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19화 (119/212)

18. 불명예

그런 생각을 했다.

삶이란 건 어쩌면 진실이 아닌 선언일지도 모른다.

다들 살아 있을 땐 죽지 않을 것처럼 굴다가 죽은 다음에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다시는 대답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생명이란 건 진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존재한다고 박박 우기는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입증 중인 불완전한 가설이고, 죽어 버리고 나면 결국 반례에 잡아먹힌 거짓말이 되어 버리는 것.

그러니까 살아서 어떻게든 악착같이 우겨야 하는 거라고.

그러다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

우리는 시험받고 있는 중인 게 아닐까? 지구인이 정말로 살아 있는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생명’인가? 우주가 우리에게 그렇게 묻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은 절대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인데…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억지를 부리고 있는 중인 건 아닐까?

그런 별 거지 같은 생각도 들었었다.

쿵!

“빌어처먹을…….”

다행히도 사령관 관저의 욕실에는 내구성 강화 시공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분을 참지 못하고 벽을 때려도 벽이 무너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무너져 내리는 편이 좋았을 텐데.

쿵!

“씨발…….”

내 생각이 틀렸다.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죽음으로써 이토록… 이토록이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니, 시발 다 개소리지. 지금이 이렇게 감상에 빠질 때냐?

쿵!

회귀했을 때 분명 나는 생각했다. 이번 생은 되지도 않게 지구를 지키지 않겠다고. 있으나 없으나 표도 안 나는 목숨, 괜히 희생하며 살 필요 있나. 내 능력 밖이니 나는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고.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어 봤으니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이번 생은 별 죄책감이 없이 명품으로 사치하면서 노후 대비나 하자고.

그러니까 나도 이럴 줄은 몰랐던 거다.

아니, 분명 당신은 내가 50살이 됐던 그때도 살아 계시지 않았습니까?

무려 검웅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죽어요?

검웅이 17살의 나이로 전사했다. 검웅이…….

그 사실이 내 마음을 이렇게 흔들어 놓을 줄은 정말 몰랐다.

* * *

치열했던 전투가 끝난 다음 날, 비가 내리는 무혼 권가.

가주 권도식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의 무남독녀 권승리는 그의 옆에 하얀 상복을 입고 애처로이 서 있었다. 열네 살의 자그마한 여자아이.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오랜 삶 속에 누적된 회한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권도식 말했다.

“그는 이렇게 갈 사람이 아니었겠지?”

권승리가 답했다.

“…네. 세계를 구할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이번에도 그랬던 것일 게다.”

권승리는 말없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나는 천천히 영정 앞에서 절을 마치고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만큼 내 눈동자도 흔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입 밖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우리는 천천히 맞절을 하고 다시 반절을 했다.

작은 영웅의 애처로운 어깨가 내려다보였다. 감싸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치미는 분노와 분함을 삼키며 나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내 등에 대고 그녀가 물었다.

“…어디 계셨습니까?”

그녀는 사정을 다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외차원과의 교류를 경계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권승리는 말했다.

“내가 어리석었습니다. 내가 진 짐이 무거워 마음이 약해졌던 겁니다. 그 결과가 이거겠지요. 너무 큰 대가를 치렀어요.”

“…….”

“더는 바보같이 굴지 않을 거예요. 처음 계획한 대로 이젠 홀로 내 길을 갈 겁니다. 소시민 사령관님, 부디 저희의 앞길을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건 경고였다.

회귀자의 본래 계획은 철저한 쇄국정책.

하지만 여태 그녀는 나에게만큼은 부드러운 태도를 보여 왔다. 내가 세계수를 통해 외차원과 거래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나를 회유하려고 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천명했다. 더 이상의 유예는 없다고.

그녀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 어쩌라고.

어째서인지 내 입에서는 고운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맘대로 하세요. 아가씨가 또 헛수고하는 동안 나는 아가씨가 놓친 퀴니세인 모가지를 따 올 테니까.”

“뭐라고요?”

권승리가 날카롭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 길로 무혼 권가를 빠져나갔다.

조문을 끝내고 관저로 복귀하자 무르물랑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도 퀴니세인을 놓친 건 행운이었어.”

불덩이를 삼킨 것 같다. 나는 보통 침착을 잘 유지하는 편이었다. 화가 날 때 숨을 깊게 마시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 마음이 좀 가라앉듯이… 언제나 전해지는 [만상공감]의 다채로운 감각이 내 마음을 진정시키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많은 감각이 전부 장작이 되어 활활 타오른다.

내 표정의 변화를 느꼈는지 무르물랑이 황급하게 덧붙였다.

“퀴니세인은 지구에서 죽으면 안 돼. 그는 소좌 계급의 군인이야. 아갈타 차원에서 좌관급 이상의 장교는 아주 특별해. 그가 죽으면 당장 사단급 병력이 파견될걸? 우리가 한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되는 거라고!”

아갈타인들에게 병사는 그저 소모품일 뿐이었다. 어차피 인공수정 시스템으로 하루에도 수백만 명의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고 그들 중 많은 이가 병사가 된다. 아갈타인들은 그걸 ‘생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장교는 달랐다. 그중에서도 위관이 아닌 좌관급의 장교는 쉬이 탄생하지 않는 중요 자원. 그만한 재능을 가진 아기는 0.01퍼센트. 한 또래 집단에서도 만 명이 채 되지 않고, 그중에서도 실제 훈련 과정을 통과하고 업적을 달성하여 좌관급 장교가 되는 이는 수백만 중에서도 백여 명을 조금 넘는 정도라고 했다. 아갈타는 좌관급 장교의 손실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나는 무르물랑을 고요하게 바라보다가 아갈타의 교신기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어제 최치국의 전사 소식을 듣자마자 무언가에 홀린 듯이 교신기를 계속 엿들었고, 마침내 원하는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걱정 마. 지구밖에서 죽일 거야. 부상이 심해서 지구 밖으로 후송된다네.”

무르물랑이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다.

“분명 호위가 삼엄할 거야. 그리고 너… 왼팔도 성하지 않잖아.”

정확히는 뼈가 다 아스라진 상태였다. 그 대단하다는 성녀 나타시아가 직접 치유 능력을 쏟아부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붙지 않았다. 다만 후유증이 생기지 않게 제자리를 찾아 고정해 놓는 것에 성공했을 뿐. 무르물랑도 이건 시간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뭐… 별빛 강기에 당한 거니까.’

강기에 당한 상처라는 게 원래 잘 안 낫는다.

지금도 매초마다 팔이 잡아 뽑히는 것처럼 아팠다.

아마 못해도 몇 달은 정양을 해야하겠지.

하지만 그래서 그게 뭐?

“괜찮아. 놈도 정상이 아니니까.”

* * *

사방이 액체로 가득한 캡슐. 퀴니세인은 그 한가운데에 둥둥 떠 있었다.

최고급 응급 차량은 차원을 넘나드는 와중에도 조금의 흔들림도 만들지 않았고, 완벽하게 조절된 내부 광량은 그저 한없는 쾌적함만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퀴니세인은 그런 환경에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이런 강등이나 당할……! 법칙을 왜곡하는 힘이라니! 크윽……!’

부상이 생각보다 심했다. 연대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치료 장비로는 효과가 나오지 않았다. 구름 강기에 당한 상처까지는 효과가 있는 장비였는데도 그랬다. 퀴니세인이 느끼기로는 별빛 강기에 당한 상처보다 더 지독했다. 법칙을 뒤튼다는 게 이렇게 끔찍했다.

때문에 꼼짝없이 후방 이송을 선택하게 되었다.

후방 이송이라니!

이제 퀴니세인의 패배는 아갈타 사회 전역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원시 차원에서 중상을 입고 후방 이송 된 소좌. 한 10년은 비웃음거리가 되겠지.

‘그래도… 재기는 가능하다. 어쨌든 살아 있으니까.’

퀴니세인은 긍정적인 면을 생각했다.

몸에 새겨진 상처 그 자체가 ‘법칙을 왜곡하는 힘’에 대한 증거였다. 지구에 그런 귀중한 표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 그 자체만으로도 상부에 보고할 거리는 되었다. 향후 진급의 문제가 생길지는 몰라도 당장의 징계는 모면할 수 있는 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재수 없게 차원 해적에게 털린 유물과 유해의 표본들을 다시 모아서 상부에 보고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거기까지 해낸다면 이번에 잃어버린 점수는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길 불명예제대나 시켜 버릴…….’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그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비참했다.

‘기껏 든다는 생각이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라니…….’

원시 차원 놈들에게 패배해서 이렇게 후방 이송이나 되고 있다. 연대 내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던 138정찰대가 한낱 차원 해적들에게 전멸당했다. 이런 수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 피어나는 것은 그저 안도감뿐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죽지 않았다. 두 개의 영혼 메달과 세 명의 연인을 잃지 않아도 괜찮다. 휴 다행이다. 이딴 생각이 자꾸만 떠오르는 자신의 뇌를 뽑아 버리고 싶을 만큼 퀴니세인은 비참했고… 모욕스러우면서도… 자꾸 안심이 되었다.

‘야만인들아, 기다려라. 내가 이 기분까지 다 이자를 쳐서 돌려줄 테다.’

그렇게 퀴니세인이 치밀어 오르는 자기혐오를 삼키며 응급 캡슐 안에서 둥둥 떠다닐 때, 갑작스러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꿍!

굉음뿐이 아니었다. 차원을 넘나들 때조차 일말의 흔들림도 없던 응급 차량이 뒤집힐 듯이 흔들렸다. 무언가 강력한 힘에 얻어맞고 아주 멀리 날아가는 것처럼 관성이 생겼고 속이 울렁거렸다.

‘이게 무슨……?’

급히 수하들에게 연락을 해 보려고 했지만 통신이 연결되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편안했던 캡슐 속의 어둠이 갑자기 불안하게 느껴지는 퀴니세인이었다.

그는 비상 개폐 장치를 눌렀지만 방금 전의 충격으로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캡슐이 열리지 않았다.

불안함에 그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끼르르륵-

그때 갑자기 응급 차량의 외벽이 잘려 나갔다. 어둠이 흩어지고 어느 약소 차원의 붉은 태양빛이 캡슐 위로 쏟아졌다. 퀴니세인은 눈을 찌르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캡슐 속에서 버둥거렸다.

햇살을 등지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고작 세 개의 평행 차원에서 시도했을 뿐인데 이렇게 성공하다니. 삼분의 일의 확률이라? 너네 호위병력도 별것 없네.”

오른손에 활을 쥐고 있는 남자, 소시민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온 여자, 서민서가 말했다.

“선배, 활을 이로 물어서 쏠 줄은 몰랐어… 아무튼 얼른 치우고 가자. 나 무리해서 속 안 좋아…….”

그 말에 소시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퀴니세인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이성계의 활을 집어넣고 푸르스름한 회칼, 파도를 손에 쥔 채였다.

‘지구인?’

분명 지구를 빠져나와서 몇 번이나 차원을 다시 넘었다. 그런데 여기서 지구인이 나타난다고?

‘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호위, 내 호위들은 다 어디에? 아니… 설마 이것……?’

퀴니세인은 이 모든 게 그저 악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그렇지. 지구인이 여기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리 악몽이라 생각을 해도 몸은 으슬으슬 떨리고 숨이 턱턱 막혔다.

“너, 아까 꽤 편안해 보였어. 그런데 지금은 긴장했네? 입술이 마르고 땀이 비질비질 흐르고 등줄기가 짜릿하네? 심장은 왜 이렇게 빨리 뛸까? 응?”

퀴니세인은 캡슐 안에서 버둥거렸다. 뻐끔거렸다. 호흡이 가빠 왔다. 가슴이 짓눌린 것처럼 아팠다.

‘아, 안 돼!’

퀴니세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악몽이 아니다. 이렇게 생생하고 이렇게 두려운 악몽은 없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분명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어쨌든 살아남았다고 안심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끝이라고?

쿵! 쿵쿵!

필사적으로 캡슐을 두드렸다. 하지만 차원강습 시스템이 없는 아갈타인의 전투력은 잘해 봐야 3류 헌터수준.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는 캡슐조차 깰 수 없었다. 하지만 소시민은 달랐다.

“약해 빠졌네. 네가 이렇게 약해 빠지게 된 건 다 그분 덕이지. 그러니까… 기억해라. 널 죽인 사람의 이름은 최치국이야.”

콰직! 소시민은 손바닥으로 꾹 누르는 것만으로 캡슐을 깨뜨렸다.

‘미친! 이런 야만인이……!’

퀴니세인은 야만인의 괴력에 경악했다. 하지만 그에겐 그런 감상을 느낄 시간조차 이젠 남아 있지 않았다.

쏴아아 쏟아져 나가는 액체, 따라서 딸려 나가는 몸. 그리고 그런 그의 배를 꿰뚫는 날카로운 통증.

‘아…….’

퀴니세인은 마지막을 직감했다.

“뭐냐? 너 우냐?”

진심으로 같잖아하는 소시민의 목소리가 퀴니세인의 귀를 때렸다.

‘아아,’

퀴니세인은 버둥거렸다.

푹푹.

연약한 배에 지구의 야만스러운 흉기가 들락날락하고 몸에서 자꾸만 뭔가가 쏟아져도 퀴니세인은 버둥거렸다. 그렇게 버둥거리면 흩어져 나가는 생을 그러모을 수라도 있는 것처럼 버둥거렸다.

‘아, 안 돼… 내 영혼 메달이… 내 연인들이…….’

서걱-

그리고 세상이 빙그르르 돌았다.

이제 보이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어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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