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왜 거기서 나와?
우리가 너무 해적선처럼 보여서일까?
아니면 죽은 문어 두목의 말처럼 우리가 관습을 지키지 않아서일까?
해적들의 습격이 정말 끊이질 않았다.
이 인근은 무슨 무법 지대쯤 되는 모양인지, 한 반나절쯤 가다 보면 틀림없이 새로운 해적들의 협박이 통신회선으로 흘러 들어오곤 했던 것이다.
[응? 너희 해적이냐? 어디 싸가지없는 새끼들이 인사도 안 올리고 우리 영역을 그냥 지나가?]
[어라? 너희 설마 민머리 해적단을 그냥 다 죽인 거냐? 미친 새끼들이!]
신비주의 콘셉트를 위해 이런 통신들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전투를 준비할 뿐. 이런 변방에 있는 시골 해적단들 따위, 아갈타의 정규군과 싸우기 위해 편성된 우리 화랑단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전투를 벌이고 약탈을 하고, 또 전투하고 약탈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네 번 싸우고 네 개의 해적단을 전멸하자 더 이상 덤비는 놈이 없었다. 가끔 레이더엔 우리를 보고 덤비려고 오다가 상황을 깨닫고 부리나케 도망치는 놈들이 포착되었다. 그럴 때면 우리가 오히려 놈들을 쫓아갔다.
‘와… 진짜 달콤하네.’
분명 처음에는 원치 않는데도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와서 어쩔 수 없이 싸웠다. 하지만 몇 차례 약탈을 반복하며 알게 되었다.
‘이게 꿀이네. 이걸 했어야 되네.’
싸울 때마다 산처럼 쌓이는 전리품. 분류하기도 너무 어려워서 데미안 도련님과 까막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까막이는 도련님과 친해지기로 굳게 다짐했는지 매일 데미안 도련님 옆에 붙어 있었다.
“아, 사령관님. 말씀하신 기준으로 분류해 놨어요. 여기서 여기까지가 최상품이고, 저쪽이 상품, 중품, 하품 순이에요.”
도련님이 똘똘하게 말했다.
항상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만상공감]이 아무리 사기적인 능력이라고 해도, 결국 그 감각을 일일이 받아들여서 분류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정신적 피로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뛰어난 컬러 센스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제멋대로 섞여 있는 색깔 구슬들 사이에서 내가 원하는 구슬을 찾으려고 하면 눈알이 빠지도록 고생을 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도련님이 색깔별로 1차 분류를 해 주고 심지어 품질별로 2차 분류까지 해 주고 나면? 그다음에는 내가 원하는 구슬만 우아하게 쏙쏙 뽑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가?
“흠… 이건 상처가 좀 있지만 애초에 운 좋게 잘 만들어진 물건이네요. 중급보다는 상급이 낫겠어요. 오? 이건 특별한 인챈트가 숨어 있는데요? 상태가 별로여도 이건 아예 따로 팔아야 되는 물건이에요.”
나는 잘 정리된 전리품 사이를 다니며 2차 분류까지 마친 전리품들을 더 세세하게 분류하고 특이 사항들을 기록했다.
도련님은 만년필과 펜을 들고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열심히 감정법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면 내게 말했다.
“사령관님, 이건 우리 기파랑호에 적용하면 어때요? 원래는 소모성 개인장비인 것 같은데, 바르면 은신 계열의 효과를 부여해 주나 봐요. 이번에 입수한 차원 함포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보이지 않는 포탄을 만드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던져 주는 아이디어가 꽤나 유용했다. 막상 [만상공감]으로 호환성을 따져 보면 쓸 수 없는 아이디어도 많았지만, 혼자였다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넘겼을 쏠쏠한 아이디어도 그에 못지않게 많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오? 괜찮은데요?”
“그쵸, 그쵸? 그리고 이건 잠깐이지만 창조신의 꿈속을 유영할 수 있게 해 주는 망토래요. 근데 그런 용도로 쓰지 말고 한 열 개씩 모아서 이은 다음에 차원 선박 외벽에 아가미처럼 고정하면 보조 돛처럼 활용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안전성이 높아져서 격류를 헤쳐 나가기도 쉽고 방향 전환도 빨라진다고 하네요!”
“오, 그렇게 추진하죠.”
역시! 도련님! 성실하다!
단순히 자신의 눈썰미만 믿고 물건을 분류하는 게 아니라, 적을 협박해서든 연출가를 쥐어짜서든 어떻게든 새로운 물건의 활용 방안을 찾는 집요함을 보였다.
덕분에 우리 화랑단과 화랑단을 태운 기파랑호는 나날이 그 외형이 변해 갔다. 싸우고 약탈하고 전리품을 분류해서 실전 배치 할 때마다 한층 더 위엄 넘치는 차원 해적의 풍채를 갖추게 되었다.
그렇게 실시간으로 개조되는 기파랑호 덕분에 하루에 두 번씩 해적들과 전투를 하며 지나가도 일정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심지어 전투 기동을 반복하다 보니 길들이기 속도도 빨라져서, 어느덧 27% 안정 단계까지 길이 든 기파랑호는 더욱 빨라지고 운항하기도 더욱 쉬워졌다.
‘순조롭네. 지금까진 아주 순조로워.’
지뢰 찾기를 해도 이상하게 지뢰를 못 찾고 막혀서 답답할 때가 있고, 단숨에 10개, 20개의 지뢰를 찾아 가며 쭉쭉 나아갈 때가 있다.
지금은 예기치 않은 쪽에서 지뢰를 찾아 쭉쭉 나가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자신감도 생겼다. 처음 지구를 떠날 때만 해도 진짜 막막했는데… 이제는 ‘뭐, 아무래도 잘되지 않겠어?’ 하는 낙천적인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차원 해적들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고 약탈이 얼마나 유용한지도 알게 되고.
‘역시. 잘 몰라도 일단은 부딪쳐 보는 게 중요하네.’
이 기세가 크르으랑을 만나도 계속 유지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친김에 기파랑호에 가득 실려 있는 성검과 전리품도 다 팔아 치우고 안정적인 밀수 루트도 하나 뚫으면 좋겠다.
그런 기대를 품고 순풍을 따라 우리는 나흘 만에 크레아 차원의 영역에 들어섰다.
그리고 거기에서 마주친 건 진짜배기 해적이었다.
* * *
기파랑호에서 선박 외부의 상황을 확인하는 방법은 총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기파랑호 자체의 탐적 장치를 통해 외부 상황을 홀로그램과 같은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다. 흔히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기파랑호와 적 함선이 기호 형태로 허공에 떠오르고 주변 해역의 정보가 그 옆에 같이 표기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보면 외부 정보를 한눈에 파악하기 쉽지만 대신 생동감은 떨어졌다.
그래서 다음 방법이 기파랑호의 외벽을 투명하게 만들어 외부에 흘러가는 창조신의 꿈과 그 안을 떠도는 온갖 조각을 몸소 느껴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아주 묘했다.
창조신의 꿈은 세계의 바깥. 당연히 시각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고 오로지 존재 자체에 대한 직관만이 기능을 하는 곳이었다. 때문에 우리가 기파랑호의 외벽을 투명하게 만들면 우리는 마치 눈을 감고 어두운 바다속에 던져진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바다속에서 사납게 으르렁대고 때로는 팔에 닿고 때로는 숨결이 닿는, 존재의 본질을 파악해야만 했다. 이런 방법으로는 정확히 적이 몇 명 있는지, 어떤 종류인지를 파악하기가 훨씬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대신 그 상대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저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 파악하기는 더욱 쉬웠다.
꿀꺽.
그게 지금 침 삼키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이유였다.
약탈할 생각에 신나서 시끌시끌하던 여태까지의 갑판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이번 적은 그만큼 만만치 않았다.
탐적 장치에 표시된 것만 보아도 그랬다. 일단 상대는 해적선이 아닌 ‘해적 선단’이었다. 기파랑호 같은 작은 수송선만 두 대. 그리고 이전에 보았던 아갈타의 군용 함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기파랑호보다는 확연히 크고 잘 무장된 무장선이 한 대.
숫자도 우리보다 많은데, 느껴지는 영력은 더 심상치가 않다.
“선배, 쟤네 강해…….”
긴장해서 말하는 서민서도.
“저것들도… 우리 적입니까?”
이를 드러내며 전의를 불태우는 강전구도.
모두 다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대적하기 쉽지 않은 적수.
골치가 아프다. 왜 저런 게 여기서 나오는 거지?
‘여긴 크레아 차원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이잖아? 그런데 저런 해적 선단이 돌아다닌다고?’
일정 범위의 창조신의 꿈을 모두 영토로 지정하고 관리하는 차원 문명의 특성상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으로 거지가 됐다더니… 크레아 차원, 이 정도까지 추락한 거야?’
입맛이 썼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아쉬움을 느낄 때가 아니었다.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였지.
식은땀이 흘렀다.
싸우면 지느냐? 솔직히 그건 아닐 것 같다. 싸워 봐야 아는 수준이지만… 이성계의 활을 잘 써 주면 분명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자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피해였다. 설령 이기더라도 전멸에 준하는 피해는 무조건 입는다. 아갈타의 정규군과 싸워도 스무 명 안쪽으로 잃었던 화랑단을 여기서 모조리 잃을 수는 없었다.
‘싸우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우리 뜻대로 될까? 나는 싸워 봤자 공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에 상대도 동의해 줄까? 그게 문제였다.
나는 [만상공감]을 한계까지 발휘하며 놈들을 노려봤다. 이럴 때만큼은 내 능력으로 감각이 아닌 감정과 생각까지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놈들이 노리는 게 뭔지 미리 파악하고 싶다.
이를 악물고 그렇게 [만상공감]을 발휘하는 동안 상대에게서 딱딱한 통신이 들어왔다. 정체를 감추려는 듯, 목소리는 변조되었고 언어도 크레아 차원에서 쓰는 언어가 아닌 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는 상대가 크레아 차원의 언어를 사용하는 전혀 다른 목소리의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만상공감]의 작은 효용이었다.
[너희가 요즘 설치고 다닌다는 침묵의 해적단인가? 여기는 우리 영역이다만… 싸울 테냐?]
도전한다면 얼마든지 받아 주겠다는 강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일단은 좋은 신호다.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나도 통신회선을 열었다. 기파랑호를 타고 처음으로 여는 통신회선. 신비주의 콘셉트에 맞지 않지만 그깟 콘셉트보다 여기서 싸우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니 어쩔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목소리와 언어를 변조하고 대답한다.
“싸울 생각은 없다만, 크레아 차원에는 들러야 한다.”
[불가. 말했을 텐데? 우리 영역이다.]
칼 같은 즉답이 돌아왔다. 크레아차원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싸워야 한다. 이 해적들은 그 의미를 분명하게 했다. 하… 여기까지 와서 크레아 차원을 포기해야 한다고?
억울하다.
억울하니 화가 났다.
‘아니, 무슨 미친 해적들이 해군도 아니고 차원 진입을 막고 지랄이야? 응? 자기들이 무슨 여기… 어?’
그러다 발견한 것이다. ‘이질적인 감각’을.
‘잠깐… 이건 뭐야?’
[대답하지 않는 건… 기어코 싸우겠다는 것인가?]
해군이라는 단어를 나는 정말 무심결에 떠올렸었다. 근데,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저 해적들, 진짜 군인 냄새가 났다. [만상공감]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니 창조신의 꿈 너머에 존재하는 저들의 함선과 심지어 그 안에 존재하는 장비들까지 느껴진다.
‘잘 숨겼어, 해적처럼. 하지만… 베이스는 다 군용 장비야.’
그러고 보니 이 목소리, 낯이 익다.
이리저리 변조를 해서 그냥 변조를 했다는 것만 알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의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니 이건 내가 아는 목소리가 분명했다.
[뭐 좋다. 모두 여기서 죽도록 하라.]
낮게 경고해 오는 목소리. 차원포를 장전했는지 흉흉하게 치솟는 영력.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는 화랑단원들. 그리고 긴장한 얼굴로 내 명령을 기다리는 동료들.
그 상태에서 나는 목소리와 언어 변조를 모두 해제하고 물었다.
“어이! 크르으랑! 당신입니까?”
그러자 상대는 침묵했다. 대신 내 손등에 붙어 있는 통신 단말 스티커가 부르르 울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맞네. 역시 그 목소리다. 호랑이처럼 낮고 울림이 큰 목소리.
[어… 음… 확인할 게 있어서 통신을 보낸다. 너… 아니지? 지금 크레아 차원 앞에 웬 해적이…….]
나는 그냥 대답했다.
“나 맞아요.”
또다시 침묵. 포격을 준비하며 치솟던 영력이 사그라들고 통신회선에선 변조가 싹 사라진 크르으랑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아니… 근데 너 해적이었냐?]
쓴웃음이 나온다. 이 아저씨가 누가 누구더러 뭐라는 거야?
“아뇨. 이건 그냥 사정이 있어서… 크르으랑 씨야말로 해적이었습니까?”
[아니! 내가 그럴 리가……! 큼! 흐음… 그래. 대화가 좀 필요하겠군.]
뭔가 일이 재밌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