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28화 (128/212)

7. 걱정

북극.

수만 년간 녹은 적 없는 새하얀 빙하 위에 장년의 남자가 칼을 품고 서 있었다.

영하 60도가 넘는 칼날 바람에 소매가 넓은 장포가 깃발처럼 펄럭였지만, 대기를 몽땅 일그러뜨린 거대한 마누스 탓인지 남자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그림 속 풍경처럼 새하얗게 변화가 없던 그 자리에 불현듯 균열이 일어났다.

파지지직!

허공에 스파크가 튀고 백색광이 점멸하며 어떤 복도의 그림자가 북극의 풍경 위로 겹쳐졌다.

어느 순간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고 새하얀 빙하가 구부러져 복도를 이루어 그 위로 무수하게 많은 문이 생겨났다.

새로운 장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금발에 황금색 눈동자, 까만 베이스에 붉고 노란 포인트가 들어간 화려한 정장 차림이었다.

칼을 품고 있던 남자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감탄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드비히 가주. 이게 그 유명한 마누스 회랑이군요. 이렇게 신기한 물건인 줄 알았으면 초청하실 때 한번 이용해 볼 걸 그랬습니다.”

“반갑습니다, 무혼 권가 가주. 그러게 말입니다.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북극까지 오는 데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실 줄이야. 솔직히 수송기라도 쓰시려나 했는데…….”

금발의 남자, 로버트 루드비히는 아무것도 없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피식 웃었다.

“역시 그런 건 안 보이는군요. 무혼 권가에도 꽤 편리한 운송 수단이 있나 봅니다? 제가 몰라뵈었군요.”

약간의 비웃음이 담긴 그 말을 무혼 권가의 가주 권도식은 덤덤하게 받아넘겼다.

“아시다시피 잘난 자식을 두어서요. 요즘은 신기한 유물들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친구들이 가문에 넘쳐 납니다.”

“잘난 자식… 하긴, 그렇더군요.”

로버트 루드비히와 권도식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세계 제일의 명문가는 누가 뭐라 해도 루드비히였다. 지난 15년간 그건 변하지 않는 진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진리가 요즘 들어 흔들리고 있었다.

“권승리… 뛰어난 아이지요. 대체 무슨 수로 세계 각지의 그 날고 기는 초신성들을 다 홀려 버린 것인지는 몰라도, 이젠 무시 못 할 세력까지 가지고 있어요. 거기다가 이번에 발표한 마누스 수련법은 정말이지 놀랐습니다. 사실 오파츠라는 게 때로는 쓰는 방법을 몰라서 폐기하거나 방치할 때도 은근히 많은 물건 아닙니까? 그런 오파츠들을 이용해 빠르게 마누스를 증가시킬 수 있는 비법이라니… 잘만 하면 온 세상을 무혼 권가 앞에 무릎 꿇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나 제 여식이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칭찬 같으셨습니까?”

“…그러면요?”

루드비히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돈 많고 점잖은 금발 신사 같았던 그의 인상이 갑자기 황금색 갈기를 세운 사자처럼 흉악해진다.

“경고였습니다. 지금 같은 독주가 계속 가능할 것 같습니까? 심지어 요즘엔 초능력을 이용한 공학에도 관심이 많으신지 루드비히가 관리하는 자원과 인재들에게도 지분거린다는 소문도 돌던데… 루드비히와 척을 지고 패권을 차지하는 게 가능할 거라 착각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꿍!

로버트가 말을 맺자마자 주변의 풍경을 만화경처럼 찌그러뜨리는 압도적인 마누스가 발현되었다.

하지만 권도식은 그 강렬한 기세를 받아 내며 덤덤하게 팔짱을 꼈다.

“의외군요. 이런 얘기를 하려고 부른 건 아니지 않습니까?”

권도식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로버트의 눈을 정면으로 노려봤다. 마누스와 마누스가 부딪친다. 힘의 크기는 로버트가 압도적이었지만 권도식의 예리한 마누스는 밀려드는 로버트의 마누스를 깎아 내며 오롯이 제자리를 버텨 냈다.

“물어보니 대답하겠습니다. 패권? 저는 그런 등수 놀이에는 관심 없습니다. 제 여식도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저 무武 그 자체입니다. 인류의 신념과 생명이 꺾이지 않도록 지켜 내는, 끝내는 모든 싸움을 종식시키는 진정한 힘과 균형 말입니다. 누가 더 잘나가고 못나가고 그런 건 너무 유치합니다. 애초에 무혼 권가가 그런 걸 원했다면 대한민국의 1인자가 하준광이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광오한 말이었다. 대한민국의 두 번째 세력으로 여겨졌던 무혼 권가이지만 사실 첫 번째로 꼽히는 대한민국 헌터 협회조차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밀어낼 수 있었다는 식의 말.

권도식은 차갑게 말을 맺었다.

“루드비히가 최고를 자처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감히 무혼의 길에 훈수 두지는 말도록 하죠.”

둘 사이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이대로 북극에서 둘 중 하나는 영영 돌아가지 못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먼저 한숨을 뱉으며 긴장을 푼 건 로버트 루드비히였다.

“만약 1년 전이었다면 이대로 전화를 걸어서 세계 각지에서 무혼 권가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100가지도 넘는 전략을 당장 실행하라고 지시했을 겁니다. 그리고 딱 1시간 내로 무혼 권가 가주는 내게 무릎 꿇었겠죠.”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여전히 도발적이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어딘가 씁쓸하고 슬픈 듯한 느낌.

그에 맞춰 권도식도 기세를 누그뜨리며 가볍게 농담을 했다.

“뭐, 1년 전이었다면 난 아프다고 거짓말하고 여기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래. 애초에 두 사람이 북극에서 아무도 모르게 만난 것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떤 합의를 위해서였다.

로버트 루드비히가 말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이대로라면 루드비히와 무혼 권가의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무혼 권가에 무혼의 길이 있듯이 루드비히에겐 루드비히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요.”

권도식 역시 그 말에 동의를 표하며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로버트가 히죽 웃었다.

“무서우시죠?”

“무섭습니다. 인류가 당면한 적이 너무 무섭습니다. 이번에 그쪽 아드님과 제 딸이 멋대로 참가했던 그 전투 말입니다… 자칫하면 제 딸은 거기서 죽었을 겁니다. 그런 두려운 적을 앞두고 내부에 또다른 적을 만든다는 게 내키지 않습니다.”

그 솔직한 말에 로버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던 그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데미안… 아무도 못 찾는 외딴 행성에 가둬 두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는 형편이라.”

로버트와 권도식의 눈이 마주쳤다. 권승리와 데미안. 그게 두 아버지가 만난 이유였다.

권도식이 말했다.

“그럼 말씀하셨던 대로 협정을 맺죠.”

“좋습니다.”

로버트 루드비히가 준비한 협정문을 꺼내 들었다.

단순한 협정문이었다.

- 무혼 권가는 데미안 루드비히의 요청이 있을 경우 1회에 한해 가능한 최선의 지원을 다 한다.

- 그 대가로 루드비히가는 1회에 한해 권승리의 신변을 철저히 보호할 수 있는 ‘혈족 경호’ 시스템을 제공한다.

- 무혼 권가와 루드비히가의 경쟁으로 인한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권승리와 데미안 루드비히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노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권승리와 데미안을 위한 협정문.

루버트 루드비히와 권도식은 각각 ‘계약의 펜’으로 그 위에 사인을 남겼다. 이제 협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대한 영적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협정이 이루어지고 나서 권도식이 소매에서 술병 하나를 꺼냈다.

“협정도 맺었으니 한잔할까요, 아버지끼리?”

그러자 로버트 루드비히는 뚜벅뚜벅 걸어가서 한 잔을 받고 쭉 마셨다. 권도식에게도 한 잔 주고는 그가 그걸 마시자마자 곧장 다시 거리를 벌렸다.

“그럼 가겠습니다.”

권도식은 조금 당황했다. 천천히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라도 나눠 보자는 의도로 한잔하자고 말 한 건데 진짜 한 잔만 하다니… 그 칼 같은 모습이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담담하게 마주 인사를 건넸다.

“네. 조심히 가십시오. 그래도 자식들 덕분에 이렇게 얼굴을 뵈게 되었군요. 제 여식이 가서 협정 맺고 오라고 어찌나 성화던지…….”

그 말에 로버트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네? 설마 무혼 권가는 권승리 영애의 의지로 이 협상에 나왔던 겁니까?”

그 날카로운 추궁에 권도식은 당황했다.

“아, 아니… 제 여식이 데미안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말하길래… 설마… 이번 협정, 전적으로 데미안 군이 아니라 가주님의 뜻이었습니까?”

“아직 배울 게 많은 아이들이니까요. 힘에 부칠 것 같은 어른이 먼저 나서서 힘을 보태 주고 조율을 해 주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저희 아이는 요즘 부쩍 커 버린 느낌이라…….”

쑥스러워하는 권도식을 보며 로버트 루드비히는 혀를 쯧쯧 차고는 뒤돌아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파직! 파지지직!

마누스 회랑이 다시 발동해 북극 그리고 권도식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옆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투탕카멘의 가면이 놓인 가주의 침실로 곧장 이어졌다.

그때, 데미안 루드비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 아버지, 아버지! 부탁드린 대로 협정은 잘 맺으셨어요?

“그럼! 말해 준 대로 도장 꽝꽝 찍고 왔지!”

- 감사해요! 덕분에 다음 수를 준비할 수 있게 됐어요!

“어, 어 그래. 근데 [모이라이 홀덤]을 썼다며? 건강은……?”

“아. 그리고 소시민 사령관이 이번에 새로운 용광로를 만든대요. 차원 문명 수준의 진보한 용광로라던데… 제가 직접 보러 갈 상황이 안 되니까 연구원하고 장인들 보내서 관련 자료 좀 수집해서 보내 주세요. 저도 공부 좀 하게요. 그리고 뭐 도울 일 있으면… 그 악마 놈 눈에 안 띄는 선에서 최대한 도와주시고요. 부탁해요!”

뚝-

전화가 끊겼다. 루드비히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중얼거렸다.

“…바쁠 테지. 그 망할 악마를 상대할 계획을 짜는 중인데… 그래. 바쁜 게 좋은 거지.”

전화기를 아쉬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로버트 루드비히였다.

* * *

[시험 운행은 해 봐야겠지. 아직은 챔버만 있는 상황이라 코어 조립 같은 건 어렵겠지만… 그래도 단순한 물건 제작에는 쓸 만할 거다. 이 안에서 물건을 합성하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힘으로 쉽고 세밀한 합성이 가능할걸?]

쿠탈나르 씨가 거대하고 푸르른 소울챔버를 배경으로 그렇게 말했다.

‘시험 운행… 시험 운행이라…….’

더 이상 원시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최초로 얻게 된 차원 문명 수준의 시설. 이걸 이용해 처음으로 만들어 내는 물건은 어떤 게 되어야 할까?

불쑥 까막이가 외쳤다.

“단검! 형님! 차갑고 냉혹하며 예리하고 날카로운 단검 하나만 부탁드려요!”

그러자 김용수 명장이 허리를 두드리며 끼어들었다.

“큼. 크흠. 대장용 망치는 어떤가? 요즘 작업량이 너무 많아서 좀 힘에 부치는데…….”

웅성웅성웅성.

나랑 좀 친분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죄다 청탁을 넣기 바빴다.

손을 번쩍 들고 갑옷, 갑옷을 외치던 박민희는 문득 옆에 있는 서민서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민서, 민서. 너도 뭐 만들어 달라고 해. 솔직히 너, 장비도 구리잖아.”

“아, 아니에요. 저는 무기 사용이 아직 익숙한 편이 아니라서…….”

“하긴. 영력만 잘 쓰고 무기술은 별로긴 하지. 근데 원래 좋은 장비 써야 실력도 빨리 늘어.”

“저는 가난뱅이라 좋은 것 줘도 구분도 못해요.”

서민서는 항상 쓰고 다니는 백야의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쑥스러워했다. 백야의 안경은 공간 계열 능력자들이 겪는 괴리감과 멀미를 제어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고 보면 서민서가 재능을 꽃피운 것도 내가 저 안경을 선물한 다음부터가 아니었을까?

안경 형태라 전투 시에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그녀가 안경을 쓰고 다니는 이유였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는 저 안경 하나 선물할 때도 사치한다면서 막 죽으려고 했었지, 서민서.’

하지만 보라. 그 후로 한 번도 안경을 벗는 꼴을 못 봤다.

그런 녀석이 가난뱅이라서 좋은 걸 구분 못한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나는 마음을 정했다.

“렌즈. 렌즈를 만들 거예요. 점퍼증후군을 완화해 줄 수 있는 렌즈.”

내 말에 쿠탈나르 씨가 히죽 웃었다.

[좋지! 내 전문 분야다!]

릭이 얼른 끼어들었다.

[설계는 이런 방식이 어떨까요?]

[좋아… 근데 강력한 영적인 열과 압력이 필요한데… 아직 용광로가 완성이 안 되어서…….]

그건 걱정할 게 없었다. 사방에 널린 게 [염동력] 능력자에 [염화] 능력자였으니까.

그리고 지휘는 내가 한다.

“이건 맞춤형 렌즈라서, 제 지휘를 따라서 만들어 주세요!”

푸르른 소울챔버 안으로 재료들이 투여되고 막대한 열과 압력으로 소울챔버가 노을처럼 아름답게 빛날 때, 이계인과 지구인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차원 문명급 아이템이 완성되었다. 영롱한 렌즈가 그 빛을 사방에 뿌린다.

“와…….”

노을빛의 소을챔버에서 자그마한 렌즈 하나를 꺼냈을 때 서민서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깟 렌즈가 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지구인 중 가장 영력을 잘 다루는 서민서는 렌즈를 감싸고 도는 복잡미묘한 영력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서민서에게 렌즈를 건넸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서민서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이, 이걸… 내가 가져요? 진짜요?”

어, 너 해.

“어쩐지 미안한데…….”

빨리하라고.

그래도 계속 쭈뼛거리던 서민서는 내가 재촉을 하고 나서야 겨우 백야의 안경을 벗고 새로운 렌즈를 한 알씩 눈에 넣었다.

그러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어? 와아!”

그래. 달리 보일 거다. 이번엔 정말 차원 문명 수준의 기술로 빚어내고 내가 서민서에게 딱 맞도록 지휘해서 만든 진짜 제대로 된 물건이니까.

“좋지?”

내가 묻자 서민서가 멍하니 말했다.

“좋은 정도가 아닌데…….”

그 솔직한 반응이 마음에 든다.

“그럼 어느 정돈데?”

“공간의… 결이 보여요.”

그러곤.

파아아앙!

그대로 [점멸]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랐다.

‘잠깐? 어디까지 뛴 거야?’

아니, 이걸 [점멸]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만상공감]의 반경 안에 그녀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가진 기존 도약거리를 훌쩍 뛰어넘는 장거리 공간 도약.

몇 초 뒤에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와아! 바다 보고 왔어요!”

뭐? 바다? 서해?

원래 [점멸]은 단거리 공간 도약에 특화된 능력을 의미했다. 그런데 서해를 다녀올 정도면… 이건 [워프]로 구분하는 게 맞지 않나? 거의 2차 각성에 준하는 말도 안 되는 발전이었다.

‘아니… 이 정도였다고? 진짜 공간의 결이라도 본 거야?’

상상 이상의 효율.

여태 맞춤 렌즈 제작해 줄 기술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방치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진작에 업그레이드를 해 줄 걸 그랬잖아?

팡! 파팡! 파파파파팡!

서민서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점멸]을 반복하며 허공을 날아다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쿠탈나르 씨가 인사를 건넸다.

[보아하니 잘 완성된 것 같군. 할 일은 끝냈으니 가 보겠네. 뭐…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나름 재미있었어.]

돌아보니 쿠탈나르 씨가 우락부락한 팔로 나타르의 어깨를 휘어 감고 있었다. 나타르 씨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손으로 곧 돌아오겠다며 내게 인사했다.

…괜찮겠어? 나타르 씨,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것 맞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애써 꿀꺽 삼켰다.

쿠탈나르 씨와 나타르 씨가 떠나고, 주변은 더욱 부산스러워졌다.

장인들은 오늘의 모든 일을 [리뷰]로 기록한 함필진 교수 옆에 모여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고, 릭은 그런 지구의 장인들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거대한 소울챔버는 다시 푸르르게 식은 채로 숨을 쉬듯 천천히 부풀었다 꺼져 들었고, 서민서는 눈을 반짝이며 팡! 파팡! 그 위로 [점멸]했다.

문득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일단락했네.’

무르물랑이 요구한 3개월에서 1개월이 남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세팅도 끝이 났다. 이제는 그동안 내가 물어다 준 자원과 자료들로 성검 시스템에 대한 연구와 조립이 어느 정도 저절로 굴러갈 것이다.

잠깐 여유가 생겼다 생각하니… 스치는 바람도 달콤하고 하늘빛도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고 문득 궁금했다.

‘도련님, 잘 싸우고 있죠?’

이놈의 도련님은 왜 도와 달란 소리를 안 하는 건지. 걱정되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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