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30화 (130/212)

9. 완성을 위한 마지막 조각

윤희정은 어딜 가더라도 두각을 드러낼 자신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부 드래곤힐동에서도 제법 인정을 받았다. 아직 서류상으로는 견습으로 분류되었지만 대등한 장인 대접을 해 주는 선배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너무 빨랐다.

‘시발…….’

최고의 장인들이 모여 한마음 한뜻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영혼 용광로.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힘에 겨워하는 한 사람. 그게 윤희정이었다.

전과 달리 결정적인 아이디어 제시에서 자꾸 헛발질을 한다. 장인들의 토론 과정에 끼어들어 보지만, 호된 핀잔을 받고 결국엔 보조의 위치로 다시 물러서게 된다. 하지만 시킨 일도 따박따박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다가 일을 지체하게 만들었다.

“봐 봐! 이것 이게 아니잖아. 내 말대로 해야 된다니까?! 윤희정 장인, 요즘 왜 그래? 그 꼼꼼한, 그 번쩍이던 통찰! 다 어디 갔어?!”

“아니, 그게…….”

“쯧… 기대했는데. 됐어! 시간 없어. 빨리 넘어가자고!”

존경하던 선배 니사수의 질책이 싸늘한 비수가 되어 박힌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자꾸 뭐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남들은 이미 저기 앞서 가고 나 홀로 낙오된 기분.

이해도 못 한 일을 시키는 대로 어거지로 마치고 간신히 단칸방으로 돌아왔을 때, 윤희정은 신발도 벗지 못하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환청 같은 혼잣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요즘 왜 그래?’

‘모르겠어… 자꾸 뭔가가 맘에 걸리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피곤해서 그런 것 아냐? 그동안 계속 무리했잖아.’

‘그럴까? 다들 안 중요하다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하는데 나만 적응 못하는 이것… 피곤해서 그런 걸까?’

‘그래. 일단 좀 쉬자. 그러면 생각도 정리될 거야.’

‘아냐. 쉴 순 없지. 서부 드래곤힐동의 모든 힘을 집결해서 첫 작품을 만드는 중이잖아. 이런 경험을 놓치면 완전히 뒤쳐질 거야.’

‘그치만 지금도 못 따라가잖아. 아, 됐고 일단 오늘은 이만 자.’

‘오늘도 민폐만 끼쳤는데? 밤새 공부해서 빨리 내가 뭘 헷갈리는 건지 알아내야…….’

‘또 밤새운다고? 말도 안 돼! 죽어, 그러다가!’

‘아무튼, 안 돼.’

‘그럼 어떻게 하게?! 너 요즘 단순한 작업도 계속 실수하잖아!’

어떻게 하냐고?

어떻게… 하냐… 고?

“시발… 그러니까. 진짜 나 어떻게 하냐…….”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무릎이 몇 번 움찔거리다가 구부러졌다.

윤희정은 천천히 주저앉았다. 좁은 단칸방의 좁은 현관보다도 더 작게 웅크렸다.

딸꾹질 같은 울음이 목구멍 사이를 비집었다.

“큭… 끅… 끄윽…….”

자리에 주저앉아 울어 버리는 이유는 어디로든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다들 어디론가 바쁘게 가는데 나에게는 이곳이 싸늘한 종착역 같다.

여기 더 머물러 있을 수 없는데, 정작 단 한 발자국도 더는 디딜 자리가 없다.

“끅… 큭…….”

아무도 없는 좁은 방에서도 혼자 우는 얼굴을 들킬까 봐 윤희정은 얼굴을 더 깊게 파묻고 숨죽여 울었다. 이젠 모르겠다. 애초에 드래곤힐동에 오면 안 됐던 걸까? 나는 여기 어울리지 않나? 이 일을 좋아하기는 하나? 이제 모르겠다.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 안의 어둠이 점점 깊숙이 윤희정을 끌어내리고 있을 때.

드드드득! 파직! 꽈장창!

방이 통째로 흔들리더니 빛이 번쩍이고, 우당탕탕! 하며 뭐가 구르며 방 안을 뒤집어 놓았다.

울다가 너무 놀라면 목이 잠겨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윤희정은 쭈그려 앉은 채로 새처럼 고개만 들고 입을 뻐끔거렸다. 눈물에 젖은 얼굴과 머리카락이 흉했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목 졸린 비명이 후두를 아프게 했다.

“아야야야…….”

웬 여자가 난장판이 된 방 한복판에서 비틀비틀 일어서고 있었다. 얼굴에는 웬 검댕이 가득하고 머리는 산발을 한 괴상한 행색이었다.

그런 주제에 머리를 몇 번 툭툭 털고 얼굴의 검댕을 쓱쓱 문지르니 본래의 또렷하고 귀여운 인상이 드러난다.

그제야 겨우 한 줌 숨을 토해 낸 윤희정은 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 저 사람?’

서민서.

이런 곳에는 있을 리 없는 사람이었다.

인류의 새 역사를 시작하는 이곳 서부 드래곤힐동에서 소위 ‘간부’라고 불리는 사람.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윤희정이 눈도 못 마주치는 김용수 명장 같은 원로들도 유사시 사령관 대리라며 조심히 대하는 인물.

그런 서민서가 윤희정과 눈이 마주치더니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으악!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배상을 한다는 둥 일단 숙소부터 새로 잡아 주겠다는 둥 어마어마하게 넓어진 [점멸]의 최대 도약 거리를 실험하다가 좌표를 착각했다는 둥. 너무 신나서 자신을 과신했다고, 다시는 이런 민폐 안 끼치겠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두서 없이 꺼내 놓는 변명이었다.

그 말을 듣고 윤희정은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괜찮아요.”

눈물로 퉁퉁 부은 눈이 보이지 않도록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배상이든 뭐든 일단은 그냥 나가 줬으면 싶은 심정이었다.

비참했다.

상대는 저 어린 나이에 정상에 서 있는데.

‘나는 현관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꼬락서니지…….’

윤희정은 울어서 갈라지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고 말했다.

“배상이 필요하면 나중에 사령관저로 청구서 보낼게요. 지금은 일단 그만 나가 주세요.”

“아, 네. 네. 정말 죄송합니다.”

거듭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고 나가던 서민서.

문득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민하듯 입술을 달짝이다가 말했다.

“그런데 혹시… 울었어요?”

윤희정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런 걸 왜 묻는단 말인가? 초면에. 그리고 울었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초면에. 내가 그렇게 막 우습고… 한심하고 만만하고 막… 흑…….

갑자기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윤희정은 눈물을 막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니, 왜… 잠깐! 야! 울지 마! 야… 끄으… 흐엉…….’

일단 한번 입 밖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울음은 막을 수가 없다. 이건 우는 게 아니라 감정이 북받친 것뿐이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어헝 어허헝 쏟아지는 울음에 짓눌려서 말조차 나오질 않았다.

서민서는 어쩔 줄을 모르고 윤희정을 달랬다. 그러다가 문득 호랑이처럼 크고 날카로워진 눈으로 뭔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저랑 같이 가요.”

서민서는 그녀에게 마음을 가라앉히기 제일 좋은 장소로 데려가 주겠다고 말했다.

* * *

망할…….

머리가 아프다.

쏟아지는 감각들에 멀미가 난다.

‘도저히 안 되겠다. 잠깐 쉬자.’

최대로 가동 중이던 [만상공감]을 잔잔하게 가라앉혔다.

그제야 겨우 어깨가 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꼬질꼬질해진 케사리니 아몬이 보인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후드를 눌러썼는데도 축 처진 어깨, 때 타고 구겨진 로브에서 초췌함이 뚝뚝 묻어났다.

“죽겠네요.”

[빡세긴 하네…….]

이제 공예 대회까지 단 사흘만이 남았을 뿐이다.

성검 제작도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지옥과도 같았다.

“마감이 가까울수록 더 어려워지네요.”

[더 미세하게 조정해야 하니까.]

“장인들을 지휘하는 것… 점점 미칠 것 같아요.”

[솔직히 지금까지 해낸 것도 네 그 사기 같은 권능 덕분이지. 장인이래 봤자 영능학을 접한 지 이제 겨우 두어 달 된 생짜 초자들이니 뭘 아나. 네가 저어어기 보이지도 않는 아래에 떨어진 사람들한테 어떻게든 높은 곳의 풍경을 보여 주면 그걸 보고 어찌어찌 베끼는 거잖아.]

“그래도 처음에는 할 만했는데…….”

사진을 찍을 때, 줌-인을 하면 아주 멀리 떨어진 광경도 세세하게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하지만 확대하는 배율이 크면 클수록 아주 작은 흔들림에도 화면은 황당한 곳으로 튀고 만다. 요즘 내 기분이 그랬다. 마감이 다가오고 섬세한 조절이 필요해질수록 장인들을 지휘하기가 어려웠다. 극히 미세한 차이들에 관한 것이지만 그런 미세한 마감 하나가 명품과 공산품을 가르는 법이었으니,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장인들과 연구원들이 한두 발자국이라도 내 수준에 더 다가와 준다면 훨씬 편할 텐데…….

[사실… 지금 상태면 조금 애매하긴 할 것 같다. 입상? 다른 작품들 수준이 좀 떨어지면 해 볼 만한데 그게 아니면… 애매해. 나도 잘 모르겠다.]

“안 되죠. 가뜩이나 다른 기능 다 빼고 순수 기본 기능만 가지고 도전하는 건데… 누가 봐도 걸작이라는 수준이 아니면 안 된다고요.”

[그럼 그렇게 해. 난 착실히 잘 인챈트 하고 있잖아? 조립해서 마감하는 건 네 역할이지 뭐.]

어후, 꼭 저렇게 얄밉게 말해야 하나?

어쨌든 결국 혼자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건데… 이게 방법이 있기는 한가 싶었다.

‘그냥 내가 더 죽어라 하면 되는 문제인가?’

근데 그건 이미 그러고 있는데…….

솔직히 방법이 없는 게 아닌가?

마누스 이론과 던전 공학에서는 만렙인 연구원과 장인이라도 영능학에서는 쪼렙인 걸 어떻게 해?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잖아?

진인사대천명이라던데… 그냥 하늘에 맡겨야 하나.

‘아… 모르겠다.’

골이 왕왕 울려서 미간을 문지르며 연구실 뒤편 휴게실로 향했다.

일단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기니 기분이 즉시 나아졌다.

그곳에는 데미안이 만들어 준 마이스터제 최고급 소파 일곱 개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옆에는 [세공] 능력을 가진 장인이 한 올 한 올 새긴 수제 LP 턴테이블에서 심금을 울리고 영혼을 치유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다시 그 옆에는 명품 디퓨저가 뿜어내는 안식의 향기가 감돈다.

‘오늘은 어느 소파에 앉아서 쉬지?’

몸이 푹 파묻히는 노벨 소파도 좋고 인체 공학적으로 몸의 라인을 받쳐 주는 시즈 소파도 좋았다.

일곱 개의 소파 중 어디에 기댈까 고민을 한다. 솔직히 회귀하고 나서 맨날 싸우고 바쁘고…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인 것 같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정말 회귀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 다 행복하자고 하는 일인데. 쉬자, 쉬어.’

그리고 휴게실 문을 열었을 때, 웬 반가운 얼굴과 낯선 얼굴이 하나씩 나를 맞이했다.

“서민서? 웬일이야?”

그러자 서민서 옆에 나른하게 앉아 있던 사람이 빼꼼 나를 돌아본다. 말총으로 묶은 긴 머리칼. 안경을 쓰고 있고 화장기 없고 피로가 묻어나지만 단정해 보이는 얼굴.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본 적 있는 사람이다. 연구원? 장인이었던가?

“사, 사령관님?! 죄, 죄송합니다!”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뜨며 벌떡 일어선다. 내가 멀뚱멀뚱 서민서를 바라보니 서민서가 막 뭐라 뭐라 설명한다. 그래서 그냥 손을 휘휘 저었다.

‘뭐, 민서가 데려왔으면 데려온 거겠지.’

꼬치꼬치 이유를 물어볼 필요는 없다. 다행히 오면서 생각했던 노벨 소파는 비어 있었으므로 거기 가서 앉았다. 아, 좋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자 옆에서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진짜 좋죠?”

“네… 소파는 말할 것도 없고 색감, 조명… 향기! 그냥 모든 게 너무 완벽하네요.”

“그렇다니까요. 저 선배가 진짜 감각이 예민해요. 무시무시하죠. 커피를 또 얼마나 잘 타는 줄 알아요?”

아니다. 이제 보니까 속닥이는 게 아니라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그래서 손을 내밀었다.

서민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뜨거운 물과 커피포트를 가져왔다.

물론 물 한 방울, 커피콩 하나, 포트 하나하나. 여기엔 평범한 게 하나도 없다. 내가 타키넷에서 공수해 온 차원 문명의 이기들과 데미안이 조율해 준 장인들의 손길이 한 땀 한 땀 녹아 있으니까.

그나저나 서민서… 물을 미리 끓여 놓다니. 커피 내려 달라고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었구먼, 이거?

뭐, 어차피 나도 마실 생각이었으니 상관은 없지만.

쪼르르르-

커피를 내려 잔 세 개에 나눠 따랐다.

“이건 내 것. 이건 민서 것. 그리고 이건…….”

“윤희정입니다! 윤희정 견습… 장인이요.”

“아. 네. 이건 윤 장인 것.”

보기에는 다 똑같지만 실은 전혀 다르다. [만상공감]으로 한 명 한 명의 현재 몸 상태에 최적화한 커피를 내렸으니까.

그나저나 윤희정… 이 사람.

‘신체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져 있네. 저러고 일상 생활이 가능한가?’

서민서가 괜히 여기에 데려온 게 아닌 모양이다. 타키넷의 문물과 나의 감각, 데미안의 후원이 합쳐져서 만든 이 휴게실은 감히 지구 최고의 치유실을 자처해도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이 휴게실에 잠깐 머문 것만으로도 바짝 마를 대로 마른 사막 같은 몸에 촉촉한 지하수가 흐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로 마시는 한 모금의 커피는… 마치 가뭄 끝에 쏟아지는 폭우와 같겠지.

꿀꺽.

“아……!”

윤희정의 눈이 슬로모션으로 점점 커다래진다. 톡, 톡, 머리털이 곤두서는 게 느껴진다. 균형이 무너져서 모래처럼 바스라지던 감각이 단단하게 뭉치고 그 위로 새싹이 돋는 기분일 거다.

나는 다 안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죽이지?’

내가 눈으로 묻자 윤희정은 ‘이건 혁명이에요!’ 하고 눈으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한 모금 한 모금이 너무 아쉽다는 듯이 찔끔찔끔 아껴 가며 커피를 마셨다.

나도 만족스럽게 소파에 기대서 내 커피를 마셨다.

서민서가 내게 물었다.

“근데 선배,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일이 잘 안 풀려요?”

“응. 이제 세밀한 작업을 해야 하는데 힘드네. 당장 좀 섬세하게 작업을 해 주셔야 할 분들이 도통 영능학적 개념들을 못 따라와.”

“설명을 해 줘도요?”

“빨간색이랑 주황색이랑 다른 거라고 말하면 그게 왜 다르냐고 대답하는 느낌? 어후… 영능학을 익힌 지 얼마 안 됐으니 당연한 거긴 한데… 그렇다고 수준에 맞춰서 낮은 단계로 얘기하면 세밀한 작업을 할 수가 없고… 난감하네.”

“헤에… 지구 최고의 장인이고 연구원인데도 그렇구나”

“그분들이 평생 쌓아 온 지식이랑 호환이 안 되니까 별수 없지…….”

“소서러 만렙 찍었는데 위자드로 전직했더니 1레벨이 되는 그런 건가?”

“응. 비유 좋네.”

정말 딱 맞는 비유였다.

얼마나 잘 맞는 비유였냐면, 그 말이 끝나자마 윤희정이 물고기처럼 펄쩍 뛰어오를 정도였다.

“아……!”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서 윤희정을 쳐다봤는데, 그녀는 내가 준 귀한 커피를 단숨에 원샷 때리더니 눈을 막 깜빡이며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근데 그게… 내가 상상치도 못한 멋진 감각이었다.

“와아… 이게 뭐야?”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생각의 속도가 대체 얼마나 빠르길래?’

내 능력은 생각을 읽는 게 아니라 감각을 공유하는 것. 하지만 원래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감각에도 영향을 주는 법이었다. 뜨거운 걸 생각하면 실제로 뜨거움을 느끼는 감각이 활성화되고 바람 소리를 생각하면 그런 감각이 느껴진다. 그리고 지금 윤희정의 모든 감각이 미처 날뛰고 있었다.

정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분명 이 사람 방금 전까지 완전 말라 죽기 직전이었는데?’

사막처럼 갈라진 몸에 이제 막 비를 뿌렸는데 갑자기 거기서 지하수가 터져 올라와서 강이 막 흐르더니, 나무가 막 으드드득 자라나서 휘오 할아버님처럼 거대해지고, 산이 솟고, 무지개 뜨고, 막 사슴이 뛰놀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감각이 폭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급기야 윤희정은 노트를 펼치더니 펜을 들고 미친 듯이 수식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수식이 이상했다.

‘내가 가르쳐 준 영능학적 수식하고 원래 지구에서 쓰던 근본 없는 수식이 마구 섞여 있잖아?’

진짜 미쳤나?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윤희정이 감각이 다시 한번 폭발하고.

슥삭 슥삭 사사삭!

윤희정이 강렬하게 펜을 놀려 수식을 마무리했다.

그녀가 외쳤다.

“돼, 됐다!”

뭐가요.

“됐어요! 됐다고요!”

그러니까 뭐가요.

“뭐가 문제였는지 알아냈어요! 그동안 계속 마음에 걸리던 게 뭐였는지! 왜 다른 연구원들이 하는 말을 이해 못 했는지 지금 알아냈다고요! 아, 이걸 왜 몰랐지? 이거였어!”

대체 무슨 소리를…….

점점 인상을 찌푸리던 나는 그러나 그녀의 다음 말에는 화들짝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있던 마누스와 던전 공학 공식에서 사령관님이 주신 영능학 공식을 유도하는 방법을 알아냈다고요! 이게 있으면 예전 지식을 써먹을 수 있다고요! 효율은 나빠도 당장의 작업 성과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요!”

네? 아니… 지금 그게… 거짓말이지? 그게 말이 돼?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버버하고 있을 때 서민서가 말했다.

“그럼 소서러 만렙이 위자드로 전직해도 만렙인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100렙이 만렙이라면 10렙쯤에서부터는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아, 진짜… 이거였어… 그동안 공부했던 공식들이 머릿속에서 자꾸 꼬이고 서로 겹쳐서 쿨쩍… 그래서 헷갈렸던 거야… 쿨쩍. 이렇게 명료했던 건데… 다 연결 지을 수 있는 건데…….”

뒤에 웅얼거리는 말은 하도 뭉개져서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뭐? 10렙이나?!

이게 사실이면…….

혁명!

이건 혁명이다!

떨리는 눈동자로 윤희정을 바라보니 그녀는 나보다 세 배는 더 떨리는 눈동자로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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