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37화 (137/212)

16. 성검 시스템

입에서 쇠 맛이 났다. 이 중에 누군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나보다.

사방에서 아드레날린이 뿜어지고 시큼한 냄새가 난다. 좁아진 시야들이 내게 모여든다.

‘역시 반응들이 빨라.’

전쟁이 일상이 된 이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전사들이다. 당겨진 노리쇠뭉치처럼 단단하게 긴장된 근육들은 누가 톡 건들기만 해도 나를 향해 격발될 것이다.

오싹오싹 소름이 돋는다.

즐겁다.

아마 이들과 함께라면 내가 구상한 작전도 문제없을 거다.

‘물론 아직은 원시 야만 전사들일 뿐이지.’

작전을 위해선 이들을 단시간 내에 ‘차원 해적’ 느낌이 물씬 나도록 장비와 전투 스타일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들의 상식을 좀 세게 흔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 사람은 잘 안 바뀌는 생물이라서, 단기간에 바꾸어 놓으려면 극한에 몰아넣고 엉엉 울 때까지 흔들어 놓아야 하는 법이니까.

“표정들 재밌네. 내 말이 불쾌들 하신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말꼬리를 잡아채며 대답이 돌아온다.

“지랄.”

욕설은 양반이고.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는 제스처는 귀여운 거고.

“…….”

대개는 그냥 살기를 풀풀 날리며 뒤통수 조심하라고 눈빛으로 조용히 경고를 했다. 저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기회만 생기면 그냥 저지르겠다는 결심이었다. 왜, 실제 전쟁 때 가장 잘 죽는 게 소위고 그 소위를 죽인 총알은 대개 후방의 아군 병사한테서 날아왔다고 하지 않는가? 위험한 놈들이다. 전쟁통을 전전하며 다지고 다져진 놈들만 모아 놨으니 쉽게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있나.

말은 통하지 않는다.

자, 그러니 이제 그만 숙련된 조교를 불러 ‘차원 해적’의 전투 방식을 체감시켜 주자.

“까막이, 앞으로.”

“옙!”

까막이가 팔뚝 길이의 짧은 성검 두 자루를 허리에 차고 앞으로 나왔다. 띳돈으로 연결되어서 허리에서 잘그락거리는 검 두 자루가 잘 어울린다.

‘잘 빠졌네.’

성검에서부터 입은 방어구에 신발까지, [만상공감]에 잡히는 감각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물론 같은 성검 시스템이라고 해도 내가 가진 ‘반월’과 같은 걸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공산품에 지나지 않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훌륭했다. 만약 이런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면 최치국이 여전히 살아서 세상을 지키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에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보다시피 이 친구 어려요. 전쟁 고아라서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14살쯤에 프로 헌터 자격을 땄고 지금은 15~16살쯤 됐을까?”

그러니까 한국 나이로는 16~17살. 중3에서 고1이 된 나이다. 원래는 훨씬 작았는데 1년 사이에 부쩍 키가 커서 이제 168에 육박할 정도가 되었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렸다. 명백히 깔보는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헌터의 강함은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근력이나 유연성과는 달리 마누스나 초능력 같은 이능력은 나이를 먹는다고 쇠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괜히 예순을 넘긴 하준광이 대한민국의 최강자인 게 아닌 것이다.

“14살 때 프로 헌터 자격을 딴 건 제법이지만… 여기 계신 분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죠? 대부분 14살은 당연하고, 10살이나 9살에 프로 자격을 획득한 소위 ‘천재’들도 여기에 꽤 있는 걸로 압니다. 그러니까… 이 친구 실력은 원래대로라면 여러분 앞에 내세울 수가 없는 수준이어야 하죠. 그래서 딱 적격입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에게 나는 마침내 본론을 말해 주었다.

“가르쳐 주기 딱 좋을 겁니다, 여러분 장비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자, 도전하세요. 이 친구를 꺾는다면 제 뺨을 칠 수 있는 권리를 드리죠.”

오, 사방에서 아드레날린이 폭발한다. 반응 좋고.

“뺨 몇 대인지 말 없었어요? 그럼 마음대로 쳐도 되죠? 그 약속 지킬 거라고 믿습니다. 그 정도 명예는 있으시겠지.”

곧장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철컥.

허리에 찬 검을 소리 나게 툭 치며 걸어 나온다. 산화한 금속 같은 붉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였다.

“강철기사회의 1급 기사 토마스입니다. 나서기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사정이 좀 있어서 저 꼬마는 제가 혼내야 할 것 같습니다.”

토마스는 주변에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뭔가 사정이 있었는지 다들 수긍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념의 검을 지녔을 정도면 실력이 부족하진 않겠지.”

건방지기로 유명한 칼츠가의 인물들도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그중 오직 한 명만이 묘한 호승심으로 까막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덮어놓고 까막이를 얕보는 다른 이들과는 반응이 달라서 시선이 간다.

‘이오닌 칼츠라고 했지? 여기 모인 이들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인물이라고…….’

데미안이 전해 준 바에 의하면, 피핀 차원의 연출가를 상대할 때도 무용을 뽐냈던 인물이라고 했다. 그 후에 연출가가 소환한 보로스한테 크게 당했다고 하던데… 차원 문명의 쓴맛을 봐서 그런 걸까? 혼자만 조금 느낌이 달랐다. 나서고는 싶지만 까막이를 경계하느라 신중해진 듯한 모습.

잠시 그를 살피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토마스와 까막이를 번갈아 바라보고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세요.”

스릉-!

둘이 동시에 검을 뽑았다. 토마스가 검을 뽑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칼자루를 잡은 손에서는 태산 같은 안정감이 느껴진다.

‘단순 기량으로 따지면 까막이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닌 고수지.’

사실 까막이가 내 밑에서 영력을 제대로 배운 건 이제 반년을 좀 넘었다. 강할 리가 없다. 내 기준으로 따지면 진짜 잘 봐 줘야 2류? 반면 토마스는 누가 봐도 1류다. 까막이가 한 다스로 덤벼도 당해 내기 어려우리라.

‘하지만 까막이가 들고 있는 건 성검 시스템이야. 그리고 나는 녀석에게 다른 건 몰라도 ‘공격적 방어’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가르쳤다.’

지구에서 마족이니 악마니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는 아갈타의 병사들도 사실 차원강습 시스템을 벗기고 나면 3류 헌터들도 당해 내기 어려워한다. 물론 성검 시스템은 차원강습 시스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전 세대의 차원 전쟁을 주름잡던 재래식 병기.

1차 대전 시대의 병기라도 원시인을 상대로 싸울 땐 차고 넘치는 위력을 보여 줄 수 있는 법이다.

토마스가 말했다.

“꼬마야, 칼 잡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

쿵!

대기가 일그러지고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토마스의 몸이 까막이의 앞에 닿았다. 특별할 것 없는 정석적인 마누스 스킬 [차지]. 하지만 그 위력은 정예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토마스는 틀렸다. 성검 시스템은 분명 검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인간이 사용하는 냉병기처럼 여기면 안 된다. 성검은 어디까지나 전술적 공격을 가능하게 해 주는 영적 전투 시스템. 정석적으로 칼을 잡지 않았다고 해서 그 위력이 반감하지는 않는다.

“흥!”

성검이 주는 버프를 받은 까막이는 토마스의 어마어마한 속도에도 제때 반응을 해냈다.

두 자루의 성검에서 영력이 치솟고, 그 순간 대기를 일그러뜨린 토마스의 마누스는 바위를 때리는 계란 흰자처럼 퍽! 하고 뭉개진다.

“뭐, 뭣?”

“새꺄! 이게 바로 성검 시스템이라는 거다!”

쩌어엉-!

성검에서 저절로 발현된 실드오러가 토마스가 휘두른 신념의 검을 튕겨 낸다. 동시에 또다른 성검에서는 블레이드오러가 불길처럼 치솟는다. 영력을 극한으로 집중해서 만들어 내는 성검 시스템의 블레이드오러는 강기가 아니고서는 막아 내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다양한 활용이 불가능하고 속성이 한정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원강습 시스템에 밀렸지만, 단순 위력만 따진다면 여전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성검.

스칵!

“흐앗!”

토마스의 허리가 거의 직각으로 꺾이며 블레이드오러를 피해 냈다. 과연 뛰어난 실력. 쉽게 당하진 않았다. 오히려.

쩡! 쩌정!

토마스는 눈부신 분전을 보여 주었다. 아직 미숙한 까막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어떻게든 성검 시스템의 실드오러를 넘어서기 위해 신념의 검을 찌르고 휘두르고 비틀어 보았던 것이다.

까각! 카가각!

하지만 자랑하던 신념의 검만 애처롭게 비명을 질러 댈 뿐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으드득!

자존심이 상한 토마스가 이를 갈아붙였다. 진심을 담은 살기가 붉은 머리칼을 타고 치솟는다.

“하! 이것까지 쓸 줄은 몰랐지만……! 봐라! 이게 강철기사회의 마스터 스킬! [꺾이지 않는 신념]이다!”

야만적인 마누스가 휘몰아쳤다.

검 끝에 집중된 마누스가 대기를 극단적으로 비틀어서 토마스의 모습이 깨진 유릿장처럼 조각나 보였다.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다. 지구인이 차원 문명에 저항할 수 있는 이유인 초능력이 더해졌다.

‘강철기사회는 신체 강화 종류의 회원들을 선호한다더니… [야수화]인가?’

토마스의 근육이 급격하게 부풀고, 거칠고 두꺼운 털이 무섭게 돋아난다. 휘몰아치는 마누스 때문에 몇 배는 더 기괴해 보이는 모습으로 토마스가 달려들었다.

“막을 테면 막아 봐! 강철기사회의 신념의 검은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단단함을 자랑한다! 그리고 1급 기사의 마스터 스킬은 그 무엇에도 밀려나지 않는 돌진의 상징!”

꺾이지 않는 것이 밀리지 않고 돌진해 온다면 그 결과는 관통밖에 없다.

“흥!”

하지만 까막이는 겁먹지 않고 오히려 슬그머니 몸의 중심을 정면으로 옮겨 실었다.

‘잘한다, 까막.’

내가 가르친 ‘공격적 방어’가 바로 그것이다. 적의 공격을 끈질기게 튕겨 내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히려 더 위협적인 공격을 찔러 넣는 것. 토마스가 승부수를 띄운 지금이 바로 까막이의 기회.

꽈광!

토마스의 검이 음속을 까마득하게 상회하는 속도로 찔러졌다. 흉악하게 압축된 마누스가 상성의 우위를 무시하고 성검의 실드오러를 밀어붙인다. 털이 흉흉하게 돋아난 토마스의 전신은 고층 빌딩도 무너뜨릴 기세로 전진한다.

하지만.

써컹!

토마스의 모든 힘이 한 점에 모인 신념의 검, 그 검의 한복판을 까막이의 블레이드오러가 가르고 지나갔다.

동시에 까막은 몸을 뒤집고 또다른 성검에서 솟구친 실드오러로 힘의 중심을 잃은 토마스의 몸을 하늘로 쳐올린다.

쩌엉!

산화한 철처럼 붉은 털이 숭숭 돋은 토마스의 몸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 궤적을 따라 피가 흩뿌려진다.

“아오… 단단하네.”

까막이가 중얼거렸다. 성검을 잡은 손이 얼얼한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토마스의 검은 그 중간이 잘려 나가 뎅그렁 땅에 떨어졌다.

쿵!

허공을 훨훨 날다가 땅에 떨어져 대자로 뻗은 토마스의 몸에는 온통 울긋불긋하게 피멍이 들었다.

[야수화]에 재생도 포함되어 있는지 전신 타박상이 빠르게 치유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내상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지 토마스는 일어서지 못하고 땅을 헤엄쳤다.

결국 무릎 꿇은 자세로 겨우 몸을 일으킨 토마스는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신념의 검이… 잘렸다고?”

사방에서 침음성이 흘렀다.

“허… 저것 그 마족 새끼들 등장하기 전까지는 괴물 상대로 꺾인 적 없는 칼 아냐?”

“강철기사회의 신념의 검은 단단하기로 유명하지…….”

“그걸 16살짜리가 잘랐어? 우리 길드장님도 저렇게 생으로 부러뜨릴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는 물건인데……?”

표정들이 바뀌었다.

그들은 까막이와 토마스 둘 중 누가 더 고수인지 충분히 알아볼 실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나타난 결과에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머릿속으로 바쁘게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동작은 어설픈데 기이할 정도로 빠른 까막이의 몸놀림을 따라갈 수 있을까? 뜬금없이 솟아나는 실드오러를 넘어 타격을 가할 수 있을까? 은밀하게 날아오는 블레이드오러를 막을 수 있을까?

그 모든 시뮬레이션이 자존심 상하는 결과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비 차이 때문에 저런 애송이한테 진다고? 설마? 내가?

이를 악문 숨소리 사이로 억울한 목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대체 저 칼 뭔데?”

“성검 시스템……? 성검은 알겠는데 시스템은 뭐지?”

“…….”

아까와는 다른 의미에서 형형한 눈빛들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좋은 시작이네. 이제 내 말을 들을 준비가 좀 됐나?’

그래도 이제 겨우 한 발자국을 떼었을 뿐이다. 시간이 없다. 이제부턴 더 정신없이 흔들어 놓아야 한다. 이 야만 전사들이 엉엉 울다가 지쳐 차원 문명의 해적으로 거듭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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