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너무 성급했죠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이 차원 요새의 ‘이계화망’에는 구멍이 없다. [만상공감]이 그 사실을 확실히 알려 주었다. 달려드는 순간 절대 피할 수 없는 포격이 나를 휩쓸 것이다. 그렇다고 그걸 몸으로 받으면서 나갈 수도 없다. 3초도 지나기 전에 가루가 되어 버릴걸?
즉, 돌파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에겐 불가능한 결말을 가능케 하는 위대한 물건이 있지.
‘세계수의 걸음, 잘 부탁해.’
지구에서도 제일을 다툴 만한 신발 장인 송일이 모두가, 무르물랑조차 놀랐던 인챈터인 케사리니 아몬의 설계대로 만들어 낸 신발.
세계수는 본디 어떤 세계에서는 신으로 인정받던 태고의 존재이다. 그런 존재의 후예인 휘오의 잎사귀로 만든 몸체는 만지면 묻어날 것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칼로 그어도 그저 눌렸다가 되돌아올 정도로 질기고 탄력적이었다. 216개의 부속이 복잡한 기계장치처럼 결합되어 위대한 인챈트를 담아낼 그릇으로 완성되었고, 그 위로 아몬의 인챈트가 완벽하게 부여되면서 혼연일체가 되었다. 작품이라 불러 마땅한 물건이다.
그 위로 화르륵 백색의 아우라가 타오른다. 마침내 100% 완벽 단계로 길들인 세계수의 걸음이 [만상공감]과 교감하는 순간, 본래 인챈트되었던 한계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진정한 기적이 일어난다.
후욱- 후우우- 하고 발밑의 신발이 작은 짐승처럼 숨을 크게 마시고 내뱉는다고 느끼는 그 순간, 나는 중얼거린다.
“자유.”
이 감각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우주가 탄생하는 느낌? 빅뱅과 함께 시공간과 모든 것이 함께 태어나던 그 순간의 감각이 이와 유사했을까?
아무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나만이 느끼는 폭발이 일어난다. 한순간, 이 세상은 다섯 개의 평행 세계로 분화되었다. 누군가가 이 다섯 개의 세계를 동시에 관측해 내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부수지 못할,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다섯 개의 세계. 난 이제 이 다섯 개의 평행 차원 중에서 최선의 결과만을 취사선택할 수도 있고 평행 세계 간의 간섭을 일으켜 원래라면 불가능했을 결말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럼 확인해 볼까? 너희의 포격이 나를 떨어뜨릴 수 있는지 없는지.
나는 차원함의 밖으로 몸을 날렸다.
[잠깐! 맨몸으로 나간다고? 차원강습 시스템도 없이? 안 돼! 이건 미친 짓……!]
크르으랑의 목소리가 뒤따라오다가 창조신의 꿈결에 휩쓸려 흩어졌다.
창조신의 꿈결.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이곳에선 시각도 청각도 모두 의미가 없다. 눈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동시에 보이다가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듣는다면 모든 것이 동시에 들리다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장소. 총천연이자 암흑으로 가득한 장소.
하지만 나는, [만상공감]은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느낀다. 때문에 나는 창조신의 꿈속에서도 결코 방향을 잃지 않는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아갈타의 차원 요새. 그곳을 향해 아루카의 날개를 펼쳤다. 영력을 흠뻑 빨아먹은 아루카의 날개에도 완벽 단계에 이른 백색 아우라가 타오른다.
‘그간 화랑단만 강해진 건 아니거든.’
이미 반월이를 제외한 내가 가진 모든 장비를 다 완벽 단계로 길들였다. 아루카의 날개가 원래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차원 간 비행을 시작한다.
고요한 비행,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그렇게 어느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끼이이이이-!
창조신의 꿈결을 흔들며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나를 포착한 아갈타의 차원 요새는 경고 방송도 없이 포격을 시작했다.
온 세상을 다 뒤덮는 듯한 포격들. [만상공감]에 잡힌 감각은 기계식 시계처럼 아주 섬세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살인 기계와 같았다.
‘포탄의 종류가 다 달라. 무르물랑에게 이론으로만 배웠던 게 여기 다 있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건 ‘딜레이 샷’.
속도가 느리지만 가장 많이 발사된다. 아니, 발사라기보다는 뿌리는 것에 가깝다. 속도가 느려서 무시할 수도 있지만, 이 병기의 진가는 조금 느리고 조금 빠르고 하는 속도 조절을 통해 최종적으로 무수하게 많은 포탄이 동시에 표적을 때린다는 점이다. 내가 넘어야 할 첫 번째 관문이었다.
처음에는 아루카의 날개를 빠르게 휘저어 곡예비행으로 피해 냈다.
목표는 단 한 대도 맞지 않는 것. 저걸 한 대 맞으면 추가로 두 대, 다시 네 대는 더 맞게 되고 점점 더 수세에 몰리는 패턴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치명적일 터.
‘근데 내가… 실수를 할 리가 없잖아?’
[만상공감]이 그랬다. 세상 모든 것의 감각을 완벽하게 느끼는 그 이상으로, 내 자신에 대한 감각도 그렇다.
전설적인 피겨 선수도 트리플 악셀을 성공할지 못 할지는 뛰어 보아야 아는 것이지만, 나는 뛰기 전에 이미 안다. 내가 할 수 있다는걸.
깃털 하나 차이로 날개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딜레이 샷의 광포한 영력이 탄산처럼 짜릿하다.
“안 맞지.”
빙글. 뒤집어서 날다가 날개를 활짝 펼쳐서 회전문처럼 제자리를 휘릭 돌고, 나비처럼 흩날리며 딜레이 샷을 피해 낸다.
“워우. 안 맞는다니까?”
하지만.
“근데… 타이밍 자비 없네.”
맞지는 않지만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했다. 아니, 오히려 조금씩 뒤로 밀리는 기분인데?
‘오… 포잡이가 누구지? 대공화망이 완전 예술인데?’
딜레이 샷은 빈틈없이 내가 나아가야 할 경로를 막아서고 나를 압박했다. 완벽하게 맞물린 구조는 [만상공감]으로 다 보아도 파고들 구멍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 입가엔 오히려 미소가 진하게 어렸다.
[자유]가 활약할 시간이었으니까.
화르르륵!
세계수의 신발이 내 영력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면 다섯 개의 평행 세계가 서로 간섭을 일으킨다. 물결 두 개가 만나면 두 물결이 합쳐져서 전혀 새로운 물결이 되듯이, 서로 다른 평행 세계의 간섭은 필연적으로 포탄 경로를 이상한 방향으로 휘어지게 만들었다.
나를 노리고 압박해 오던 포탄들이 순간 휘청이며 폭발을 일으킨다.
꽝! 콰쾅!
꽈과광!
말이 좋아서 포탄이지, 사실은 파괴적으로 가공된 영력 덩어리들. 잘못 걸려들었다간 분자 한 톨은커녕 영혼 한 조각조차 남기지 못할 흉악한 폭발이다.
근데 왤까? 왜 자꾸 웃음이 그치지 않지?
“아, 짜릿해.”
포탄의 완벽하게 계산된 각도. 잘 만들어진 영력 포탄 그 자체의 에너지 구성. 그 무엇 하나 심심한 맛이 없다. 평생 기본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거장이 요리한 듯한 빈틈 하나 없는 밸런스!
심지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콰과과과광!
‘딜레이 샷’ 사이에 섞여 있던 ‘스톰 샷’이 사방을 흔들었다. 스톰 샷은 속도는 느리지만 강력한 폭발과 폭풍을 일으켜서 내 움직임을 방해했다. 저것에 흔들려서 휘청이다가는 딜레이 샷에 떠밀려서 저승까지 가는 거겠지.
하지만 포탄 그 자체라면 몰라도 고작 여파 정도라면.
쓰르릉-!
반월이가 맑은 검명을 울리며 긴 호선을 그렸다. 나를 흔들기 위해 쏟아지던 폭풍이 쭉 갈려 나간다. 아, 이 푹신한 손맛! 참치 뱃살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맛은 아주 진하고, 그 뒤에 와사비 같은 매운맛을 감추고 있다. 스톰 샷. 강력하면서도 우아한 포탄이었다. 가를 때마다 달라붙는 손맛에 탄성이 터져 나온다. 잘 만든, 훌륭한 물건이다.
‘갈 때 포랑 포탄들 좀 챙겨서 가자.’
얼른 차원 요새로 진입하고 싶어졌다.
스톰 샷의 여파로 이리저리 출렁이는 창조신의 꿈결 속에서 나는 다시 아루카의 날개를 펼친다.
피이잉-!
그런데 그 잠깐의 틈을 노리고 쏘아지는 포탄이 또 있었다. 느끼는 순간 이미 눈앞에 당도해 있는 미친 속도. 쏟아지는 포탄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암살자, ‘킬 샷’이었다.
쩌어어엉-!
이건 피할 시간이 없었기에 전투 망치 어스퀘이크를 꺼내 후려쳤다.
그 즉시 눈살이 팍! 찌푸려졌다.
“뭐야? 이건 왜 이렇게 밍숭맹숭해?”
딜레이 샷에서 증명된 탄탄한 기본기. 스톰 샷에서 보여 준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파괴력. 다 어디로 갔지? 정작 메인 메뉴가 왜 이래?
별빛강기를 깨부술 때의 그 짜릿한 손맛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이 밍숭맹숭한 킬 샷이 도무지 납득되질 않았다.
“차라리 좀 더 느리더라도 더 은밀하든가! 아니면 아예 은밀하지 않고 차라리 더 빠르거나! 그것도 아니면 송곳처럼 꿰뚫는 파괴력이라도 있든가! 이 맛도 저 맛도 아니고 이건 뭐야, 대체?”
쩡!
쩌정!
어스퀘이크로 쳐 낼 때마다 소리만 요란하지 실상은 맥아리 없이 픽픽 튕겨져 나갈 뿐이다.
팡! 파팡!
차라리 소형 화기로 아무렇게나 쏘아 대는,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랜덤 샷’이 더 의외성의 재미를 줄 정도였다.
“하……! 좀 더 분발해 보라고!”
나는 이를 악물고 아루카의 날개를 크게 한 번 내리치며 한층 가속을 더했다. 저 앞이 차원 요새다. 이제 절반쯤 왔다. 나머지는 이제 단숨에 돌파한다!
* * *
- 아아, 성급하네요. 저러면 안 되죠!
밀수꾼들 사이에서 밀수 정보상을 자처하는 인간형 종족 제노츠니는 안타까움의 탄식을 내뱉었다.
- 정말 안타깝습니다! 기세 좋았었거든요. 아, 역시 차원 요새를 뚫고 탈환을 하는 건 너무 무리였나요.
밀수와 관련된 이슈가 있는 곳에 직접 찾아가 생중계를 하는 제노츠니. 그는 얼마 전 아갈타에게 나포당한 배를 되찾아 달라는 말도 안 되는 도움 요청을 실제로 수락한 이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여기까지 한달음에 날아온 건 그의 프로페셔널한 성격상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실력은 정말 대단했는데.’
창조신의 꿈결 속에서 느낀 기세도 엄청났지만, 탐적 시스템에 잡힌 구체적인 모습은 정말 소름 돋는 것이었다.
제노츠니는 생중계를 통한 정보 공유를 주업으로 삼고 있었고, 그만큼 그 누구보다 최신의 탐적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었다. 단순화된 기호로 간단하게 표시되는 게 아니라 그래픽 효과끼지 들어간 탐적 시스템. 덕분에 소시민의 전투 장면을 더욱 실감 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차원 요새가 뿌려 대는 딜레이 샷의 위용에 입을 쩍 벌렸다. 포탄이 너무나 많아서 구름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저걸 어떻게 뚫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소시민이 그 사이를 날며 곡예비행을 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어? 이거 정말 뚫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인 비행.
하지만 그 이후 소시민이 성급하게 속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며 현실로 돌아왔다.
- 딜레이 샷이 전부가 아니죠. 스톰 샷에 킬 샷까지 있어요. 이건 아니죠. 지금 딜레이 샷도 제대로 못 뚫고 밀려나기 직전인데 도리어 속력을 높이다니요? 이건 그냥 머리 내밀고 죽겠다는 건가요?!
제노츠니는 그렇게 확언을 했다.
그랬기에 그 뒤에 일어난 광경을 보며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 어… 어찌했누?
그의 방송을 보던 밀수꾼들 역시 끝도 없는 물음표를 던져 댔다.
소시민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그 빼곡한 포탄의 구름이 갑자기 폭발을 일으켰다. 소시민이 피하면서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니면 포탄들이 오작동을 일으켰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갑자기 포탄들이 궤도를 이탈하며 폭발했고 소시민의 앞으로는 길이 활짝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노츠니는 돌파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 하, 하지만 스톰 샷이……!
스톰 샷의 폭풍이 단칼에 잘려 나갔다.
- 킬 샷이……!
소시민에게 닿지도 못하고 부서졌다. 그러곤 속도를 더 높인 소시민은 순식간에 차원 요새 내부로 진입해 버렸다.
멍… 하니 있던 제노츠니는 쏟아지는 밀수꾼들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제노츠니는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섬주섬 아공간을 열었다.
- 아, 제가 실은 미리 숨겨 놨던 스파이 정령이 하나 있습니다. 차원 요새 내부로 진입한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스파이 정령이 보내 주는 영상을 보도록 하죠.
제노츠니의 관자놀이에서 땀이 한 줄기 주르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