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작은 이들의 싸움
아직 이능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지구에서도 어떤 이들은 그렇게 허풍을 떨었다. 사단 규모의 병력과 화력이면 산 하나를 옮길 수도 있을 거라고.
고작 화약 문명의 자신감이 그러한데, 영능학이 발전한 차원 문명의 사단이 보여 줄 수 있는 위력은 상상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것이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차원 하나를 해체해 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니까.
두 개의 사단을 합쳐 임시 편성된 아갈타의 보복 원정 군단에서는 그런 대규모 작업이 매일 일어났다.
[흠. 희귀한 암석군이네. 쓸 만해 보여.]
[예! 모두 채굴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음, 그래.]
[군단장님 명령이다! 이 산맥하고 저 산맥 그리고 저쪽 산맥까지 모두 파내도록!]
[예! 알겠습니다!]
[뛰어! 뛰어, 이 새끼들아! 군단장님 명령이다! 다 파 버려!]
[산맥을 어디까지 파내야 합니까? 해발 0미터까지 쭉 따면 되겠습니까?]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해? 장난하냐? 군단장님 명령이 장난 같아?]
[아, 아니, 아닙니다!]
[새끼가… 해발고도 그딴 걸 왜 따져? 지반 포함해서 같은 종류의 암석이면 모조리 파 버려!]
[예!]
이러저리 시찰 다니며 한마디씩 하고 지나가는 군단장과 과잉 충성 하는 지휘관들로 인해 르누아 차원은 매일같이 몸살을 앓았다. 자고 일어나면 종족의 역사와 정기를 상징하던 산맥이 무너지고 경기도 크기의 지반이 갈려 나가는 일들의 반복.
아갈타의 군단장이 움직인다는 건 그렇게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때문에 언제나 그렇게 큰 스케일의 병력 운용만을 지켜보던 군단장이었기에 사실 200명도 되지 않는 차원 해적의 출현은 딱히 관심을 가질 만한 계제가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참모 선에서 정리가 되고 군단장은 그저 결과만 보고받으면 되는, 뭐 경우에 따라서는 훈장 만드는 서류에 사인 하나 해 주면 끝나는 그런 사소한 업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날 차원 해적에 관한 보고를 가져온 참모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군단장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외부에 주둔 중이던 3317수색 대대가 차원 해적으로부터 포격을 당했습니다. 당초에는 4등급 차원 포격으로 보고되었지만 통신이 두절될 정도의 위력으로 보아 최소 3등급 이상의 위력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젠 군단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차원 포격이라는 말 자체는 놀라울 게 없었다. 두 개의 사단을 묶어 운영하고 있는 군단장 에르하무스를 놀래키려면 3등급이 아니라 1등급 포격으로도 부족했으니까.
그가 심각해진 건 그를 이 머나먼 오지까지 파견 오게 만든 본래의 임무 때문이었다.
감히 아갈타의 소좌였던 퀴니세인을 죽이고 아갈타 사회 전체에 불명예를 안겨 준 차원 해적. 그놈들을 찾아 피의 보복을 안겨 주는 것이 이번 보복 원정 군단의 본임무가 아니던가?
하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기에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차원 포격을 쏘는 해적이 나타나다니?
에르하무스는 중얼거렸다.
[그놈들일까?]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보고드려야 할 것 같아 바로 보고 올렸습니다.]
[잘했다. 가장 가까이에 주둔하고 있는 연대 병력을 보내서 포위해. 시간은 얼마나 걸리지?]
[마침 그 주변에 177차원 수송 여단 소속의 차원강습함 1척과 연대규모의 병력이 있습니다. 30분 내로 차원 이동을 원천 봉쇄 하는 게 가능합니다.]
[30분 동안 놈들이 도망칠 가능성은?]
[마침 근처에 있던 네 개 대대가 차원 간섭 조치를 하고 즉각 지원에 나섰다고 하니 30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4개 대대의 지원이면 사실 30분을 버티는 게 아니라 30분 내로 상황을 정리해 버릴 수도 있는 전력이었다. 하지만 군단장의 참모는 군단장이 항상 요구하는 대로 신중하고 보수적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군단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특이 사항이 있을 시 즉시 보고하도록.]
[예!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근질근질.
군단장 에르하무스 준장의 입가로 미소가 들썩였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지금 그의 심정은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승리가 알아서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군.’
아갈타의 불명예를 씻으라고 파견된 군단장이 그 원흉을 구경도 못 하고 돌아간다? 결국엔 임무 실패일 뿐이다. 그걸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르누아 차원을 비롯한 차원들을 쥐어짜 내고 있는 중이었지만… 사실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자신의 명예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되는 것. 그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정도로 분했다.
그런데 차원 포격을 가하는 차원 해적이 나타나다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설령 퀴니세인을 죽인 그 범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범인으로 뒤집어씌울 수 있어.’
억울한 불명예를 떠안을 일은 이제 없다.
‘기왕이면 그 해적 놈들, 잘 싸워 줬으면 좋겠군…….’
너무 약하면 곤란했다. 4개 대대가 가고 추가로 차원강습함 1척까지 파견했으니 어차피 놓칠 리는 없다. 그러니 이제 기왕이면 놈들이 잘 싸워 줘서 퀴니세인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놈들이었다는 이미지를 충분히 남겨 주는 편이 유리했다.
[아니다. 내가 직접 가 보는 것도 좋겠군.]
아갈타의 소좌를 죽인 해적 두목을 아갈타의 장군이 전장에서 직접 목을 쳐 버린다면 그 역시 아갈타의 영광을 드높이는 일일 것이다.
[그래. 내가 태양 강기로 손수 목을 쳐 주는 거야. 그게 좋겠어.]
에르하무스 준장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작업 중인 인원만 남기고 다 따라오게 해. 아갈타의 불명예를 씻으러 내가 직접 간다.]
기왕이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들의 군단장이 어떻게 아갈타의 불명예를 씻고 원한을 갚아 주는지 똑똑하게 보여 주자.
하지만 그 순간 참모가 귀신이라도 본 듯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보고를 시작했다.
[구, 군단장님!]
[뭐야?]
[저, 전멸입니다!]
[뭐? 벌써?]
에르하무스 준장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니… 이렇게 약하다고?’
이렇게까지 약하면 범인이 아닌 것 아니냐고 트집 잡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눈치껏 시간 좀 끌면서 천천히 싸울 것이지……!’
에르하무스가 괜히 현장 지휘관들을 향한 분노를 담아 물었다.
[거기 지원 간 대대가 어디어디라고?]
참모는 답했다. 여전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3317수색 대대 전멸, 1326차원강습 대대 괴멸적 타격을 입고 퇴각, 273, 682, 3326대대가 차원강습함 1척과 함께 해적들을 추격하고 있지만 이미 포위를 뚫고 도주… 현재 해적들의 행방이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
에르하무스는 잠시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의 눈에서 새빨간 영력이 일렁일렁 흘러나왔다.
[전원 작업 중지. 수색망을 구축한다.]
그의 입에선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놈들 찾아서 내 앞에 무릎 꿇릴 때까지 나를 포함해 내 밑으로 전부 다 현 시간부로 상시 전투태세다. 잠깐이라도 차원강습 시스템을 벗고 휴식 취하는 새끼 보이면 바로 즉결 처형 해 버려.]
[예! 알겠습니다!]
* * *
[작업 중지! 작업 중지!]
아갈타 군단 사이로 천둥 같은 알림이 울려 퍼지던 그때, 르누아 차원의 주민들은 저 멀리서 무너지는 산맥을 보며 눈물을 짓고 있었다.
[큭… 빌어먹을 놈들…….]
[저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황혼산맥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 너머의 바다별 평야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참게. 참아.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다른 모든 걸 잃어도 선조의 유산만큼은 우리가 지켜야 되지 않겠나?]
[큭… 크으윽!]
르누아 차원인들은 참혹한 풍경에 몸을 떨면서도 나설 수 없었다. 패퇴를 거듭하면서도 뿔뿔이 흩어져 숨지 않고 어떻게든 방어선을 만들어 내고 있던 이유.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아갈타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던 이유. 그 모든 건 결국 종족의 보물을 지켜 내기 위해서였다. 침략자로부터 다른 모든 긍지를 빼앗기더라도 가장 중요한 그 긍지만큼은 지켜 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각오를 했다고 해도 정작 눈앞에서 저렇게 비참한 광경이 벌어지면 참아 내기 어려운 법이었다.
한국인으로 따지자면 눈앞에서 남산이 가루가 나고 태백산맥이 무너지고 한라산이 잘려 나가는 꼴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그런 충격적인 경험.
…이건 직접 당해 보지 않고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흥분한 무리 중에 끼어 있던 작은 아이는 오히려 침착한 어조로 모두를 다독였다.
[장로님 말씀이 맞아요. 다들 침착하세요.]
하지만 어조가 침착하다고 해서 아이가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의 눈에는 글썽글썽 눈물이 맺혀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울면서도 제 할 말을 끝까지 다 해냈다.
[지금 잃어버린 것보다는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 그것에 집중하도록 해요.]
[별빛 님…….]
르누아의 주민들은 침음성을 삼켰다. 차원 전체의 수도라고도 할 수 있는 ‘저물녘의 요람’. 그곳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빛의 후손이 바로 별빛이었다. ‘빛의 후손’은 타고난 귀족, 르누아인들의 본능적인 존경을 받는 혈통이었다.
별빛의 부모님 역시 위대한 지도자였고, 모두 얼마 전 ‘저물녘의 요람’을 지키다가 살해당했다.
그런 별빛이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집중하자.’라고 말하니 그 무게가 남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한데 모두의 시선이 잠시 별빛에게 향했던 그때, 멀리 아갈타의 진형에서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이가 외쳤다.
[어? 어? 저놈들이 철수하는 것 아닙니까?]
[뭐라고? 철수?]
계속해서 전진하며 압박하던 아갈타의 선봉대가, 저 멀리서 산맥을 뜯어내던 아갈타의 공병대가 분명 물러나고 있었다. 일시적인 재정비가 아닌 차원 자체를 떠나려고 준비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진짜 가? 진짜야?]
[마, 맙소사, 마, 만세!]
[어, 어. 어. 만세!]
[간다! 진짜 간다! 만세! 만세!]
이 얼떨떨한 행운을 어쩔 줄 모르고 모두가 일단은 만세를 부르고 있던 그때, 빛의 후손인 별빛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철수? 어째서… 설마?’
별빛이 알고 있는 정보는 아주 제한적이었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나름대로 가설을 만들어 보았다.
예전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때 별빛은 아갈타의 지휘관들의 대화를 들었고, 그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르누아의 현자와 장로들의 주문으로 번역을 하는 데 성공했었다.
‘그때 분명 그랬어. 아갈타가 공격하는 건 우리 르누아뿐만이 아니야. 주변의 다른 차원과 지구… 라는 곳도 침공을 한다고 했다. 만약 그곳에서의 싸움이 예상처럼 풀리지 않아 놈들이 떠나는 거라면?’
별빛의 눈이 반짝였다.
‘어쩌면 이 전쟁은 우리만의 전쟁이 아닐 수도 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약 그런 거라면 차원 외부의 상황이 평정되는 즉시 아갈타 놈들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도 열어 놓아야만 해. 만약 그렇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 돼!’
그러니까…….
별빛은 단호한 목소리로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외쳤다.
[좋아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도 차원 도약 기술을 완성해야 합니다! 아갈타 놈들이 두고 간 것을 조사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우리도 르누아 차원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여차할 때 저 바깥에서 아갈타와 싸우고 있을 다른 차원들과 합동 전선을 펼칠 수 있다. 이것은 할 수 있냐 없냐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든 해내야만 하는 문제!
별빛의 두 눈에는 단호한 결의가 서렸다.
[저 바깥 어딘가에… 우리와 같은 적을 두고 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 * *
‘후우… 힘들다, 혼자 싸우려니까.’
삭신이 다 쑤셨다. 어떻게 싸워서 어떻게 도망치고 지구로 복귀했는지 기억조차 혼미했다. 며칠은 침대 신세를 져야 할 것 같다.
‘할 만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도한 건데… 막상 해 보니까 진짜 죽겠네.’
차원 해적으로 위장해 아갈타의 후방을 들쑤셔 놓겠다는 계획.
어찌 보면 허술할 정도로 단순한 그 계획을 어떻게든 현실화하는 건 전적으로 나의 역할이었다.
돈이 없어서 차원 포대를 설치할 수 없으니 내가 포대 역할을 해야 되고, 병력이 없으니 부대 하나의 전투력을 발휘해야 하며, 동시에 [자유]로 평행 세계 세 군데에서 싸우며 최적의 전략을 찾고 최선의 결과를 끌어모아야 했다.
정말이지 죽을 맛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생을 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휘오가 자신의 가지 위에 축 늘어진 채로 말했다.
“아… 죽는 줄 알았어…….”
정령 형태의 휘오뿐만 아니라 휘오의 본체도 가지가 축 처지고 이파리들이 노랗게 시들시들해져서 아주 보기 안쓰러웠다.
그 모습을 보니 내 입에서는 푸념이 절로 나왔다.
“아갈타 놈들 진짜 부럽네… 그 엄청나게 발전한 장비들… 그런 주제에 물량도 미쳤고… 미안해. 고생 많았지?”
우리는 장비의 발전도도 낮은데 물량도 적다. 그러니까 나랑 휘오가 다 갈려 나가야만 했다.
휘오는 나를 따라 푸념했다.
“응. 진짜 죽을 뻔했어. 그래도 걔네 부대 단위로 들고 다니는 차원 간섭 장비는 괜찮았어. 근데 나중에 웬 잠수함 같은 것도 오더라? 창조신의 꿈이 흐르는 차원의 격류를 막 가르면서 다가오는데… 그거 진짜 무서웠어.”
휘오가 말하는 건 차원강습함이었다. 창조신의 꿈속을 기동하는 차원 이동 함선. 대규모 병력의 차원 이동을 가능하게 하며, 차원을 봉쇄할 수도 있고 이동형 차원 포대로도 사용할 수 있는 전천후 차원 병기.
현재 우리의 전력으로 상대하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최종 병기 같은 대상이었다.
휙, 휘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시민시민, 시민은 그런 것 못 만들어?”
“어, 못 만들어. 만들고 싶다.”
“아빠 능력 없네.”
“아빠 아니다. 그냥 소시민이다.”
차원강습 시스템도 없는 찌질이인데 차원강습함은 무슨…….
나는 곳곳에 널브러진 화랑단원들을 보았다.
제일 고생한 건 나랑 휘오라고 해도 화랑단원들 역시 첫 출진부터 혼이 쏙 빠지는 치열한 전투를 경험해야 했다. 피해도 적지 않았다.
198명이 나가서 177명이 돌아왔다. 21명이나 전사했다. 적의 대대 두 개쯤은 전멸했으니 상대적으로는 적은 피해지만, 이들 하나하나가 전도유망한 헌터라는 걸 생각하면 역시 아까운 손실이었다.
피해 없는 전투란 있을 수 없고 분명히 대승한 것도 맞지만, 여전히 아까운 그런 거.
“후…….”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휘오의 줄기에 등을 대고 기댔다. 눈을 감았다.
‘아는 사람이 죽는 걸 보는 건 진짜 익숙해지질 않네…….’
많이 봤는데, 심지어 지금은 두 번째 삶인데…….
털썩.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내 옆으로 누가 와서 앉았다. 눈을 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서민서였다.
툭.
조용히 앉아 있다가 내 어깨를 자기 어깨로 살짝 받아 주며 서민서는 말했다.
“둘 다 수고했어요. 크게 이겼고, 전리품도 엄청 많네.”
그냥 인사말 같지만 서민서는 지금 날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티 나냐? 티 안 날 텐데.”
“선배는 똑같아요. 좀 슬프면 눈썹 끝이 처진다고요. 고등학생때부터 그랬어요.”
…그러냐? 내가 사실 네 기억보다 수십 년은 더 살다가 되돌아왔는데도 여전히 그랬던 거냐?
“내가 슬플 리가 있냐. 이겨서 얼마나 기쁜데.”
“눼에 눼에.”
나랑 휘오 그리고 서민서. 우리 셋은 그렇게 잠시 어깨를 기대고 휴식을 취했다.
데미안 도련님은 그런 우리 모습을 흘깃 보고는 전리품 분류와 부상병 치료를 시작했다. 하여튼… 도련님은 어린데도 든든하다, 든든해. 덕분에 지금 내가 이렇게 긴장을 풀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치만 우리 도련님도 조금은 쉬는 게 좋을 텐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앉은 채 곯아떨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