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17화 (117/212)

16. 다행이다

다행이다, 살아 있어서.

나는 명품이 좋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완벽하게 조율된 물건이 주는 그 조화로운 감각이야말로 내 영혼을 고양시키는 원동력이었다.

‘지구가 망해 가는데 무슨 놈의 명품이야…….’

물론 이런 생각으로 나를 학대했던 적도 있다. 사실 지난 생에 내내 그렇게 참고 견디고 나를 혐오하며 살았으니… 그 얼마나 어리석었나.

‘아! 행복해…….’

7미터의 창을 휘두르며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창이 손바닥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아, 이게 정말 거인창이란 말인가?

거인창은 사실 쓰기 좋은 무기가 아니었다. 내 [만상공감]으로 어찌어찌 잘 다루고 있었을 뿐이지, 그 본질은 사람이 쓰라고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 충격 밀집 기술이라는 신기술을 연구하기 위한 샘플로써 크게 제작되었던 시험작이 아닌가?

지나치게 두껍고 지나치게 긴, 사용성으로는 빵점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탑골시장에서 ‘게헨나 강화술’을 받은 거인창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

거인창은 길고 두껍다. 따라서 그립감은 형편없고 휘두르기에는 불편하다. 하지만 지옥의 불길과 연기로 제련한다는, 무려 4만 타키온짜리 ‘게헨나 강화술’을 받은 거인창은 물질(실체)과 비물질(영체)의 경계에 놓여 언제든 불길과 연기로 흩어질 수 있게 되면서 이 단점들이 단숨에 사라졌다.

먼저 그립감.

출렁

꽈아아악-!

이것은 그립감의 혁명이었다.

남들이 창대를 손으로 쥘 때 내 창은 오히려 창쪽에서 내 손을 꽉 잡아 준다.

모양새로 봐도 창대를 쥔 게 아니라 창대 속에 손을 담갔다고 해야 하는 모양새였다. 붉은 창대가 영체화되면 내 손이 연기를 파고들 듯 그 안으로 잠겨 든다. 나는 창대 중심의 심지를 쥔다. 그러면 연기처럼 일렁이던 창대가 다시 단단하게 수축하며 내 손등에 착 달라붙었다.

이 단단한 밀착감, 황홀한 일체감!

그 상태로 창을 휘두른다. 창을 휘둘러 방향을 바꿀 때면 창이 다시 연기처럼 흩어져서 회전의 부담이 줄어든다. 찌를 때면 다시 단단하게 굳으며 아갈타의 병사를 꿰어 버린다. 부분부분 실체화와 영체화를 섞어 가며 휘두르니 거인창은 더 이상 1회용 돌격용 무기가 아닌 상시 사용 가능한 주 무기가 되었다.

위력? 그건 말할 것도 없었다.

지옥의 불길과 연기를 마신 거인창의 창날에서는 지옥의 맛이 났다.

차원강습 시스템의 방어 체계를 꿰뚫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거기에 또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거인창은 이미 진작에 길들이기를 끝낸 물건이라는 점!

휙!

창을 허공으로 던졌다.

우우웅-!

내 뜻을 알아들은 거인창이 우렁차게 울며 스스로 허공을 날아다녔다. 내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며 전투하는 거인창. 지금 같은 집단전에서 이 능력은 특히나 빛을 발했다.

잠시 전투를 거인창에게 맡겨 두고 나는 [만상공감]을 최고조로 발휘해 전장을 빠르게 파악했다. 목표를 전멸로 변경한 이상 피해를 줄이며 최대한 빠른 시간에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우선 아갈타의 병사들이 느껴졌다. 어려워지는 전황에 크게 당황한 듯했지만 아직 여유를 완전히 잃지는 않고 있었다. 자신들의 주 무장인 ‘차원강습 시스템’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차원강습 시스템은 정규군을 상징하는 무장.’

반면에 내가 양성한 창신대에게는 아직 차원강습 시스템이 없다. 창신대의 주 무장인 캐스터의 화력은 사실 차원 문명 기준에서는 고무탄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한 명의 마족과 싸울 때에도 최소 50명이 한 팀을 이루어야만 했다. 또한 강자라고 말할 수 있는 박민희, 강전구, 서민서, 김민수 또는 까막이의 도움도 필수였다.

비유한다면 차원강습병은 선진국의 병사였다. M16과 수류탄을 개인 무장으로 하고 방탄이 되는 엑소 스켈레톤을 착용하여 체력과 화력이 월등하다. 반면에 우리는 오지의 민병대나 다름없었다. 50명이 고무탄을 난사해 적을 견제하는 동안 뛰어난 검술가들이 진검을 들고 접근해 방탄복 사이로 칼을 찔러 죽이는 야만적인 전술이나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어찌 이겼으나 매번 위태위태했다.

하지만 무르물랑과 탑골시장을 다녀온 지금은 조금 달랐다.

우우우웅-

물론 ‘차원강습 시스템’은 완벽한 무장이었다. 착용하는 순간 체력과 영력, 정신력 모든 면에서 본인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니 단점이라곤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이른바 ‘성검 시스템’이라는 게 유행했다고 한다. 그 역시 한때는 완벽하다 불렸던 장비였다. 근접 공격과 원거리 공격은 물론 방어 기능과 각종 버프, 강화 능력까지 구비된 전천후 장비. 다만 슈트 자체의 영력을 자유자재로 끌어 쓸 수 있는 차원강습시스템과 달리 성검에 담긴 영력은 오러 블레이드 또는 오러 실드와 같은 특정한 형태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범용성에서 큰 단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치 각궁이나 화승총처럼 이제는 쓰이지 않는 무기가 되어 시중에 풀려나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약탈의 일삼는 차원 해적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장비가 되었다.

나와 무르물랑은 탑골시장을 뒤지고 뒤져서 창신대에게 꼭 맞는 성검 100자루를 맞춰 웠다.

그 성과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 창신대의 화력은 더 이상 고무탄이 아니다. 각궁과 화승총이 쏘아 내는 날카로운 화살과 묵직한 탄환에 비할 수 있었다. 여전히 구식이지만 당당한 살상 병기의 화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포탄이 분당 24발씩 쏟아지고 있다는 것.

기이이잉-!

스르으응!

창신대의 왼손에서는 지휘봉처럼 생긴 캐스터가 요란하게 떨리고 창신대의 오른손에서는 길쭉한 성검이 황금빛 오라를 뿜어냈다. 이차원인들이 본다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차원 해적이네.’라고 말하고 나머지 한 명은 ‘차원 사극 촬영 중이야?’라고 말할 고풍스러운 비주얼이었다.

훈련 기간이 짧았지만 창신대는 배운 대로 훌륭하게 움직였다.

스카가가강-!

우선 검을 휘둘러서 황금색 오러를 날린다. 지구의 1류 능력자들도 경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참격이었지만, 그걸로 차원강습 시스템의 방어 체계를 넘어서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미 포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놈들에게는 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가왔고, 놈들이 허둥지둥 회피와 방어를 수행하는 틈을 서민서가 [점멸]로 파고들었다.

요즘 들어 부쩍 이차원인들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서민서의 손속은 무자비했다.

“죽어 버려.”

콰지지직!

그녀가 사용하는 무기는 ‘미러브레이크’. 이번에 무르물랑의 투자로 새로 맞춰 준 신무기다.

거울에 투영된 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거울을 깨면 어떨까?

미러브레이크는 그런 무기였다. 영력을 공간에 투영하여 공간 자체에 균열을 일으키면 그 위에 놓인 존재는 절로 찢기는 법.

공간을 다루는 능력을 가진 그녀와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무기. 탑골시장에서 저걸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던지.

[끄으윽!]

[큭!]

아갈타의 병사들은 역시 단단해서 찢어지진 않았지만 상당한 타격을 받고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그 틈을 노리고 이어지는 건 박민희의 돌격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애검 릴포스 그레이를 뽑아 들고 새로운 각성 능력 [백뢰白雷]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다시 한번 광범위 공격을 가했다. 그 뒤를 빠짝 따라붙은 강전구는 태산 같은 일격으로 한 놈 두 놈 머리통을 땅에 심어 버렸고, 킬러 출신인 까막이가 그 뒤를 따르며 한 명 한 명 착실하고 은밀하게 칼을 꽂아넣었다. 그사이 김민수는 팀원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게 서포트했다.

이만큼 양념이 되면 성검을 앞세운 창신대가 돌격을 한다. 성검은 근접 공격과 원거리 공격이 모두 가능한 전천후 병기였지만 근접 공격의 위력이 더 강한 것이 사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아갈타 놈들 위로 황금빛 오러가 가득 담긴 검이 연달아 스쳐 지나갔다. 세 번 맞으면 외장갑이 쩍 벌어지고 머리의 뿔이 뚝 떨어져 나갔다. 다섯 번의 검광이 지나가면 목이 달아나 버리는 놈도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내가 날려 보낸 거인창이 적진을 유린하고 위험에 처한 창신대원들을 구해 냈다.

무르물랑 역시 동분서주하며 아군이 감당하기 힘든 간부들을 요격했다.

이 모든 상황을 살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이네.’

모두가 제 몫을 해냈다. 그 덕에 벌써 승기가 넘어왔다. 이제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아군은 큰 피해 없이 적을 전멸하리라.

‘이제 저놈에게 집중해도 되겠어.’

나는 적의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놈은 살기등등한 얼굴로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놈이 온몸에 두른 강기였다.

성운 사이로 빛나는 초신성처럼 자욱한 구름 강기 사이로 빛나는 별빛 강기.

영력 활용의 극이라고 불리는 강기에도 등급이 있다. 입문자의 단계가 구름 강기, 능숙한 자의 단계가 별빛 강기, 달인의 경지가 달빛 강기 그리고 적수가 없다는 태양 강기.

그중 별빛 강기였다. 그런 게 있다고 듣기만 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나도 이번이 처음.

‘내가 저걸 상대할 수 있을까?’

[만상공감]으로도 쉬이 측량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영적 현상.

저런 것과 맞부딪쳐야 한다니…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아루카의 날개를 믿고 피해 다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피해 다닌다면 놈은 내 동료들과 창신대를 표적으로 삼을 것이다.

‘여기서 승부를 본다.’

나는 숨을 골랐다.

이제 내 몸처럼 느껴지는 회칼, 파도가 내 마음을 느끼고 우웅- 검명을 토해 내며 스르르 날아올랐다. 나는 아공간에서 커다란 망치 하나를 꺼내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존경하는 투자자 무르물랑 님은 내게도 신무기를 해 주었다. 대상의 구조를 붕괴시키는 강력한 파동을 만들어 내는 명품 무기 ‘어스퀘이크’.

매번 지나치게 작거나 지나치게 큰 무기만 들고 싸우다가 이렇게 적절한 크기의 워해머를 드니 마음이 든든하다. 영력을 끌어 올려 모든 장비의 아우라를 고조시키며 나는 외쳤다.

“와라!”

이번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 * *

퀴니세인은 말했다.

[멍청해.]

물론 권승리의 권능은 대단했다. 법칙에 관여하는 힘은 위대한 문명들 사이에서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지는 최상위 기술. 그런 힘을 타고나다니 반칙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퀴니세인이 사방에 뿌려 둔 것은 극에 이른 별빛 강기였다. 강기剛氣란 극도로 응축된 영력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법칙 그 자체.

법칙과 법칙이 부딪치면 더 강한 법칙이 승리한다. 비록 최치국의 한 수로 호흡을 빼앗긴 퀴니세인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별빛 강기는 꺼지지 않고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그 앞으로 달려드는 권승리의 모습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에 지나지 않았다.

[너는 별빛 강기를 넘어서지 못해! 그게 네 한계다!]

자욱한 별빛 강기가 맹렬하게 진동하고 회전하며 권승리를 믹서에 넣고 갈아 버릴 것 같은 기세로 좁혀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권승리는 오히려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법칙왜곡이 별빛 강기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두 번이나 살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권능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법칙왜곡]에는 한계가 없어. 한계가 있다면 그건 결국 상상력의 한계일 뿐이지.’

한계는 없다, 어디까지가 법칙인가, 그 법칙을 어떻게 일그러뜨릴 수 있는가, 단지 그 상상력에만 한계가 있을 뿐이라고 그녀는 항상 생각해 왔다.

‘물론 강기는 대단하지. 강하고 단단하여 흩어지지 않는다는 법칙의 결정체와도 같으니까. 하지만 직접 깨뜨릴 수 없다면……!’

훅-

권승리는 자신 앞에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법칙을 왜곡했다. 권승리를 따라 좁혀 오던 별빛 강기가 왜곡된 공간을 따라 권승리를 피해 좌우로 미끄러진다.

[얕은 수작을……!]

하지만 차원강습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퀴니세인은 금세 왜곡된 공간의 곡률을 계산해서 대응했다. 미끄러지던 별빛 강기가 금세 제 방향을 찾고 권승리를 압박했다. 하지만 퀴니세인은 권승리가 준비한 또 다른 한 수를 뒤늦게 눈치채고 말았다.

‘뭐, 뭣?’

권승리가 숨긴 회심의 한 수는 퀴니세인과 자신 사이의 ‘거리’라는 법칙 역시 왜곡해 그 거리를 없다시피 만든 것. 권승리가 애써 파고들 필요도 없이 퀴니세인은 어느덧 권승리의 앞에 있었다. 미끄러졌던 별빛 강기가 미처 권승리에게 닿기도 전이었다.

권승리가 말했다.

“너, 아직 방어 시스템이 정상이 아니지?”

꿍!

그녀의 자그마한 손이 퀴니세인의 외장갑을 때리는 순간, 퀴니세인의 외장갑을 감싸고 있던 비늘이 충격으로 진동하며 일어났다.

[꺼으……!]

최치국 때문에 크게 흔들린 방어 시스템은 권승리의 힘에 너무나 간단하게 유린당했다. 퀴니세인은 강렬한 통증과 함께 아찔한 상실감을 느꼈다. 권승리의 일격이 법칙을 뒤틀어 차원강습 시스템과 퀴니세인의 연결 그 자체를 일시 정지 시켜 버린 것이다.

퀴니세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오는 순간 권승리의 주변을 찬란하게 물들이던 별빛 강기들이 힘을 잃고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하악……!”

동시에 권승리 역시 가쁜 호흡을 뱉으며 주저앉았다. 그녀는 일어서려고 바둥거렸지만 떨리는 팔다리가 그녀를 자꾸만 주저앉혔다.

성치 않은 몸으로 [법칙왜곡]을 무리하게 사용한 대가였다.

하지만 무사하지 않은 건 퀴니세인도 마찬가지였다.

[큭! 크으으!]

차원강습 시스템의 다운과 동시에 가해진 충격이 퀴니세인의 내장을 완전히 진탕시켜 놓았다. 1~2분쯤 지나 차원강습 시스템이 스스로 복원되더라도 퀴니세인이 더 이상 전투를 속행할 수 없을 만큼 큰 부상.

퀴니세인은 전의를 잃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의 몸은 어느 순간 덜컥 굳어 버렸다.

꾸드드득!

부서진 방어 시스템을 넘어 아찔하게 파고드는 한기. 얼어붙은 관절이 움직이지 않았다.

[너, 너……!]

“다행이야, 너 같은 새끼를 두고 도망치는 게 최선이 아니라서.”

머리가 푸르게 세어 버린 리디아가 두 손 가득 냉기를 뿜어냈다.

[아, 아니 잠깐……!]

퀴니세인이 다급히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를 꽉 붙들고 있는 냉기로부터 벗어날 힘이 그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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