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영업은 어려워
지구에 뿌리내린 첫 번째 세계수, 휘오는 무럭무럭 혼자 잘 컸다.
친구가 찾아오면 가지에 누워 있던 몸을 반쯤 일으켜서 능청스레 손을 흔들 정도로.
[데미안, 오랜만!]
“휘오, 오랜만!”
데미안이 다가가자 휘오는 가지 위에서 조그만 주먹을 내밀었다. 데미안은 그 작은 주먹 위로 자기 주먹을 정면으로 맞추고, 상하좌우로 신나게 부딪치는 손장난을 수행해야 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뭐 하고 있었어?”
[영화 봤어.]
데미안은 영화 본다는 그 말이 어쩐지 의외였다. 타키온을 먹고 다른 차원으로 가지 뻗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던 휘오였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사람들의 문화에 관심을 보였다.
“영화?”
[응! 근데 영화 보고 알았는데, 데미안하고 소시민은 히어로인 거지? 그거… 음!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요즘 보는 영화가 히어로물인 모양이다.
데미안은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 속 히어로들과 비슷한 면도 많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좀 많이 달랐다.
“아냐, 휘오. 우리는 히어로가 아냐.”
[그럼?]
“히어로보다 훨씬 좋은 거지.”
휘오의 연녹색 머리칼과 그 주위를 나풀거리는 가는 가지들이 동시에 ‘?’를 만들어 낸다.
[그런 게 있어?]
“응. 혁신적이고 비전 있는 젊은 사업가……?”
휘오가 눈을 깜빡였다. ‘그게 뭐야. 처음 들어.’라는 표정으로 눈을 계속 깜빡이더니 이윽고 알겠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에잇!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내가 나중에 히어로 되면 소시민이랑 데미안도 히어로 시켜 줄게! 너무 아쉬워하지 마!]
데미안이 히어로가 되지 못한 게 부끄러워서 변명을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데미안은 그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 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휘오의 오해만 깊어질 뿐이었다. 자고로 영화 몇 편 보고 세상을 배운 꼬마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소시민 사령관에게 휘오의 교육 환경에 대한 건의를 해야겠어. 이렇게 협소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이라니! 루드비히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데미안은 결국 백기를 들고 원래 하려던 주제로 말을 돌렸다.
“아무튼 휘오, 오늘은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려고 온 거야?]
영화 <대부>의 명대사였다. 루드비히는 불현듯 7살 때 아버지의 지도하에 시청하고 감상문을 제출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음. 인용이 다소 적절하지 않았지만 괜찮은 시도였어. 크흠.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건 너한테도 나쁜 얘기는 아닐 거야.”
데미안이 품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주머니 입구를 열자 타키온 수백 개가 영롱한 광채를 드러냈다. 하지만 휘오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그걸로 되겠어?]
…이 친구 히어로를 목표로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데미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품에서 또 다른 주머니를 꺼냈다. 휘오가 눈을 반짝였지만 주머니에서 나온 건 타키온이 아니었다. 하지만 휘오는 오히려 타키온을 봤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어? 이거?]
“맞아, 세계수의 씨앗. 네 동생들.”
[동생 말고 부하.]
“…어, 그래. 부하.”
휘오가 데미안의 손에서 가죽 주머니를 받아 갔다.
휘파람을 불며 세계수의 씨앗을 둘러보았다. 총 세 알의 씨앗이 있었다. 권승리가 이끄는 아틀라스 클럽의 방해가 얼마나 집요했는지 세계를 이 잡듯이 뒤지고도 겨우 세 개를 찾아낸 게 전부였다.
[이거 지금 싹 틔우면 돼?]
그 물음에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사람들을 데려오면 싹을 틔워 줘. 그 사람들에게 나눠 줄 거야. 그렇게 할 수 있지?”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이걸 협상 카드로 지원군을 좀 늘리려고.”
[지원군……? 혹시 싸워? 도와줄까? 소시민은 알아?]
벌떡 일어나서 주먹을 불끈 쥐는 휘오. 데미안은 그런 녀석을 타이르며 말했다.
“응응. 이번에 세계수의 씨앗들 나눠 준다는 건 말했어. 하지만 싸우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도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은 각자가 각자의 일을 잘하는 게 최선이라는 점괘가 나왔거든. 너도 소시민 사령관님도 끼어들면 안 돼.”
[으음…….]
휘오는 불만스레 얼굴을 찡그리다가 넌지시 데미안의 눈치를 살폈다.
[이길 수 있지?]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기면 안 돼.”
휘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째서?]
“여기서 이기면 걔네랑 계속 싸워야 되거든.”
[그러면 또 이기면 되잖아?]
데미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순진한 아이에게 루드비히식 가르침을 조금 전수해 줄까?
“그게 아냐, 휘오. 혁신적인 사업가란 잘 싸우는 사람이 아니야. 애초에 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지. 상대가 누구든 찬란한 비전을 함께할 아군으로 만드는 능력. 그게 혁신가의 미덕이거든.”
그 알쏭달쏭한 소리 앞에 휘오는 또 몇 초간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뒤늦게 알겠다는 듯이 두 눈썹을 처량하게 휘었다.
[아… 히어로가 아니라 사업가라서 못 이기는 거였구나… 걱정 마! 좀만 참아! 내가 얼른 히어로가 될게!]
“…….”
사르락사르락 하는 연한 가지들을 뻗어 동정을 표하는 휘오. 데미안은 기가 막혀서 뭐라 변명을 하려다가 말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 녀석의 연녹색 머리칼을 헝클어 주었다.
* * *
데미안과 마주 앉은 하준광은 자신의 회색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흐흐흐. 꼬마, 세계수라는 것 마음에 들었다. 이런 좋은 게 있으면 진작에 바칠 것이지.”
데미안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아직 드린 적 없습니다. 이번 일을 도와주면 분양해 드리겠다고 했죠.”
“흐. 네가 이 하준광이를 아주 우습게 보고 있구나?”
“설마요. 이 대한민국 땅에서 협회장님을 우습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쯧.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세계수의 씨앗을 놓고 가거라. 네 요청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
사실 하준광은 협상이라는 것과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에 계산할 수 있는 것은 두렵지 않은 것이었다.
하준광은 두려운 사람이고 싶었다.
사실상 적자 무역을 했으면서도 굳이 조공의 형식을 강요했던 옛 중국의 황제처럼, 그는 자기 앞에 이런저런 조건을 앞세우는 이들을 불쾌해했다. 어찌 감히 자신의 앞에서 계산기를 내민다는 말인가? 그것도 이 대한민국 땅에서!
하지만 데미안 루드비히도 그간 하준광과 지지고 볶으며 그의 성향을 어느 정도 알아차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내가 제대로 된 계획을 들려주면 움직일 사람이야. 그는 계산하지 않는 폭군의 모습으로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지만… 사실 그 자리에 오를 때까지 그가 보여 준 건 철두철미한 계산 그 자체였으니까.’
그러니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데미안은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잘 생각하세요. 지금 우리는 역사의 변곡점 앞에 서 있어요.”
인류의 앞에 놓인 건 두 갈래의 길.
하나는 영능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힘과 기술을 받아들이고 차원 문명들에 맞서 경쟁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기존의 마누스와 던전 공학을 더욱 계승, 발전해 차원 문명이 더 이상 간섭할 수 없게 교류를 완전히 단절하는 것.
그게 소시민과 데미안 그리고 권승리가 바라보는 두 갈래의 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큰 그림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타키넷에 가 본 적도 없었으며, 차원 문명이라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이차원에서 온 존재들이라는 건 그저 던전에서 발견되는 괴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사실 소시민이 전파한 영능학이란 그저 신기한, 하지만 아직은 마이너 한 지식에 지나지 않았다.
‘몰라. 어려워 보여.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자.’
‘아직은 끼어들 단계가 아냐.’
이게 대다수 사람들의 판단이었다.
사람들은 왜 영능학이라는 다시 없을 혁신을 앞에 두고도 이렇게 보수적인 결정을 내리는 걸까?
여전히 사람들이 편리한 세 벌식 자판 말고 두 벌식 자판을 사용하는 이유.
처음 사용해 보는 크롬이 익스플로러보다 어렵게 느껴졌던 이유.
조선이 조총을 자체 생산 할 수 있게 된 이후에도 활을 주 무장에서 빼지 않았던 이유.
그게 모두 같은 이유였다.
하나의 기술이 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발전하며 생태계를 형성하고 나면, 그것을 대체하는 신기술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신기술이 아무리 혁신적이라고 해도 압도적인 인프라와 생태계를 지닌 기존 기술의 효용성을 뛰어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설령 양자 컴퓨터 기술이 상용화되더라도 그게 기존 컴퓨터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설 때까지 사람들은 그냥 기존의 컴퓨터를 사용하길 원하지 않을까?
마누스와 영력의 관계가 바로 그러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비현실적으로 빠르게 지구의 발전과 변화를 앞당겨야만 승산이 있었다. 그게 피핀 차원을 두고 [모이라이 홀덤]을 한계의 한계까지 돌린 끝에 내린 데미안의 결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데미안이 하준광을 찾아온 건 그가 강력한 ‘인플루언서’였기 때문이다.
한국이 일본과 달리 어느 날 하루아침에 국한문 혼용체를 포기하고 한글 전용을 법제화했듯이, 마누스 중심의 체제를 빠르게 포기하고 영능학 중심의 생태계를 구축할 강력한 파트너들이 필요했던 것.
물론 그 밖에도 데미안이 자유를 얻기 위해 하준광에게 몇 가지 준비물을 부탁해야 했지만… 일단 큰 틀은 그랬다.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을 보지 말고 미래를 보세요. 지금은 영능학이 미약해 보일지 몰라도 추후에는 영능학의 시대가 올 거거든요. 지금 제 말을 따라 주셔야 그 과실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겁니다. 자, 다른 말 다 필요 없고 딱 한마디만 할게요. 영능학 생태계는 떡상 합니다.”
데미안은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열정을 담아 하준광을 설득했다.
“흐아아아암-!”
그리고 하준광은 커다란 하품으로 그에 응수했다.
그쯤 되어서는 데미안도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정성껏 설득을 했는데도 저런 비뚤어진 태도라니…….
하준광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 루드비히 꼬마.”
“…….”
데미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무례한 말에 대꾸하기 싫었다.
하지만 하준광의 입에서 나온 힐난은 데미안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너, 다른 사람들 앞에 가서도 그렇게 말할 거야?”
“…네?”
“아, 다른 사람한테 찾아가서도 지금 나한테 말한 것처럼 그렇게 찌질하게 말할 거냐고.”
“아니, 찌질하다니…….”
“아, 거, 진짜 답답하네.”
하준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오,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중요한 데서 애송이잖아? 어이, 내가 파트너 하고 싶어도 불안해서 같이하겠냐? 무게 잡고 적당히 넘어가 주려고 해도 이건 원…….”
“네, 네?”
“루드비히 꼬마, 잘 생각해 봐. 너, 영능학 기술이 떡상 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
“무, 물론입니다.”
“나도 그래. 나도 눈 있어. 서부 드래곤힐동에 별 기기한 것들이 생겨나고 있는 걸 내가 모르냐? 창신대만 봐도 알아. 걔네가 쓰는 장비를 우리가 몰래 빼돌려서 다 테스트 안 해 봤을 것 같냐? 근데 못 써먹겠더라고. 그거 영능학을 알아야 쓸 수 있는 거잖아. 맞지?”
“아, 네네…….”
“거봐. 벌써 그 정도인데 소시민이가 마음먹고 매달리면 그 발전 속도가 보통 속도겠어? 암만 늦어도 10년, 20년이면 기존 마누스 생태계를 다 뒤집어 버리고도 남지. 자, 그럼 그때까지 마누스 생태계에서 존버 하던 애들은 어떻게 되겠냐?”
“…다 죽겠죠?”
“그래! 다 한강 가는 거지! 이제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하준광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데미안을 압박했다. 인상은 공 같은 일자무식이었지만 하는 말은 너구리가 따로 없었다.
“겁을! 팍팍 주란 말야! 너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네가 이 대단한 제안을 안 받으면 그건 네가 멍청한 거다. 이 동아줄을 놓치고 나락에 처박히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아, 그러니까…….”
“그래! 사람은 메리트보다는 페널티에 더 예민하다고! 겁을 주란 말야! 군림하란 말야! 네가 뭐가 아쉬워서… 함께해 주십시오?! 지랄이다, 지랄.”
하준광의 박력 넘치는 조언에 데미안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하준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커다란 주먹으로 던전마호가니 책상을 쾅! 내려치곤 못을 박았다.
“쯧! 가서 설득 문구 고쳐서! 내일까지 저기 이종범 실장한테 제출해!”
데미안은 기세에 눌려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화들짝 물었다.
“어… 어? 저기, 그러니까 협회장님. 지금 파트너 하기로 하신 거죠? 그리고 제가 따로 부탁드렸던 것도……!”
“아, 잔말 말고 일단 고쳐서 가져오라니까! 어, 그리고 이 실장! 그 마누스 수련하는 것 지겹지 않아? 당장 영능학 교재 구해 가지고 와! 너랑 나부터 솔선수범해서 어? 단숨에 고쳐 보자 이거야. 그리고 루드비히 꼬마, 뭐? 유물? 어비스 게이트? 그건 알아서 추진해. 이 실장이 자료 줄 거니까 일단 위치 파악 해 놓고 실행할 때 되면 그때 보고하고.”
데미안 루드비히는 멍하니 하준광을 바라보았다.
말은 뭐 거의 명령조였지만, 하나하나가 다 데미안이 부탁했던 그대로였다.
결국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데미안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건 천진한 웃음이었다.
“푸핫… 하하하하! 하핫! 힣! 아이고… 웃어서 죄송해요. 예. 알겠습니다, 협회장님!”
막 웃고 말았다. 루드비히로서의 예법도 잊고 정말 오랜만에 만 15살짜리 아이답게 마음껏 웃었다. 긴장이 풀려서 더 그랬을지도 몰랐다.
“큼, 크음. 시끄럽고, 바쁘니까 나가!”
본인도 민망했는지 하준광은 책상을 쿵! 치며 데미안을 얼른 쫓아내 버렸다.
* * *
부우웅-!
허공에 열린 화이트 게이트 속에서 데미안과 하준광이 걸어 나왔다.
금발을 포마드로 가지런히 넘기고 도수 없는 안경을 한 번 치켜올리는 데미안.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었다. 가슴 주머니에 꽂아 둔 영롱한 만년필이 시선을 끈다.
회색 머리칼을 단정히 정리했지만 여전히 야성적인 턱수염을 한 번 쓰다듬는 하준광. 정장을 입어도 터질 듯한 근육 굴곡이 드러났다. 소매의 알 굵은 커프스 단추가 시선을 끌었다.
베이징, 이화원.
데미안은 14,000여 개의 그림이 그려진 산책로를 걸으며 중국의 군벌들에게 서류를 돌렸다.
서류를 돌려 읽어 본 군벌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완전히 새로운 공학? 이미 새로운 마누스 수련법을 도입했소. 솔직히 관심 없소.”
“자세히 읽어 보시죠. 여기 보시다시피 새로운 용광로를 짓고 있습니다. 당장 한 달 뒤면 지구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병기를 제조할 수 있을 겁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 반면에 마누스 수련의 전투력 상승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이야기가 지지부진해지자 하준광이 바로 끼어들었다.
“아! 하기 싫으면 관둬!”
“협회장님! 가만히 계세요! 죄송합니다. 잠깐, 잠깐만 아직 설명을 더…….”
“아, 됐어! 우리도 바쁘잖아.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한 달 뒤에 어떻게 되나 보자 그래.”
데미안의 팔을 낚아채서 끌고 가 버리는 하준광. 데미안은 끌려가는 와중에도 군벌들에게 필사적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이것! 이것 받아 주십시오! 꼼꼼히 읽어 보시고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저희 정말 자신 있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중국의 군벌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서류들을 받아 들었다.
부우웅-!
다시 화이트 게이트가 발동했다.
이번에는 미국 오리하르콘 밸리.
데미안은 미리 모여 있던 길드장들과 던전 공학자들 앞에서 설명회를 개최했다.
시큰둥했던 중국과 달리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그런데 솔직히 레퍼런스가 전혀 없는 주장 아닙니까?”
“소시민 사령관은 자신의 동료인 서민서나 그의 부대 창신대가 강한 이유를 영력으로 설명했는데요… 실제로 그가 공개한 방식대로 영력 수련을 실험해 보았지만 아직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한 사람은 없습니다.”
“소시민 사령관의 영능학을 유사 과학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긍정적인 질문은 거의 없었다.
데미안이 만년필을 빼 들고 즉석에서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하는 이벤트도 열었지만, 용기 있게 나서서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사람은 두세 명에 지나지 않았다.
설명회가 파할 즈음 하준광이 마이크를 잡았다.
“시끄러운 새끼들. 증거가 필요해? 한 달만 기다려라. 거기 자료에 쓰인 대로 용광로가 건설되고 나면 너희가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구체적인 데이터와 사례가 쏟아질 테니까. 그때 가서 돈 싸 들고 와서 무릎 꿇고 애걸을 해 보든가. 솔직히 나야 그 편이 더 좋지. 흐흐”
“하준광 협회장님! 그렇게 말씀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인류의 중대사인데!”
“됐어. 가자. 시간 없어.”
“여러분, 죄송합니다! 하지만 서류는 꼭 꼼꼼히 다시 읽어 주세요!”
부우웅-!
데미안과 하준광은 화이트 게이트를 타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는 예의 바르게 미소 짓는 유럽의 길드장들을 만났다. 하준광은 그들에게 “너희가 내년에도 그렇게 웃고 있을 수 있을까?”라는 조소를 날렸다.
런던 브리지에서 만난 신사들은 “판타스틱! 러블리!” 하며 데미안의 설명에 찬사를 보냈지만, 역시나 사인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계약서와 자료를 남겨 주고 오는 데미안의 뒤에서 하준광은 “됐다. 어차피 미국 꼬봉 노릇 하는 놈들!”이라고 비웃었다.
도쿄에서 만난 이들은 “하이! 하이!” 하며 곤손한 모습을 보였지만, 하준광의 도발 끝에 마지막에는 “칙쇼!”로 마무리가 되고 말았다. 데미안이 꾸벅꾸벅 사과하며 서류를 뿌리고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일정이 다 끝나고 데미안은 어쩐지 허탈해진 심정으로 하준광에게 물었다.
“진짜 이래도 돼요?”
“어. 잘했어. 생각보다 호흡이 참 잘 맞았다.”
“무슨 굿캅 배드캅으로 취조하는 것도 아니고… 인상만 나빠진 것 같은데…….”
“그러니까 성공이지. 최악은 아예 기억에 안 남는 거야. 나쁜 인상이라도 남겼으니 된 거다. 일단 기억에 남으면… 그다음엔 인상이 문제가 아니라 이득이냐 아니냐 그게 문제니까.”
잠시 먼 곳을 응시하던 하준광은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튼 기다려 보라고.
* * *
소시민에게 탑골시장 공예 대회에서의 입상이라는 미션을 남기고 돌아온 무르물랑.
그녀는 겉으로는 미련 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 그 속은 꽁꽁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빚까지 져서 풀로 땡긴 금액이 4,000만 타키온인데 벌써 2,000만을 훌쩍 넘게 써 버렸어!’
이미 ‘손절’이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그러니 사실 무르물랑은 소시민이 공예 대회에서 입상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냥 이미 입상을 한 거라고 혼자 기정사실화를 해 버렸다. 그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그녀는 이미 자신의 인맥과 정보를 다 동원해서 ‘투자 제안서’를 돌리고 온 참이었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던 이유.
‘지구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해. 이젠 천만 단위가 아니라 최소 억 단위가 필요하다고.’
1억 타키온이라고 하면 굉장히 큰돈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가령 200억이라는 돈은 지구에서도 큰돈이지만, 그 돈으로 아마존 오지에 있는 원시 마을을 산업화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고개를 젓게 되는 것이다. 서울 중심가에 있는 건물 하나를 사면 끝나는 돈. 1억 타키온이라는 대단한 액수도 차원 문명들 사이에선 그 정도 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억 단위의 투자라는 건 지구를 문명화하기 위한 기초 단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르물랑에게는 그런 여력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이쯤에서 새로운 투자자들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아아, 정말 미치겠네. 연락이 오겠지? 응… 연락이 올거야.”
무르물랑은 초조하게 물방울을 튕겼다.
이러다 스트레스로 하얗게 일어나는 포말이 다 사라지고 민둥민둥한 물결만 가지게 될까 봐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연락이 오겠지? 얼마나 빨리 성장했는지 통계청 자료를 긁어다가 보여 줬는걸?’
수익률도 아주 많이 쳐 줬다.
그녀가 생각할 때 지구의 성장 가능성은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였기 때문에 아무리 수익률을 높이 잡아도 그녀가 얻게 될 수익과는 비교도 안 될 것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은 선뜻 마음을 열지 않았다.
‘테라 차원? 듣도 보도 못 한 차원인데…….’
테라라는 별명을 쓴 건 아갈타의 시선을 끌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지구든 테라든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니 별 상관은 없었다.
투자자들은 무르물랑이 보여 준 제안서를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뒤집고는 그냥 서류 더미 사이에 던져 놓으려 했다. 그럴 때마다 무르물랑은 그들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이번 탑골시장 공예 대회에서 입상을 할 이들입니다! 일단 당장 소액이라도 투자해 주세요. 그러면 입상 이후에 남들보다 투자 기회를 더 크게 열어 드리겠습니다.”
물론 아예 입상 이후에 투자를 받아도 되는 문제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전에 먼저 소액투자라도 받으려고 안달을 했다.
그렇게 돈을 묻어 둔 사람이 있어야 더 이슈가 되고, 이슈가 더 되어야 더 많은 투자와 투자금이 몰려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슈는 그 자체로 돈. 아무리 좋은 상품도 이슈가 없으면 쫄딱 망하게 되는 법.
그렇게 빠른 투자를 요청하며 바쁘게 보낸 9주.
공예 대회를 코앞에 두고 이제 본격적인 투자가 시작되는 날. 무르물랑의 초조함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토옥.
또옥.
물방울만 튕기고 앉아 있던 그때, 돌연 그녀의 방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어? 메시지 주문?’
무르물랑을 감싸고 한 바퀴 비행을 한 새는 무르물랑의 눈앞에서 광채를 뿜어내며 유리처럼 부서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화려한 인장 하나.
동시에 타키넷 시스템 메시지가 귀를 때렸다.
[‘고요한 투자자’ 님이 10,000타키온을 입금했습니다. 투자 계약이 형성되었습니다. 투자자의 메시지를 첨부합니다.]
- …발끝만 살짝 담가 볼까?
그게 시작이었다. 빛나는 물고기, 빛나는 원반, 각양각색의 모양을 갖춘 메시지 주문들이 차원 곳곳에서 속속 날아들었다.
[‘지옥을 거닐어도 고수익’ 님이 100,000타키온을 입금했습니다.]
- 간만에 보는 괜찮은 수익률이라. 불안해도… 에잇!
[‘어둠을 뒤적이는 붉은 눈동자’ 님이 1,000,000타키온을…….]
- 믿고 미리 많이 맡기니까 입상하고 나면 투자 우선권도 통 크게 열어 줘. 물론… 입상 못 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신중한 저울의 기만자’ 님이 500,000 타키온을…….]
- 아… 멘트가 딱 사기꾼 같은데… 이상하다. 왜 이리 끌리지?
부서지는 빛과 함께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는 화려한 인장들.
쏟아지는 박수 소리처럼 끊임없이 귀를 때리는 타키넷 시스템의 메시지.
“아, 아아…….”
그 가슴 벅찬 풍경 앞에서 무르물랑은 촛농처럼 흐늘흐늘해졌다.
아직도 모집해야 할 금액은 까마득했지만, 일단 선투자로 이슈 몰이는 확실하게 성공적.
무르물랑은 출렁출렁 녹아내리려는 어깨를 추스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됐어. 됐다고! 이쪽 해냈어. 그러니 이제… 소시민 너만 잘하면 돼!”
그렇게 무한한 차원계의 어느 한 편에서 무르물랑이 기쁨으로 찔끔찔끔 물방울을 흘리고 있을 때, 원시 차원 지구의 한구석에서 데미안 역시 행복한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어이! 편지! 또 계약서다!”
“바로 사인할게요!”
“여기 또 있어! 칼츠가家 라는데?”
“네? 칼츠가家요? 대박! 대박이다! 바로 사인할게요.”
“또 왔어! 이것도 사인해!”
“네! 네!”
“크큭, 빌어먹을 놈들. 역시 자료 다 읽어 보고 나서 뒤늦게 아차 싶었구만? 어차피 사인할 거면서 건방 떨기는… 어이, 꼬마. 어때? 이 정도면 너 필요한 만큼은 다 모은 거지?”
“네! 네네!”
데미안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사실 루드비히의 적손으로 자라다 보면 어떤 제안을 하든 긍정적인 답변을 돌려받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가문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개인적으로 움직였으며, 그 대상들 하나하나도 다 루드비히의 이름에 주눅 들지 않는 지역의 패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루드비히의 방식이 아닌 하준광과 함께 여태 해 보지 않은 방법으로 부딪쳤다.
그리고 마침내 맞이한 결과는 아름다웠다.
데미안은 마지막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눈을 살짝 감았다.
‘됐어. 이제 내가 준비할 수 있는 패는 다 깔아 놨어.’
[모이라이 홀덤]으로 보았던 전략. 그걸 위한 준비가 결국 모두 끝났다. 이젠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다.
“다 됐어요. 이제 나머지는… 소시민 사령관님한테 달렸네요.”
과연 소시민 사령관님은 탑골시장 공예 대회에서 입상을 해낼 수 있을까? 그것만 믿고 지른 건데…….
“후…….”
살짝 내쉬는 한숨에 아무튼 일단은 속 시원하다는 미소가 함께 묻어 나왔다.
* * *
탑골시장의 공예 대회.
이 대회가 갖는 의미는 특별했다.
타키넷의 최외곽 무법 지대인 쓰레기 거리를 마침내 졸업하고 갯펄시장에 입성한 이는 처음으로 차원 문명들 간의 거래에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이 갯펄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은 질 낮은 재료와 수준 미달의 기술로 그냥 싸게 많이 찍어 내는 저품질로 인식되곤 했다. 진정한 차원 문명의 수준에서는 쓰기 부끄러운 수준의 물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탑골시장은 달랐다. 아주 드물게나마 ‘명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공예품이 가끔 튀어나오는 시장이 바로 탑골시장이었으니까.
그러니 탑골시장의 공예 대회에서 입상한다는 것은, 차원 문명 전체를 두고도 ‘꽤 잘 만들어진 물건’을 만들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기교를 넣는 건 안 돼.]
케사리니 아몬이 말했다.
[공예 대회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면 시간상 제대로 된 성검은 딱 한 자루밖에 못 만들어.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거지. 그러니 최대한 단순하게, 클래식하게 가야 돼.]
정론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조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참가자들은 엄청나게 기교를 많이 넣는다면서요? 하다못해 캐스터 하나를 만들어도 아공간, 치유, 안티 소울, 영혼 포식 등등 온갖 기능을 정교하게 때려 넣는다던데…….”
[맞아. 하지만 우리는 그럴 사정이 안 돼. 우린 성검의 기본 기능인 블레이드, 실드, 버프 이 세 가지에만 집중한다. 대신 그 퀄리티를 확실한 명품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거야. 다른 잡다하고 현란한 기능들을 다 압살할 정도로.]
“…그게 더 어려운 것 아니에요?”
[가장 어렵지만 우리에겐 유일한 길이지.]
그렇게 제작 방향이 확정되었다.
공예 대회를 3주 남기고 마침내 영혼 용광로가 완공되었다.
그 후 1주일은 기획과 설계로 보냈고, 남은 2주일은 설계한 대로 한 자루의 성검을 벼려 내는 데 모든 힘을 다 쏟았다.
땅! 땅! 따당!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모여 달로 향하는 로켓을 만들었듯이.
영능 공학이라는 측면에서 현재 지구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과 연구원들이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 팔을 걷어붙였다.
나는 피를 토하면서까지 [자유]를 사용했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단 한 번의 기회. 그러니 핵심적인 공정이 있을 때마다 세 개의 평행 차원에서 각자 다르게 작업을 진행하고 그중 가장 뛰어난 결과만을 취사선택했다. 실패한 경우의 자료들도 내가 따로 모아 뒀기에 우리의 작업 데이터는 세 배는 빠른 속도로 쌓여 갔다.
땅! 땅! 따당!
[자유]를 남발한 대가로 으슬으슬 시큰시큰한 어깨를 주무르며 작업과정을 계속 모니터했다.
그러다가 문득 황홀해졌다.
‘벌써… 짜릿한데?’
아직 완성도 되기 전인데…….
[만상공감]이 전하는 감각에 오싹오싹했다.
균형과 조화가 완벽하게 제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이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땅! 따당!
지구 최초의 영혼 용광로는 노을처럼 빛나고.
첫 번째 지구산 성검은 그 안에서 쌔근쌔근 숨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