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적진의 한복판에서
영혼을 지니고 태어나서 가장 많이 하게 되는 착각.
그건 어디에나 질서가 있을 거라고 믿는 것. 질서가 있는 상태가 오히려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 정말이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착각이었다.
진실은 단순한 확률 문제에 가깝다. 점을 무작위로 배열하면 99.999999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신호가 꺼진 티비 화면과 같은 노이즈, 무질서가 나올 뿐이다. 그 점들이 배열되어 글자를 이룬다거나 그림을 만드는 건 기적과도 같은 작은 확률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혼과 생명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기적이기에 그 기적의 소산들은 질서라는 게 얼마나 얄팍하고 아슬아슬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지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이따금 그 얄팍한 토대를 무너뜨리는 사건을 마주할 때가 되어야 이 세상의 본질이 사실은 무질서였음을, 끔찍한 공포였음을 깨닫고야 마는 것이다.
차원 포격이 휩쓸고 간 현장은 바로 그런 깨달음을 얻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서민서는 그 풍경 앞에서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미쳐 버렸네.”
그래. 미친 풍경.
작디작은 약소 차원 하나가 차원 포격을 맞고 쑥대밭이 되었다. 연출가가 모아 온 소문에 의하면 이곳은 어떤 차원 해적단의 근거지였던 모양.
해적단의 근거지라고는 하지만 그 전에 하나의 도시였다. 대부분의 주민은 해적이 아니었고… 그저 저마다의 이유로 자신의 고향을 떠나야 했던 불쌍한 사람들이 밀리고 밀리다가 모여든 차원의 외곽. 지구의 중세 시대로 치면 화전촌쯤 되는 그런 작은 차원 도시 하나가 완전히 멸망해 버렸다.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부서지고 하는 수준이 아니라…….
“하늘이… 찢길 수가 있는 거였네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까막이의 말처럼 차원 포격을 맞은 하늘은 찢겨 있었다. 그 너머로 차원의 격류가 보였다. 차원은 구멍이 뚫린 풍선처럼 자꾸만 시공을 유실했다. 온 세상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황금빛 알갱이, 타키온으로 변해 가는 풍경은… 슬프디슬픈 마지막 황혼이었다.
‘이게… 채굴이라는 거구나.’
타키넷 친구들이 늘상 경고해 오던 그것, 바로 ‘채굴’이다. 차원 하나를 타키온으로 분해해서 뜯어 가는 극악한 행위.
그렇기는 한데… 이상했다.
연출가 역시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못생긴 프랑켄슈타인 얼굴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네. 채굴하는 인원이랑 장비가 보이질 않는데?”
차원이 타키온으로 분해될 정도로 걸레짝을 내놓기는 했는데, 정작 타키온을 수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황금빛 황혼 속에서 한때 불쌍한 누군가의 보금자리였던 작은 약소 차원 하나가 쓸쓸히 홀로 증발할 뿐.
그뿐만이 아니었다.
“채굴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주둔부대도 안 보이는데?”
우리는 일제히 연출가를 바라보았다.
분명 놈이 여기에 만만한 부대가 하나 주둔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못생긴 프랑켄슈타인 인형이 화들짝 놀라면서 손을 휘저었다.
“아, 아냐! 분명 정확한 정보였다고!”
“그래? 근데 왜 정보가 다를까? 정확한 정보인데. 이상하다. 그치?”
데미안의 싸늘한 목소리에 연출가가 주춤 물러서며 손을 떨었다.
그래. 정말 이상했다.
분명 주둔부대가 없는 건 그렇다 쳐도, 아까운 타키온을 저렇게 방치하고 있는 이유는 대체 뭐지? 왜 타키온을 채굴하고 있어야 할 작업자조차 없고 그냥 아무것도 없지?
그저 차원의 격류 속으로 녹아드는 차원만이 덩그러니…….
그래.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곳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다.
“어……?”
갑자기 [만상공감]의 경계를 비집고 들어오는 역겨운 감각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미친!”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 아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느껴 본 적 있는 혼란스럽고 저주스러운 감각. 하지만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여태까지는 나는 작은 구멍 너머에 있는 모습만을 경험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완전 달랐다. 그것은 이미 구멍을 넘어 온전한 상태로 나와 함께 이곳에 있다.
몸이 떨린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연출가도 비명을 질렀다.
“뭐?! 미친! 1급 혼돈? 사상의 붕괴가 이미 진행 중이라고? 야! 튀어! 튀자고! 당장 튀어!”
압박하던 데미안을 도리어 작은 손으로 밀어내며 연출가는 절규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새끼지만 지금만큼은 놈의 말에 동의했다. 도망쳐야 한다. 지금 당장!
“휘오!”
- 알겠어!
부우우웅-!
하얀색 게이트가 우리 발밑에서 열렸다. 황급히 부서진 차원을 떠나는 순간, 지평선 너머에서 치솟는 거대한 존재가 보였다.
회색이라고 해야 할까, 투명하다고 해야 할까? 세상 모든 것이 뒤섞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세상의 그 무엇도 섞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불쾌하고 불쾌한 촉수가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땅과 하늘을 관통하며 치솟았다. 그것은 바로 어비스 게이트 너머에 존재하는 것. 멸망. 혼동. 무의미. 공포… 차원 너머의 차원 격류와 창조신의 꿈마저도 지나쳐 그 바깥에 존재하는 것. 존재함의 바깥에서 찾아오는 불길하고 흉한 것. 질서가 아닌 혼돈과 무질서 그 자체인 것.
어쩌면 저것이 세상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그 거대해 보이는 차원 문명들조차… 완전하고 무한해 보이는 세계의 ‘질서와 섭리’마저도 사실은 ‘무질서와 혼돈’이라는, 훨씬훨씬 거대한 혼돈과 공포 위를 표류하는 난파선이고 그 안에 타고 있는 승객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승객 놈들은 또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고 있다는 우스운 이야기.
가끔 이런 일이 있다고 듣기는 했다.
차원이 통째로 부서질 때 낮은 확률로 이 세상에 임해서 질서와 창조의 흔적을 감쪽같이 지워 버리는 섭리 바깥의 존재. 어비스 게이트, 혼돈, 세계 밖의 신.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그 것.
그것이 이렇게 어비스 게이트 밖으로 완전히 나왔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도망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이 불쌍한 세상은 타키온 한 톨조차 남기지 못한 채 소멸할 것이다. 비록 거대한 모래사장의 모래 한 톨 정도되는 크기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분명 수많은 차원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세상은, 섭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작아질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덜덜덜 몸을 떠는 사이 휘오는 무리해 가면서까지 여러 차례 차원 이동을 감행해 우리를 안전한 장소에 내려 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겨우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하… 죽는 줄 알았네.”
[만상공감]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을 더 크게 입었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한 기분.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내 주위로 동료들이 터덜터덜 둘러앉았다.
힘들긴 하지만 뺄 순 없다. 계획을 다시 세워야 했으니까.
데미안이 말했다.
“큰일이네요. 원래는 아까 거기서 아갈타의 주둔군을 하나 잡아먹었어야 했는데…….”
연출가가 그 말을 받았다.
“별수 없지. 혼돈이 나타났으니 아갈타 놈들도 난리가 났었겠지. 죄다 긴급 철수 했을 거고, 지금 부대 배치는 완전 뒤죽박죽일걸?”
박민희가 미간을 좁혔다.
“그럼 문제되는 것 아닌가? 우리 인원이 압도적인 열세인데… 상대 진형도 모르고, 퇴로도 미리 준비 못 하고 들어갔다가는… 그냥 둘러싸여서 죽는 거잖아.”
그 말에 다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출가가 못생긴 얼굴을 흔들며 말했다.
“에이. 어쩔 수 없네. 한 번 빼자. 잠깐 상황 지켜보다가 다시 출진해. 이건 너무 위험하잖아. 멋진 장면 뽑기도 전에 허무하게 다 죽으면 시청자 민심이 나락으로 간다고.”
연출가는 일리 있는 말을 굳이 재수 없는 말투로 설명해 주었다.
“아갈타 놈들 만만하지 않다. 숫자도 장비도 너네 따위보다 훨씬 좋아. 근데 진형 확인도 안 하고 그냥 들어간다? 죽겠다는 소리지. 주인공이 죽는 방송도 자극적이고 좋긴 하지만, 그래도 좀 죽을 만한 곳에서 죽어야지, 갑자기 개죽음당하면 개연성 없다고 민심 나락이라고. 알겠어? 빠져. 빠지자고. 빠져야 돼!”
퍼억!
그래. 내가 너 까불다가 한 대 맞을 줄 알았지. 연출가를 발로 찬 건 역시 데미안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의 표정은 그다지 개운해 보이지 않았다.
“알아. 안다고. 여기서 지금 물러서야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 없어. 분위기 파악 좀 해라.”
역시 데미안.
도련님 말이 다 맞다. 그럼그럼. 다 맞지. 하나만 빼고.
“저기, 도련님.”
“네?”
“그냥 속행하죠.”
“네에?”
데미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발랑 자빠졌던 연출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야! 미쳤어? 상황 파악을 못 하네! 이번에 파견된 아갈타 놈들, 다 최근에 장비를 업그레이드한 놈들이야! 너희가 예전에 싸워 본 그 허접한 놈들이랑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고!”
오, 이건 못 들어 본 이야기인데?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연출가는 데미안의 눈치를 살살 보며 말을 계속 이었다. 나를 꼭 설득하고 싶은지 다급하고 절실한 목소리였다.
“너, 너희한테야 그저 차원강습 시스템이라고 하면 다 최신식 오버 테크롤로지겠지만, 엄연히 그 안에도 급이 있다고. 중고로도 안 팔릴 구닥다리가 있고, 모델 자체는 오래됐어도 여전히 계속 신제품이 나오는, 어? 한두 세대 이전에는 명품으로 불린 그런 괜찮은 물건들도 있다고! 지금 우리가 칠려고 하는 녀석들은 다 그런 신품으로 무장한 놈들이다. 출력이 다르고 반응이 다르다 이거야! 근데 그냥 들어간다고? 부대 하나 잡아먹기도 전에 둘러싸여서 다굴 맞고 죽어, 인마!”
“그러니까 최근에 장비 업그레이드를 해서 전력이 더 강해진 상태다?”
“그래!”
흠… 그런데 그걸 감안해도 어쩔 수 없었다.
“첫 실전이야. 차원 전쟁이라는 게 원래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걸 텐데, 이런 일로 처음부터 꼬리를 말 수는 없어. 르누아 차원도 그 잠깐 사이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고.”
데미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사령관님…….”
하지만 나는 도련님의 말을 끊고 뜻을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포위되어도 어떻게든 뚫고 나갈 수 있으니까 걱정 말자고요. 제가 훈련시킨 화랑대를 믿고 또 저를 믿어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최악을 가정해 봐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적의 본대도 아니고, 외곽을 돌아다니는 소규모 부대들 따위… 몇이 오든 상대할 수 있다.
그 정도 자신이 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고작 200명도 안 되는 인원을 이끌고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았겠지.
“사령관님…….”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는 보는 동료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선진 문명에서 온 연출가조차도. 심지어 본인들조차도.
자신들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그리고…….
“진짜 괜찮습니다. 이젠 활도 잘 다룰 자신이 생겼으니까.”
나는 정말 자신이 있었다.
* * *
아갈타의 차원강습병들은 지구에서 마족 또는 악마라고 불렸다.
괜히 그런 게 아니다.
차원 문명 간의 전쟁은 영적인 전쟁. 높은 단계 영능학은 낮은 단계의 문명에게는 신과 악마의 행사처럼 이해할 수 없고 두려운 것일 뿐이었다.
아갈타 제57차원강습 사단 1771강습 연대 3317수색 대대. 원시 차원 지구와 낙후 차원 르누아를 포함하는 방대한 영역을 통제하에 두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진 주둔부대들 중 하나였다.
가끔 수입이 끊겨 악에 받친 차원 해적이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약소 차원의 차원 도시들이 저항할 때면 전투를 벌이곤 했지만, 그 전투가 늘 시시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하, 참. 기껏 새 장비를 받으면 뭐 해. 쓸 일이 없는데. 쓸 일이 없어.]
[그러니까 말이다. 그냥 죽음의 오러만 켜고 다녀도 알아서 다 픽픽 쓰러져서 죽으니 원. 이게 전투인지 쓰레기 청소인지 모르겠네.]
[아직도 몰랐냐? 우리 군인이 아니라 청소부인 거?]
지급 받은 장비의 성능이 100이라고 할 때, 5나 10만 써도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전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학살의 연속. 차원강습병들의 마음에 자만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 그 쪽팔린 연대장을 죽인 차원 해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군대 수준의 무장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솔직히 여기 와서 마주친 차원 해적들은 다 해적이라고 불러 주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잖아.]
[아니, 애초에 이런 오지에 대체 무슨 그런 해적이 있다는 거야. 솔직히 이상하지 않아? 그때 분명 해적들이 차원 포격을 퍼부었다며? 근데 그 포를 어디서 쐈는지 조사관들도 못 찾았다는데, 그게 말이 되나?]
도리어 보고가 잘못되었다고 의심해 보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갈타 병사들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불행이 그러하듯 그들의 불행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닥쳐 왔다.
- 경보! 경보! 경보!
차원강습 시스템이 알리는 다급한 경고.
- 강력한 영력 반응을 확인. 5초 뒤 충돌합니다. 4등급 차원 포격을 뛰어넘는……!
[뭐, 뭐? 무슨……!]
벌떡 일어나는 차원강습병들. 마음은 당황했지만 몸은 훈련한 대로 움직였다. 아공간에 손을 뻗어서 주먹만 한 유리구슬을 꺼내 가슴에 내리친다.
쩡! 쩡! 쩡!
사방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함께 영력이 회오리쳤다.
사용한 장비의 이름은 ‘영력 중화제’. 적대적 영력을 무효화하는 오러를 생성하는 아이템으로, 차원 포격을 대비하는 가장 기초적인 개인장비였다.
[서둘러! 서둘러!]
- 경보! 경보!
사방에서 황금빛 문자열이 떠올랐다. 차원 문명의 부대들도 참호를 파는 것은 매한가지. 영적인 결계가 마치 참호처럼 구불구불 피어올라 차원강습병들의 은폐와 엄폐를 담당했다.
차원강습병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막대 모양의 작업용 캐스터를 꺼내 황급히 주변의 공간을 파내고 둘둘 말아 그 안에 자신의 몸을 숨겼다.
완벽한 차원 포격 대비 태세. 만약 쏟아지는 공격이 4등급 차원 포격 정도였다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을 것이다.
- 경보! 경보! 위력을 상향 조정! 3등급! 아니, 2등급! 국지적이나 위력만큼은 2등급 수준!
하늘에 먹색의 글씨가 새겨지고 있었다. 낯선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아갈타인들마저도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아닌 영혼에 새겨지는 글씨.
[성 위에 일흔 살을 쏘시어 일흔의 낯이 맞으매, 개가로 돌아오시니].
[아기살 하나에 섬 도적이 놀라니…….]
그리고 그 먹색의 글자를 혜성의 꼬리처럼 끌고 내려오는 붉은 화살들.
소리는 없었다.
그저 뜨거운 칼날이 눈뭉치를 파고들 듯이 하늘을 뒤덮은 황금빛 결계도, 차원강습병들이 칭칭 휘감고 있던 시공간의 곡면도, 몸에 스며든 차원 중화제도 그냥 근처에 떨어지는 화살을 피해 밀려날 뿐.
그리고 공간이 흔들리고 시야가 흔들렸을 뿐.
소리는 오히려 그 후에 들렸다.
[끄아아아아아!]
그건 처절한 비명이었다.
* * *
나는 엄지손가락에 낀 활깍지를 빼고 이성계의 활을 내렸다.
“후우…….”
실전에서 써 보는 건 꽤 오랜만이다. 위력이야 강하지만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매번 탈진해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위력을 한정했고, 탈진하지 않은 채로 여러 개의 화살을 쏘아 낼 수 있었다.
우웅- 우우웅-
내 허리춤에서 나의 성검, 반월이가 두렵다는 듯 몸을 떨어 댔다.
그래. 유물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어비스 게이트를 빠져나온 혼돈의 존재처럼 압도적이고 공포스러운 면이 있다. 내가 가진 장비 중 가장 뛰어난 반월이조차 두려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그런데도… 익숙해졌어.’
나는 묘한 시선으로 이성계의 활을 내려다보았다. 이성계의 활을 타고 타오르는 백색의 아우라가 보였다. 테두리를 절반 좀 넘게 채우고 타오르는 아우라.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그래서 이걸 처음 봤을 땐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랐다.
‘유물에도 길들이기가 될 줄이야?’
길들이기 진척도 능숙 단계. 이성계의 활이 내게 길들고 있었다.
‘[만상공감]… 이건 대체 한계가 어디야?’
내 능력이면서도 두려울 지경이었다. 대체 유물을 완벽하게 길들이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200만 원짜리 명품 과도도 다 길들고 나자 스스로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 줬는데…….
상상하다 보면 너무 허황된 생각마저 들어서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덕분에 돈이 굳었다, 뭐 이런 식으로.’
이성계의 활 덕분에 당분간 그 비싼 차원포를 구매하지 않아도 되니까 엄청난 이득이다.
나는 초토화가 된 아갈타의 주둔지를 바라보았다. 피해가 크지만 사망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참호의 방어 체계를 허물고 놈들을 혼란 상태에 빠뜨렸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 결국 마무리는 보병이 해야지.
아갈타 측은 차원강습병 161명.
이쪽은 화랑단원 197명.
‘첫 전투로 딱 괜찮은 숫자네.’
나는 화랑단원들을 향해 예령을 내린다.
“전군!”
내 등 뒤에서 영력들이 치솟는다.
“목표는 전멸. 놈들 지원부대 오기 전에 싹 정리해.”
그리고 한 템포 끊고 동령을 내린다.
“돌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