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32화 (132/212)

11. 데미안 루드비히의 그림

“좋아. 그럼 방송 계속하세요.”

데미안이 말했다. 선선히.

연출가의 미간이 지점토처럼 구겨졌다.

“날 지금 놀리나?”

데미안은 픽 웃어 버렸다.

“다 같이 죽자는데 방법이 없잖아요. 대신 장르를 바꾸죠. 시즌2를 만듭시다.”

“대체 무슨 소리를…….”

“지금도 방송 중이죠?”

“그야 물론.”

“그렇죠. 당신들 장난감이었던 데미안이 미쳐 가지고 연출자를 죽이겠다고 날뛰고 있는데 얼마나 재밌겠어요? 시청률은 잘 나와요?”

“…실시간으로 시청률 기록을 계속 갈아 치우는 중이다.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징글징글하다. 데미안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러니 이들의 이 징글징글한 속성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놈 하나 치우자고 정말 다 같이 죽을 수는 없는 거니까.

데미안은 [모이라이 홀덤]을 끝낸 그 순간부터 이미 결단을 내렸다.

루드비히답게. 이해득실을 철저히 따져서.

방송을 할 것이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할 것이다.

“그러니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우리 지금 합의하죠. 결정은 게이트가 완전히 열리기 전에 내려야 합니다.”

“무슨 합의를 말하는 거냐?”

“첫째, 우리 형 몸에서 즉시 나온다. 그리고 둘째, <루드비히×루드비히>의 두번째 시즌은… 휴먼 다큐 대하드라마다.”

“휴먼 다큐 대하드라마?”

“피핀 차원의 놀이터에 불과했던 원시 차원 지구가 소시민과 데미안이라는 혁신가의 활약으로 외세의 침략을 이겨 내고 자주, 자강을 이룩하는… 거대한 차원계 전체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 과정을 생생하게 담은 휴먼 다큐 대하드라마. 이번에는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에서 방송을 하는 거죠. 남의 몸 빼앗고서 짜증 나게 끼어들지 말고.”

“뭐… 라고?”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연출가의 눈동자가 조금씩 커지고 있는 어비스 게이트로 향했다.

‘저게 더 커지면 나는 죽는다.’

그리고 다시 데미안에게 향했다.

‘흥미로운 제안이다. 하지만…….’

연출가의 목소리는 다시 차갑게 식었다.

“너희가 가지지도 못한 것을 거래 대상으로 삼지 마라. 지구가 외세를 이겨 내고 자주 자강을 이룩한다? 아니. 너희는 몇 년 내로 아갈타에게 채굴당해 사라질 거다. 이미 아갈타의 두 개 사단이 지구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걸 모르나? 그리고 영능학이 뭔지도 모르는 지구인들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연출가의 말은 신랄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흔들리지 않았다. “가능합니다. 지구의 잠재력을 얕보지 마요. 증거를 보여 드리죠.”라고 말하며 손가락을 따악! 하고 튕겼을 뿐.

그러자 데미안과 연출가 사이로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까마득히 뻗은 탑. 탑과 탑을 이어 만든 오각형의 경기장. 그리고 그 한복판에 서 있는 남자.

“…이건?”

연출가의 눈이 커진다.

“어딘지, 누군지, 알아보시나요? 타키넷 탑골시장의 공예품 대회입니다. 대회는 끝났고, 그 우승자가 결정되었죠. 그게 누굴까요?”

연출가가 중얼거렸다.

최근 들어 데미안과 부쩍 가깝게 지낸 남자. 연출가로서 당연히 그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설마… 소시민……?”

데미안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 * *

세상의 무엇이든 내 몸처럼… 아니, 내 몸보다 더 내 몸같이 그 실질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

[만상공감].

예전에 어떤 친구가 ‘전지全知’에 닿아 있는 능력이라고 평가했을 만큼 강력한 능력이었다.

덕분에 사실 난 자신이 없었다.

이번 대회에서 질 자신이.

딘딘의 ‘올인원 이너 슈트’? 물론 뛰어난 물건이다. 하지만 우리 반월이에 비할 수는 없었다.

만약 올인원 이너 슈트가 내 것이라면? 매일 입고 다닐 것이다. 집에 들어오면 벽에 걸어 놓고 감상할 것이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을 것이고, 입을 때마다 자랑스럽고 든든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게 올인원 이너 슈트가 아니라 반월이라면? 밖에서는 업고 다닐지도 모른다. 집에 들어와선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구경하다 말고 미쳐서 칼날을 마구 핥을지도 모르니까. 볼 때마다 칼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지 않고는 못 배길 거고, 쥘 때마다 감동해서 소름이 돋을 것이다.

그 정도로 감각적인 차이가 있는 물건이었다. 유용성도 유용성이지만 영혼을 울리는 깊이가 다르다. 그리고 차원 문명의 세계에서 이러한 아우라의 차이는 곧 영력의 차이로 이어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탑골시장에서 그걸 알아볼 수 있는 눈썰미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회의 두 번째 단계인 ‘매스 리뷰’는 나에게 아주 불리하게 흘러갔다.

[와. 이번 공예대회 정말 수준 높은걸? 눈 돌아간다.]

[특히 저기 반월이라는 성검 시스템하고 올인원 이너 슈트는… 어후! 저축 좀 열심히 할걸! 사고 싶어!]

[그래도 역시 딱 하나만 산다면 올인원 이너 슈트지?]

[기능의 수 차이부터가 말이 안 되잖아. 클래식한 성검 시스템이 주는 감성은 있지만… 그래도 저 정도로 기능 차이가 나면 감성이고 나발이고.]

[이너 슈트 하나면 다른 부가 장비가 다 필요 없다니… 용병들이랑 해적들은 눈이 뒤집히겠네 아주.]

[넌 얼마면 살래? 나는 반월은 8만 타키온. 올인원 이너 슈트는 30만 타키온.]

[에이, 너무하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반월은 10만 타키온. 이너 슈트는 20만 타키온.]

[난 반월에 15만 타키온까진 쓸 수 있다. 돈만 있다면.]

[난 25만까지!]

‘매스 리뷰’

사람들의 생각과 대화가 요약되어 모두의 눈앞에 펼쳐지는 방식이었다. 대세를 이루는 여론을 모두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고, 실시간으로 동의를 하거나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여론을 움직일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메시지가 허공에 주르르 펼쳐지고, 그 옆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정 가격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무대 위에 올라간 모든 작품에 대한 ‘매스 리뷰’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반월과 올인원 이너 슈트에 대한 메시지는 다른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반월과 이너 슈트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다는 뜻.

반월 – 15만, 17만, 16만…….

올인원 이너 슈트 – 30만, 24만, 26만…….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적정 가격. 하지만 경향은 뚜렷했다. 사람들은 올인원 이너 슈트에 반월보다 두 배 가깝게 비싼 돈을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망할 놈들… 눈이 없나?’

열불이 터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브리핑을 끝낸 상황에서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때문에 나는 관중석을 보았다. 나타르와 릭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나타르와 릭이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미쳤구만? 아까 반월이 올인원 이너 슈트의 앱솔루트 실드를 찢어 버리는 것 못 봤나? 동태 눈깔들.]

편안하게 흘러가는 여론의 흐름 속에 가시처럼 톡! 튀는 어그로 하나. 말투를 보아하니 나타르의 생각이었다.

[좀 조용히 하세요. 저 머저리들이 저렇게 나와야 저 보물을 싸게 사죠.]

이건 릭이었다.

나타르와 릭의 공동 어그로.

효과는 대단했다!

[쟤넨 뭐야? X문가들 납셨나 본데?]

[현대전에 있어서 가장 예술적인 보조 장비가 될 이너 슈트하고 감성팔이에나 매달리는 재래식 병기인 성검을 비교하는 수준 하고는…….]

[주 무장인 성검으로 보조 장비의 방어 기능 하나 뚫었다고 좋아하는 꼬라지 하고는.]

[그걸 모르는 모양인데? 이런! 앱솔루트 실드가 당했군. 하지만 어차피 그놈은 우리 올인원 이너 슈트의 1,000가지 기능 중에서도 가장 약한 녀석이지!]

매스 리뷰가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반감 탓인지 반월이의 가격이 순간적으로 8만까지 떨어지고 올인원 이너 슈트의 가격은 도리어 40만까지 치솟았다.

민심이 완전 뒤집어지는 그 순간, 릭이 차분하게 모두를 비웃었다.

[장인은 도구를 안 가리지만 도구는 장인을 가린다고 하지. 어차피 저 성검은 저런 애들 손에 들어가면 15만짜리 값어치도 못할 테니 쟤네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그 도발에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지구인들이나 이계인들이나 무시당하는 말은 참을 수 없는 법이니까.

‘매스 리뷰’를 통해 더욱더 심한 말들이 쏟아지려는 그 순간, 조용히 앉아 있던 심사 위원이 손을 들었다.

[잠깐! 할 말이 있네.]

초록색 피부에 두꺼비처럼 거대한 면상과 커다란 입. 그리고 그만큼이나 거대한 손과 작달막한 몸통을 가진 자였다.

[심사 위원, 병장기의 악몽……!]

꽤나 악명을 떨치는 심사 위원인 모양이다.

그가 나서자 대회장이 금세 조용해졌다. 다른 심사 위원도 한발 물러서서 병장기의 악몽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클클. 아니,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 들려서. 그게 무슨 뜻인가? 15만 타키온의 가치도 못한다니? 저 성검이 주인이라도 가린다는 소린가? 자네 아까 보니까 저것 주인하고 아는 사이 같던데… 가격을 뻥 튀기하려고 수 쓰는 것 아냐? 그것 실격 처리인 건 아는지?]

병장기의 악몽은 그 크고 두툼한 손가락을 뻗어 릭을 정확히 지목하며 말했다. 기본적으로 익명인 줄 알았는데… 심사 위원은 누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지목을 받은 릭은 잠시 당황했지만 금세 표정을 수습하고 당차게 답했다.

[당연합니다. 저 검은 혼이 담긴 검으로써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자의 손에서는 빛을 발하지 않을 겁니다.]

[호.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네.]

[만약 확인해 봐서 아니면 저 성검은 그대로 실격 처리 될 걸세. 그래도?]

릭이 멈칫했다. 실격이 걸린 문제에 함부로 나설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나섰다.

“네.”

그제야 병장기의 악몽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커다란 입에서 비현실적으로 길고 넓적한 혀가 스르르 기어나와 두툼한 입술을 핥았다.

[그건… 내가 직접 좀 과격하게 감정을 해 봐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그 한마디에 장내가 다시 술렁거렸다.

[악몽의 감정!]

[설마 그걸 보게 되는 건가?]

[보고 싶지 않은데… 저런 명작에 그렇게 잔인한……!]

이런 말들이 들리는 걸 보면… 아주 가혹하기로 악명이 높은 감정법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릉-

성검을 꺼내 녀석의 검신을 쓰다듬었다. 나의 모든 것과 지구의 모든 것을 걸고 만들어 낸 이 녀석은 특별하다. 다른 물건들은 길들이기를 모두 끝낸 다음에야 비로소 나와 소통이 가능했지만… 이 녀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와 교감했다.

‘다 들었지? 잘할 수 있지?’

우우웅-

자신만 믿으라는 듯 성검은 낮게 진동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나는 만족해서 그대로 칼을 뒤집어 병장기의 악몽에게 건넸다.

[흐흐흐. 어디 보자.]

병장기의 악몽이 음흉하게 웃으며 처음 수행한 것은 기초적인 테스트였다. 먼저 반월이를 쥐고 두부처럼 무른 물건을 베어 보았다.

[호?]

그저 젤리처럼 눌릴 뿐 베이지 않았다. 반월이가 스스로 따르지 않으니 칼날의 예기가 사라진 것이다.

[이래도 버티나 볼까?]

그러자 병장기의 악몽은 반월이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차원 문명이 금속을 가공할 때 쓰는 온갖 기계와 도구들을 꺼냈다. 드릴로 반월이의 칼날을 망치려고 하고 프레스로 반월이를 종잇장처럼 찌그리려고 했다.

하지만 도리어 드릴은 조각났고, 프레스는 과부하되어 부서졌다. 그 어떤 금속도 가공할 수 있는 장비였지만, 스스로 혼을 품고 영력을 행사하는 반월이를 넘을 수는 없었다.

[오오…….]

커다란 입에 걸려 있던 비웃음과도 같던 큼지막한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고집불통이로고…….]

병장기의 악몽은 반월이를 한참 바라보더니 불쑥 녀석을 한입에 삼켜 버렸다. 반월이가 칼자루 끝까지 완벽하게 놈의 거대한 입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야, 이 새끼야! 반월이한테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병장기의 악몽은 손을 뻗어 나를 제지할 뿐이었다. 사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귓가를 따갑게 했다.

[나왔다! 트레이드 마크! 악몽 체험!]

[저 배 속에는 그 어떤 쇳덩이도 녹일 수 있는 뜨거운 열과 산성이 몰아친다며?]

‘악몽 체험’은 개뿔이! 더럽잖아! 감히 우리 반월이한테! 나도 아직 핥아 보지 못했는데!

참지 못하고 내가 발작을 하려던 순간.

우웨에엑!

병장기의 악몽의 초록색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구역질을 하며 반월이를 토해 냈다. 화륵! 화륵! 위액처럼 흘러나온 불길이 경기장 전체를 후끈하게 만들고, 뚝뚝 떨어진 산성액이 두꺼운 바닥을 녹여 완전히 관통해 버렸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온 반월이는 흠집 하나 없었고, 심지어 오염된 부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반월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우윳빛 실드가 모든 것을 막아 낸 것이다.

병장기의 악몽은 그런 반월이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우웩, 우엑 하며 바닥이 찰박찰박해질 때까지 피를 토해 낸 다음 나를 바라보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순서를 변경해서 바로 심사 위원 리뷰를 시작하지. 내 감정가는 100만 타키온. 나한테 팔게.]

100만이라니… 성검은 10만 타키온만 넘어도 명품이라 불리고 30만 타키온이면 손에 꼽히는 하이엔드였다.

그런데 100만. 이 가격은 성검의 시세가 아닌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 나온 가격이었다.

[이건 작품이야.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정도라고… 이런 완성도를 가진 성검은 기나긴 차원의 역사 속에서도 몇 없었을 거다.]

병장기의 악몽의 눈에는 소유욕이 드글드글 끓고 있었다. 그렇다. 반월이의 가격은 ‘물건’으로써의 가격이 아닌 ‘예술품’으로써의 가격이 적용된 것이다.

나는 얼른 반월이를 품에 안고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이건 제가 핥… 아니, 제가 쓸 거예요.”

[200만.]

도리도리.

[300만…….]

도리도리.

[망할… 오늘밤 잠은 다 잤군. 꿈에 나오겠어.]

병장기의 악몽이 머리를 긁으며 물러섰다. 그러곤 그대로 등을 돌려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어, 어딜 가십니까!?]

다른 심사 위원이 당황해서 부르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집에! 어차피 대회 끝났잖아! 우승 상금 줘서 보내!]

* * *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연출가의 입이 떡 벌어졌다.

데미안이 옆에서 히히 웃으며 물었다.

“어때? 괜찮죠? 고작 1년이 좀 넘는 시간 만에 공예 대회에서 저렇게 인정받을 정도로 발전한 게 지구입니다. 여전히 지구의 자주 자강이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러곤 정색을 하고 다시 말했다.

“그러니 루드비히가와의 모든 계약을 무효로 돌리고 우리 형 몸에서 나와. 이제부턴 휴먼 다큐 대하드라마를 찍어. 또한 당신은 평범한 인간보다도 나약한 몸에 들어가서 지구에 체류하게 될 거야. 간섭은 절대 안 되고, 내가 허락하지 않는 장면은 방송은 물론 촬영할 수도 없어. 타키넷 평의회가 제정한 피핀 차원 방송 심의 윤리 계약서로 확실하게 못 박는 겁니다.”

연출가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무수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냉정하게 생각하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여전히 말도 안 돼. 아무리 저런 미친 발전 속도라고 해도… 지구가 아갈타를 이길 수는 없어. 아무리 좋게 쳐 봐야 10퍼센트 미만의 확률이다.’

하지만 그는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10퍼센트나 된다는 소리잖아? 제로가 아니야! 심지어 두 자릿수야!’

깜빡깜빡 눈의 깜빡임이 점점 빨라졌다.

‘거절한다면? 여기서 죽는다. 하지만 승낙한다면? 낮은 확률이지만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찬스가 온다!’

그 순간 연출가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고민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만약 일방적으로 방송을 중단하라고 했다면 죽더라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데미안의 반란 이후를 다룬다는 점에서 본래 프로그램인 <루드비히×루드비히>와 연결점도 있으면서 심지어 대박을 터뜨릴지도 모르는… 아니, 꼭 한번 만들어 보고 싶은 그런 기획으로 이어지는 대안을 제시했다.

피핀 차원의 역겨운 연출가라면 그 누구라도 이걸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좋아! 하겠다!”

연출가는 데미안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 타키넷 평의회에서 최상위 문명들을 향한 피핀 차원의 무차별적인 방송을 막고자 만든 방송 심의 윤리 계약서를 꺼내 사인을 하여 스스로 강제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자크 루드비히의 몸에서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데미안에게 악수를 청했다.

“너… 진짜 우릴 연구 많이 했구나? 아마 우리 피핀 차원 연출가를 상대로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우주 역사상 네가 처음이 아닐까 싶다. 자랑스럽다. 역시 내가 연출한 캐릭터다워.”

그 뻔뻔한 태도에 데미안은 혐오감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그 손을 딱 한 번 잡고 아주 짧게 흔든 후 더러운 걸 놓듯 휙 손을 빼며 말했다.

“그야 너희가 X발 X라게 싫으니까.”

훗날 데미안은 자신이 이 말을 하는 순간 피핀 차원의 수많은 시청자가 심장을 부여잡고 땅바닥을 기며 데미안의 덕후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더더욱 깊은 혐오감으로 몸을 떨어야만 했다.

아무튼 일단, 데미안 루드비히는 피핀 차원과 새로운 계약을 맺음으로써 놈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현시점에서 적을 늘리지 않고 생명을 잃지 않으며 자유를 얻어 낼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었다.

적마저도 이용하는 지극히 루드비히다운 대처였고…….

물론.

데미안은 놈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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