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16화 (116/212)

15. 새로운 목표

- 여기는 138정찰 대대. 현재 고도로 무장된 차원 해적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피아 식별 포탄을 쏟아붓는 정규군 수준의 화력을 가진 해적입니다! 지금 즉시 지원 바랍니다!

[하… 씨…·.]

귓가를 때리는 통신에 퀴니세인은 안 그래도 더럽던 기분이 더욱더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성가시네.]

파지지직!

치이이이-!

퀴니세인의 몸에서 번갯불이 튀더니 그를 결박하고 있던 빙결이 빠르게 녹아내렸다.

까드드득! 쩡! 쩌정!

굳은 얼음을 털어 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니 흡사 만녈설이 깨져 나가는 듯한 웅장한 소리가 들렸다. 지독한 한기였다.

퀴니세인은 리디아를 노려보았다. 리디아가 뿜어내는 빙결의 힘에 번번히 가로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외장갑을 형성하고 있는 생체 슈트 드래고니안의 비늘이 보기 흉하게 깨지고 뜯겨 있었다.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타격을 입었다는 증거.

[정말 성가셔.]

리디아는 찬란한 은발을 푸르게 물들이고 서 있었다. 전신에서는 캠프파이어의 불길처럼 거대한 마누스가 피어올라 주변의 대기를 온통 일그러뜨렸다.

하준광과 비견되는, 아니 오히려 그를 뛰어넘는 기세.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가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역시나 창백한 얼굴을 한 권승리가 지키고 서 있었다.

데미안만이 홀로 멀쩡한 얼굴이었지만 그래서 더 분통이 터지는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던 퀴니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리디아와 권승리의 얼굴을 보면 그녀들도 온전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지만, 그걸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내가 쏟아부은 힘이 얼마고 찌른 약점이 몇 개인데……!’

고작 얼굴이 좀 창백해지고 입가에 피 한 줄기 흘리고 전부라니?

[무식하게 강력한 권능을 가진 놈이 둘이나 모이니까 상성이고 약점이고 뭐고 그냥 힘으로 극복을 해 버리네 허, 참…….]

지구의 야만인들은 생각보다 더 야만스러웠다.

그는 생각했다.

‘물러나야 하나?’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는 와중에 운송대가 습격을 받았다고 하니 빨리 돌아가야 옳았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은 운송 작전 그 자체.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아까운 표본이다.’

헬멧 속에서 퀴니세인은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의 시선이 새까만 머리칼을 단발로 자른 여자아이, 권승리로 향했다.

‘법칙을 비트는 권능이라니?’

특이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줄은 몰랐다. 그 때문에 자칫하면 큰 부상을 입을 뻔하기도 했다.

처음엔 당황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찾아온 감정은 희열이었다.

법칙을 비틀다니? 그건 어쩌면 고대신의 흔적보다도 훨씬 더 가치 있을 수 있는 샘플이었다. 그게 퀴니세인이 쉽게 이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유였다.

‘오르피앙페르만 있었어도…….’

그가 가진 세 개의 팔찌는 세 개가 모두 모였을 때 시너지가 최고조에 달한다. 고작 지구 따위에서 팔찌 세 개가 모두 필요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하나를 리트리안에게 내주었던 것인데… 퀴니세인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리트리안 새끼. 이제 그 최치국인지 뭔지를 죽이든 말도 넌 파면이다.’

분노로 일렁이는 속을 다스리며 퀴니세인은 치열한 전투에서 슬쩍 한 발을 빼냈다. 그는 쉽게 분노하는 포악한 성질을 가졌지만, 동시에 자신의 분노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한 판단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욕심을 조금 버리기로 마음을 먹고 말했다.

[너희는 보내 주지.]

퀴니세인이 말하는 ‘너희’는 리디아와 데미안이었다.

“……!”

권승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반면 리디아는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로 퀴니세인을 살폈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조심스럽게 재는 기색이었다.

[정말이다. 가라. 보내 주지.]

리디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지상 목표는 단 한 가지. 데미안의 안전. 퀴니세인의 제안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거부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리디아, 믿지 마.”

타아앙-!

불안함을 느낀 데미안이 퀴니세인을 향해 루드비히의 마탄을 쏘았다.

하지만 퀴니세인은 그 비싼 마탄을 길쭉한 손톱 하나를 움직여 튕겨 내고는 반복해서 말했다.

[보내 줄 때 가지?]

리디아가 눈을 깜빡하고는 한 손을 쭉 뻗어 데미안 루드비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으윽! 리디아!”

데미안이 저항하려고 했으나 리디아의 마누스에 짓눌려 꼼짝도 못 하고 그녀에게 이끌렸다.

리디아는 퀴니세인을 바라보며 천천히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섰다. 퀴니세인은 조금도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않고 리디아의 이탈을 방치했다. 다만 권승리가 움직이려고 할 때는 별빛 강기를 빼곡히 뿌리며 민감하게 경계했다.

권승리가 입술을 깨물며 리디아에게 물었다.

“…여기서 도망친다고 데미안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차피 데미안은 죽을 거라는 의미심장한 한마디였지만, 리디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기고 저기고 간에 아무튼 데미안 루드비히를 살게 하는 것. 그게 그녀 인생의 목표였다. 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그녀가 판단할 때 아무튼 이곳은 벗어나야 하는 장소였다.

[그쪽 보고 있을 거야?]

권승리가 한눈을 팔자 퀴니세인은 노란 광망이 뚝뚝 흘러나오는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휘며 웃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별빛 강기가 반짝이며 권승리의 주변을 둘러쌌다.

권승리는 입술을 악물었다.

리디아가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설 때마다 권승리가 선 자리는 점점 더 위태해졌고, 리디아에게 붙잡힌 데미안의 몸부림은 점점 더 애처로워졌다.

“같이 싸우고 있었잖아! 이렇게 가면 어떡해! 리디아! 아직 진 것도 아니잖아! 제발! 제발 좀! 리디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이 루드비히라곤 하지만… 데미안은 아직 어렸고 여렸다. 그리고 어쩌면 가문을 떠나 소시민과 함께 지내는 사이에 뭔가가 더 변한 걸 수도 있다. 권승리를 두고 가는 이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는 권승리가 아닌가? 소시민도 중요하게 평가했던 사람이고… 그리고 또 나름의 채무감을 느끼고 있는 최치국의 주군이 아닌가? 도무지, 정말이지, 그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이런 식이었다. 리디아는 늘 자신이 데미안과 함께 있고 그녀를 걱정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리디아는 한 번도 데미안이 진정 바라는 일을 도와준 적이 없었다.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 호위 팀 직원들을 지키고 싶었을 때도, 하준광 같은 노괴물들 앞에서 영혼이 떨릴 정도의 압박감을 느낄 때에도 리디아는 나서지 않았다. 그녀의 바람대로 움직여 준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냥 뒤에 숨어서 그녀가 죽지 않게만 할 뿐이다. 죽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그녀가 절망을 하든, 비통에 빠지든, 꿈이 꺾이든 아무 상관없다. 살아 있게 하기만 하면 된다.

“리디아아!”

리디아는 답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갑자기 그게 서러웠다. 여태 잘 참아 왔는데,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오늘은 참을 수가 없었다.

“리디아! 난 맞서 싸울 거야! 싸울 거라고! 더 이상 숨고 속이지 않아! 그 새끼! 빌어먹을 외계인 놈들 따위 안 무서워! 차라리 죽을지언정!”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마구 쏟아 냈다. 어쩌면 그건 잠이 들기 전 늘 생각만 해 오던 말. 하지만 아버지와 가문을 생각하며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었던 그런 말이었다.

리디아가 멈칫 멈춰 섰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데미안의 말은 눈앞의 퀴니세인을 겨냥한 게 아니었다. 루드비히 가문 깊숙이 자리잡은 비밀에 관한 이야기.

리디아가 입술을 꾹 물고 말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아직… 아직은 아닙니다.”

그리고 마누스를 움직여 데미안의 입까지 틀어막았다. 고도로 어려운 최상위의 마누스 기술이었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숨 쉬듯 쉽게 해냈다.

“리디……! 읍……! 끄……!”

데미안은 절규를 하다 말고 거인의 손에 붙잡히기라도 한 듯 잔뜩 굳은 채로 입만 뻐끔거렸다.

전장에서 힘없는 자의 절규는 그저 공허히 흔들리는 그림자와 다를 게 없었다. 상황은 제멋대로 흘러가고, 그 안에서 데미안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딱 한 명.

힘없는 자의 절규에 반응하는.

그런 영웅이 한 명 있기는 했다.

“괜찮아.”

웬 소년이 데미안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최치국이었다. 대체 어떤 사투를 벌이다가 온 건지 눈 한쪽이 터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옆구리에서는 진득한 피를 꿀럭꿀럭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왼손엔 리트리안이라는 악마의 오른팔을 잘라 쥐고, 오른손으로 검을 쥔 채 그는 달렸다. 소시민과 데미안이 선물한 새 신을 신은 그의 질주는 놀랍도록 쾌속했다.

“어이!”

최치국이 퀴니세인을 향해 외쳤다.

“옜다! 여기 네 팔찌다!”

그가 들고 있던 리트리안의 팔을 흔들었다.

그 순간, 권승리에게 못 박혀 있던 퀴니세인의 시선이 최치국이 치켜든 새빨간 팔에 고정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손목에 끼여 있는 팔찌에 고정되었다.

‘오르피앙페르!’

그걸 확인하는 순간 퀴니세인의 전신이 탐욕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그의 시선이 슬슬 발 빼고 있던 리디아에게 닿았다. 데미안의 입을 막고 조심조심 물러서던 리디아가 흠칫 놀라 그를 경계한다.

흥분이 퀴니세인의 목구멍을 간질였다.

‘저게 있으면 굳이 저것들을 보내 줄 필요도 없지!’

대체 저 지구인이 무슨 생각으로 오르피앙페르를 자신에게 들고 오는지는 몰라도,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

퀴니세인은 권승리를 방치한 채 최치국을 향해 달려들었다.

찰나의 순간 둘이 닿았다 떨어졌다.

지이이잉-

큰 청동 종을 친 것처럼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강렬한 파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끅… 장난질을… 쳐 놨어?]

최치국에게서 리트리안의 팔을 뜯어낸 퀴니세인이 왈칵 피를 뿜었다.

오르피앙페르의 힘은 [팽창]. 영력만 충분하다면 달조차도 폭발시킬 수 있다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초월 병기.

반면에 최치국의 초능력은 [굴절].

최치국은 리트리안과 사투를 벌이며 그가 마지막 순간에 풀어낸 [팽창]의 힘을, 굴절로 회전시켜 오르피앙페르 위에 고스란히 담아서 여기까지 들고 왔던 것이다.

그 결과, 퀴니세인이 최치국에게서 리트리안의 팔을 강탈하는 순간 여태 쌓이고 쌓였던 막대한 힘이 단번에 터져 나왔다.

그 충격은 퀴니세인의 방어 시스템을 뚫고 장기마저 크게 흔들어 버렸다.

퀴니세인은 중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몇 발자국이나 비틀거렸다.

털썩.

한편 최치국은 무참하게 무릎을 꿇어앉았다.

머리칼이 허공에 흩날리고, 몸이 허깨비처럼 휘청거린다. 정상이 아닌 몸으로 그 강대한 힘을 컨트롤하며 달려온 것도 모자라 힘의 폭발에도 같이 휘말렸으니 살아 있는 게 신기한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장이라도 꺼질 듯한 얼굴로도 희미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아가씨… 지금이에요…….”

해변에 굴러가는 모래알처럼 작은 목소리였지만 권승리는 그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었다.

그 순간, 권승리가 퀴니세인에게 달려들었다.

“…다행이에요. 새로운 최선이 생겼어요.”

리디아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데미안을 내려놓고 퀴니세인에게 달려들었다. 퀴니세인이 오르피앙페르를 받아드는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살아 나기지 못할 거라고. 그렇다면 충격을 받고 비틀거리는 이 순간을 노려 퀴니세인을 죽이는 게 데미안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멍청한 놈들……!]

그 모습을 본 퀴니세인이 이를 갈았다.

[너희가 내 별빛 강기를 넘어설 것 같으냐!]

퀴니세인의 주변으로 자욱하게 별빛들이 떠올랐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퀴이이잉-

이제 다시 세 개가 된 팔찌들이 퀴니세인의 손목 위에서 거대한 공명을 일으키며 함께 회전하기 시작했다.

* * *

사방에서 쏟아지는 포격. 거기에 픽픽 나가떨어지는 아갈타의 차원강습병들.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창신대와 무르물랑.

물러서서 전열을 가다듬을 줄 알았던 아갈타의 운송대는 어째서인지 물러서지 않고 우리를 붙들고 늘어지고 있었다. 그 탓에 놈들을 상대하기가 더욱 수월해졌다.

너무나 순조로웠다. 그래서 이상했다.

‘퀴니세인이 안 보이는데?’

이번 습격 계획은 어디까지나 퀴니세인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짠 것이다.

그랬기에 무리해서 포격을 준비하고 빠르게 물건을 탈취한 뒤 휘퇴 할 순서와 동선까지 다 준비해 두었던 게 아닌가?

하지만 싸움이 너무 편하다.

이상해서 둘러보니 아무리 찾아봐도 퀴니세인이 보이질 않는다.

‘분명 교신기에서는 퀴니세인이 운송대와 동행한다고 했었는데?’

그사이에 계획이 변경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잠시 자리를 비운 거고 금방 돌아오는 건가? 돌아온다면 언제? 돌아오기 전에 유물과 유해의 흔적들을 회수해서 후퇴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그때, 문득 [만상공감]에 걸려든 감각이 있었다.

적의 지휘관이 통신에 대고 떠든 말이었다.

- 연대장님? 연대장님! 언제 오십니까 연대장님? 연대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연대장님!

그 숨길 없는 당황이 묻어나는 감각.

그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퀴니세인은 여기에 없다.’

심지어.

‘오기로 한 시간도 지키지 못했으며 연락도 되지 않고 있다.’

왜? 어째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기회가 아닐까?

어쩌면… 퀴니세인은 이번 전투 내내 여기 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무르물랑과 시선을 마주쳤다.

이번 습격 계획은 어디까지나 퀴니세인이 이곳에 있다는 전제하에 꾸려졌다.

하지만 퀴니세인이 없다면?

무르물랑의 살결이 출렁였다. 가슴 중앙 부근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류가 전신을 휘감고 도는 게 느껴진다. 그녀의 생각도 나와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이는 무르물랑.

그 즉시 나는 통신회선을 열고 외쳤다.

- 목표 변경! 새로운 목표는… 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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