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20화 (120/212)

19. 엇갈림

변화라는 건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한 5년쯤, 어쩌면 한 10년쯤. 별다른 변화 없는 일상이 계속 이어진다. 현실이라는 벽은 너무나 단단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실금 하나 생기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일단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 그것은 걷잡을 수 없다. 차갑고 견고하던 벽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지고 그 너머 떠오르는 건 새로운 하늘. 거짓말 같을 것이다. 단 1년 만에 지난 10년간 일어난 모든 변화를 다 합친 것보다 더욱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야 마니까.

그런 갑작스러움 때문에 사람들은 격변이 코앞에 와 있음을 자주 간과하고 만다.

용산 제2지역의 서부 드래곤힐동이 그랬다.

일반인들은 몰랐다. 그들은 여전히 서울 3대 공방 거리니, 전구 8대 공방 거리니 하며 10년 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순위를 들먹이곤 했다. 물론 그 순위 안에 서부 드래곤힐동은 들지 못했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았다. 서부 드래곤힐동은 이미 그런 것들을 다 뛰어넘고 완전히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지구의 문명사를 새로 쓸 만한 변화가 바로 이곳에서 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부 드래곤힐동에서는 장인들이 모여서 연구하고 토론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싸움이라도 하듯 고성이 오가다가 직접 보여 주겠다며 뚝딱뚝딱 작업을 시작한다. 늘 시끌벅적 사건 사고가 발생했기에 어지간한 비일상은 그냥 ‘평범한 하루’가 되어 버리는 다이나믹한 장소.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

하지만 오늘은 그런 와중에서도 유독 비일상적이었다.

뚝딱뚝딱 물건 만드는 소리가 딱 그치고 장인들은 모두 거리로 나왔다.

시끌벅적 떠들어 대며 하던 토론은 소근소근 조심스러운 의견 교환과 마른침 삼키는 소리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인들과 상인들이 바쁘게 오가던 탁 트인 거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전시된 ‘전리품’들이 가득했다.

“하… 대단하군 그래.”

“내 생에 이렇게 많은 오파츠를 본 건 처음인데…….”

“이게 그 마족 놈들이 쓰는 장비라고?”

사실 인간의 능력은 창조보다는 모방에 특화되어 있다.

아무것도 없는 터전에서 무언가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주 어렵지만, 보고 흉내 낼 만한 것이 있을 때 인류의 기술은 빠르게 발전한다.

그리고 이 지구상에서 소시민만큼 대단한 사람은 없었다.

차원 문명의 진보한 물건들을 광범위하게 소개해 주고 무엇을 모방하고 흉내 내야 할지 상세히 설명해 주는, 그런 능력이 되는 사람은 오직 소시민 한 사람밖에 없었다.

“사령관님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

“글쎄? 르네상스? 개화? 산업혁명? 뭐가 됐든… 엄청난 일이겠지.”

“솔직히 이거 스케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아서 겁도 좀 나는데… 어쩔 수가 없네. 이렇게나 많은 자원과 샘플을 가져다주면 지옥에라도 붙어 있어야 되잖아?”

“철밥 먹은 것들은 드래곤힐동에 발 한번 들이면 나갈 수가 없어. 요즘 봐 봐. 어찌 소문이 났는지 세계 각지에서 난다 긴다 하는 장인들 다 모이잖아?”

“도시 괴담처럼 말로만 들었던 전설적인 장인들도 보인다니까? 그동안 다들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지…….”

수군거리는 장인들의 시선이 피부색과 머리칼 색이 다른 외국 장인들을 훑고는 이윽고 유해의 마을에서 내려온 장인들을 흘깃흘깃 살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던 그들의 시선이 최종적으로 멈춘 곳은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소시민 사령관이 있는 곳이었다.

소시민은 거리를 가득 메우는 ‘전리품’ 진열을 막 마치고 거리 중앙에 위치한 연단에 막 올라선 상태였다. 낯선 장비를 걸친 창신대가 거리 곳곳에 배치되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불어오는 3월의 바람에서는 무언가가 시작되려는 듯 조금 따스하고 뭉클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사령관님께서 작심하신 것 같지? 뭔가 시작하려는 것 같지?”

“그래. 뭔가… 역사에 남을 뭔가가.”

* * *

내가 듣기로, 최치국의 죽음은 심지가 다 타 버린 양초와 같았다고 한다.

기름 먹인 심지가 다 타 버리고 나면 다시 파라핀으로 하얀 기둥을 만든다고 한들 불은 붙지 않는다. 한계 이상의 힘을 사용해 아갈타의 간부를 죽이고 다시 퀴니세인에게 치명상을 입힌 최치국에겐 치유가 소용없었다. 상처를 수복하고 뼈를 다시 붙게 해도 서서히 흩어지는 그의 영혼은 붙잡을 수 없었다.

‘벌써 치료한 거야? 고맙네. 우리가 이겼지?’

‘아, 근데 자꾸 졸리고… 왜 이러지… 전투 복기는 자고 일어나서…….’

숨을 거두기 직전, 잠깐 눈에 총기가 돌아온 최치국은 상처가 아문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는 그렇게 딱 두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그렇게 머리칼이 하얗게 센 채로, 잠이 들 듯, 성녀 나타시아의 품 안에서, 데미안 루드비히가 지켜보는 앞에서, 최치국은 숨을 거두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무르물랑은 이렇게 말했다.

‘영혼 분해 증상이었어. 그걸 막으려면 0등급 영력 고정 및 유도 장치가 필요했겠지만… 그건 최상위 문명에서도 전략물자로 취급되는 장비야. 어쩔 수 없었던 거지.’

최상위고 나발이고… 아무튼 그 장비가 있었으면 최치국을 살릴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아니 애초에, 마족들이 입고 다니는 차원강습 시스템 같은 것만 있었어도. 아니, 내가 입고 다니는 강화된 절규를 삼킨 밤 같은 방어구만 있었어도 최치국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최치국은… 허접한 장비 탓에 죽은 것이다.

‘그런 꼴을 보는 게… 행복하지가 않네.’

죽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이 죽는 꼴 보는 것도 싫고, 지구의 물건들을 두고 이차원의 상인들이 ‘아우라는 있지만 원시적이다.’라고 지껄이는 소리 듣는 것도 신물이 난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 시점이었다.

이번 전투를 계기로 아틀라스 클럽의 회귀한 영웅들은 자신들의 조직력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나 역시 마족 100명과 맞붙어 싸울 수 있을 만큼 전력을 강화했다.

페이스 조절과 몸싸움이 중요한 초반 경쟁이 끝나고 전력 질주만이 남은 시점이 찾아온 것이다.

오늘의 박람회도 그랬다. 더는 숨기지 않는다.

‘오늘을 기점으로 지구의 영능학 산업을 진흥시킨다.’

나는 거리를 가득 채우도록 깔아 놓은 전리품과 전시물들을 한번 살피고 그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 장인들을 주욱 살폈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유해의 마을 장인들이 총출동하다시피 나와 있다는 것. 권승리가 나와 선을 그은 만큼 그들도 나와 거리를 둘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은 무혼 권가와 협력 관계이지 주종 관계가 아니라면서, 유해의 마을을 구해 준 나를 홀대할 수 없다면서 다가오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게 아니라 내가 제공하는 샘플들에 관심이 많은 눈치다.

뭐, 능력 있는 사람은 한 명이라도 더 많으면 좋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을 때 나는 연단에 올랐고, 마침내 서두를 떼었다.

“오늘은 여러분께 알려 드리고 싶은 지식이 있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한마디를 하자 수군거림이 잦아 들고 수많은 눈동자가 나에게 고정된다. 반짝이는 눈들이 묻고 있었다.

‘지식? 어떤 지식?’

‘이 많은 오파츠와 관련이 있는 지식일까?’

그 눈동자들 앞에서 나는 말했다.

말로 수레를 끌게 하고 상황을 알리기 위해 봉화를 피우던 사람들 앞에서 최초로 전기의 유용함을 알려 주는 사람처럼.

“이 오파츠들은 영력에 의해 작동합니다. 지금부터 영력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성되고, 이용될 수 있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를 영능학이라고 합니다.”

영능학 개론. 교보재는 최상위 문명에서 온 엘리트 무르물랑이 직접 마련해 주었다.

* * *

서부 드래곤힐동에서 열린 전람회 소식을 전해 들은 권승리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이번 전쟁으로 노획한 아갈타인들의 차원강습 시스템을 [법칙왜곡]으로 공중에 띄워 놓고 이리저리 비틀고 열어 보기를 반복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물속으로 깊이 가라앉는 것처럼 더 낮아진 목소리로 사실을 받아들였다.

“소시민 사령관은 결국 우리와 다른 길을 가기로 했네.”

- 제거해야 합니다. 차원 폐쇄에 영향을 미칠 겁니다.

텔레파시로 전해지는 리프 얀센의 목소리는 서늘하고 딱딱했다. 권승리 역시 그에 동의했다.

“맞아. 그렇게 하는 게 맞지.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게 불가능하지.”

-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아틀라스 클럽은 지난 1년간 무수한 유물과 유해를 확보했습니다. 그를 제거할 방법은 당장 꼽아도 세 가지는 됩니다. 자기 목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도, 마치 잠든 것처럼 소시민 그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권승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들킬 수도 있어. 우린 아직 그의 초능력이 무엇인지도 파악하지 못했잖아. 그리고 그가 이차원에서 어떤 존재들과 거래를 한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만약 우리가 실패해서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 그건…….

“전리품의 규모를 봤지? 마족 100명을 잡았다는 건데… 그런 전력과 전면전을 한다고? 안 돼. 우리는 마지막 보루야. 어떤 경우에도 허무한 전력 손실은 없어야 돼.”

- 하지만 그대로 두면 대계 자체가 무력화될 수 있습니다. 소시민 그자로 인해 지구가 외차원에 공개되면 공개될수록 더욱더 강성한 이계의 괴물들이 몰려올 겁니다!

“그렇다고 적과 싸우기도 전에 내분으로 자멸을 할까? 당분간은 지켜봐. 우리가 소시민을 세력으로 압도할 수 있는 때가 올 테니까.”

- …생각한 게 있으십니까?

“응. 나도 이번에 깨달은 게 있거든. 우리도 전리품들을 좀 써먹자고.”

권승리는 차갑게 웃으며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허공에서 이리저리 뒤틀리던 아갈타인들의 차원강습 시스템이 하얀 불꽃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재도 남기지 않고 그저 연기만을 뿜어냈다. 뿜어진 연기는 흩어지지 않고 뭉게뭉게 허공에서 점점 크기를 부풀려 갔다.

“소시민이 말한 영력이라는 것, 그건 그렇게 빨리 익힐 수 있는 게 아냐. 어렵기도 어렵거니와 낯설거든. 사람들은 세벌식자판이 훨씬 빠르고 편해도 두벌식자판을 쓰잖아? 구관이 명관이라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법칙왜곡]을 잘 사용하면… 장비에 깃든 영력을 마누스로 뽑아 흡수할 수 있거든.”

까딱 권승리가 손가락을 흔들자 허공에 뭉쳐 있던 연기가 권승리의 전신을 감싸고 회오리치며 흡수되었다.

화르륵-!

그녀의 전신에서 마누스가 솟구쳤다. 방 안 전체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압도적인 마누스가 사방을 잠식했다.

- 아…….

리프 얀센의 텔레파시에 감탄이 깃들었다.

“이 능력을 물건에 담아 각지에 뿌릴 거야. 남은 대중들의 선택이지. 낯설고 어려운 영력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것과 익숙한 마누스를 간편하게 강화하는 것. 과연 사람들은 어디를 지지할까?”

- 그렇게 세력을 모아서 소시민을 자연스레 압도하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3년, 아니 1년이면 결판이 날 거야. 소시민은 저절로 도태될 거야.”

권승리의 얼굴은 차가웠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두 어깨에는 인류의 미래가 오롯이 실려 있음을 인정했다. 수백 번 시뮬레이션 한 확실한 ‘대계’를 두고서 더 이상은 소시민이라는 변수에 휘둘릴 수는 없었다.

“소시민에 대한 처분은 그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미룬다.”

- 잘 알겠습니다.

* * *

아갈타 차원 방위성.

머나먼 오지에서 보내진 초장거리 메시지가 굽이굽이 차원의 격류를 넘어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다.

복잡한 영력 패턴으로 암호화되고 차원의 격류로 인해 이리저리 훼손된 그 메시지를 복구한 통신병은 눈을 홉떴다.

다급히 상부로 보고된 메시지의 내용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방위성에 상주 중인 장군들의 회의 석상까지 올라갔다.

“퀴니세인? 들어 본 이름인데… 전사했다고?”

“아갈타의 수치로군. 어떻게 그런 원시 차원에서…….”

“보니까 임무 지역인 지구가 아니라 부상을 입고 후송 중에 차원 해적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하는데?”

“그건 그것대로 수치지.”

“좌관급 장교의 불명예 전사라… 5년 만이군.”

아갈타의 장군들은 서로를 허물없이 대했다. 상명하복, 상하관계가 철저한 아갈타의 사회였지만, 족히 수백년 간 전우로서 함께 싸우며 마침내 이 계급사회의 정점에 오른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친근하게 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탕!

가장 상석에 앉은 노인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는 순간 그 편안하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돌변했다.

잡담이라도 나누는 듯하던 장군들은 구부정하던 허리를 펴고, 느긋하던 눈매를 날카롭게 세우고, 무거운 영력을 흩뿌린다. 동창회와 같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거인들이 둘러선 전장과도 같은 분위기가 된다.

가장 상석에 앉은 노인, 5성 장군 아케르가 말했다.

“좌관급 장교의 불명예는 아갈타 사회 전체의 불명예. 명예가 없는 아갈타는 오로지 멸망한 아갈타뿐.”

이 역시 5년 만에 흘러나온 애도사였다.

장군들 역시 정해진 대로 화답했다.

“상대를 짓밟고 명예를 되찾는다.”

이에 아케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장 최근에 1성을 받고 장군이 된 세르큘린이 뒤에 서 있는 부관들에게 지시했다.

“즉시 두 개 사단 병력을 보내 퀴니세인의 죽음을 철저히 조사하고, 그와 관계된 모든 것을 제거한다. 이건 전투가 아닌 응징이 되어야 한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구성하라.”

“인원 편성 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케르가 말을 덧붙였다.

“지구도 조사해.”

세르큘린이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지구 차원 밖에서 차원 해적이 벌인 일이라는 보고가…….”

“지구도 조사해.”

“알겠습니다.”

고분고분 수긍하고 다시 분주하게 지시를 내리는 세르큘린을 보며 아케르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지구.

원시 차원이지만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고, 자원 조사가 필요하다는 보고가 여러 차례 올라왔던 차원.

하지만 여태까지는 별 신경을 두지 않았다. 아갈타가 진출한 차원은 수백 개나 되었고, 보고는 생각보다 자주 과장되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가슴에 걸린 가시처럼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구…….”

아케르는 낮게 한 번 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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