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동태들과 진짜배기
‘오늘도 여기엔 머저리들뿐이로군.’
감정사 릭은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며 생각했다. 탑골시장 경매장이라니…….
‘언제까지 이딴 곳에서 물건 볼 줄도 모르는 동태눈깔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현실이었다. 먹고살기 위해선 무릇 나보다 못한 자들에게도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하는 법.
고용주가 릭에게 물었다.
“어때? 오늘 소울챔버 중에는 뭐가 제일 낫지?”
릭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하급 3번입니다. 570년 전 창공의 영광 차원에서 제작된 소울챔버입니다.”
“그래……? 근데 570년이면 연식이 좀 오래 된 것 아냐? 팸플릿에도 내구성이 의심된다고 적혀 있던데.”
“이번 경매사 측 감정사가 창공의 영광 차원에 대한 건 잘 모르는 모양입니다. 딱 500년에서 600년 사이에 창공의 영광 차원에는 특이한 소재 법률이 존재했습니다. 그때 제작된 제품들은 유독 뛰어난 내구성을 자랑합니다.”
“오호? 그러니까 오래됐어도 내구성은 걱정 없을 거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실제 권장되는 출력보다 더 높은 출력을 사용해도 끄떡없을 정도라고 예상됩니다. 하급 소울챔버지만 튜닝만 잘하면 중급 부럽지 않게 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3,500만 타키온까지는 아끼지 않고 쓰셔도 됩니다.”
“오오, 아주 좋아! 역시 감정사 릭! 모르는 게 없구만!”
“과찬이십니다.”
릭의 말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과찬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겸손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런 지식은 그닥 대단한 게 아니지. 당장 여기 따라온 감정사 중에서도 이걸 알아낸 이가 다섯 명은 넘을걸? 이런 지식도 없이 경매를 하는 회사 측이 한심한 거지. 탑골시장에서 뭘 바라겠냐마는.’
지식에 근거하여 물건을 감정하는 것? 그건 그냥 달달 외운 공식 같은 것이었다. 공식만 그때그때 대입하면 사고력 없이도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처럼 번뜩이는 지성과 영감 없이도 누구든 시간만 갈아 넣으면 적당히 알아맞힐 수 있는 수준의 문제.
하지만 진짜들의 세계는 달랐다. 릭은 그걸 본 적이 있었다.
‘세상엔 그런 존재들이 있지. 공식을 달달 외워서 푸는 게 아니라 공식을 만드는 자들. 공식을 서로 합치고 조각내서 그 원리를 파고드는 이들. 그 어떤 변형 문제도 풀어낼 수 있는 진짜배기들.’
배워서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분야에서나 ‘진짜’들은 배우지 않아도 해내는 이들이었다. 이론이 없으면 이론을 만들고, 검증된 데이터가 없으면 직접 검증을 해낼 줄 아는 이들.
물론 그런 이들은 드물다. 가령 ‘국’이라는 낱말에서 초성의 기역과 종성의 기역이 사실은 서로 다른 소리라는 것은 배우기만 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세상에는 배우기도 전에 ‘국’에서 초성의 기역과 종성의 기역 소리가 서로 다르다는 걸 깨닫고 ‘왜 다른 소리인데 똑같이 기역을 쓰지?’ 하는 의문을 떠올리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릭이 생각할 때 진짜 전문가의 세계는 그런 것이었다. 지식은 기본이고 센스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그러니까… 진짜들이라면… 여기 나온 완제품 소울챔버를 사려고 아등바등하지 않겠지.’
만약 릭에게 돈이 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소울챔버에 필요한 여러 요소를 나눈다. 가령 내구성, 영능학적 안정성, 영자 밀폐성 등등. 그리고 그에 맞는 요건들을 가진 다른 제품들을 산 다음에 직접 조립을 하는 것이다.
물론 리스크는 있었다. 소재들이 정말 필요한 성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지, 서로 충돌이 없을지, 쉽게 조립이 가능한지, 이 모든 것을 스스로의 직관으로 정형화된 공식을 대입할 수 없는 까다로운 문제 풀이로 검증해 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수고를 실패 없이 수행해 낸다면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으로 매우 뛰어난 소울챔버를 구현해 내는 게 가능했다. 적어도 이런 곳에서 팔리는 오래된 중고 소울챔버보다는 훨씬 뛰어난.
‘물론… 나로선 그 저렴한 가격조차 감당 못 하니까 입 다물어야 하는 거지만…….’
처음엔 릭도 열정이 과한 시절이 있었다. 때문에 고용주들에게 더 어렵지만 더 좋은 방법을 알려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었고, 네가 책임질 수 있냐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맞는 이야기라도 상대의 상식을 뛰어넘는 이야기는 반감만을 불러올 뿐이라는 걸 릭은 그때 배웠다.
그 후로 릭은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정보들만을 알려 주며 적당한 보수를 받아 저축을 하는 삶을 몇 년째 이어 올 뿐이었다.
진짜배기들만 있는 상위 시장으로 올라갈… 그 까마득한 언제가를 기다리며.
‘어휴, 동태 눈깔들. 빨리 이 지루한 경매가 끝났으면 좋겠네.’
하지만 그날의 경매는 릭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다.
시작은 모두에게 비웃음을 사던 호랑이 귀에 꼬리를 가진 흑발 남자였다.
그가 호가를 크게 올리고 즉시 요청을 덧붙였다.
[1천5백만! 그리고 검증 요청합니다. 하급 1번 챔버를 구름 강기로 한 대 때려 주세요. 공명음을 들어보고 싶네요.]
그 요청을 듣는 순간 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라? 저 남자 제법……?’
* * *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지식이 상당한데?’
호랑이 귀에 꼬리를 가진 남자. 그는 탑골시장의 독특한 경매 방식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했다.
무르물랑은 탑골시장이 골동품과 중고품 그리고 조악한 수공예품을 취급하는 시장이라고 말했다. 최상위 차원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시장인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인지 탑골시장에는 ‘뽑기 운’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운이 좋으면 진짜 보물을 헐값에 살 수도 있다는 것. 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물건이 ‘가짜’, ‘중고’, ‘골동’이라는 이름으로 미어터지는 시장이기 때문에 그중에는 아무도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진짜 명품들도 섞여 있는 것이다. 때로 사람들이 그런 보물찾기를 하기 위해 방문하기도 하는 시장이 바로 탑골시장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경매에는 독특한 시스템이 있었다.
[2천만 타키온! 또 검증 요청합니다. 하급 1번 소울챔버 내부에 폭주하는 정령석을 던져 주세요.]
시작가의 배수에 해당하는 호가를 부를 때마다 일정량의 비용을 따로 지불하고 회사에 검증을 요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 경매 회사 측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물건의 진가를 경매 참가자가 직접 검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공개 검증이다 보니 자칫하면 검증 비용을 독박 쓰고 경쟁자들만 늘리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주 사용되진 않았다. 그저 아주 애매하고 전문적인 문제에 있어서 리스크를 줄이고자 가끔씩 사용될 뿐.
하지만 호랑이 남자는 그 시스템을 공격적으로 활용했다.
치지지지지직! 끼릭! 끼리리리!
호랑이 남자의 요청에 폭주하는 정령석이 소울챔버 속으로 들어가자 정령석은 180도가 넘는 프라이팬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챔버 안을 토도동 튕기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중구난방으로 뛰지 않고 원을 그리며 중앙에 수렴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부분의 경매 참가자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안목이 뛰어난 몇몇은 그것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물론 나도 그 의미를 파악한 인물 중 하나였다.
‘와… 영력 고정 능력을 저런 식으로 파악할 수도 있구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쓴 방법은 [만상공감]으로 눈앞의 소울챔버를 샅샅이 느끼고 그렇게 느낀 것을 토대로 영력 고정 능력이 뛰어나겠거니 하고 짐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만상공감]이 대단한 능력이라도 실제 움직이는 것을 느낄 때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낄 때는 받아들이게 되는 정보량이 완전 달랐으니까.
그런데 호랑이 남자는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상품을 테스트했다. 저런 식이라면, 전문 지식이 있고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이들은 정령석이 튀는 각만 보고도 팸플릿에 적힌 스펙보다도 더 정확한 수치를 뽑아낼 게 분명했다. 물론 나는 [만상공감]으로 그걸 훨씬 더 자세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결론은 명확했다.
‘가끔씩 힘이 튀기는 하는데… 그래도 팸플릿에 적힌 것보다 훨씬 우수하다!’
그리고 이걸 눈치챈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2,500만!]
[2,700만!]
[이익! 3,000만!]
어쩌면 2,000만 타키온에서 정리가 될 수 있었던 경매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 꼴을 본 나타르가 분노를 터뜨렸다.
[뭐야? 저 호랑이 새끼는 왜 저래? 괜히 깝쳐서 경매가만 처올리잖아? 저거 멍청한 새끼 아냐? 저러면 지도 못 사는 것 아냐?]
하지만, 그 순간 나는 호랑이 남자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느꼈다. 그 미소에서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아냐. 멍청한 게 아냐. 저건 일부러 경매가를 올린 거야!’
그런데 대체 왜? 나타르의 말처럼 저렇게 경매가를 올리면 정작 본인도 물건을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 아닌가?
‘노리는 물건이 따로 있나? 경쟁자들의 돈을 초반부터 말려서 후에 이득을 보려고?’
상황이 웃기게 흘러가고 있었다. 넋 놓고 있다가는 바보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상황을 파악하자.’
즉시 [만상공감]을 최대로 전개했다. 물론 경매장에 모인 여러 차원의 부호들은 다들 나름대로 인지 방해 결계와 심지어 공간 왜곡 결계까지 동원해 자신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구인의 초능력은 권능이라 불리는 고차원적인 능력. 그중에서도 내 [만상공감]은 유독 특별한 것.
여태까지 그 어떤 위대한 문명이 만든 결계도 내 [만상공감]을 완벽히 차단하지 못했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른 경매 참가자들의 시선과 청각 등의 감각을 공유하며 그들의 의도를 읽었다.
‘하급 3번 소울챔버… 이걸 노리는 사람들이 꽤 있잖아? 그러면… 저 호랑이도 그걸 노리는 건가?’
이번엔 사방으로 흩어 놓았던 [만상공감]을 호랑이 남자에게 집중했다. 마침 그는 팸플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멈추는 아이템. 그리고 그의 심장박동이 거세지는 아이템이 어떤 것인지 분석하다가, 나는 마침내 알아차렸다.
‘아냐! 저 새끼… 소울챔버를 노리는 게 아냐!’
소울챔버를 노리는 체하며 다른 이들을 엿 먹이고 있을 뿐이었다.
정작 호랑이 남자는 소울챔버 그 자체를 노리는 게 아니라…….
‘조합하면 소울챔버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 대체 아이템들을 노리고 있어!’
빌어먹을!
이건 내가 아껴 둔 비장의 한 수였는데?
소울챔버 3개 중 아무것도 사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한 수였다. 리스크는 있지만… 다른 완제품들을 조립해서 소울챔버의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경매장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연금 같은 것이랄까?
그런데 저 호랑이 새끼가 지금 내 연금을 노리고 있었다.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타르는 여전히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하아… 진짜 열받는다. 저 새끼 때문에 우리도 소울챔버 못 사는 것 아냐? 왜 저렇게 가격을 처올리냐고!]
동감이다. 심지어 우리 연금까지 노리고 있으니…….
“나타르 씨.”
[어?]
“아는 영능 공학자 얼른 섭외해 오세요. 지금 당장.”
[뭐야? 이미 섭외했잖아, 영혼 용광로 만든다고. 다 지구로 보낸 것 못 봤어?]
“아뇨! 단순 기술자 말고요! 다른 아이템들을 조합해 소울챔버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된 진짜 실력자를 데려오라고요!”
[뭐, 뭐? 내가 무슨 수로 그런 실력자를 데려와?! 지금 너 무슨 생각을……!]
“아, 시간 없어요! 당장! 10분 안에!”
내가 볼 때 완제품을 사는 건 이미 물 건너갔다. 저 호랑이 새끼는 마지막 소울챔버까지 가격만 최대로 올려놓고 본인은 몸을 쏙 빼낼 게 분명했다.
그럼 이제 남는 건 나 역시 다른 아이템을 조합해 소울챔버를 만드는 것.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호랑이 남자와 경쟁을 하게 생겼다.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못 사고 빈 손으로 돌아가게 생겼다. 그럼 쫄딱 망하는 거다. 이렇게 큰 규모의 경매는 자주 열리는 게 아니다.
‘진짜 딱 필요한 것에 힘을 집중해서 사야 돼!’
대충 내 감각에 의존해서 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걸 조합해서 만들어 낼 기술자를 모셔 놓고 의견을 들으면서 확실한 집중투자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아, 아니, 그러니까 그런 실력자를 갑자기 어디서……!]
“아! 좀! 나타르 씨 아니면 누가 해 줘요! 할아버지의 친구의 사돈의 팔촌 인맥이라도 좀 대령해 봐요! 전생의 인연이라도 동원하라고요! 우리 물러설 곳 없어요!”
나도 내가 억지 부리고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때로는 억지로라도 해내야 되는 때가 있는 거다.
[허…….]
다행히 눈을 깜빡이던 나타르는 뭔가 방법이 떠올랐는지 침을 몇 번 꿀꺽 삼키더니 비장하게 입술을 오물거렸다.
[알겠다. 내가 우리 차원에서 개진상으로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더라도 대령해 주마. 그 정도로… 필요하다는 것 맞지?]
“네. 알잖아요. 우리 지금 재산 다 처분하고 여기 온 것. 여기서 소울챔버 못 구하면 어차피 끝장 아니에요?”
[…오케이. 대신 넌 꼭 소울챔버 구하는 거다?]
“네. 빨리 가요.”
나타르 씨가 급히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나는 팸플릿을 펼치고 [만상공감]을 극도로 발휘했다.
‘보자… 네놈이 뭘 원하고 있는지.’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었다. 내가 놈의 의도를 먼저 파악했다는 것. 잘하면 나도 놈이 쓴 것과 같은 방법을 쓸 수 있다. 나한테는 필요 없지만 놈에게는 필요한 아이템들을 파악해서 가격을 팍팍 올리는 것. 그렇게 놈의 출혈을 유도하고 내게 꼭 필요한 핵심 아이템들을 사는 것이다.
‘절대 지지 않아!’
누가 더 물건의 진짜 값어치를 볼 줄 아는가?
싸늘한 진검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