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49화 (149/212)

11. 호랑이는 참을성이 좋지 않았다

[만상공감]으로 크르으랑의 감각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화가 난 건지 뭔지, 덜컹거리는 가슴의 울림을 꾹 누르고 차분한 분노를 가장해 내게 말했다.

[개떡? 먹지도 못할 쓰레기 음식 같다고? 100년을 바라보고 50년을 목표로 한다는 내 말이? 그 말 굉장히 부주의하군. 현실감이 없는 건가 아니면 책임감이 없는 건가? 너도 너의 고향에서는 귀족 계급일 것 아닌가.]

크르으랑은 침착함을 가장하고 말했다. 오늘의 콘셉트는 냉철하고 현실적인 귀족인 모양인데… 그래 봤자 몸은 정직하다. 가령 내가 이렇게 한 번만 긁어도 움찔! 하고 반응이 오지.

“웃기지 마. 네가 정말로 백 년을 기다릴 수 있다고?”

예의 따위 집어던지고 반말을 했다. 태연한 척, 냉철한 척, 그 꼴이 보기 싫었으니까.

크르으랑은 멈칫 말이 없다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큰일을 도모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호랑이 귀는 살짝 처졌고, 호랑이 꼬리도 낮게 깔려 갈팡질팡 흔들렸다.

아무리 봐도 아니다. 저 호랑이는 100년을 기다리다가 본인이 먼저 속병 들어서 죽을 거다. 나랑 똑같았다.

실은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 것 아닐까? 어째서인지 크르으랑은 나를 필사적으로 설득하려고 했다.

[흥! 이걸 봐라.]

화아아악-!

크르으랑이 손을 펼치자 주위가 살짝 어두워지고 별 같은 것들이 자욱하게 떠올랐다.

‘뭐지?’

크르으랑에게 물어보려는 순간 저절로 알 수 있었다.

- 900넘버링 코어 팝니다.

- 미크론 차원 밀수 후기.

- 급구! 창공소 백 마리 삽니다.

- 생중계) 캐디아 차원의 내전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 도움!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지만 곧 알 수 있었다. 이건 일종의 게시판이었다. 사방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자신이 품고 있는 내용을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 하나하나가 일종의 게시글이었다. 특정 별에 집중하면 게시자가 남긴 메시지를 오감과 육감을 통해 다채롭게 체험할 수 있었다. 특정 검색어를 떠올리면 별들이 우르르 날아서 검색어별로 정렬되기도 했다.

크르으랑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게 바로 네가 들어가고 싶어 하는 밀수꾼들의 네트워크다. 물론 이 무한한 세계에는 이런 네트워크가 셀 수도 없이 많지. 하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거대 네트워크다. 1,000개가 넘는 차원에서 활동하는 1만에 가까운 밀수 조직이 참여하고 있지. 그런데 봐라.]

크르으랑은 손을 쭉 뻗어 빨간색으로 빛나는 별들만을 한쪽으로 모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붉은색 별이 의미하는 바는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 도움! 타키온 채굴을 위한…….

- 도움! 차원 격류에 의한 조난…….

- 도움! 아갈타 정규군에게…….

- 도움! 펜네부리 차원의 정규군에게 쫓기는 중!

하나같이 도움을 요청하는 게시글들.

근데 그중 시선을 잡아 끄는 게 하나 있었다.

‘아갈타?’

반짝이는 붉은 별에게 시선을 집중하자 자세한 상황이 텔레파시 형태로 머릿속에 들어온다. 시각, 청각, 촉각, 심지어 후각과 미각은 물론 약간의 육감마저 포함하고 있는 그 정보는 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갈타에게 밀수 선박을 나포당했다고? 그리고 그 안에는 중요한 제조 시설이 있다? 하지만 밀수 선박만 되찾아 준다면 그 안에 있는 적재물들과 시설까지 넘기겠다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크르으랑이 말했다.

[안타까운 사연이지. 누가 정규군이 얽힌 문제에 도움을 주겠나? 심지어 이미 아갈타의 요새로 끌려갔으니 게임 끝이다. 게시자도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속이 쓰리니 혹시나 해서 올리는 것뿐이지 기대같은 건 안 할 거다.]

“그… 래? 그런데 애초에 아갈타는 왜 남의 선박을 막 나포하는 거야? 밀수업자라서?”

[그 게시글 작성자는 나도 좀 안다. 그냥 밀수업자가 아니라 아주 유명한 밀수꾼이었다. 거대한 밀수선을 끌고 다니며 그 안에서 영자분열에 쓰이는 핵심 소재인 귀령용액을 만들었지.]

응? 귀령용액이 뭐야?

내 표정을 본 크르으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귀령용액을 모른다고?]

미안하지만…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결국 원시 차원 지구에서 온 촌사람이니까.

크르으랑의 얼굴에 잠시 당황과 경멸 같은 게 어리는가 싶더니 다시 표정을 고치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신살급 병기나 멸세급 병기가 뭔지는 알겠지?]

그건 알았다. 아몬에게도 들었고 무르물랑에게도 들었다. 그런 게 있으면 지구의 자립이 가능하다고 했던가? 하지만 아주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지구를 잘 키워서 믿을 만한 차원에 합병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었다. 그 편이 더 현실적이기는 하다.

[귀령용액은 신살급 병기나 멸세급 병기를 만들기 위한 핵심 자원 중 하나다. 저자는 그걸 팔아넘기던 거물이었다. 자원을 만드는 시설 자체가 계속 이동하는 밀수선 내부에 있다 보니 그간 단속을 따돌리고 승승장구했는데… 결국 잡혔군. 아갈타 차원… 최근 들어 이름이 들리기 시작하던데 만만치 않다.]

하여튼 아갈타 놈들, 쓸데없이 성실해서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근데… 귀령용액 밀수? 지구로 따지면 우라늄을 가공해서 여기저기 몰래 팔아먹는 것쯤 되는 건가? 그 정도면 이미 ‘밀수’라는 범주를 벗어났다. 거물이라고 불릴 만도 하다.

[하지만 봐라. 그런 거물조차 정규군에겐 저렇게 자기 배를 나포당했다. 그만큼 만만치 않은 세계라는 거다. 오랜 세월 쌓아 올린 노고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지. 이제 알겠나? 남들의 눈을 피해 힘을 기른다는 건 지독히 어려운 일. 50년이 목표지만 설령 100년이 걸리더라도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지도자는 언제나 현실을 보아야 한다. 이상은 품는 것이지 보는 게 아니다. 너처럼 눈 멀지 않으려면 말이야.]

크르으랑이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아래로 처졌던 귀와 꼬리도 슬며시 다시 일어선다.

‘보아라. 이게 현실이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라고 말하고 싶은지 나를 깔보는 듯한 눈빛이 아주 거슬린다.

그래요,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크르으랑 씨.

근데요. 왜 이상하게 당신의 가슴은 답답하고 손발은 묶인 것처럼 무거울까요?

역시 난 크르으랑의 말을 한 마디도 못 믿겠다.

호랑이란 짐승은 원래 참을성이 없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단군신화 보면 웅녀한테도 지잖아.

심지어 100일도 아니고 100년?

한번 확인해 보자.

“그럼 저 도움 요청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어때?”

크르으랑은 대답이 없었다. 귀로는 내가 한 말을 들었지만 머리로는 그 의미가 접수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냥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던 크르으랑.

하지만 내 말을 먼저 이해한 건 크르으랑의 머리가 아닌 그의 가슴이었다.

두근! 두근!

답답하던 심장이 시원하게 뛴다. 묶여 있는 것처럼 무겁던 팔다리에 팽팽하게 힘이 들어간다.

거봐.

역시, 내가 ‘개떡 같네.’라고 말했을 때 울렸던 그 고동은 분노가 아니었지?

[무… 슨 말을 하는 거냐?]

뒤늦게 내 말을 이해한 크르으랑은 무너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감추며 내게 물었다.

“저 도움 요청을 받아들여서 귀령용액을 제조하는 시설을 확보하면 시간을 얼마나 줄일 수 있겠냐고. 너네도 그게 필요한 거잖아, 신살급 병기, 너희 차원을 재건하고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면.”

두근두근두근두근.

호랑이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몸은 솔직하다. 100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지만 크르으랑은 여전히 얼빵한 소리를 냈다.

“…어?”

그래서 좀 도와주기로 했다.

“한발 더 나가 볼까? 아무도 안 도와준다는 도움 요청을 우리가 성공해 내면 어떻게 될까? 괜히 네 돈 주고 성검 시스템 잔뜩 사 주는 것보단 그런 게 훨씬 더 빨리 유명해지고 영향력도 높이는 길이 될 것 같은데? 어때?”

“아, 그, 그야… 물론. 하지만…….”

“그림을 크게 크게 그리자고. 모든 걸 다 잃을 위기에 처한 선량한 밀수꾼을 우리가 보호해 주는 거잖아. 그럼 다른 밀수꾼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 쟤네는 유사시에 우릴 보호해 줄 수 있는 존재구나 하고 생각하겠지? 자, 우리가 밀수꾼의 보호자가 되는 거야. 너, 보호해 주면서 보호비 받는 사람을 지구에선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뭐, 뭐라고 부르지?]

“두목.”

두근두쿵! 둑둑!

크르으랑의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힘이 잔뜩 들어간 팔다리가 끼긱끼긱 소리를 내며 당장이라도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고 튀어 나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크르으랑은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했다.

[아, 아니. 혀,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하겠지. 하지만… 거기는 도시야! 아갈타의 정규군이 지키고 있는……!]

“에이. 너도 무늬만 해적이지 실은 정규군이잖아. 솔직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안 그래?”

크르으랑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 호랑이는 항상 달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끌고 있는 수하들이 있으니 자기를 억제하고 또 억제해 왔던 거겠지.

하지만 지금 나는 크르으랑에게 분명히 알려 줬다.

억제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음을.

차원의 재건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를 이루려면 신중함보다 속도감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였다.

파아아앗!

우리 뒤에서 계속 봉우리 뛰어넘기에 실패하던 데미안이 빛살처럼 날아올랐다.

쏴아아아!

이번에도 타이밍은 어긋났다. 봉우리 사이를 부는 바람이 해일처럼 일어나 데미안을 뒤로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오히려 그걸 뚫고 앞으로 나아간다.

“가요! 도련님!”

“힘 빡 주고 버티십쇼!”

서민서와 박민희가 고래고래 응원을 했다. 저 둘이 손을 맞잡고 데미안의 마지막 도약에 힘을 더해 준 것이다.

데미안의 질주에 서민서와 박민희의 영력이 합쳐진 결과, 가속에 가속을 더한 데미안은 맞바람의 흉포함을 뚫고 마침내 우리가 있는 봉우리에 한 발을 걸쳤다.

“으읏차! 루드비히는 언제나 성공합니다!”

그러면서 자랑스럽게 나를 올려다보는 도련님. 나도 모르게 무심결에 그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아차, 내가 무슨 짓을?’

뒤늦게 놀랐지만 정작 도련님은 자랑스럽게 웃고만 있었다.

아무튼, 귀여운 도련님 덕에 크르으랑에게 먹여 줄 마지막 일격이 생각났다.

나는 크르으랑을 돌아보며 말을 맺는다.

“방향, 타이밍 그리고 가속도라며? 어쩌면 우리가 하려는 일들은 100년간 꾸준히 한다고 이룰 수 있는 그런 말랑말랑한 임무가 아닐지도 몰라. 중요한 건 오히려 속도일 수도 있다고. 5년 내로 이루면 가능성이 있지만 1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나면 오히려 어려워지는 걸 수도 있다고!”

점점 커지는 크르으랑의 동공에 대고 말했다.

“승산은 있다. 이제 남은 건 가속도를 받아서 단숨에 봉우리를 뛰어넘을 것이냐, 아니면 겁먹은 채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를 순풍을 기다릴 것이냐.”

그게 결정타였다.

둑둑둑두구두구두쿵!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전신으로 퍼지는 전율. 사슬이 깨어져 나간 듯 자유롭고 거뜬해지는 팔다리. 뭐… 신체 반응이 너무나 선명해서 따로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나는 등을 돌려 봉우리를 뛰어넘으며 말했다.

“뭐 해? 가자, 약탈하러.”

크르으랑은 홀린 듯이 내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어. 저기요? 사령관님? 돌아가시는 건가요? 저, 저기요?! 저… 혼자선 못 뛰어넘을 것 같은데요?! 사령관님?!”

홀로 남은 데미안이 깡총깡총 뛰며 소리 질렀다.

* * *

[내가 미쳤지…….]

아갈타의 차원 요새 앞에서 크르으랑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지옥의 아가리를 보는 것 같은데… 이거 이대론 절대 못 들어간다.]

탐적 시스템으로 감지한 아갈타의 차원 요새는 사실 요새가 아니라 하나의 도시라고 불러야 옳았다. 그것도 그냥 소도시가 아닌 백만의 인구를 수용하고도 남을 광역시급의 대도시.

거리고 그 거대한 차원 요새에는 외부의 공격을 원천 차단 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차원 포대가 빼곡하게 수놓여 있었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크르으랑의 심장도 저 강력한 화력 앞에서는 차갑게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이계화망’이 갖추어진 요새라니… 차라리 전투 선단 몇 개가 있는 편이 더 상대할 만했겠어. 이건 계획을 다시 재고해야 된다. 접근하는 순간 우리 배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건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크르으랑의 상식에 기초한 조언.

하지만 나의 상식은 그와는 달랐다.

그리고 지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크르으랑도 결국엔 내 계획을 따를 것이다.

그건 단순히 크르으랑이 흥분을 잘하는 호랑이라서가 아니다.

내가 그에게 가능성을 보여 줄 것이라서 그렇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쟁취했을 때의 막대한 보상은 이미 알려 줬기 때문에 그렇다.

“크르으랑 씨.”

[그치? 역시… 물러서야 될 것 같지?]

“우리 배 하나만 포기해요.”

[…배를 포기하라니?]

“어차피 세 척이나 있잖아요. 하나 포기해요.”

[헛소리! 이 배 하나하나가 모두 크레아의 재건을 위한……!]

“배 하나만 포기하면 제가 뚫고 들어갈게요.”

[…뭐?]

“배 하나만 포기하면 제가 뚫고 들어갈 테니까 그 틈을 노려서 퇴로만 장악하고 버텨 줘요. 목표 선박까지 끌고 나올 테니까.

[혼자 들어간다고……? 저길? 설마 저 흉흉한 영력이 안 느껴지는 건가?]

안 느껴질 리가. 이 자리에서 저 흉흉한 영력을 가장 잘 느끼는 건 바로 나다. [만상공감]이 확실히 알려 준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촘촘한 살기를.

근데 그러니까…….

“다 느껴지니까 내가 간다는 거지.”

호흡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나는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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