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백 년?
<공예 대회 우승에 빛나는 명품.>
<기본에 대한 집착이 빚어낸 시원始原의 성검 시스템.>
<테라. 화이트 에디션. 디 오리진 블레이드 no.1>
탑골시장에 새로운 점포가 열렸다.
한창 공예 대회의 우승자 소시민의 명성이 치솟던 때라서 신생 브랜드치고는 손님이 꽤 몰렸다. 하지만 결국 무기라는 건 보수적으로 선택을 하게 되는 법.
신생치고 잘 팔렸다는 것이지 손님이 줄을 서고 그런 일은 없었다. 덕분에 가게를 지키는 나타르와 아몬은 중간중간 잡담을 나눌 시간이 많았다.
[아몬 님,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나타르가 묻는 건 지구가 정말 자주적으로 차원 문명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케사리니 아몬은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잠시 말이 없다가 답했다.
[나타르, 1년에 멸망하는 세계가 몇 개나 되는지 아나?]
[정확한 숫자는 잘…….]
[내가 가장 최근에 통계를 본 게 378년 전인데, 그해에는 정확히 1,923개의 차원이 멸망했지. 적어도 평의회가 파악하고 있던 세계들 중에선 그랬어. 별로 특별한 해도 아니었고.]
[…1,923개? 엄청난 숫자군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왜 멸망했느냐가 중요한 거야. 매년 엄청난 수의 차원이 발견되지만, 그 대부분이 개도 차원이지. 보통은 그래. 그리고 상당수가 멸망한단 말야. 운 좋게 훌륭한 차원 문명을 만나지 않는 이상 열에 다섯 여섯은 멸망이다.]
[아! 보편적 권리를 중시하는 문명을 만나면 차원 문명으로 성장하지만… 아갈타같이 침략하는 문명을 만나면 멸망하거나 쇠퇴한다는 뜻이군요.]
[그래. 예외는 없네. 자기 세계 밖을 구경도 하지 못한 개도 차원이 대체 무슨 수로 억겁의 세월 동안 무수한 문명이 교류하며 쌓아 올린 영능학의 이기들을 감당하겠어? 침략당하면 멸망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지.]
아몬이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런데 지구가 스스로 살아남는다? 사실 그 의미는 심플해. 차원 형성 초기에 태어나는 신적인 존재조차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병기. 즉 신살급 병기를 갖추는 것. 물론 더 나아가서 대형 차원 하나를 통째로 지울 수 있는 멸세급 병기를 갖추는 게 더 확실하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신살급 병기 정도는 갖춰 주어야 다른 차원 문명에서 함부로 하지 못할 거고, 그래야 ‘스스로 살아남아 차원 문명이 되었다.’라고 인정할 만한 수준이 되겠지.]
그래서 아몬은 자신할 수 없었다. 소시민의 능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신살급 병기니 멸세급 병기니 하는 것은 소수의 천재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차원이 자신의 모든 역사와 잠재력을 집대성해야만 비로소 이룰 수 있는 위업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전체가 함께 진화해야만 이루어지는 필연.
소시민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런 우주사적인 진화를 혼자의 힘으로 일으킬 수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군. 모르겠어.]
고개를 젓는 아몬을 향해 나타르는 두터운 입술을 질겅거리다가 꿀꺽 침을 삼키고 물었다.
[그래도 말씀해 주시죠. 만약 지금 추세로 계속 승승장구한다면 어떻습니까?]
[지금 속도로? 뭐든지 규모가 커질수록 성장률은 떨어지니까 말이 안 되는 가정이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시민이 너무 대단해서 지금 추세라고 한다면… 30년?]
나타르는 화들짝 놀랐다.
[30년이요?]
[그래. 지금처럼 모든 게 잘 풀리고 별다른 일이 안 일어난다면 30년 뒤에는 신살급 병기를 만들고 차원 문명이 될 수 있겠지.]
[허…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300년이라고 해도 놀랐을 겁니다. 그런데 30년… 정말 그게 될까요?]
[몰라.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여기 나타르 자네랑 같이 앉아 있는 거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궁금하니까.]
[아… 하긴. 의외이긴 했습니다. 케사리니 아몬 님이 계속 소시민의 일을 도와줄 줄은…….]
[그래. 그 정도로 놀랍고 기대되는 일인 거야. 그래서 저 쥐새끼도 열심히 방송을 만들잖아. 다들 궁금해할 테니까.]
케사리니 아몬이 고개를 돌렸다.
로브에 가려진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번뜩 빛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어이쿠야. 뭐야, 저 양반? 피핀의 카메라를 그냥 꿰뚫어 본다고? 형님들, 저놈 뭡니까?”
아몬과 나타르를 염탐하며 지구의 자주자강이라는 목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열심히 복선을 깔아 놓던 연출가는 화들짝 놀라 버렸다. 케사리니 아몬과 눈이 마주치고 그 순간 송출되던 영상이 날아가 버린 탓이다.
“하여튼 소시민. 주변에 있는 놈들도 다 이상한 놈들입니다. 최상위 종족 중에서도 최상위로 취급받는 뮤론이 투자자로 있질 않나, 대체 왜 이런 쪼렙 지역에서 굴러먹는지 알 수가 없는 초실력파 인챈터가 있질 않나.”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던 연출가는 짧은 인형 팔다리를 쭉 펴더니 옆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데미안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거죠. 우리 아가씨 도련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사실 이거 반반은커녕 반의반의반도 안 되는 승률입니다. 그나마 승률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다들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뿐이죠.”
연출가는 일부러 쏟아지는 시청자들의 피드백을 데미안에게 흘려보냈다. ‘맞지. 이건 맞는 말이지.’, ‘반의반의반도 많이 쳐 줬다.’ 뭐 대충 이런 의미를 가진 상념들이 데미안에게 쏟아진다. 3류 헌터만 해도 이 상념에 묻혀서 부지불식간에 세뇌되고 말았을 것이다. ‘지구의 승률은 낮다. 그러니 소시민이 실패하고 지구가 아갈타에 점령당했을 때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라는 연출가와 시청자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겠지.
하지만 데미안은 고개를 털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눈을 살짝 내리깔아 연출가를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글쎄? 연출가, 내가 대안을 생각하며 움직였다면 과연 지금처럼 너를 내려다볼 수 있었을까?”
“앗… 아아…….”
연출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방송을 더 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사실 연출가는 그날 패배했다. 연출을 하기는커녕 방송의 운명을 연출 대상에게 맡겨 버리는 상태가 되었던 그것은… 피핀 차원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기가 막힌 참패.
연출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뻔뻔해도 그는 연출가이기에 실패한 연출에 대해 두말을 하지 못한다.
데미안이 이겼고, 그러니 연출가는 그녀의 판단에 감히 뭐라 할 자격이 없다.
데미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작작하고, 가서 다른 사람들 일이나 도와. 크레아 차원 진입한다고 다 바쁜데 넌 뭘 하고 앉았냐? 방송 금지. 크레아 차원 진입해서 내가 허락할 때까지 금지.”
연출가가 화들짝 놀랐다. 계약에 따라 방송 금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방송을 중지해 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매 순간이 처음처럼 고통스러웠다.
내 방송인데… 제발…….
애처롭게 손을 내미는 연출가를 향해 데미안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야, 그리고 다시는 그거 하지 마라.”
목소리도 서릿장 같았다.
연출가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아, 아가씨 도련님이라고 부른 거? 시, 시청자 피드백 흘려보낸 거?”
데미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운 눈빛이 연출가의 목덜미를 싸늘하게 스칠 뿐.
연출가는 가까스로 정답을 찾았다.
“아, 아, 네. 네. 둘 다 안 하겠습니다. 둘 다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그제야 만족한 데미안이 시선을 거두고 멀어져 갔다.
“일해. 난 잠깐 티타임 가지려니까.”
데미안은 휘오의 가지를 통해 까막이를 불렀다. 부쩍 따라다니는 바람에 어느새 직원처럼 편해진 까막이었다.
“까막아, 홍차랑 설탕 그리고 스푼 좀 가지고 와. 아, 우유도.”
까막이의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 …맨날 먹는 그걸로 가져다주면 돼?
그리고 유달리 의기소침했다.
그럴 만도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데미안과 서로 말을 놓는 것에 성공한 까막이였다. 하지만 실질을 들여다보면 이건 친구인지 하인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 빨리 가져와.”
하지만 데미안은 오늘도 무신경했다.
- …응.
사실 어쩔 수 없다.
루드비히로 태어나서 겪게 되는 인간관계는 애초에 세 부류뿐. 가족, 사업 파트너, 하인.
까막이는 가족도 아니고 사업 파트너도 아니다. 그러니 데미안으로서는 하인처럼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키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인은 아니지만 늘 가까이에 있고, 하인처럼 대하지만 서로 말은 놓는 관계. 조금 이상하지만 어느새 그녀의 곁에 편안하게 다가와 버린 낯선 관계.
그녀는 그저 이게 무엇인지 아직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아, 그리고 올 때 네 것도 챙겨 와. 같이 먹자, 까막아.”
그 순간 까막이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 어… 어? 진짜? 어, 어! 진짜?!
“응. 빨리 와.”
- 아, 알았어! 금방 갈게! 스콘이랑 마카롱이랑 어… 또… 아무튼 맛있는 건 다 챙길게!
“오케이.”
데미안은 휘오의 가지를 품에 넣고 가볍게 걸었다.
기분이 좋은지 그녀의 나직한 콧노래가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 * *
크르으랑의 안내를 따라 쉽게 크레아 차원에 입성할 수 있었다.
크레아 차원은 우주 전체가 거대한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끝도 없이 늘어선 산봉우리와 그 산봉우리의 하부를 가리고 있는 자욱한 안개와 구름만이 보이는 세계.
“저 산 밑에는 뭐가 있죠?”
그렇게 물었더니 크르으랑은 이렇게 답했다.
[산 밑에는 또 다른 산들이 있지.]
“저 하늘 밖에는 뭐가 있죠?”
…라고 물었을 때에도 이렇게 말했다.
[또 다른 산들이 있지.]
그리고 그 모든 산봉우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서, 산봉우리를 밟으며 계속 나아가다 보면 하늘에 있는 봉우리도 땅속의 봉우리도 모두 밟아 볼 수 있는 구조라고 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라고 따졌더니 크르으랑은 반대로 “그러면 동그랗게 뭉쳐진 땅들이 까만 하늘에 둥실둥실 떠 있는데, 그게 청호산맥처럼 수십, 수백억 개로 몰려 있으면 은하가 되고 흑호산맥처럼 은하가 다시 수십, 수백억 개가 모여 있으면 은하단이 되고… 그건 말이 되는 소리인가?”라고 따지길래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렇게 가벼운 입씨름이 끝나고 크르으랑은 우리에게 크레아 민속놀이를 알려 주었다.
룰은 단순하다. 하나의 산봉우리에서 다음 산봉우리까지 뛰어넘기. 짧게는 수십 미터, 길게는 수 킬로미터가 되는 그 거리를 오로지 육체와 영력의 힘으로 뛰어넘는 것.
한국인이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 때 사우나를 가듯 크레아의 주민들은 봉우리 뛰어넘기를 함께하며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이길 텐데.”
게임 자체가 지구인에게 너무 유리하다.
지구인은 영능학 기술 수준이 낮을 뿐이지 신체 능력과 영적 재능 자체는 기이할 정도로 뛰어났다. 이계에서는 ‘권능’이라고 불리는 능력이 ‘초능력’이라고 불리며 상당히 흔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큭!”
“아오! 뭐야!”
의외로 나를 제외한 동료들은 전부다 50미터 봉우리조차 뛰어넘지 못하고 비탈을 구르기 일쑤였다. 크르으랑은 훌쩍훌쩍 봉우리를 뛰어넘고서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돌아봤다.
나는 말했다.
“크르으랑 씨, 이거 사기잖아요.”
그랬다. 이건 단순한 뛰어넘기가 아니었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마다에 영력이 섞인 기이한 바람이 불었다. 크르으랑은 예민한 영적 감각으로 그 바람이 멎었을 때를 노리거나 도리어 방향이 좋은 바람을 타고 봉우리를 건너뛰었다. 물론 나는 그 뒤를 따를 수 있었다. [만상공감]이 있으니까.
하지만 지구인 중 영력의 경지가 제일 높다는 서민서조차 봉우리 사이로 부는 바람의 영력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했다. 그 정도로 쉽지 않은 경지를 요구했다.
크르으랑은 으스댔다.
[봉우리를 건너뛰려면 일단 세 가지가 필요하지. 올바른 방향과 가속도. 그리고 정확한 타이밍. 네 친구들은 가속도와 방향은 나무랄 게 없지만 타이밍은 잡질 못하네.]
아니, 처음인데 못 잡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처음이라 못한다는 변명은 어릴 때나 통하는 거다. 지구에서는 안 그런가?”
민속놀이 하다 말고 뜬금없이 훈계를 하는 크르으랑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쳐다보니, 장난기를 싹 지우고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는 크르으랑이 있었다.
[우리 상황을 현실적으로 보자.]
크르으랑은 냉철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네가 가져온 차원강습 시스템? 그건 좋다. 보안 시스템 때문에 직접 사용은 불가능하지만 고물값만 쳐도 상당하니 내가 속한 밀수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잘 팔아 줄 수 있어. 하지만 성검 시스템? 그건 아니지. 가속도도 좋고 방향도 좋지만 타이밍이 틀렸다.]
크르으랑의 목소리는 우리에 갇힌 호랑이가 작게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낮고 비관적이었었다.
[네 능력은 인정하지만 대량생산은 다른 이야기다. 이제 처음 대량생산을 시작한 상품을 뭘 믿고 구매하나? 지나치게 일러. 조급한 짓이었어. 차라리 수제 명품을 만들어 팔고 그 돈으로 무기를 사는 게 나았을 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망스러울 정도의 판단 착오다, 이건.]
“…그러니까 결국 그 얘기네요. 우리가 노획해 온 전리품은 사 주겠지만 성검 시스템은 못 사 준다?”
[내가 아니라 그 누구도 그런 물건은 사 주지 않을 거다.]
“왜죠? 우리 물건 좋습니다. 차원강습 시스템을 사용하는 정규군도 이겼고, 여기까지 오면서 침묵의 해적단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걸 보면 아실 텐데?”
[하지만 그 사실을 믿어 줄 만한 사람은 나뿐이지. 처음 보는 해적이 와서 물건을 팔려고 하면 잘도 그 말을 믿어 주겠군.]
“그래서 크르으랑 씨를 찾아온 거잖아요?”
[그건 고맙다. 하지만 아쉽게도 밀수 네트워크 내에서는 나도 신입이다. 성검 거래를 주선해 줄 정도의 영향력이 없어. 뭐… 그렇다고 내가 네 성검을 사 줄 수도 없고.]
“에이. 물건 좋은 건 믿는다면서요. 좀 사 주시죠?”
[믿지. 내가 봤으니까. 하지만 이미 성검은 살 곳들을 정해 놓았다. 밀수 네트워크 내에서 영향력이 강한 거래처들을 봐 놨거든. 이런 큰 거래는 그 자체만으로도 네트워크 내에서 우리의 발언권을 키우는 실적이 된다. 너희의 물건이 아무리 좋아도 이 메리트를 이길 수는 없지.]
여기까지 설명을 한 크르으랑은 이를 으득 갈며 짜증을 냈다.
[그러니… 바람을 보아 가며 조금 기다렸어야지! 무턱대고 뛰면 고꾸라지는 거다. 지켜야 할 소중한 게 많다면 더 신중하게 때를 보았어야지!]
크르으랑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이를 드러내고 얼굴을 찡그리더니 훌쩍 뛰었다.
휘이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크르으랑의 몸을 밀어 주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 크르으랑은 200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리를 가뿐하게 넘어 다음 봉우리에 사뿐하게 착지해서 날 바라보았다.
근데 왜일까?
‘왜 되게 슬픈 얼굴로 잘난 척이냐, 이 호랑이는.’
정작 나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크르으랑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질 않았다. 가슴은 김을 빼내지 않은 압력솥처럼 답답하고 팔다리는 족쇄라도 채워 놓은 것처럼 무력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기다린다라… 얼마나요? 크르으랑 씨는 고향의 재건이 목표였죠? 언제까지 해 볼 생각인데요?”
200미터는 멀리 떨어진 봉우리. 하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내 것처럼 생생하게 공유된다. 끓어넘치는 솥뚜껑처럼 잠시 덜컹거리는 가슴.
하지만 이내 누르고 또 누르고 그는 침착함을 가장하여 답했다.
[몰락한 차원 하나를 되살리는 일이다. 100년을 바라봐도 긴 시간이 아니지. 그걸 50년까지, 내가 노년이 되기 전까지… 앞당겨 보는 게 나의 목표다. 성급할 것 없이 천천히 오래 견뎌야 하는 일이다.]
워우… 백 년.
내가 지난 생에 50살까지 살면서 지구가 어떻게 멸망해 가는지 다 봤는데… 100년? 지금부터 다시 100년이면 120살 넘어서? 그게 잘 풀리면 70살에 보는 거고? 하……!
그 숫자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왔다.
“개떡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두근!
열받은 걸까? 압력솥처럼 답답하게 응어리져 있던 크르으랑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