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각자의 짐
인기 드라마 <루드비히 × 루드비히>! 지금까지의 이야기.
아주 머나먼 어느 푸른 행성. 두 자식과 아내를 모두 잃을 위기에 처한 야만인.
“내가 죽어도 좋으니 부디 우리 가족들만큼은…….”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듣고 나타난 제작진!
“당신 목숨은 재미없어. 대신 첫째 아들의 몸을 빌려주는 건 어때?”
제작진의 친절한 권유. 하지만 야만인은 무섭게 화를 내고.
“내 아들을 빼앗겠다고? 안 된다!”
억울한 제작진. 하지만 다시 친절하게 설명하는데…….
“아니, 빼앗는다는 게 아니라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빌린다고. 물론 우리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면 그땐 우리 게 되는 거지만.”
그 말을 듣고 다시 무섭게 화를 내는 야만인! 하지만 첫째 아들은 현명했는데…….
“그걸로 괜찮다면 그렇게 하지요. 제 몸을 빌려주겠습니다, 아버지. 모두 죽는 것보다는 제가 조금 불편해지는 게 낫습니다.”
“아들아…….”
그렇게 시작된 드라마 <루드비히 × 루드히비>!
아들을 저당 잡힌 야만인은 고군분투한다. 다소 무리한 ‘부탁’도 어떻게든 이루어 내는 재능과 의지로 똘똘 뭉친 야만인! 시청자들을 즐겁게 한 주옥같은 명장면들! 열심히 버티며 세 번째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한계는 찾아오고. 다시 집안이 다 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제작진은 그에게 또 한 번의 자비로운 기회를 주는데…….
“이러면 어때? 너희 세계에서 제일가는 권세를 갖게 해 줄 테니까 넷째를 우리에게 줘.”
다시 무섭게 화를 내는 야만인!
“넷째를 가질 계획도 없지만, 너희에겐 절대 내주지 않을 거다!”
너무도 매정한 말투에 상처받은 제작진. 하지만 끝까지 호의를 잃지 않고 그를 설득한다.
“좋아. 그러면 내기를 하자. 넷째가 남자아이라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하지만 넷째가 여자아이라면 우리한테 줘. 나쁘지 않잖아? 자식 셋을 낳았는데 셋 다 아들이니까 넷째도 아들일 확률이 높은 것 아냐?”
운만 좋다면 공짜로 제작진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 하지만 이 좋은 제안을 거절하는 야만인.
“개소리 하지 마!”
문득 궁금해진 제작진. 과연 이 야만인은 언제까지 어리석은 소리를 할까?
그렇게 시작된 무자비한 부탁 릴레이. 세 번의 부탁을 넘기고 기적적으로 네 번의 부탁도 넘긴 야만인. 하지만 결국 제작진이 준비한 비장의 다섯 번째 부탁 앞에 무너지는데…….
(제작진 인터뷰: 아, 이 부분 정말 즐거웠죠. 그 고집스러운 야만인이 무릎 꿇고 펑펑 울고 있고, 시청률은 막 쭉쭉 오르는데!)
그에게 다시 돌아온 제안.
“처음 약속대로 첫째 아들을 가질 수도 있어.”
하지만 다른 방법을 제시하는 제작진!
“자, 전에 얘기한 대로 내기하자. 넷째가 여자아이라면 우리에게 줘. 이번에도 남자아이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잖아? 거절할 이유가 없어. 이 내기를 받아들인다면 이대로 첫째 아들을 완전히 소유하는 걸 한 번 미뤄 줄게. 그뿐만이 아니야. 너희 집안에 세계 제일의 권세도 더해 줄 거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제안 앞에서 또다시 고민하는 바보 같은 야만인.
(제작진 인터뷰: 이 역시 명장면이었죠. 이 비이성적인 고민 장면에선 시청자들이 욕하면서도 막 봤다니까요?)
하지만 결국 야만인은 제작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태어난 넷째.
아니, 그런데 남자아이라고?
제작진의 동공 지진.
(제작진 인터뷰: 아… 물론 내기니까 질 수도 있는 건데, 진짜 여자아이이길 바랐거든요? 그래야 재미가 있는 거니까요. 근데 남자라길래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봐요. 이렇게 조작이 하나도 없는 청정 방송입니다, 우리가. 근데… 근데 거기에 또 그런 반전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죠.)
드러나는 진실!
이런 원시 차원에서 제작진의 눈을 속이고 한바탕 사기극을 벌인 거였다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실시간 리얼 버라이어티 드라마!
비밀을 밝혀 냈지만 모른 척하고 있는 제작진!
제작진이 행여나 비밀을 알아차릴까 전전긍긍하는 야만인!
이미 들켰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애처로운 연기를 이어 가는 비극의 넷째!
그런 와중에 차원 문명과 교류하며 자신의 운명을 쥐고 있는 제작진의 비밀을 캐내는 넷째.
과연 이들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 * *
줄거리를 대충 훑은 피핀 차원의 시청자는 채널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인기 드라마는 개뿔. 클리셰 범벅 쓰레기네. 보나 마나 또 꿈도 희망도 없는 신파 비극 엔딩일 게 뻔하다, 뻔해. 어휴. 어디 신선한 이야기 없나.]
* * *
화려한 호텔방.
데미안은 쇼파에 앉아 소시민의 전화를 받았다.
“네, 소시민 사령관님. 아… 그렇게 됐군요. 알겠습니다.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사령관님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다면 가능한 거겠죠.”
무르물랑이 떠났다는 것, 성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아몬과 나타르를 지구로 불렀다는 것.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듣고도 데미안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 네. 요즘 좀 바빠서요.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요. 잠깐 생각만 정리하고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네? 아, 아… 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식적으로 진지한 대화를 피하려고 하던 데미안은 문득 소시민의 한마디에 목이 메었다.
그저 “믿고 있다.”라는 흔한 한마디였을 뿐인데…….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 같은 걸? 진짜 날 믿어도 되는 건가?
데미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 이상하네 요즘…….’
최치국이 죽은 이후로, 가문을 농락한 악마의 정체를 알게 된 후 나날이 마음이 약해졌다. 루드비히로서 3살 때부터 배워 온 침착함을 유지하는 훈련이 요즘 들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였다. 자기도 모르게 불쑥 속마음이 튀어나온 건.
“사령관님, 그런데 만약 당신의 인생 전체가… 여태 당신을 괴롭혀 온 모든 운명이… 그저 어떤 변태 놈들의 볼거리에 불과했다면, 그럼 어떤 기분일 것 같으세요?”
그렇게 묻고서 데미안은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때 소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네? 음… 당연히 기분이 나쁘겠죠? 저라면 그 변태 놈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고 설칠 겁니다. 근데… 도련님이라면 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네? 어떻게요?”
- 루드비히니까요. 저 같은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냉철하고 오만한 루드비히. 아, 물론 좋은 뜻이에요.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도련님은 제가 아는 한 가장 루드비히다운 루드비히니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저처럼 단순한진 않겠죠. 결국… 잘해 낼 거라 믿어요.
그 말에 데미안의 작은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하지만 애써 목소리를 평범하게 가장하며 답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러고 나서는 일상적인 인사를 주고받고 전화를 끊었다.
데미안의 어깨가 미미하게 떨렸다.
“루드비히답게… 라고?”
마법처럼 그 단어 하나가 데미안의 마음을 무겁게도 하고 즐겁게도 했다.
위축되어 있던 그녀의 긍지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활활 타올랐다.
“그래.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 주마.”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겁먹을 필요도 없고 화낼 필요도 없이 보여 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 악마들에게 알려 주는 거다. ‘루드비히’라는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그동안 우리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 * *
“민서야, 내 운명이 사실은 다른 이들의 구경거리였다… 이게 무슨 말 같아?”
“네? 잘 모르겠는데… 아, 근데 그것 생각나네.”
“뭐가?”
“아기 원숭이.”
“원숭이?”
“네. 옛날에 그런 실험을 했대요. 아기 원숭이들을 가둬 두고 관찰하는 거예요. 근데 한쪽 우리에는 철사로 만든 엄마 인형을 둬요. 아기 원숭이들이 그 철사 인형을 안고 젖을 빨아먹을 수 있게 만들죠. 그리고 다른 우리에는 헝겊으로 만든 엄마 인형을 둬요.”
“…좀 기괴하네?”
“네. 그리고 실험하는 거죠. 전기 충격을 주거나 아주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아기 원숭이한테? 너무 하잖아……?”
“심지어 관찰하죠. 이 겁먹은 아기 원숭이가 헝겊 인형한테 달려가서 안길지, 철사 인형한테 가서 안길지.”
“뻔한 결과가 예상되는데?”
“맞아요. 죄다 헝겊 엄마한테 달려가서 안겼대요. 심지어 철사 엄마만 있어서 헝겊 엄마한테서는 젖 한 모금 못 먹어 본 애기들도 다 헝겊 엄마 품에 머리를 파묻었대요.”
“그렇겠지. 걔네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게 좋을 테니까.”
“그쵸. 그런데 과학자들은 진짜로 애기 원숭이들도 따뜻한 체온과 부드러운 살결을 더 좋아하는 건지 검증해 보고 싶었던 거예요.”
“원숭이니까… 다를 수도 있다?”
“그쵸. 아주 우습게 본 거죠. 그냥… 선배가 ‘구경거리’라고 하니까 갑자기 그 얘기가 떠올랐네요.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쩌면 괴롭히는 게 목적이 아니었을 텐데, 뭔가 당하는 입장에선 그래서 더 끔찍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약자의 설움이죠, 뭐.”
그래. 그렇겠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데미안은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걸 물었던 걸까? 무르물랑이 말한 루드비히의 ‘배후’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지켜볼 때였다. 무르물랑도 신경 쓰지 말라고 했고… 데미안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지난 생에는 꽤나 늦게 깨달은 것인데… 동료, 파트너는 내가 일일이 뒤치다꺼리 해 줘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각자 자기가 짊어져야 할 무게가 있는 거고, 그걸 알아서 들고 함께 목적지로 걸어가야 하는, 말 그대로 동료이고 파트너인 것이다. 내가 혼자 다 들어 주려고 하다 보면… 결국엔 무너지게 된다. 어떻게든.
데미안이 직접 도움을 청하기 전까지는 데미안을 믿어 주는 수밖에 없다.
지금 내 코가 석 자이기도 했고.
“민서 네 말이 맞네. 약육강식의 세계네. 아주 그냥, 막.”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차원 문명들 사이에서 지구인이란 실험관 속 원숭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무르물랑은 우리 편을 들어 줄 동맹을 만들고 친구들을 사귀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아직 대부분의 존재들에게 지구인이란 헝겊 어미를 좋아할지 철사 어미를 좋아할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미개하고 낯선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실력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건들면 화를 낸다.
우리도 꽤 능력이 있다.
“민서야, 더 분발해라. 슬슬 강기 정도는 써 줘야지. 약하면 서럽다니까?”
내 말에 서민서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뭐 선배는 막 강기 쓰나? 솔직히 그냥 생으로 영력 다루는 걸 보면 나보다도 못하는 것 같던데?”
“그니까 네가 더 잘해야지. 지구 제일의 영력 사용자가 바로 넌데! 네가 샘플들을 잘 다뤄 줘야 우리 장인들이 연구하기 편할 것 아냐?”
요즘 서민서는 우리가 사 들인 각종 성검 시스템들로 실험을 반복하고 있었다. 서민서가 영력으로 성검 시스템에 다양한 자극을 주면 장인들이 그걸 토대로 성검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데이터화하는 것.
강기를 다룰 수 있을 만큼 세밀한 영능 지배력이 필요한 작업이라 서민서는 실험 때마다 무척 버거워했다.
“그냥 선배가 하면 안 돼요? 솔직히 성검 시스템이든 뭐든 선배 손에만 들어가면 자유자재잖아요? 나보다 열 배는 나을 텐데.”
“나도 할 일이 있어서.”
“뭔데요?”
“탑골시장 경매에 참석한다. 지구에서 못 구하는 재료가 있나 봐.”
“하… 바쁘네요.”
“바빠야지, 원숭이 꼴 안 나려면.”
“하… 네에… 원숭이 꼴을 피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겠습니다. 눼눼.”
입술이 비죽 나온 서민서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 휘오에게 향하는 화이트게이트를 열었다.
그래. 각자 자기 일 알아서 해야지. 나는 나대로. 서민서는 서민서대로.
데미안은 데미안대로.
* * *
리디아는 데미안의 결심이 걱정되었다.
- 도련님… 알고 계시겠지만, 도련님의 능력은… 신체에 큰 부담을 줍니다. 부디 조심히…….
하지만 데미안은 그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오히려 자신에게 약속하듯이 중얼거렸다.
“여기서 막히면 안 돼… 이번에… 꼭 해결책을 찾을 거야!”
- 도련님…….
리디아가 또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탕!
데미안의 손바닥이 소파의 팔 받침대를 내려쳤다.
동시에 [모이라이 홀덤]이 발동되었다.
세상 모든 것이 연기처럼 어두워지고, 눈앞에는 두꺼운 원목 테이블 하나만이 두둥실 선명하게 나타난다.
[모이라이 홀덤]
현재와 미래를 읽는 카드 게임.
첫 번째 카드를 뽑자 테이블 위로 플레이어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처음 보는 이들도 있고 익숙한 얼굴도 있다.
데미안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들고 있는 카드를 짐작해 가며 자신이 들고 있는 카드로 게임의 승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게임을 지면 다시 하고, 지면 또다시 반복했다.
‘내가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찾아야 돼.’
미래는 게임과 같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그 결과도 크게 달라지는 것. 그런 의미에서 [모이라이 홀덤]은 미래를 점치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하나의 운명만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게임을 반복하며 나를 최선의 운명으로 이끌 전략을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판. 한 판.
아무리 게임을 다시 해도 데미안이 승리하는 결과는 쉬이 나오지 않았다.
데미안의 입술이 점점 마르고 갈라졌다.
그래도 그녀는 카드와 테이블만을 노려봤다.
안색은 파리해지고 눈 밑은 어두워졌다.
그래도 테이블만을 노려봤다.
뚝… 뚝뚝…….
급기야 그녀의 코에서 코피가 줄줄 흘렀다.
하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뭐지? 이 이상 어떤 전략을 쓸 수 있지? 아직 시도하지 않은 전략이 있기는 한가?’
코에 흐르는 피를 훔쳐 내고, 충혈된 눈을 천천히 깜빡이고, 파르르 떨리는 손을 꼭 모아 쥐며 계속 계속 카드를 돌렸다. 하지만 어떻게 카드를 내도 결국엔 지고 마는 게임.
그러다 문득 데미안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손은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그저 허공에서 파르르 떨리기만 했다.
그때, 테이블만 노려보고 있던 그녀의 시선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구석에 앉아 있는 플레이어에게 향했다. 어둡고 어두운 존재. 카드도 별로 안 내면서 어째서인지 자꾸만 플레이어로 나타나는 그 불길한 존재.
‘만약… 만약에…….’
그녀는 생각했다.
내 카드에 해답이 없다면?
해답을 쥔 카드가 다른 존재의 손에 있다면?
‘내 카드를 나의 승리가 아닌 다른 존재를 더 적극적으로 만드는 데 사용해야 한다면?’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손이 다시 망설임 없이 다음 카드를 잡았다.
자신의 운명을 끊어 낼 최선의 수를 찾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