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승전
얼어붙은 팔다리 그리고 살기등등한 리디아의 눈빛.
그걸 보는 순간 퀴니세인의 뇌리에 주마등이 스쳤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퀴니세인. 그가 살던 거리에는 으리으리한 저택이 있었고, 그곳에는 중좌 계급의 장교가 한 명 살고 있었다. 그는 공훈을 증명하는 영혼 메달을 자그마치 다섯 개나 가지고 있었고, 열 명의 연인에게서 사랑을 받는 전쟁 영웅이었다. 자고로 아갈타의 어린아이들에게는 높은 계급의 군인이란 신과도 같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영혼 메달이 무려 다섯 개라니! 사랑을 맹세한 연인이 열 명이나 되다니! 어렸던 퀴니세인은 그의 집 앞에서 몇 날 며칠을 서성이다가 간신히 사인 하나를 받아 냈다.
몇 년간 그 사인은 퀴니세인의 보물이었다. 그 사인을 빼앗겠다고 옆 동네 형까지 쳐들어왔지만, 퀴니세인은 머리가 깨지도록 싸워 그 사인을 지켜 냈다.
하지만 그 중좌는, 아니 그 멍청이는 한심하기도 짝이 없이 어느 이름도 알 수 없는 오지 차원을 개척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그럴듯한 차원과의 세력 다툼 중의 사망도 아닌 오지 차원의 야만인들에게 당해 전사라니… 아갈타 전체의 수치였다. 물론 아갈타 사회는 그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당장 세 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파견되었고, 그 오지 차원은 통째로 차원의 격류 속으로 침몰해 버렸다.
그렇게 아갈타 사회는 불명예를 씻었다.
하지만 한때 퀴니세인의 영웅이었던 그 모지리는 아니었다.
그의 가문을 살찌우던 다섯 개의 영혼 메달은 압수당했다.
사랑을 맹세했던 열 명의 연인은 이제 그의 무덤에 침을 뱉고 오줌을 갈겼다. 애초에 군에서 무덤을 만들어 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느덧 성년이 된 퀴니세인도 지난 7년간 목숨처럼 지켜 온 사인을 불태우고 그 위에 오줌을 쌌다.
그렇게 패배자의 명예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 법이었다.
‘아, 안 돼……! 여기선 안 돼!’
그래서 퀴니세인이 리디아를 보고 공포에 질린 것은 그깟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 죽음으로 아갈타 차원 전체에 남길 수치가 두려웠다. 가문의 자랑이자 든든한 기반이 되어 주어야 할 두 개의 영혼 메달을 몰수당할 것이 두려웠다. 세 명의 연인으로부터 모욕당할 것이 그리고 그 연인들이 다시 다른 이들에게 모욕당할 것이 두려웠다.
‘여기서 죽으면 안 돼!’
하지만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이게 끝이라고?’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이다.
모든 면에서 그가 압도하고 있었다. 오르피앙페르까지 회수한 이상 정면으로 힘 대결만 해도 1분 안에 제압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법칙왜곡]이 만들어 낸 단 한순간의 변수가 모든 걸 망쳐 버렸다.
‘설마… 그 찰나의 순간에 차원강습 시스템을 다운시킬 거라고는…….’
아무리 권승리라고 해도 차원강습 시스템을 다짜고짜 다운시킬 수 있을 만큼 능력이 강하지는 못했다. 그녀도 회귀한 지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이니까.
하지만 최치국이 만들어 놓은 찰나의 빈틈. 그 사이로 그녀는 자신의 [법칙왜곡]을 날카롭게 갈아 있는 대로 찔러 넣은 것이다.
그렇게 차원강습 시스템이 다운되는 순간, 더 이상 상위 문명으로서 갖는 이점은 없었다.
‘진짜 이렇게…….’
믿을 수 없는 허망함에 입이 벌어지던 그때, 아갈타의 병사들이 리디아와 퀴니세인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피하십시오, 연대장님!]
병사들은 필사적이었다.
그건 충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두려움에 질려 있을 뿐이었다.
장교의 수치가 수준에 맞지 않는 전장에서 전사하는 것이라면, 병사의 수치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상관을 잃는 것. 심지어 일선 장교도 아닌 사령관이었다. 퀴니세인이 죽을 경우 병사들의 앞날에 남는 것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수치뿐.
그렇기에 병사들은 악착같이 리디아의 앞을 막아섰다.
리디아가 내뿜는 극한의 한기에 차원강습 시스템의 방어 체계마저 얼어붙어 터져 나갔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검은색 생체 슈트들이 쩡쩡 소리를 내며 동파되고, 어깨가 끊어지고, 무릎이 찢어지고, 얼음 동상이 되어 가면서도 병사들은 퀴니세인을 보호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퀴니세인.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끔찍하게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저앉아 버둥거리던 권승리가 외쳤다.
“죽여!”
칼을 빼 들고 아갈타의 병사들을 밀어붙이며 데미안 루드비히도 외쳤다.
“죽여야 돼!”
리디아는 그런 데미안을 만류하면 한 발 더 앞으로 파고들었다.
“도련님, 제가 하겠습니다. 물러서십시오.”
그 와중에 성녀라 불리는 나타시아는 최치국을 끌어안고 치유의 초능력을 쏟아부으며 외치고 있었다.
“검웅님! 검웅님! 누구 회복 능력이나 아이템 있는 분은 누구라도! 제발!”
저쪽에선 퀴니세인이 크게 부상을 당하고 이쪽에선 권승리와 최치국이 나가떨어지고, 아갈타의 병사들이 퀴니세인을 지키기 위해 집결하고 리디아는 날뛰고… 사방이 아비규환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혼전 속에서 시체를 쌓고 쌓으며, 지구에서의 싸움은 피와 살점을 너저분하게 뿌리며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정작 킹은 서로 잡지 못한 채 퀸, 비숍, 나이트를 다 잃어 가는 진흙탕 싸움.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닌… 승자가 없는 싸움.
그 참상을 지켜보며 데미안은 생각했다.
‘이런 정예가 모이고도 이 꼴이라니… 이 악마들을 상대로 깔끔한 승리라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심장이 자꾸 아팠다.
쓰러진 최치국이 신경 쓰였고, 죽이고 싶어도 죽지 않는 퀴니세인 때문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다른 곳에서 싸우고 있을 소시민이 걱정되었다.
뚝…….
데미안 본인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데미안은 자기가 우는 줄도 모른 채로 방아쇠를 당기고 칼을 휘둘렀다. 이 무력함과 이 답답함을 어떻게든 벗겨 내고 싶어서.
무력하다는 건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다.
* * *
짜릿한 기분이었다.
별빛 강기는 단단하고 흉포하고… 그래서 그걸 부수는 감각은 전율 그 자체!
“아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손맛이 손끝에서 퍼져 나간다. 어스퀘이커의 중심으로 별빛 강기를 때렸을 때의 기분이 그랬다. [만상공감]은 대상의 모든 것을 느낀다. 어스퀘이커는 진동을 만든다. 그럼 나는 대상을 완벽하게 해체할 수 있는 최고의 파장을 [만상공감]으로 찾아내 별빛 강기의 중앙에 때려 넣었다.
쩌어어엉-
영력이 팡팡팡! 하고 웨딩 팡파르처럼 터져 나간다. 파장은 겹겹이 동심원을 그린다. 스윙 한 번에 골프공을 하늘 끝까지 날려서 홀인원 하는 기분이 이럴까? 살짝 얼어붙은 초콜릿을 손끝으로 뭉개는 기분이 이리 달콤할까? 싫어하는 놈이 힘겹게 조각한 얼음 조각상을 와장창 부숴 버릴 때 이토록 짜릿할까?
중독적인 손맛이었다.
끼아드드득!
콰직!
물론 중심을 못 맞췄을 때의 리스크는 무시무시했다. 어스퀘이커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어지고, 그 여력을 이겨 내지 못한 내 팔은 철사처럼 배배 꼬여 버린다. 다행히 순간적으로 오른팔을 놓아서 왼팔만 아작이 났다. 강기의 힘이 서린 상처는 잘 낫지도 않는다. 최고급 치유를 받아도 족히 한 달은 정양해야 할 부상.
[드디어 걸렸다!]
자신을 히카니온 대위라고 소개한 악마는 답지않게 희색을 드러냈다. 나와의 싸움이 어지간히 힘들었는지 너무 좋아한다.
하지만 놈은 몰랐다. 별빛 강기를 깨뜨리는 중독적인 손맛은 그 고통마저도 잊게 만든다는 것을!
[무, 무슨? 계속 달려든다고?]
놈은 왼팔이 박살 난 채로 달려드는 나를 보며 기겁하여 몸을 빼냈다. 별빛 강기 하나가 나와 놈 사이로 떠오른다. 내 접근을 막으려는 수작.
뿌드득!
나는 성한 오른손만으로 어스퀘이커를 틀어쥐고 그대로 별빛 강기의 중심을 때렸다. 한 팔이라 힘에서 밀린다면… 이번엔 타이밍에 더욱 신경을 쓴다.
쩌어어엉-!
홈런이다!
‘아아, 그래. 이거야. 이 맛이야!’
더, 더, 조금만 더!
나는 자극을 갈망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히이이익!]
처음엔 강인해 보이던 히카니온 대위는 점점 겁쟁이처럼 나약하게 뒤로 물러선다. 별빛 강기를 만들 시간이 없었는지 흐릿한 구름 강기를 피워 올려 내 접근을 막으려고 허우적거린다.
에이. 그러지 말라고. 별빛 강기를 만들어. 안 그러면 넌 죽는다?
나는 미약한 불쾌감을 느끼며 어스퀘이커에 영력을 쏟아 넣으며 하찮은 구름 강기를 흩어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어?”
오른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힐긋 내려다보니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보인다.
‘아… 한계였나?’
별빛 강기와의 연이은 충돌로 체력도 영력도 완전히 고갈되어 버렸다. 왼팔은 아작이 났고, 오른팔은 정신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진정한 한계를 맞았다.
아, 좀 더 별빛 강기의 손맛을 보고 싶었는데. 바짝 갈증이 인다.
그리고 내 상태를 눈치챈 히카니온은 태세를 전환했다.
[하, 하하! 그럼 그렇지! 멀쩡할 리가 없지! 죽어라!]
그는 죽다 살아난 기색으로 조급하게 내 목숨을 거두려고 했다. 그게 놈의 패착이었다.
푸우욱-
[커컥…….]
별빛 강기의 폭발에 계속 노출되어 있던 탓에 놈의 차원강습 시스템에는 작은 오류가 생겨났고, 그 틈새를 노리고 은밀하게 날아든 파도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이이잉-
유체화된 파도는 약해진 놈의 방어 체계를 넘어 단숨에 본체를 찔렀고, 곧이어 강렬한 쇼크웨이브를 뿜어 놈의 목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주르르-
붉은 피가 외장갑을 넘어 쏟아졌다.
쿵…….
악마라 불리는 거대한 생체 슈트가 땅 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오른팔이 회복되기를 기다렸고, 다가가 놈의 목에서 파도를 뽑아 회수했다.
‘너무 아쉽다…….’
아, 별빛 강기를 깨고 싶었다.
놈이 별빛 강기를 조금만 더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었어도 죽는 건 내가 됐겠지만…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별빛 강기 손맛을 더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시끄럽던 포격이 어느새 그치고 사방이 조용했다.
하아, 하아
학, 학, 하아… 하…….
숨소리. 숨소리. 온통 지친 숨소리만 가득했다.
시야를 돌리는 곳마다 시체가 가득했고, 그 시체들 사이에 서 있는 이는 죄다 지구인들. 자랑스러운 창신대와 내 동료들이었다. 다들 학학대며 전투의 여운을 씻어 내고 있었다.
“피해는?”
내 물음에 서민서가 가쁜 호흡을 고르며 답했다.
“하악… 학… 후우. 열두 명 사망, 서른 명 중상임다. 후…….”
사망자는 10퍼센트가 넘고, 부상자까지 쳐서 사상자를 따지면 거의 절반에 육박했다.
피해가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도주한 적은?”
내 물음에 온몸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고 찰랑거리며 호흡을 고르던 무르물랑이 답했다.
“없어. 전멸했다, 100명 전원.”
차원강습병 100명 전멸. 이쪽 사상자는 50퍼센트 미만.
그것도 지구 밖에서.
에펠탑 대첩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승.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에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기분 이상하네.’
영웅이 되고자 내 모든 걸 바쳐서 싸웠던 지난 생에는 마족 하나도 상대할 수 없는 엑스트라로 살다 죽었는데, 오히려 내 욕망을 따라온 이번 생에선 인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승리를 거두다니…….
무르물랑이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 밖에서 벌어진 일이니 차원 해적의 소행이거나 다른 차원의 농간이라 생각하겠지. 아갈타 놈들 당분한 삽질하느라 힘을 뺄 거야. 이건 제대로다. 시간 제대로 벌겠어. 벼랑 끝에서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오려고 했던 건데… 졸지에 한 다섯 걸음쯤 진전을 봤네.”
그녀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그랬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그리고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문득 그 사실이 신경 쓰였다.
“결국 퀴니세인은 나타나지 않았네.”
“그러게… 지구 친구들이 생각보다 잘해 준 걸까?”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귀환자들은 강하니까. 진짜 인류의 영웅들이니까.’
그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사람은 대마법사도 아니고, 대기사 군다르도 아니었고, 심지어 엄청나게 강하다는 권승리도 아니었다.
최치국.
내가 영웅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그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그래. 아마 엄청 잘 싸웠던 거겠지. 나는 물론이고 무르물랑의 예상까지 깰 정도로. 그래서 퀴니세인이 운송대를 따라올 수 없었던 것일 테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구인을 얕보지 마라, 외계인.”
“그거 종족 차별이다.”
무르물랑과 시시덕대며 전투의 피로를 씻어 냈다. 그녀가 던져 준 물방울 몇 개가 몸에 진득하게 달라붙은 피와 체액을 닦아 주어 한결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무튼, 대승이야.”
무르물랑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그 위로 가볍게 하이 파이브를 했다.
찰랑!
기분 좋게 시원하고 찰랑이는 하이 파이브였다.
모두가 용감했던 전투였고.
장례식은 그다음 날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