을 휩쓸었다.

삐이이이이-

영력으로 보호받는 청력이 망가져서 이명이 들릴 정도의 압도적인 기세.

피아를 막론하고 괴성이 들린 장소로 시선이 향한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의 미남자가 서 있었다.

크르으랑이었다.

호랑이 귀에 호랑이 꼬리를 쫑긋 세웠다.

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거대한 도끼 형태의 성검 두 자루를 각기 한 손에 들고 날뛴다. 백자와도 같은 맑은 강기가 도끼 끝에 어리운다.

아갈타의 병사 중 하나가 중얼거린다.

[달빛강기…….]

하지만 놀람도 잠시, 곧 아갈타 병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이런 미친! 마, 막아!]

[뚫어! 뚫어!]

크게 울부짖은 크르으랑이 전선을 훌쩍 뛰어넘어 아갈타 민간인들이 밀집한 곳의 길목을 딱 장악했기 때문이다. 크르으랑의 뒤를 따라 그의 가신들과 화랑단의 간부들이 전선을 뛰어넘었고, 민간인들 사이에 포진하고 있던 아갈타의 정규군들을 학살했다.

[뚫어!]

아갈타의 병사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다가가는 족족 크르으랑의 도끼에 걸려 곤죽이 된다. 구름강기를 다루는 위관급 장교들은 두 토막이 나고, 별빛강기를 다루는 대위 혹은 소좌급 장교는 팔다리가 잘린 뒤에 다시 목이 잘린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크르으랑의 머리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무겁게 흘러내리는 핏물에도 곤두선 흥분으로 머리칼과 쫑긋 솟은 호랑이 귀는 가라앉지 않는다.

[더 없나?! 더 없나! 지나가 봐라! 크르으하하하!]

그 뒤에 밀집해 있던 민간인들은 모두 무기를 내던지고 항복할 때까지 아무도 크르으랑을 넘어서지 못했다.

심지어 항복한 민간인들 앞에 데미안과 서민서가 나서서 몇 가지 약속을 주고받을 때까지도 아무도 크르으랑을 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고 나자 전세가 역전되었다.

“어……? 저게 뭐야?”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토마스가 넋을 잃을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쾅! 콰콰콰쾅!

[으악!]

[빌어먹을! 이래서 군인도 되지 못한 천것들은 다 죽여야……!]

쿠쿵! 쾅!

[낙오자들에게 무기를 주는 영광을 줬더니 감히 배신……!]

아갈타의 병사들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방금 전까지 독한 얼굴로 화랑단과 크르으랑의 수하들을 향해 랜덤 샷을 쏘던 민간인들이 갑자기 총구를 거꾸로 돌려 아갈타의 정규군들에게 랜덤 샷을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까와 똑같은… 아니, 아까보다 더 지독하게 진짜 살심이 어린 표정으로.

[뒈져라! 개자식들아!]

잔뜩 신이 난 듯한 어떤 민간인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아련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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