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등장
차원 문명들 입장에서는 지구의 신비 학문이란 그저 못 봐 줄 정도로 원시적인 무언가일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영능학조차 없이 순수한 관찰과 사유로 과학이라는 이성적인 학문을 발달시킨 족속이었다. 그런 인류가 세운 신비 학문이 비이성적일 리 없다. 조악하고 끔찍하게 비효율적이며 하나 마나 한 뻔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을망정, 아예 틀릴 수는 없는 이론이었다.
그랬기에 가능했다. 그 조악하고 비효율적인 체계로 세워진 학문을 정식 영능학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통합 공식, 일명 ‘윤희정 브릿지 공식’이.
그리고 이건 우연한 발견이 아니었다.
단언컨대 이 시점에서 윤희정만큼 짧은 시간 동안 모든 이론적 변화를 성실하고 빠르게 습득한 사람은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마누스 이론과 던전 공학에서부터 영혼 용광로를 이용한 영능학 중고급 응용 기술까지. 무엇 하나에 익숙해질 시간도 없이 바로 다음 단계로, 다시 다음 단계로 계속 건너뛰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깊이 있게 모든 걸 체득한 사람. 그런 그녀였기에 그 모든 이론을 연결하는 ‘브릿지 이론’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윤희정이 눈물 콧물을 다 빼면서 울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시간들이 헛된 게 아니었어……!’
그 힘든 시간들 덕분에 지금의 성과가 있었다는 것. 그 사실이 깊은 위로를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만약 서민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소시민이 없었더라면, 그 모든 가능성을 품고도 그대로 침몰해 버렸을지 몰랐으니까.
브릿지 공식의 타당성을 인정받고 밖으로 나서는 길, 윤희정이 꿈속의 신기한 생물을 바라보듯 서민서를 힐끔거린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때 서민서가 휙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선배 이름 참 잘 어울리지 않아요?”
“네? 소시민 사령관님이요?”
윤희정은 어리둥절했다. 솔직히 이름은 안 어울리지 않나? 그렇게 잘나가는 사람이 소시민이라니…….
하지만 서민서는 말했다.
“네. 선선한 바람 시颸에 가을 하늘 민旼. 선배는 늘 그랬어요. 뭔가 막혀서 어찌해야 할 줄 모르겠을 때 시원한 바람처럼 숨통을 트이게 해 주더라구요.”
헤헤 웃는 서민서를 바라보며 윤희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디선가 휙 바람이 불었다. 저절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는 선선하고 상쾌한 바람이었다.
그렇게 순풍을 따라.
땅, 따랑.
성검의 단련과 연마도 순조로웠다. 브릿지 공식 덕분에 장인들은 비로소 소시민이 요구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렇게 칼날에, 코등이에, 칼집과 칼집을 허리띠에 이어 주는 띠돈까지.
성검을 이루는 디테일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아로새겨졌다.
그렇게 성검은 공예 대회 하루 전에 완성되었다.
* * *
성검아.
네가 태어나던 날. 온 공방이 네 이름을 속삭였단다.
반월半月.
우리 성검아, 하늘의 달처럼 우리를 수호할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아느냐.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반월半月이라 이름 붙인 우리 성검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자식 같다는 상투적이 말이 이 순간에는 참 잘 어울렸다. 자식처럼 아끼는 마음이 드는 것도 그랬고, 자식이 그렇듯 검의 완성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아우라를 뿜어내는 검을 벼릴 때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 장인들의 영혼과 깨어난 검의 영혼이 제멋대로 상호작용을 일으켜서 결국에는 예측 불가능한 무언가로 태어나기 때문이었다. 결국 검은 우리가 만들되 그 완성은 검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난 나무를 보듯이 더 신비하고 놀라웠다. 왜, 가끔은 자식들이 내 맘대로 되지 않아서 더 다행일 때도 있다고 하지 않던가? 내 심정이 그랬다.
‘이걸 정말 우리가 만든 거야?’
이렇게 대단하고 아름다운 것을?
나는 황공한 마음으로 반월이를 품고 길을 나섰다. 드래곤힐동의 모든 식구가 길가에 나와서 우리를 전송해 주었다.
현재 탑골시장의 입장 자격을 가진 건 나와 나타르와 릭, 이렇게 세 명뿐. 우리는 휘오가 열어 주는 게이트를 타고 공예 대회의 현장으로 향했다.
공예 대회가 열리는 장소는 하늘 위에 떠 있는 오각형의 노천극장 같은 모양새였다.
탑골시장 자체가 끝도 없이 삐죽삐죽 솟은 탑들과 그 탑들을 연결하는 다리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원형 경기장은 다섯 개의 투명한 자재로 연결해서 펜타곤을 만들고 하늘은 툭 터 두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푸른 하늘이 보이는 이 아름다운 건물 앞은 공예 대회를 구경하러 온 관람객들과 참가 신청하기 위해 줄을 선 대회 참가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참가 신청을 위한 줄을 기다리고 있을 때 릭이 슬며시 물어왔다.
[공예 대회는 이번이 처음이신 거죠?]
“응. 처음이지.”
릭. 탑골시장에서 감정사를 하던 이 친구는 어째서인지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간 고생도 많이 했다. 키는 허리쯤 올 정도로 작은 그가 외눈 안경을 치켜올리며 바쁜 영혼 용광로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누비고 다녔으니까. 때로는 기술적 조언과 시범까지 보여 주어서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그의 별명은 ‘빌런 판독기’가 되었다.
평소 몸짓이나 말투는 고양이처럼 도도한데, 물건을 대할 때만큼은 푼수처럼 자기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나가다가 방긋 웃는다면 그 라인의 장인들은 일을 잘하는 거였고, 눈동자가 흔들리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표정을 보인다면 그 라인 장인들이 일을 개판 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오늘, 완성된 반월이를 품고 나를 따라오는 릭의 얼굴에는 여태 본 것 중 가장 크고 환한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자꾸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내게 차분히 설명을 했다.
[대략적인 대회 과정을 설명해 드리자면, 총 네 가지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브리핑. 두 번째는 매스 리뷰, 세 번째는 전문가 리뷰. 그리고 마지막, 구매자 모객.]
그가 묘사하는 공예 대회의 이미지는 원형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축제 현장 같기도 했고 경매 현장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첫 번째 단계인 브리핑이 가장 중요하다고 릭은 힘주어 말했다.
[이미 물건은 만들어진 거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브리핑뿐이죠. 모든 참가자가 동시에 작품을 들고 나와 각자의 작품을 뽐내는 브리핑 자리에서 이목을 끌 수 있다면 아무래도 그 뒤에 이어지는 매스 리뷰에서도 유리하거든요.]
그의 설명을 들어 보면, 공예 대회의 우승은 전문가 리뷰와 매스 리뷰를 통해 주어지는 아이템 감정가와 구매자 모객을 통해 집계되는 희망 구매자의 숫자를 합산해서 가려진다고 했다. 거기에 뭐, 전문가 가산점이 있고 상황에 따라 가중치가 어떻게 되고… 복잡한 계산법이 있지만, 아무튼 결론은 공예 대회를 구경하러 온 관람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 역시 아주 중요한 득점 포인트라는 것.
[브리핑 과정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정말 정신이 없어서… 아차 하면 좋은 물건도 저 밑바닥에 깔릴 수 있거든요. 흐름을 읽는 눈과 기세가 중요합니다.]
“오케이. 알겠어.”
[감히 말씀드리자면… 브리핑만 잘해도 우승까지도 문제없을 겁니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릭.
나는 그에게 공범자의 미소를 지어 주었다.
‘강력한 인상’
그 다섯 글자를 마음에 새기고 공예 대회장에 들어섰다. 참가비가 10만 타키온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입상만 해도 200만 타키온을 상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일단 대회장에 들어서고 나니 진행은 굉장히 빠르게 이루어졌다.
등록에서 대회 시작까지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차원 문명의 일 처리 클래스를 보여 준달까? 다들 멀리서 온 사람들이다 보니 이리저리 쓸데없는 시간 지체 따위는 일절 없었다.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쿵!
찌르르르- 쿠쿵!
기묘한 파동이 행사장 전역을 휩쓸었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지만 이내 그게 음악이라는 걸 깨달았다.
기묘한 박자였고 기묘한 음정이었다.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파르르 진동하는 옷깃을 통해 가청 범위 밖에서 연주되는 소리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미쳤네. 이 음악 신나잖아? 대체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든 거야?”
이 음악이 신난다는 사실. 처음 들어 보는데, 이렇게 낯선데 이렇게 신나는 게 가능한 건가?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릭이 흐뭇하게 웃었다.
[유니버셜 뮤직, 보편 음악이라는 겁니다. 그 어떤 이계인이 들어도 흥겹게 느끼도록 소리와 빛의 다양한 파장은 물론 영력의 파장과 중력파까지 합성해서 만든 음악이죠. 상위 시장에서는 거리에서도 흔하게 즐길 수 있다고 하던데, 탑골시장에서는 1년 중 이때 공예 대회 때만 겨우 듣습니다.]
사실 말이 좋아서 음악이지, 오감은 물론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각종 영역까지 다 표현하고 있는 그것은 사실상 음악은 물론이고 미술의 영역까지 초월한… 종족을 초월해서 개미마저 홀릴 수 있는 예술의 궁극과도 같은 무언가였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피카소 같은 인물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대로 돗자리를 펴고 이곳에서 노숙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1년에 한 번 이 음악을 듣기 위해서.
그걸 듣고 있으면.
피가 끓었다.
마구 포효하고 싶었다.
랩 배틀을 앞둔 래퍼처럼 호승심이 들끓었다.
내가 최고다! 우리 한번 어깨를 겨뤄 보자!
그런 분위기 속에서 ‘브리핑’은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것이었다.
[하! 내 작품을 소개하지!]
첫 번째 참가자가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50소울 영력 증폭기에 200넘버링 코어를 장착한 기동 시스템으로……!]
그 순간 다른 참가자가 끼어들었다.
[어딜 200넘버링 코어로 비벼? 나는 300넘버링 코어를 조합한 신발형 기동 시스템! 발끝만 튕겨도!]
파아앙-!
그의 몸이 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뒤늦게 고개를 꺾어 보니 하늘 높이 뛰어오른 그의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허공을 걷듯 땅을 박차고 방향을 전환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하지만 곧장 또 다른 참가자가 끼어들었다.
[뚜벅이는 꺼져! 500넘버링 코어를 조합한 날개다! 느려! 느려!]
이전 참가자가 열심히 허공을 밟으며 몸을 피해 보려고 했지만 날개를 달고 나온 참가자는 그 주위를 빠르게 비행하며 그를 조롱했다.
[저런 모이 주워 먹는 날것들에게는 이 주문이 효과적이지요. 같은 500넘버링이라도 조립과 인챈트에 따라 성능은 천양지차! 이게 바로 극한에 닿은 걸작 캐스터입니다.]
부우우웅-!
꽝! 콰앙!
새로운 참가자의 손목에서 캐스터가 진동하자 하늘을 날고 있던 이전 참가자들이 돌연 추력을 잃고 땅에 처박혔다.
계속 그런 식이었다. 새 참가자가 나와서 이전 참가자를 짓밟거나, 서로서로 짓밟힌 무대 위로 새로운 참가자가 홀로 튀어나오거나 동시에 셋이 튀어나오거나, 서로 치고받는 사이에 다른 참가자들에게 묻혀서 존재감을 잃어버리거나.
“하하… 개판이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관객들도 작품을 진지하게 감상한다기보다는 이리 차이고 저리 밟히는 참가자들을 보며 낄낄낄 비웃고 있을 뿐이었다. 왜 릭이 ‘만만치 않을 거다’라고 말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브리핑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고만고만한 작품들 사이로 굵은 선을 그리듯 진짜 명품들이 하나씩 등장했다.
그는 난장판이 된 무대를 깔끔하게 얼려 버리며 등장했다. 시간이 멈춘 듯이 갑자기 딱 멈춰 서는 참가자들. 아니, 그건 정말로 시간을 멈춰 버린 것이었다.
[1,200넘버링 코어. 국지적으로 사건의 지평선을 만드는 ‘시간 빙결’ 주문을 탑재한 모래시계입니다. 작게는 자신의 몸속에 적용하여 치명적인 독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크게는 한 지역에 작동시켜 반경 1킬로미터의 공간을 영원히 봉인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오오오-
관중의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낄낄낄 비웃던 웃음이 사라지고, 발표자의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파도가 일듯 온통 술렁거린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듯 그때부터 명품들이 하나씩 하나씩 무대 위로 올라왔다. 장내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가 등장했을 때, 관중도 무대 위의 쟁쟁한 참가자들도 모두 숨을 죽였다.
그는 작달막한 키에 두꺼운 팔과 두꺼운 허벅지를 소유한 남자였다. 그는 정사각형의 큐브 하나를 손에 띄우고 말했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올인원 이너 슈트입니다. 1,800넘버링 코어. 차원강습 시스템의 핵심인 영력 동기화를 제외하면 그 밖의 역사상 존재한 모든 전투 장비의 기능을 이 슈트 하나에 담았습니다. 이것 하나 입고 차원강습 시스템을 겹쳐 입으면 다른 모든 장비가 필요 없어질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앱솔루트 실드와 자동 요격 시스템 마저도 항상 적용되기 때문에 이 올인원 이너 슈트 하나만 입어도 어지간한 차원강습 시스템은 다 씹어먹는 전투력과 활용성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손에 든 큐브를 자신의 가슴에 퍽! 하고 내리치는 순간 그의 전신이 빛에 감싸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액체 같기도 하고 금속 같기도 한 물질이 꼼꼼히 덮이더니, 그 위로 빛과 함께 마법진들이 떠올라 갑옷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게 그가 말한 앱솔루트 실드와 자동 요격 시스템인 모양이다.
모습만으로도 화려하고 강했다.
모두가 압도되었다.
그 시끌벅적하던 대회장에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릭에게 물었다.
“누구야?”
릭이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작년과 재작년 우승자, 딘딘이에요. 원래 대단한 사람이긴 했는데… 이번엔 유독 미쳤네요. 대체 뭘 어떻게 해서 저런 물건을 만든 거지? 이건 그냥… 패왕이네요. 한동안은 계속 딘딘의 시대가 지속되는 건가……?]
줄곧 자신감을 보이던 릭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
딘딘이 가지고 나온 작품은 재료부터가 압도적이었다. 1,800번대 코어면 탑골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위 재료. 거기에 기능은 얼마나 화려한가?
와아아-!
뒤늦게 쏟아지는 함성. 이미 대회가 끝난 느낌이었다. 이게 대회 시작을 알리는 브리핑 자리인지 아니면 다 끝난 후 우승 소감 발표 자리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 딘딘, 그는 진정으로 탑골시장 공예 대회의 왕처럼 보였다.
그 덕분에 깨달았다.
‘지금이다.’
모든 참가자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겨 줄 수 있는 타이밍. 그게 바로 지금이다. 나의 [만상공감]이 외쳤다. 허를 찔러!
스르릉-
성검을 빼 들고 자리를 박찼다.
[앗? 지금?]
나타르가 옆에서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성큼성큼 무대 위로 올라간 뒤였다.
내가 다가가자 무대 중앙에서 환호를 받던 딘딘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영롱하게 빛나는 성검을 들고 딘딘의 가슴 한복판을 찔렀다.
쩌어어엉-!
앱솔루트 실드가 칼끝을 밀어내며 저항했다. 하지만 내가 쥐고 있는 것은 반월이었고, 반월을 쥐고 있는 건 나다. 최고의 검에서 최고의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중이라는 뜻이다.
딘딘, 네가 아무리 이 자리의 왕이라 해도 나는 자신이 있다.
“1,600넘버링 코어. 기능은 블레이드, 실드, 버프 딱 세 가지.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궁극적인 성검 시스템.”
두근두근!
내 심장박동과 함께 성검의 코어에서 어마어마한 영력이 뿜어졌다. 뿜어진 영력은 조금의 낭비도 없이 칼끝에 집결하여 강기조차 깨뜨릴 강력한 영력의 칼날을 만든다.
딘딘이 험악한 얼굴로 속삭였다.
[이 새끼가…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뭐긴? 보면 모르냐? 게임도 안 해 봤어?
“왕위를 계승하는 중이다, 새끼야.”
찌이익!
반월의 칼끝이 딘딘의 앱솔루트 실드를 가볍게 찢었다.
* * *
소시민이 공예 대회에 성공적으로 자신의 등장을 알리던 그때.
데미안 역시 자신만의 등장을 준비했다.
스읍- 하아- 후우-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본다. 평소라면 ‘루드비히라는 이름이 부끄럽다.’라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자신이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강렬한 운명이. 평생의 숙원이 자신을 이끌고 있었다. 덕분에 의식이 끊어질 것 같은 중압감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다.
“…어이, 진짜 하는 거지?”
하준광이 물었다. 언제나 개념 없이 막 나가는 미친놈의 포지션을 좋아하는 하준광이었지만, 그도 이 지경에 와서는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아뇨. 농담이었어요.’라고 말하며 ‘그, 그치? 농담이지? 아, 진짠 줄 알았지. 그럼 당연히 농담이지.’라고 말하면서 반색할 것만 같지 않은가?
하지만 데미안은 농담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
움찔 놀란 손끝으로 느릿느릿 휴대폰을 꺼내며 하준광이 혀를 내둘렀다.
“미친놈. 내가 몰라뵀네, 몰라뵀어. 진짜 미친놈은 나도 아니고 소시민이도 아니고 데미안이었네.”
뚜르르- 탈칵!
한 번의 신호음이 끝나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하준광은 마지막 순간에 입술을 잠시 깨물고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 말을 뱉고 말았다.
“시작해.”
그리고 데미안을 따라 정면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저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성과 같았고, 성이라기에는 또 도시 같았다. 바티칸 시국을 연상시키는 고전적이고 웅장한 건물. 활짝 열려 있으나 불청객에겐 결코 관대하지 않은 곳.
어지간한 선진국의 국력을 뛰어넘는다고 알려진 세계제일가世界第一家. 이곳은 바로 루드비히 가문의 본가였다.
“…진짜 가주랑 얘기된 거지?”
“인장도 보여 드렸잖아요. 아시잖아요. 그건 제가 맘대로 쓸 수 없는 거예요.”
“하… 그치. 가자. 가자고.”
꽝! 콰과광!
가자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타타타탁!
한 남자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와 데미안과 하준광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하준광이 인상을 와락 찌그러뜨렸다.
“아니…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하지만 하준광이 그러거나 말거나 포탄처럼 허공을 난 남자는 거대한 폭풍과 함께 커다란 기둥과 조각으로 장식된 루드비히 본가의 정문을 박살 내며 착지했다.
꽈과과광!
경비원들이 여기저기 날아가 처박히고 먼지구름이 날린다. 그 난리의 한복판에서 청흑발의 남자 이오닌 칼츠가 하얗게 웃었다.
“아- 오길 잘했어. 루드비히의 정문을 이렇게 박살 낼 수 있다니.”
폭발을 발견한 루드비히의 경비 병력들이 달려 나와 이오닌 칼츠를 포위했다.
“웬 놈이냐!”
이오닌은 웃었다.
“칼츠가家의 이오닌이다. 뛰어난 재능과 헌신으로 칼츠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받은 칼츠가의 일곱 양아들 중 둘째가 바로 나지. 너희 도련님 부탁으로 여기 왕림하셨다.”
이오닌이 턱짓을 한 곳에는 데미안 루드비히가 서 있었다. 그 얼굴을 본 경비 병력들은 놀라서 얼어불었다.
“막내 도련님! 이게 무슨……!”
하지만 데미안은 그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온몸의 마누스와 이제 막 수련을 시작한 영력까지 모조리 끌어 올려 첫째 형의 이름을 불렀다.
“자크 루드비히! 나와!!”
그러곤 곧장 척척 걸음을 옮긴다.
뚜벅뚜벅 걷는 데미안의 뒤로 하준광이 데려온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간부들이 뒤따르고, 또한 파트너 관계로 동맹을 맺은 전 세계의 유력 단체 능력자들이 따랐다.
면면도 화려했다. 유럽을 주름잡는 칼츠가家의 집행관들, 미국 오리하르콘 밸리의 유명 길드 일리온의 자원 개발 팀, 국제 헌터 단체 헌터피스의 조사관들 등등. 한 지역을 대표하는 수준의 능력자들이 데미안의 뒤를 줄줄이 따라왔다.
그 모습을 본 이오닌이 투덜거렸다.
“뭐야? 일은 내가 다 했구만 주목은 혼자 다 잡수시네.”
이오닌은 궁시렁거리며 데미안의 뒤를 따랐다.
경비조장은 데미안을 보고 당황했지만, 데미안은 몰라도 외부인은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우르르 몰려들어서 그들을 저지하려 드는 경비 병력.
하지만 데미안의 명령은 단호했다.
“치우세요. 죽거나 장애가 남지 않게 배려해 주시고.”
“예. 예.”
“이거 뒷감당 되는 것 맞죠?”
다들 농담을 한마디씩 던지며 앞을 막는 경비대에게 달려들었다. 정문은 순식간에 장악되었다. 데미안이 걸어가는 대로 길이 열렸다.
“막내 도련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외세를 끌어들이시다니요!”
살기충천해서 달려온 루드비히가의 가신들이 데미안을 보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가 이후에는 어쩔 줄을 모른 채 악만 써 댔다.
“비켜. 첫째 형님한테 갈 거니까.”
“왜 이러십니까! 형제들 간에 피를 보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나랑 첫째 형님 사이 알잖아? 오늘 종지부를 찍을 거니까 비켜.”
“안 됩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어린 시절엔 대공자님을 곧잘 따르지 않으셨읍니까……!”
“그래. 그러니까 첫째 형을 원래대로 되돌리겠다는 거잖아. 비켜.”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형제들 일이야. 비켜!”
“하지만……!”
“비키지 않으면 치워야지.”
데미안의 눈짓에 하준광이 달려들었다. 루드비히가의 가신들은 대단히 수준이 높은 능력자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절대자라 불리는 하준광을 막아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기다가 루드비히가의 사람들은 이미 데미안을 보고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에 빠진 상태. 그런 어정쩡한 마음가짐으로 데미안이 데려온 정예 병력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한참을 걸었다. 육중한 문을 몇 번이나 넘어서자 루드비히의 직계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나타났다. 탁 트인 하늘이 나타나고 바닥에는 반듯하고 고급스러운 석재가 쭉 깔려 있다. 양옆으로는 기나긴 회랑이 이어진다. 그 한가운데에 자크 루드비히… 아니, 피핀 차원의 연출가가 서 있었다.
데미안의 뒤를 따르던 하준광은 흠칫 놀랐다.
그 소란을 일으키며 여기까지 왔는데 자크 루드비히는 조금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놀라기는커녕… 감정이 없는 듯 무기질처럼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는 소름이 끼치기까지 했다. 데미안의 눈동자가 황금빛 꿀이었다면 자크 루드비히의 눈동자는 그저 금색 플라스틱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데미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네요. 역시 오셨군요? 이 난리를 피우며 여기까지 왔는데도 댁이 아니라 진짜 형님이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 말에 자크 루드비히의 탈을 쓴 연출가가 말했다.
“와야지. 날 찾는데.”
거기까지 말한 연출가는 데미안과 데미안을 따라온 정예 능력자들을 무감각한 눈으로 쓱 흝었다. 그리고 쯧, 혀를 한 번 찼다.
“근데… 설마 고작 이것들로 날 어쩌려고 한 거야? 진짜 그런 거면 너무 실망인데, 데미안?”
그 오만한 말에 하준광과 정예 능력자들이 발끈했다. 다들 자기 지역에선 이름만 대면 다들 벌벌 떠는 실력자였으니, 그 말을 그냥 들어 넘길 수가 없었다.
“하! 이 새끼가……!”
특히나 자부심 강한 이오닌 칼츠는 인상을 사정없이 구겼다. 그러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펄펄 끓는 무쇠솥 같은 마누스를 피어 올리며 연출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산소가 소용돌이치듯 칼츠의 손아귀로 빨려 들고, 이내 강렬한 폭발이 그의 주먹에 감돈다. 마누스와 초능력을 융합한 칼츠가의 비기 중 하나, [폭권爆拳]! 이오닌은 평소에 주먹 한 번으로 성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경고. 당신은 지금 피핀 차원의 시민을 공격하는 중. 판결 중… 즉결 처분!]
우드드득!
갑자기 말이 아닌 의미로 전달되는 텔레파시가 뇌리를 때리곤, 기세 좋게 나아가던 이오닌의 주먹이 360도 비틀리며 아스라졌다.
“큭! 끄으윽!”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에 이오닌의 얼굴은 터질 듯 붉어지고, 미처 참아 내지 못한 비명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털썩. 주저앉는 이오닌의 앞으로 차르르- 비늘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새카만 철편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적인 형태는 철갑 비늘로 감싸인 구렁이를 닮았다. 하지만 비어 있었다. 철편들을 잇는 실과 같은 연결 고리는 전혀 보이지 않고 철편 내부도 푸른 섬광만이 보일 뿐 투명했다. 철갑 비늘만으로 둥둥 떠서 차르륵 소리를 내며 저 혼자 몸을 비비며 텔레파시를 보냈다.
[즉결 처분.]
그러자. 연출가가 손을 들었다.
“아아, 잠깐.”
[보류. 복수권을 가진 시민의 판결을 우선시.]
연출가가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 정말 실망이야, 데미안. 난 여태 너를 그렇게 연출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순진하고 안일한 판단을 내릴 줄이야. 솔직히 좀 기대했거든. 반란도 그럴듯하면 좋은 콘텐츠가 되니까. 만약 그랬다면 네가 좀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후-
한숨을 흉내 낸 듯한 무감정한 숨이 훅 불어 나온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치열한 반란도 좋지만 강력한 무력 앞에 허망하게 스러지는 반란을 보는 것도 재미니까. 자, 이쪽 구렁이 닮은 친구는 피핀 차원의 차원 경찰 보로스라고 한다. 초고도 영능학으로 만들어 낸 가디언으로, 어지간한 차원의 정규군 대대도 씹어 먹을 만큼 강력해. 시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몇 명이든 찾아온다. 네가 아무리 강력한 지구인들을 불러왔다 해도 상관없어. 시민 한 명의 생명과 영상 제작권을 지켜 주기 위해서라면 지구 전체와 전쟁을 벌이는 것도 불사할 거거든, 피핀 차원의 경찰 총국은 말이지.”
그와 동시에 스르륵 스르륵 소리를 내며 더 많은 보로스가 연출가의 앞뒤를 감싸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연출가의 얼굴에 작위적인 미소가 그려졌다.
“자, 데미안. 이제부터 여기 보로스들이 너희 친구들을 다 잡아먹을 거야. 아주 지저분하게 살점을 흘리고 피를 일부러 튀기면서 쩝쩝 소리를 내며 말이야. 물론 너는 마지막이야. 네 역할을 알겠지? 좌절과 공포가 담긴 얼굴을 보여 주면 돼. 마지막 연기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데미안은 연출가를 노려보았다. 사실 그녀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여기, 이 순간까지 오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애를 써 왔던가. 공들여서 베팅하고 카드를 돌렸다. 그리고 드디어 역전의 패를 뒤집을 순간이 왔다. 내가, 아니 다른… 피핀 차원의 연출가보다 더 어둡고 두려운 존재를 움직임으로써.
데미안의 입술이 움직였다.
“알죠, 피핀 차원. 차원 문명에서도 최상위로 분류되는 평의회의 이사국. 그리고… 드라마에 미친, 시청률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문명. 직접적인 폭력보다는 정서적으로 괴롭히는 콘텐츠를 좋아한다지요? 뭐, 가끔은 다른 차원의 역사적인 순간에 참여하는 선하고 정의로운 휴먼 다큐 드라마도 인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역겨울 뿐이죠.”
“뭐야. 조사를 잘했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대책 없이 덤벼든 거야?”
“그럴 리가 있나요.”
데미안이 눈짓을 하자 하준광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아공간에서 상자 세 개를 꺼냈다.
그걸 본 연출가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 그게 무슨…….”
하지만 그가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덜컹! 하준광은 상자들을 열었다. 상서로운 영기들이 상자에서 솟구쳤다.
그 모습을 보고 데미안이 말했다.
“얼추 알고 있겠지만, 이 지구에는 유물이라는 게 있어요. 그리고 이 유물이라는 게 특정한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면…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생시키거든요. 이 사실이 알려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과 도시들이 소멸했는지 모릅니다.”
“너… 설마?”
“네, 맞습니다.”
상자 속에 담긴 것은 세트 유물이었다.
롤랑의 뿔피리, 하멜른의 피리, 사티로스의 피리.
‘참 힘들게 모았지.’
파트너 계약을 맺은 조직들이 지닌 유물을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어 보니 세트가 하나 나왔다.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3개의 유물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며 모이면… 그 자리에 반드시 나타나는 존재가 있죠. 어째서인지 항상 유물을 탐내는 미지의 존재.”
그 말에 연출가는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어비스 게이트.”
“빙고.”
으드드드드!
지진인가? 아니다. 공간이 진동하는 것이었다. 하늘로 뻗은 상서로운 서기들이 서로 엉기면서 공간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아주 작은 검은색 구멍이 서서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연출가가 빨라진 어조로 말했다.
“미쳤어? 모두 죽을 거야.”
“그쵸. 모두 죽겠죠. 당신이 믿고 있는 저 보로스라는 것도 당신을 지켜 줄 수 없겠죠.”
쉭!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콩알만큼 작게 뚫린 구멍에서 회색빛 실 같은 것이 한 뼘 정도 기어 나왔다.
보로스가 즉각 그에 반응했다. 차르르륵! 철갑을 부딪치며 아직은 그저 새카만 점과 같은 어비스 게이트를 틀어막았다.
[경보! 경보! 1급 혼돈 오염을 감지! 사상의 붕괴의 전조! 무의미한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보로스는 즉시 허수 차원으로 철수! 경고! 모든 시민은 즉시 모든 일을 멈추고 자력 탈출……!]
꽈드드득!
하지만 보로스는 경고를 끝까지 남기지 못했다. 어비스 게이트에서 기어 나온 것은 그저 한 뼘 길이의 실처럼 가느다란 촉수였지만, 그것은 그 막강하던 보로스를 붙잡고 구멍 안으로 끌어들이며 무참하게 으스러뜨렸다.
후드드. 짤랑.
괴물이 먹고 뱉은 뼈다귀처럼 박살 난 보로스의 잔해가 바닥에 떨어진다.
스르륵 스르륵.
그와 동시에 연출가의 사방을 철통처럼 지키고 있던 보로스들이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홀로 남은 연출가뿐.
주춤.
연출가가 크게 한 발 물러섰다. 그의 플라스틱 같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쩌자는 거냐? 저 저주받은 외신을 불러들여서 너희 세계라도 멸망시키겠다고?”
“우리 세계는 이 정도로 망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이제 내가 진지하다는 걸 알겠나요?”
“그러니까 어쩌자는 거냐.”
무감각하던 연출가의 목소리에 점점 감정이 깃들었다.
데미안은 웃었다.
“형님 몸을 돌려줘요. 당신, 아무리 피핀 차원의 주민이 남의 몸에 기생하는 정신체라 해도 단독으로도 존재할 수 있잖아요. 일단은 거기서 나오세요.”
그러자 연출가가 말했다.
“혹시 그건… 나더러 너희 가문에서 손을 떼라는 소리인가? 더 이상 루드히비×루드비히를 방송하지 말라고?”
“하… 이름도 구리네. 네. 방송 때려치우세요, 살고 싶으면.”
그 순간, 연출가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뚝 멈춰 섰다. 다시 무감정하게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 돌아왔다.
연출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럼 죽여. 피핀 차원의 연출가에게 방송을 포기하라니.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으드드드득!
그러는 동안에도 어비스 게이트는 조금씩 조금씩 크기를 넓히고, 어비스 게이트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촉수도 점점 길고 두꺼운 것으로 바뀌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