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해적선
지구 곳곳에 나타난 불규칙 던전.
그리고 시작된 마족의 대규모 침공.
첫 1주일 동안 세상은 난리도 아니었다. 세계의 모든 언론이 당장 내일이라도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고, 매일 쏟아지는 건 암울한 전망이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사재기를 하고, 강도짓을 하고, 최전선으로 달려가야 하는 군인들이 탈영을 하는 막장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미 전쟁이 일상이 된 현대에 또다시 한번 패닉을 줄 만큼 이번 침공은 그렇게 충격적이었다.
“또, 또 싸우라니! 난 못 해! 못 한다고!”
마족. 그 악마들이 인류에게 낯선 상대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작년부터 인류는 마족들과 크고 작은 전투를 수도 없이 벌여 왔으니까 마족에 대해서 알 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때론 잘 알고 있기에 더 큰 충격과 공포에 직면하기도 하는 것이다.
마족들과의 전쟁은 그 어떤 전쟁과도 달랐다. 소시민과 권승리가 있는 대한민국과 달리 대부분의 도시와 국가는 사회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일상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참혹한 전면전을 벌였고, 그렇게 겨우겨우 승기를 잡은 게 고작 몇 달 전.
그런데 그보다 더 강한 마족들이 그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숫자로 다시 쳐들어온다?
격투기로 말하자면 10라운드까지 이어지는, 진을 쏙 빼는 혈투 끝에 간신히 승기를 잡았더니 갑자기 체급도 더 높고 컨디션도 쌩쌩한 선수 두 명이 태그를 하고 링 위로 올라오는 격이었다. 미처 싸우기도 전에 전의가 꺾여 버린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이 나온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2주가 지나고 3주가 지났을 때도 수많은 사람이 예측하고 울부짖었던 멸망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아틀라스 클럽’이라는 명칭과 ‘권승리’라는 이름 석 자가 지구 전체를 뜨겁게 달궜다.
“오케이! 오파츠 획득! 내일부터는 좀 더 싸울 만하겠다.”
“마족들이 무섭긴 해도 효율 좋은 오파츠도 많이 들고 다니니까 다행이야.”
“그러게. 아틀라스 클럽이 오파츠로 마누스 비술을 알려 주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맞아. 우리도 실시간으로 강해질 수 있으니 이걸 버티지, 안 그랬으면 다 갈려 나가서 죽었겠지.”
아갈타의 차원강습병을 죽이면 차원강습 시스템은 보안을 위해 자폭됐지만, 캐스터나 빔 웨폰 같은 개인장비들은 고스란히 남아 전리품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런 선진 문물에 깃든 영력은 아틀라스 클럽이 제공하는 비술을 따라 헌터들의 마누스로 변환할 수 있었다.
매일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이길 때마다 더 강해지고 생존 가능성이 높아졌다.
“힘들지만… 할 만해. 적어도 희망은 있으니까.”
전리품을 챙길 때마다 아틀라스 클럽을 칭송하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였다.
“그뿐이냐? 솔직히 아틀라스 클럽에서 우격다짐으로 헌터들의 던전공략을 강제했으니 망정이지… 자율에 맡겼으면 지금쯤 사라진 나라가 두 자릿수는 됐을 거야.”
“대륙이 통째로 날아갔겠지.”
오파츠를 챙기며 희희낙락하다가도 헌터들은 또 그렇게 숙연한 생각을 했다.
처음 아틀라스 클럽이 오파츠-마누스 비술을 볼모로 참전을 강요할 때만 해도 다들 억울해하며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몇 주 만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비록 자유는 잃었지만 이렇게 다 함께 참전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큰 것을 잃었을 게 분명해졌으니까.
“그래도 결국 권승리 님이 있었으니까 이런 결과가 가능했던 거겠지?”
“맞아. 그 무력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 많은 세력을 결집시켰겠어?”
“나는 지금도 얼떨떨하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어린 사람이 그렇게 강할 수가 있어? 아틀라스 클럽의 간부들이 다들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고는 해도… 권승리 님은 그중에서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이잖아.”
“그렇지… 유럽의 무관왕을 자처하던 라이언하트 가문의 가주도 권승리 님에게는 못 당한다면서 패배를 인정했다지?”
“미국의 대형 헌터 가문 드제니 가문의 왈티도 두말 않고 고개를 숙였대. 그런 최강자급 괴물들의 충성마저 얻어 내다니… 나중엔 얼마나 더 강해지게 되는 걸까?”
“애초에 지금 전선을 유지하는 것도 권승리 님 덕분이라는 소문도 있더라.”
“나도 들었어. 제일 강한 악마들을 앞에서 다 도륙 내 버리시는 덕분에 우리한테 오는 건 그나마 싸울 만한 놈들만 남는 거래.”
“허 참… 이렇게 몇 달 만에 아틀라스 클럽이 세상을 장악할 줄이야.”
다들 혀를 내두르며 전리품 수거를 했다.
그리고 이런 잡담의 마지막 주제는 항상 정해져 있었다.
“그에 반해 루드비히 가문은 뭘 하는 건지…….”
“시류를 전혀 읽지 못했지.”
“너희 친구 중엔 아직도 루드비히 그 퇴물들 따르는 블랙카우는 없지? 이런 시국엔 줄 잘 서야 된다?”
“루드비히도 그렇고 칼츠랑 일리온도 그렇고… 안타깝다. 한때 잘나가던 곳들인데.”
“냅둬.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자기들 지역에선 떵떵거리면서 지낸다더라. 우리가 얼마나 강해지고 있는지, 또 아틀라스 클럽이 얼마나 큰 지지를 받고 있는지 감도 못 잡는 거지.”
“전쟁이 끝나는 순간 알게 되겠지,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이제 패망할 일만 남은 거다, 걔네는.”
아갈타의 전리품들을 모아 커다란 수레에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 넣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소시민과 화랑단이 그들이 상상치도 못한 곳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차원 문명의 전리품을 분류하고 훨씬 더 알뜰하고 값비싸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 * *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어.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더 빨리 일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초조했다.
밀수 루트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갈타의 후방을 괴롭히는 것 역시 중요한 임무다. 한 번 휘저어 놨으니 당분간은 우리를 찾겠다고 바쁘게 다니겠지만, 우리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갈타 놈들은 금방 신경을 끄고 침략을 재개할 것이다.
‘가능하면 열흘… 아무리 늦어도 보름. 그 안에 성과를 내고 돌아가야 돼.’
권승리와 아틀라스 클럽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잘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갈타의 본대가 움직이면 소용이 없다.
자꾸 아갈타의 후방을 교란해서 시간을 계속 끌어 주지 않는다면… 저번 최치국 때처럼 비극적인 일이 또 발생할 수 있었다.
‘그 꼴 또 보기는 싫다.’
비록 가는 길은 다르지만, 아틀라스 클럽의 한 명 한 명은 지난 생에서부터 존경해 마지않던 나의 영웅들. 그들이 죽고 다쳤다는 소식 따위 솔직히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마음이 급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할 일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법.
“빨리빨리 뜯어! 분류해! 뛰어! 시간 없다, 얘들아!”
내 독촉을 들으며 화랑단원들은 전투가 끝난 차원 선박 안을 불 나게 뛰어다녔다.
전투만큼 중요한 것은 전투 후의 약탈.
보상을 챙기지 않고 싸움질만 하는 건 마치 단백질을 먹지 않고 웨이트만 땡기는 것 같은 어리석은 행동. 해적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화랑단원들은 알뜰하고 살뜰한 약탈로 힘겨웠던 전투를 가치 있는 일로 만드는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숭고한 작업에 불만이 있는 이계인이 하나 있었다.
[미, 미쳤나! 배의 소유권도 넘겼는데 왜 다 뜯어 버리는 거냐!]
내 앞에 무릎 꿇고 엎어져 있는 팔이 여덟 개 달린 문어 인간. 그는 물렁물렁한 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표했다.
보기는 흉하지만 나름 해적단의 두목이었다. 성검 시스템을 한 번에 네 자루나 쓰는 놀라운 기량을 보여 주길래 내가 몸소 제압해 둔 상태다.
나는 놈에게 심드렁하게 답해 주었다.
“당연한 것 아냐? 뜯어 가야 팔든가 우리 배를 개조하든가 할 것 아냐?”
문어 두목이 둥글고 밋밋한 머리에 핏대를 세웠다.
[너희는 관습도 모르냐!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다 뜯어가 버리면 우리는 뭐를 먹고 사냐! 너희의 권위를 인정해 주기로 했으면 너희도 우리 생활을 보전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
“뭔 소리래. 이 바닥에서 못 보던 해적이라면서 다짜고짜 덤벼든 건 너희 아니냐? 네 말대로 이 바닥 출신이 아니라서 너희 관습 같은 건 알 바 아닌데?”
내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건지 문어 두목의 빨판이 파르르 떨렸다. 새끼. 눈치는 빨라 가지고.
[아, 아니… 잠깐, 너 설마?]
“그래. 보아하니 더 뱉을 정보도 없어 보이는데 그만 죽어.”
[그, 그러지 마라! 이 지역엔 이 지역의 관습이 있다. 그걸 지키지 않으면 너희는 모두의 표적이……!]
서걱!
물컹이는 문어든 단단한 거북이든, 반월이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게 잘려 나간다.
“해적한테 관습이 어딨어? 강한 놈이 관습이지.”
우리는 아갈타라는 문명과 전쟁 중이었다. 이 지역 해적들과 피바다가 되도록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생존자를 남기는 후환을 둘 순 없었다.
‘우리 콘셉트는 혜성처럼 나타난 잔인무도한 의문의 해적단. 딱 이만큼이 좋다.’
절대로, 절대로 ‘아갈타를 습격한 해적단과 공통점이 있는 수상한 해적단’이라는 끔찍한 소문이 돌아서는 안 됐다.
그렇게 문어 두목을 죽이고 주변을 둘러보니 약탈도 거의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비켜 비켜! 이거 내 거야! 아까 내가 죽였다고!”
“와! 이거다, 이거! 아까 보니 끝내주던데? 멀미를 일으키는 아이템 같아. 순간 죽을 뻔했다니까?”
“저, 저기 선배님……? 설마 이런 것까지 챙겨야 합니까?”
“뭐야? 당연하지. 챙겨!”
“근데… 이건 팔이 8개인 놈들이나 쓸 법한 장비인데…….”
“챙겨! 싫으면 나 주든가! 나 줄래? 됐어! 내놔!”
“아, 아닙니다. 챙기겠습니다.”
그러나 가만 보니 1기 화랑단원들과 신입 화랑단원들의 분위기 차이가 보였다.
고기도 먹어 본 놈들이 잘 먹는다고, 아갈타와의 싸움을 겪어 본 1기들은 신입들보다 약탈에 훨씬 적극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적들이 쓰던 장비를 뜯어 가서 잘만 쓰면 깜짝 놀랄 만한 전력 상승이 가능하다는 걸 직접 경험해 본 이들이었으니까.
아니, 전력 상승을 떠나서 그들은 이미 차원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하는 재미에 완전 중독되어 버린 상태였다.
“어? 선배님? 그건 무기도 방어구도 아닌 것 같은데…….”
“야야, 뻘소리 하지 말고 너도 빨리 하나 챙겨. 이거 개 쩌는 홀로그램 기기야.”
“네, 네? 홀로그램 기기요?”
“존나 좋은 스마트폰이라고 생각하면 돼. 오감을 다 구현할 수 있는 영능학 홀로그램! 공방 가져가서 호환성 손보면 스마트폰이랑 컴퓨터의 모든 기능을 생생한 오감 지원 홀로그램으로 즐길 수 있다고. 엄청 쿨해!”
“그래. 너 그거 쓰다가 스마트폰 보면 뗀석기 같아 보일걸?”
희희낙락, 싱글싱글. 죽은 이계 해적들의 개인적인 물품들까지 싹싹 벗겨 가는 화랑단원들의 모습에서 참된 해적의 기상이 물씬 풍겼다.
그렇게 각자 개인 물품들도 챙기고, 화랑단 전체의 전리품으로 쓸 물자들도 챙기고, 기파랑호를 개조할 때 쓸 수 있는 부속들까지도 알뜰하게 뜯어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적 해적선 자체를 나포해서 팔아 치우고 싶지만…….’
그렇게까지 할 시간은 없었다. 값비싼 부속들을 뜯어 가는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자! 다 챙겼으면 바로 뜨자! 시간 없어! 전리품 분류는 가면서 해!”
쿠궁!
진동과 함께 우리의 기파랑호는 다시 창조신의 꿈속을 헤치며 나아간다. 이미 두 차례의 전투를 거치며 이리저리 개조된 기파랑호는 이젠 어엿한 해적선처럼 보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