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33화 (133/212)

12. 기분 좋은 날

“그래서… 어비스 게이트는 어떻게 닫을 거야?”

“걱정 마. 마침 본가에 적당한 유물이 있으니까. 범위 내의 모든 신비를 차단할 수 있는 강력한 유물.”

“설마… 투탕카멘의 가면? 그게 있다고?”

“응. 아버지 방에 있어. 이미 챙겨 왔지.”

데미안이 손을 내밀자 긴장해서 지켜보고 있던 오리하르콘 밸리의 능력자가 상자째로 가져온 투탕카멘의 가면을 넘겼다.

연출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나 참… 한 방 먹었군. 그런 걸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루드비히를 얕보지 마.”

투탕카멘의 가면이 담긴 뚜껑을 열자 어비스 게이트와 세 개의 피리형 유물이 있는 공간 전부가 파라오의 안정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는 그 어떤 외부의 신호나 신비도 침투할 수가 없다.

- 끼이! 끼이이이익!

어느새 젓가락만큼 굵어진 촉수가 밀려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데미안이 피리 유물이 든 상자들마저 뚜껑을 덮고 봉인을 하자 어비스 게이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데미안이 다시 투탕카멘의 가면 상자에 뚜껑을 덮고 봉인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연출가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됐군. 그럼 이만 몸을 비워 주지.”

연출가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스윽 둘러보고는 자크 루드비히의 몸을 떠났다. 자크 루드비히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스르르 주저앉았다. 깊은 잠에 빠진 것이다. 한잠 자고 일어나면 이제 온전한 자신의 삶을 되찾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체인 연출가는 데미안이 제공한 프랑켄슈타인 인형 속에 들어갔다. 팔뚝 절반 크기이고 사랑스러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못생긴 그 인형을 보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형편없는 육체… 아니, 육체도 아니잖아?’라고 툴툴거렸지만, 데미안의 태도는 완강했다. 결국 연출가는 차원 경찰 보로스를 불러 인형에 몇 가지 조치를 취하고는 얌전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든 일을 처리했을 때, 저 높은 곳 오파츠 기반 궤도 정거장 오보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던 나디아가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 결국… 저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군요… 너무 분합니다.

데미안이 그녀를 위로했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내가 목숨 내놓고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다 네 덕분이야. 결국 마지막 순간에 네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 …항상 한발 떨어져 있어서 송구합니다. 하나 지켜봐 주십시오. 분명… 제가 도움이 되는 날이 있을 겁니다.

“이미 충분하다니까. 근데 말이 좀 이상해? 내가 위험해지길 바라는 것 아냐?”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데미안이 나디아를 놀리며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 연출가가 못생긴 프랑켄슈타인의 몸으로 뒤뚱뒤뚱 걸어와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지? 여자로 돌아갈 거야?”

“음… 아니. 그건 내가 좀 어색해. 당분간은 이렇게 지내도 괜찮지 않나 싶… 어? 자, 잠깐! 근데 알고 있었어?”

“피핀 차원을 얕보지 마. 투탕카멘의 가면은 중요도가 떨어져서 놓쳤지만… 너희가 ‘제천대성의 터럭’을 확보했다는 건 알아냈지. 유물들 중에서도 특별하다는 신화 기반의 유물. 그중에서도 둔갑에 특화된 전승을 지닌 유물이… 왜 그렇게 은밀하게 필요했을까?”

“그럼 그걸 알면서도……!”

“안 들키려고 머리 쓰고 긴장하는 모습이 정말 꿀잼이었지.”

“개자식들…….”

“덕택에 시청률 끝내줬어.”

“닥쳐. 그리고 오늘은 방송 금지야.”

“뭐, 뭣! 지금도 역대 시청률을 계속 경신 중인데!”

“내 알 바니? 계약 지켜.”

“아니, 데미안! 데미안 님!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데미안은 애원하는 연출가를 퍽 걷어차고 자리를 떠났다.

기지개를 한 번 나른하게 켰다.

큰일을 끝냈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소시민 사령관님은… 타키넷으로 가면 볼 수 있겠지? 휘오? 듣고 있지? 문 좀 열어 줘.”

- 응! 데미안! 잘은 모르겠지만 멋있었어!

휘오의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화이트 게이트가 스르르 그녀의 눈앞에 생성되었다.

* * *

이변은 없었다.

우승.

대회는 그렇게 끝났고, 대회보다 더 바쁜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온갖 사람이 다 몰려와서 내게 인사를 건네고 차원 간 연락 수단을 남겼다.

그냥 호기심에 말을 걸어 봤다는 물고기.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물건에 관심을 가진 촉수.

반월이를 팔라는 털북숭이.

콜라보 작업을 해 보자는 미끈거리는 이계인.

너무 많은 존재가 몰려들어서 정신없었지만, 나와 나타르 그리고 릭은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인사를 나누고 밝게 웃으면서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고 연락처를 받았다.

무르물랑은 말했다. 지구에는 친구가 필요하다고.

지금 받는 연락처 모두가 다 우리의 자산이었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인사에 노곤노곤 녹아내리기 직전이 되었을 때야 몰려들었던 인파가 흩어졌다.

‘이제 끝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여어.]

한산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인물 두 명이 내게 다가왔다.

“어?”

그들을 보고 나는 조금 놀랐다. 둘 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다만 그 둘이 같이 있는 그림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랐다.

한 명은 흑발 머리를 질끈 묶고 호랑이 귀에 꼬리를 가진, 체격 좋고 잘생긴 남자.

다른 한 명은 작달막한 키에 기형적으로 두꺼운 팔과 허벅지를 소유한 남자.

“크르으랑 씨? 그리고… 딘딘 씨?”

한 명은 경매장에서 소울챔버를 두고 경쟁했던 크르으랑이고 다른 한 명은 오늘 대회 우승을 두고 경쟁했던 딘딘이다. 얘네가 왜 갑자기? 그것도 함께?

크르으랑 씨가 말했다.

[기억하고 있었군.]

“그야 물론…….”

크르으랑이 호랑이 귀를 팔랑이더니 코를 킁킁거리고는 말했다.

[거, 그쪽 차원의 인사는 어떻게 됩니까?]

이게 웬 소리야?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에서 하는 인사가 있을 것 아니오?]

…나랑 친해지고 싶다는 소리인가?

일단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고 흔듭니다. 악수라고 하지요.”

크르으랑이 내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거 솔직히 감탄했소. 소울챔버 때도 놀랐는데… 사실 이번에 딘딘 이 친구 작품은 우리 차원에서 사활을 걸고 지원했던 작품이라… 이번엔 이길 거라 생각했거든.]

아, 그래서 딘딘과 함께 있었구나?

크르으랑이 코를 찡긋거렸다.

[솔직히 자꾸 방해받는 것 같아서 짜증도 나는데, 그보다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왔소. 그쪽도 보아하니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차원 같고, 이쪽은 폭삭 망했다가 다시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는 차원이니 같이 뭉칠 일이 분명 있을 거요. 그럴 때마다 같이 뭉쳐서 좋은 결과 만들어 봅시다. 친하게 지냈음 좋겠소.]

어쩐지 오늘 받은 모든 제안 중에서 가장 와닿는 제안이었다.

아무리 서로의 능력이 뛰어나도 막상 협력해 보면 그 결과는 신통치 않을 수 있다. 결국 서로가 아쉬워야 협력도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크르으랑은 정말 괜찮은 친구가 될 조짐이 보였다.

잔흔들림 없이 깊고 크게 들이마시는 크르으랑의 숨소리마저 신뢰감 있게 들렸다.

“좋죠.”

우정의 증표로 나는 휘오의 가지 하나를 건넸고, 크르으랑은 차원 간 통신 단말 스티커를 내 손등에 붙여 주었다.

그리고 떠나는 크르으랑. 이제 정말 끝인가 했는데… 또다시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나는 살짝 굳고 말았다.

지구인과 거의 구분이 가지 않는 외형. 하지만 피부톤이 살짝 잿빛이어서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그는 틀림없는 아갈타인이었다.

‘아갈타인이 왜 나에게?’

하지만 다행히도 긴장한 내 속내와는 달리 그는 다른 존재들처럼 그저 나에게 통신수단을 건네며 영업의 말을 전할 뿐이었다.

[우연히 선생님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정말 감탄했습니다. 아갈타는 능력 있는 장인을 우대합니다. 최고의 조건으로 선생님을 모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꼭 한번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지만, [만상공감]으로 느껴지는 건 오감을 곤두세워서 나를 샅샅이 관찰하고 뜯어보는… 사냥감을 노리는 뱀의 그것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하여튼… 정말이지 정이 가지 않는 족속이다.

나는 고개를 그냥 끄덕였다.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놈들은 지구를 안다. 혹시나 내가 내뱉는 말소리가 지구의 언어라는 걸 놈들이 알게 되면 상황은 아주 안 좋게 흘러갈 것이다. 물론 타키넷은 태초의 주문에 의해 모든 언어가 자동으로 통번역이 되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내 눈치를 알아차린 나타르가 대신 잘 응대를 해서 아갈타인을 보내 주었다.

[관심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검토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꾸벅 인사하며 사라지는 아갈타인. 나는 딴청을 피우는 척했지만 그가 완전히 감각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쉬었다.

“후우…….”

갑자기 10년은 늙은 기분이 든다.

“피곤하네. 어서 가서 쉬고 싶다.”

용산구 제2지역, 나의 사령관저가 너무 그리웠다.

‘이럴 땐 휴게실에 가서 LP 틀어 놓고 한 30분 정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침실로 가면 딱인데…….’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동한다. 얼른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를 찾는 사람은 끊이질 않았다.

“소시민!”

아… 또 누구야?

조금은 짜증스럽게 돌아봤는데, 오! 웬걸? 피곤은커녕 정신이 번쩍 든다.

“무르물랑?”

내가 우승한 걸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돌아온 무르물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수고하셨습니다, 사령관님. 덕택에 모든 일이 잘 풀렸네요. 드릴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그새 훌쩍 큰 것만 같이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미안 도련님이 오만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발치에는 웬 못생긴 프랑켄슈타인 인형이 쭈글하게 서 있었는데… 뭐지? 새로운 장난감인가?

아무튼, 다들 엄청 반가웠다.

‘가서 쉴 게 아니라 축하주라도 진탕 마셔야 되나?’

반색을 하며 다가갔다.

하지만 우리 투자자님은 시간을 허투로 쓸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훌륭해! 덕분에 계속 진행해도 좋을 것 같아. 기대 이상의 성과이니 투자금도 기대 이상으로 넉넉하게 준비해 왔지!”

돈으로 우주도 살 것 같은 기세로 무르물랑이 당당하게 말했다. 오, 든든하다. 멋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안은 그닥 달갑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이 돈을 어떻게 쓸지 얼른 회의를 하자고! 한시가 급하다!”

아 좀… 물론… 열심히 하는 건 좋아. 좋은데… 그래도 사람이 쉬는 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힐끔 데미안 도련님을 바라보았다. 도련님이 좀 쉬자고 말해 주지 않으려나?

하지만 도련님은 내 기대를 저버렸다.

“네. 회의해야죠. 저도 공유해야 할 일이 많아요. 앞으로의 전략 수립도 시급합니다. 그간 아갈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오 쉣.

포기했다. 그래. 쉬기는 뭘 쉬냐. 움직일 수 있을 때 일해야지.

그래도 한 가지 바람이 있었다.

“그, 그래. 회의하죠. 근데 회의 장소는 우리 사령관저 어때요? 거기 휴게실 좋은데.”

장소라도 좀 아늑한 곳이라면 피로가 덜할 것 같다는 노림수였다.

하지만 무르물랑은 나의 이 가녀린 요청마저 단칼에 잘라 버렸다.

“아니. 무슨 소리야?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조금 상처받았다.

아니. 휴게실에서 회의하자는 게 이렇게까지 질색할 일? 서럽다. 나 우승도 했는데…….

“무르물랑, 나한테 왜 그래…….”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무르물랑은 내 얼굴에 청량한 물방울을 톡! 튕기더니 악동같이 웃었다.

“아까 내 말 못 들었어?

“뭐, 무슨 말.”

“투자금을 기대 이상으로 넉!넉!히! 가져왔다고.”

그러곤 멋드러지게 등을 휙 돌리며 말한다.

“공예 대회 우승자를 그냥 집에 보낼 수 있나! 오늘은 이 누나만 따라와. 차원 문명의 고오오오급 숙박 시설이 어떤 건지 보여 줄 테니까. 아마 너라면 거기서 평생 살고 싶어질걸? 회의도 거기서 할 거야. 거기라면 회의도 너무 좋아서 파티처럼 행복할 거라고 장담한다, 내가.”

어?

두근, 심장이 조금 뛰었다.

꿀꺽.

좋은 숙박 시설? 차원 문명 수준의?

어째서일까? 데미안 루드비히의 방에 처음으로 초대받았던 그날이 떠오른다.

눈 돌아가는 명품으로 가득했던 그곳. 루드비히 랜드!

힐끗, 데미안을 돌아보니 데미안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기대감으로 인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역시 데미안이다. 뭘 좀 안다.

나랑 데미안은 동시에 서로에 대한 시선을 거두곤 든든한 무르물랑의 등에 따라붙었다.

“나, 나 기대한다? 기대할 거, 거야? 응? 기대해도 되지? 완전 기대할 거야!”

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었고.

“엄첨 엄청 기대돼요, 언니!”

데미안 도련님은 바보처럼 자기 성별을 헷갈렸다.

역시. 도련님도 좋은 물건 앞에서 볼썽사나워지는 건 나랑 똑같다.

나 홀로 바보가 아니란 사실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진다.

차원 문명 수준의 고오오오급 숙박 시설로 향하는 길.

탑골시장의 하늘은 푸르고 높고 영광과 승리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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