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36화 (136/212)

15. 도무지 못 봐 주겠네

사실 조직원 하나하나를 납득시키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그 리더들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물론 사람을 움직이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돈이 줄줄줄 들어가는 법이다. 그 누가 대가를 받지 않고 일을 해 주겠는가?

하지만 때론 대가 없이 사람을 움직일 수 있을 때도 있다. 만약 아무도 모르는 지식을 나 혼자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걸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 충분히 많다면.

중세의 도제제도가 그랬고, 현대의 인턴 제도가 또 그렇다.

그래서 난 동맹 조직의 리더들을 앞에 두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다.

“각 조직의 장인들과 연구자들을 영혼 용광로로 파견해 주세요. 자연스럽게 영능학에 눈을 뜰 수 있게 잘 가르치겠습니다.”

대체로 표정들이 애매해졌다. 막 좋아할 만한 제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덮어 놓고 싫어할 제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인재들을 내놓아야 하니 속이 쓰리겠지만, 현장에서 직접 배우는 것만큼 좋은 교육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또 당당히 요구했다.

“장래성이 뛰어난 각 조직의 최정예들도 파견해 주세요. 직접 내 밑에 두고 최고의 장비로 무장시켜서, 지구 밖 차원 문명들의 세계를 보여 주고 그들의 전투를 경험시켜 주겠습니다.”

끔뻑끔뻑.

여전히 애매한 얼굴들이었다.

하긴, 세상에 튜토리얼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강력한 장비들을 지급 받고 다 같이 타키넷으로 뛰어나가 좌충우돌 거래도 해 보고 싶겠지.

하지만 나는 선을 딱 그었다.

“좋은 인재들을 가능한 많이 보내 주셔야 할 겁니다. 그들이 많이 보고 많이 배워야 나중에 적용하시기도 편할 테니까요. 영능학 기반으로 체제를 전환하기 위한 지원 수준은 그때 협의하여 필요하신 만큼 정하기로 하지요.”

으음…….

끄응…….

장내에 침음성이 흘렀다. 결국 내가 한 말은 “기다려.” 이 소리였으니까. 사실 이번에 영혼 용광로를 만들기 위한 막대한 자원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또 피핀 차원의 연출가를 꺾는 과정에서 데미안은 동맹 세력에게 꽤나 큰 빚을 졌다. 그건 동시에 내 빚이기도 했고.

그에 반해 우리가 동맹에게 내준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 보답을 나중으로 미루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불편한 신음 소리가 튀어나올 수밖에. 하지만 대놓고 반대하는 소리도 없었다.

어쩌겠는가? 우리의 유일한 대항 세력이라고 할 만한 아틀라스 클럽은 이보다 더한 착취를 감행하는 중인걸? 거기에 여기 있는 이들은 이미 다들 보고 왔던 것이다. 서부 드래곤힐동에 우뚝 솟은 영혼 용광로가 얼마나 찬란한지를. 영능학 문명의 위대한 가능성을 다들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해하는 그들에게 결정타를 꽂았다.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투자한다 생각하고 길게 보셨으니 이 자리에 계신 것 아닙니까?”

투자를 할 거면 떡상 할 때까지는 존버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달디단 과실을 따 먹을 자격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그럼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끙…….

으으음…….

기운찬 신음 소리와 함께 내가 올린 안건이 승인되었다.

* * *

강철기사회(Knights Fullmetalar) 소속 1급 기사 토마스는 긴장해서 눈동자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렸다.

‘와씨… 저 사람 오리하르콘 밸리의 천재라고 잡지에 나왔던 사람 아냐? 와… 저쪽은 5년 전 유럽 신인 헌터 평가에서 수석을 차지한 사람? 그때 내가 11위였는데… 으악! 저 사람은 칼츠가의 이오닌?!’

200명이 모였는데 그 200명이 전부 다 대단했다. 잘난 애 옆에 잘난 애 옆에 잘난 애. 평소 어딜 가도 재능으로 꿇리지 않는다고 자부해 온 토마스였지만, 이 자리에서는 나대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만이 정수리를 직각으로 찔러 댈 뿐이다.

‘각 세력의 최정예들만 모인다더니 진짜였네. 이런 정예들을 지휘한다고? 소시민인가 하는 사람 진짜 계 탔네, 계 탔어.’

이들 사이에 끼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깨가 으쓱거릴 정도.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슬며시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근데… 이 인원들을 제대로 통제나 할 수 있을까? 여기 모인 사람들… 나처럼 성격 좋은 사람 몇 없을 텐데?’

토마스는 자신이 비교적 평범하고 유순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달랐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이들이었고, 어디를 가나 주목받고 주도권을 행사하는 게 당연한 이들이었다.

심지어 소속마저도 저마다 다르니 단결보다는 경쟁을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봐 봐. 벌써부터 기 싸움 벌이잖아. 살벌하네.’

물론 그것은 세련된 것으로, 고등학교 1학년 첫 수업 날에 벌어지는 소년들의 노골적인 신경전과는 달랐다.

모두들 서로에게 아무 관심 없는 것처럼 쿨하게 앉아 있지만, 눈동자만큼은 빠르게 굴러갔다. ‘저쪽은 내가 이긴다’, ‘저놈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빠르게 판단을 내리며 어디서 다리를 뻗고 어디서 다리를 오므려야 하는지 가늠하는 것이다.

실력을 가늠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하자면, 사람과 물건을 함께 살피는 방식이었다.

가령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상대 손에 박인 굳은살, 무심코 손가락 훈련을 할 때 보여 주는 관절의 움직임 등 사람 그 자체를 통해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악기를 안았을 때의 자연스러움, 피크나 활 같은 소품의 낡은 정도, 소장한 악기의 가격 등 물건을 따져 보며 실력을 가늠하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헌터들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손과 눈을 보고 발의 디딤새를 본다. 무심코 내비치는 버릇을 통해 초능력의 종류와 위력을 가늠해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장비를 보게 되었다.

‘와! 저게 그 유명한 일리온 길드의 깃털 망토인가?’

하늘빛 깃털이 타고 흐르는 아름다운 망토였다.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지만, 손때가 묻어 길이 잘 들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망토가 그냥 한 몸처럼 움직이네. 만약 싸운다면… 내가 저 망토를 비집고 칼날을 찔러 넣을 수 있을까? 한 부분만 집중 공격 해서 찢어 버리는 게 더 나으려나?’

토마스도 상대의 장비를 살피며 머릿속으로 전투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자신이 속한 강철기사회의 자랑인 ‘신념의 검(Faith sword)’이라면 꺾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도통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시선을 돌리든 마찬가지였다.

헌터피스 특급 조사관들은 그림자 화살을 쏘아 낸다는 ‘흑영궁黑影弓’을 비껴 차고 있었고, 칼츠가의 인물들은 몸을 가볍게 하고 바람을 제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윙즈 머플러’를 하나씩 두르고 있었다. 머플러마다 짜임 무늬가 다 달라서 보는 재미마저 있었다. 하지만 보기 좋고 멋진 그 장비들 뒤에서는 무수한 실전과 연습을 거치며 닳고 닳은 파르스름한 예기가 싸늘하게 빛났다.

토마스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후덜덜 하네. 나 오늘 진짜 평범하다, 평범해. 그냥 여기서 중간만 가도 딱 좋겠다…….’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던 토마스. 문득 그의 눈에 톡 도드라지는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뭐야? 왜 이렇게 어려?’

15살이나 됐을까? 각 조직의 정예들만 모인 이 자리에는 대부분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인물들이 있었다. 재능만 뛰어나다고 되는 게 아니라 다년간의 경험마저 필요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저건 너무 어렸다.

심지어…….

‘장비는 왜 저렇게 새 거야? 뭐야? 대체 어느 조직에서 나온 거지……? 듣도 보도 못 한 행색이네?’

짧은 칼 두 자루를 쓰는 까만 머리의 동양계 소년이었다.

그런데 장비들이 하나같이 어찌나 새 것인지, 칼집은 반짝였고 칼집이 달랑 달려 있는 가죽 허리띠는 핏기마저 안 가신 것처럼 촉촉해 보였다. 입고 있는 옷에서부터 신발에 장신구까지, 전부 다 새 것이 아닌 게 없었다.

저래서야 경험도 훈련도 부족한 핏덩이로 보일 수밖에.

소년은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칼츠 가문 사람들의 윙즈 머플러가 눈에 들어왔는지 그 주변을 얼쩡거렸다.

토마스는 덜컥 걱정이 들었다.

‘이런! 저러다가 큰일 나지.’

칼츠 가문은 유럽에서 손에 꼽는 명문가였고, 그런 만큼 칼츠가의 헌터들은 뛰어난 실력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실력과 인성은 꼭 비례하지는 않는 법. ‘루드비히가 오만하다면 칼츠는 폭급하다.’는 말이 유럽에선 격언처럼 받아들여졌다. 칼츠가의 사람들은 시빗거리가 있으면 기어코 싸움을 벌이기로 유명했고,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그 상대를 아주 뭉개고 이가 갈리도록 수모를 주는 것으로는 더더욱 유명했다.

어리다고 봐줄 작자들이 아니었다. 토마스는 혀를 차며 급히 나섰다.

“어이, 꼬마! 이쪽으로 와.”

깜빡.

그러자 소년은 까만 눈동자로 토마스를 돌아보았다. 뭔가 토마스가 예상한 반응은 아니었다. 심지어 소년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꼬마? 그거 날 부른 거야?”

토마스는 생각했다.

‘아이고… 진짜 물정 모르네. 어쩌다가 저런 멋모르는 꼬마가 이 자리에 낀 거야?’

토마스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까딱거렸다.

“그래, 너. 일로와.”

그런데 소년은 토마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악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짓는 게 아닌가? 심지어 삐딱한 자세로 이렇게 말했다.

“어따 대고 이래라저래라야? 장비도 허접한 게.”

토마스는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오파츠를 통해 번역된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공손한 표현은 절대 아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화가 불끈 치밀었다.

“어이, 꼬마. 견습기사뻘도 안 되는 게 예절은 수프 말아먹었나? 여기 휘장 안 보여? 나는 강철기사회 1급 기사 토마스다. 기사한테는 ‘써(sir)’ 하고 경어를 붙여야 하는 것 못 배웠어?”

그러자 소년은 불손한 웃음을 더욱 짙게 띠며 답했다.

“반말은 지가 먼저 지껄여 놓고… 나는 창신대 소속 까막이다. 꼬우면 덤비든가?”

토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창신대?’

잠시 기억을 더듬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지휘를 맡게 된 소시민 사령관의 직속 부대 이름이 창신대였다.

‘하… 어쩐지 듣도 보도 못 한 차림새더라니.’

사실 소시민이란 이름이 유럽에까지 잘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토마스는 소시민을 그냥 아시아의 유력자 정도로만 생각했고, 소시민 개인이나 그 휘하 부대의 무력에 대해서는 딱히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토마스는 까막이의 행동을 멋모르는 치기 정도로 생각하고 점잖게 타일렀다.

“꼬마야, 너 그러다가 피똥 싼다?”

까막이의 웃음에 살기가 번졌다.

사실 까막이는 지독한 아이였다.

요즘 들어서는 여기저기 많이 치이는 바람에 착하고 얌전하게 살고 있지만, 원래 까막이는 살인 경험을 하고 싶다며 처음 보는 소시민에게 달려들었을 정도로 막 나가던 녀석. 특히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가차없었다.

까막이가 입술을 비틀고 대꾸했다.

“재밌겠네. 해보자.”

토마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기를 꺼낼 필요도 없이 몇 번 쥐어박을 생각이었다.

‘쯧. 소시민… 이 작자는 휘하에 그렇게 사람이 없나? 이런 철없는 애송이를 정예랍시고 데려오다니. 얘는 차라리 지금 나한테 몇 대 맞는 게 낫겠다.’

진짜 성질 더러운 애들한테 걸려서 심하게 맞느니 본인이 때려 주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었다.

‘아… 주변 시선이 부끄럽네. 다들 실력자인데 그 앞에서 손을 쓰려니 영… 얼른 끝내자!’

꾸욱! 디딤발에 힘을 주고 그가 막 까막이에게 달려들려던 그 순간.

“소시민 사령관님 입장하십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광장 앞 연단에서 울려 퍼졌다.

동시에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던 까막이의 눈이 땡그랗게 풀렸다.

“앗! 형님이다!”

토마스로부터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연단을 바라본 까막이는 다시 힐끗 돌아보며 으르렁거렸다.

“너… 이따 보자. 지금은 형님 때문에 산 줄 알아!”

토마스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은 주먹을 풀며 말했다.

“그래. 넌 좀 이따가 맞자.”

토마스는 ‘신념의 검’을 소리 나게 절걱! 흔들고는 연단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소시민이 무슨 말을 할지 무척 궁금하긴 했다.

‘대체 이 많은 정예들을 데리고 뭘 하려고?’

강철기사회에서 받은 명령은 여기 와서 소시민의 지시에 따르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잘 배워 오라는 것.

하지만 직접 와서 보니 그게 다 형식적인 말이 아닌가 싶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인물들. 남들에게 뭘 배우고 그럴 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차라리 같이 연구를 하면 연구를 하지.

결국 소시민은 이 막대한 전력을 이용해 본인의 전력을 강화하고 이제 발전하고 있는 영능학 연구를 가속화하려는 게 아닐까? 그런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윗분들을 구워삶았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토마스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조직에서 모인 200여 명의 정예들은 다들 비슷비슷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어디 한번 말해 봐라. 들어 주지. 그런 태도로 연단에 오른 소시민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연단에 오른 소시민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 원래는 형식적인 인사부터 하려고 했는데요. 죄송합니다. 도무지 못 봐 주겠습니다. 여러분! 일단 그 쓰레기 같은 장비들부터 좀 어떻게 합시다!”

치켜들고 있던 턱들이 일제히 갸웃 기울어졌다.

“예? 거기! 그 후줄근한 망토! 그게 뭡니까? 잡아채서 패대기치기 딱 좋아 보이네.”

그건 일리온 길드의 자랑, 깃털 망토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그 충격적인 폭언에 사람들의 입이 헤- 벌어졌다.

“그리고 까만 활은… 미친! 저 좋은 재료를 고작 그렇게 쓴다고요?! 그 시위 제대로 당길 줄은 아세요? 그리고 저 기다란 머플러는 또 뭡니까! 다들 패대기쳐지지 못해서 한이라도 맺혔습니까?”

헌터피스의 흑영궁과 칼츠가의 윙즈 머플러가 차례로 공격받았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뛰어난 실력을 지닐수록 자신의 장비를 아끼는 법. 소시민의 말은 그냥 들어 넘기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하지만 소시민은 장내에 모인 인원들의 장비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더 차갑게 비웃을 뿐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하아……? 신념의 검? 그건 그냥 우리 영혼 용광로의 땔감으로 쓰는 게 낫겠네요.”

장내에 모인 정예들의 눈동자가 분노로 활활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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