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알 수 없는 이유
지난 생을 통틀어 보아도 아갈타의 병사, 그러니까 마족과 인류가 이렇게 100명이 넘는 규모로 회전을 벌인 경우는 많지 않았다.
칭찬하고 싶진 않지만… 놈들은 정말 비겁하게 싸웠다.
인류가 전면전에 돌입했을 때도 놈들은 쉬이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던전을 터뜨리고 다른 괴물들을 조종해서 인류를 압박하여 우리의 시선을 돌려놓고, 정작 본인들은 중요한 파괴 공작에나 간간이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런 만큼 대규모의 마족과 전투하고 승리한 이야기는 교과서에 실리는 귀중한 사례들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마족과의 대규모 전투는 참패로 끝이 났지만.
‘에펠탑 대첩이 이 정도 규모였던가?”
프랑스의 대통령과 헌터 협회장이 미끼가 되어 아갈타의 차원강습병 120명을 유인, 소탕한 전투. 프랑스의 수도 방위군과 헌터 협회 소속 1류 능력자 200여 명이 매복하고 있다가 덮쳐서 마족 50을 참살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다만 그 전투에서 대통령은 사망했고, 1류 능력자 60명과 수도 방위군 대괴수 부대의 정예 800명이 전사했다.
숫자로 보면 오히려 이쪽이 손해인 것 같지만, 그 전까진 인류가 승리했다고 평가하는 전투에서조차 마족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겨우 마족 한 놈을 잡아 죽일 때마다 1류 능력자 5명 또는 대괴수 부대 정예 300명 이상이 죽어 나가는 교환비였으니… 대승 중의 대승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덕분에 기능이 마비되어 수십만 명이 아사할 뻔했던 파리를 구할 수 있었다던가…….
‘미친. 그런데 내가 오늘 에펠탑 대첩 규모로 싸우는 거네.’
물론 오늘 우리의 목표는 마족의 괴멸이 아닌 목표 화물의 탈취였지만. 새삼 감회가 새롭고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무르물랑을 돌아봤다.
그녀는 찰랑거리며 적당히 뜨거워진 상태로 저 멀리 대기 중인 아갈타의 병사들을 낱낱이 살펴보다가 말했다.
“피해도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정에도 없는 휴식이라…….”
그녀의 말처럼 아갈타의 운송대는 여러모로 우리의 예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피해도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원래 정해진 운송 계획에 따르면 휴식을 취할 시점이 아닌데도 현재 행군을 멈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무르물랑이 물었다.
“함정일까?”
내가 답했다.
“함정이어도 어쩔 수 없지. 지금 쳐야 돼.”
무르물랑이 잠깐 몸을 출렁였지만 이내 잠잠하게 가라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가까운 포대까지 이동해서 휴식하기로 되어 있던 운송대가 아직 거리가 남은 상태에서 행군을 멈추고 대기하고 있다.
함정일까?
아닐까?
모른다.
아갈타의 감청 장비가 걱정이 되는 터라 데미안에게 지구의 상황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부족한 정보로라도 일단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내 선택은 go.
‘가야 돼. 뭐든 어설픈 게 최악인 거야.’
최선을 다해 정보를 수집했지만 이게 함정이라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이상 지금은 스스로를 믿고 기세를 살려 달려 나가야 했다. 함정조차도 부숴 버리겠다는 각오로.
무르물랑이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자.”
“그래.”
이미 [자유]는 펼쳐져 있었다. 다른 두 개의 평행 차원에서 나와 무르물랑은 인접한 아갈타의 포대 2개를 점령하고 특제 포탄을 장전한 채 대기 중이었다.
포대 하나가 1분에 쏘아 낼 수 있는 포탄은 각각 열두 발.
다른 평행 차원에서 나는 놈들의 포대를 조작해 자체 제작 한 수제 포탄을 운송대의 진형을 향해 쏘아 냈다. 콰콰! 꽈광! 꽈르릉! 내 귀에만 들리는 평행 차원의 벽력음. 1분 동안 스물네 번이 울렸다.
“…….”
하지만 이곳은 조용했다.
누차 말하지만 [자유]는 분신술이 아니다. 다른 평행 차원의 내가 운송대를 향해 포를 쏜 것은 그쪽 평행 차원의 이야기. 그쪽 평행 차원에선 난리가 났겠지만, 아직 이곳의 운송대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
무르물랑이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시작 안 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이미 시작했어.”
내 말에 무르물랑의 시선이 다시 평온하게 대기 중인 운송대로 향했다. 그녀의 몸에 파문이 점점 늘어났다. 인간으로 치면 인상을 잔뜩 구긴 모양새이리라.
“시작했다고? 뭐를?”
운송대는 여전히 평온했다.
그치만 괜찮대도 그런다.
[자유]의 효용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오묘하다.
1시간의 제한 시간 동안 나는 세 개로 나눠진 평행 차원에서 발생하는 각각의 결과를 ‘취사 선택’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불가능한 엔딩’도 볼 수 있었다. 세 개의 평행 차원이 나뉘어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중첩’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차원과 차원이 간섭할 때 사건의 궤적은 원래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한 곳에 닿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내가 개입하는 순간 평행 차원의 사건이 저 위로 ‘중첩’될 것이다. 그리고 이 주문이 끝날 때까지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게는 너무나 선명하게 와닿는 사실.
하지만 이건 내가 느끼는 ‘감각’일 뿐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한번 직접 봐.”
말을 마치고 까만 후드를 뒤집어썼다. ‘절규를 삼킨 밤’. 루드비히가의 마에스터 유진이 만들어 준 방어구. 훌륭하지만 요즘은 조금 아쉬움을 느낀다. 방어구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완전히 길든 명품이 주는 시너지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나는 새로운 방어구의 구매가 아닌 기존 방어구의 업그레이드를 선택했다. 물론 자금은 우리의 물주 무르물랑 씨가 댔다.
후우웅-
‘절규를 삼킨 밤’은 벨벳 느낌의, 까만 바탕 위로 보랏빛이 슬쩍슬쩍 비치는 후드였다. 거기에 영력을 불어넣는 순간 그 표면엔 은하수가 흐르듯 작은 별빛이 어른거렸다.
‘때깔 끝내주네!’
전투를 앞두고 심장을 조이던 긴장이 기분 좋은 흥분으로 물든다.
그래. 이거지. 이 느낌이지! 이게 바로 최신 유행의 기적의 강화제, ‘은하 강화제’의 성능! 갯펄시장보다도 상위 시장인 탑골시장에서 따끈따끈하게 업그레이드해 온 물건이었다.
거기에 강화한 건 방어구뿐만이 아니었다.
거인창을 꺼내 들었다. 창날과 창 몸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다.
꾸욱 감아 쥐니 거인창이 예전보다 한결 묵직해진 소리로 구우웅-! 하고 울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
굳어 있던 몸이 풀리고 전신에 자신감이 들끓었다.
나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전군…….”
내 등 뒤에 도열한 창신대가 소리없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놓기 직전의 시위처럼 미세하게 떨리는 공기.
“돌격.”
등 뒤로 빛나는 날개를 펼치고 나는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물론 이 날개도 신품이다. ‘아루카의 날개’. 무려 타키온 50,000알짜리. 타키온 70알짜리 네필림의 날개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명품’이었다.
* * *
고대신의 잔해 운송을 책임지게 된 아갈타의 제637차원강습 연대 138정찰 대대장 히카니온은 슬쩍 교신기를 확인했다.
‘금방 오신다고 했는데 늦네… 화풀이를 오래 하시나.’
지구인들의 방해 때문에 연대장 퀴니세인은 지구를 빠져나오는 게이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 대신 금방 따라갈 테니 잠시 기다리라는 지시를 구두로 남겼을 뿐이었다.
히카니온은 퀴니세인의 합류를 10분으로 예상했다. 거슬리는 놈들을 해치우는 데 5분. 차원을 넘어 이곳까지 오는 데 다시 5분.
하지만 벌써 11분이 지나도 퀴니세인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건방지게 언제쯤 오시냐고 먼저 물어볼 수도 없고… 그런데 또 너무 늦어지는데 안 물어보는 것도 문제고…….’
관료 조직 구성원의 숙명과도 같은 고민을 이어 가며 히카니온은 어쨌든 20분까지만 기다려 보고 조심스레 연락을 드려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키이이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빛나는 무언가가 히카니온의 정찰대대를 향해 쏘아진 것은.
히카니온 대위는 아갈타 제국의 군 간부였고, 그중에서도 특수부대의 일종인 정찰 대대를 책임지고 있는 엘리트였다. 전술적 재능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지만 개인의 전투 능력으로 그걸 다 만회할 수 있는 우수한 인재. 그랬기에 타오르는 날개와도 같은 섬광을 포착하고 그 즉시 그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어? 저것 아루카의 날개 아냐? 영력 밀도 조절에 의한 비행 장치… 요즘 주목받는 기술인데? 나도 이번 임무 끝나면 하나 장만해야지 생각했던……?’
주변의 영력 밀도를 조절해 미끄러져 날아가는 장치. 급격한 가속과 방향 조절이 가능하며 영력 밀도 조절을 통한 자체적인 방어 기능까지 있기에 인기가 많았다. 물론 상위 차원에서 유행하는 진짜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최신 기술을 흉내 낸 것만으로도 상당히 먹어 주는 장치였다.
그래서였다. 히카니온 대위의 대응이 비행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건.
[허, 헛! 적습이다! 실드 전개!]
콰드득!
히카니온 대위가 외쳤을 때는 이미 7미터에 달하는 붉은 창이 차원 강습병 셋을 동시에 꿰뚫어 버린 다음이었다.
튼튼하기 그지없는 차원강습 시스템의 방어 시스템이 무슨 소시지처럼 가볍게 뚫렸다.
물론 아갈타의 정예병들은 그 정도로 전의가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소시민의 거인창에 소떡소떡처럼 꿰인 상태로도 눈에서 붉은 광망을 뿜어내며 되레 창대를 움켜쥐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강기와 크게 부푼 팔근육을 보면 창을 부러뜨릴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붉은 창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히카니온 대위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차원 해적인가? 제법 장비가 충실해. 하지만… 이쪽은 군대다!’
감히 해적이 주제 파악 못 하고 정규군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노라 다짐하며 그는 외쳤다.
[제압해!]
하지만 그 순간.
꽈과광!
강렬한 폭발이 전신을 두드렸다.
자동으로 전개된 실드가 충격을 흡수했지만, 자세가 흔들리고 시야가 가려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뭐야? 포격? 어디서?’
약 3초간의 추적 끝에 차원강습 시스템이 포격이 날아온 좌표를 눈 앞에 출력했다.
하지만 정작 출력된 내용은 히카니온의 기대와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 알 수 없는 이유로 위치 추적 불가.
‘뭐지?’
당황스러웠지만 히카니온은 우수한 군인이었기 금방 감정을 수습했다.
그는 침착하게 가장 가까운 두 개의 포대에 통신을 넣었다. 포탄이 날아온 위치를 추적하고 반격을 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기대는 빗나갔다.
- 알 수 없는 이유로 통신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쯤 되자 아무리 우수한 히카니온이라고 해도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애초에 메시지부터가 이상했다.
‘고장이라면 고장이라고 하고 적습 때문이라면 적습 때문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차원강습 시스템은 대단한 시스템이었다. 어지간한 이유는 알아서 파악해야 옳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라니? 이런 메시지는 그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물론 그 진짜 이유는 소시민이 펼친 [자유] 때문이었다. 도합 세 개의 평행 차원이 중첩되어 존재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는 와중이었기에 법칙을 따르는 존재들은 그 과정을 확인하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히카니온은 그 사실을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는 충분히 우수한 군인이었지만 세계의 법칙에 닿은 대주문을 알아볼 정도로 우수하지는 못했다.
콱! 콰드득!
대신 히카니온은 보았다. 쏟아지는 포탄 위로 날뛰는 소시민을.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달려온 창신 1, 2대의 모습을. 그들은 쏟아지는 포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아갈타의 병사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히카니온은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피아를 식별하는 포탄이라고? 보통 해적이 아니다……!’
사실 그 역시 착각이었다. 포탄이 피아를 식별하는 게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현재 쏟아지는 포탄은 이쪽이 아닌 저쪽 평행 차원에서 쏟아졌던 포탄. 그 사건이 여기까지 중첩되어 나타난 것이기에 저쪽 차원에서 포탄을 맞지 않은 소시민 일행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원하는 결과만 선택된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히카니온은 큰 위기를 느끼고 새롭게 통신을 열었다.
연대장 퀴니세인을 향한 통신이었다.
- 여기는 138정찰 대대. 현재 고도로 무장된 차원 해적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피아 식별 포탄을 쏟아붓는 정규군 수준의 화력을 가진 해적입니다! 지금 즉시 지원 바랍니다!
- …하, 뭐? 씁. 후. 알겠다. 금방 간다.
다행히 이번엔 통신이 멀쩡하게 이루어졌다.
히카니온은 통신을 종료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습격이 두려워서 흘리는 식은땀이 아니었다. 습격이야 어차피 퀴니세인이 금방 종결 지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가 식은땀을 흘린 건 퀴니세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짜증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지만… 조금만 붙들어 놓자. 연대장님이 한 번에 쓸어버리고 좋게 잘 잡아 놓고 있어야 기분이 조금쯤은 풀리시겠지.’
후우우욱-!
히카니온은 몸서리를 치며 전신에서 구름 강기를 뿜어냈다. 뿜어지던 구름 강기가 점점 어두워지고 걸쭉해지더니 이내 그 사이로 희미한 별빛이 어렸다. 구름 강기보다 상위에 있는 별빛 강기의 발현이었다.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그 무수한 아갈타의 대위들 사이에서도 상위 1퍼센트 안에 드는 이들만 선보일 수 있는 영력 전투술의 극치였다.
꿍!
쏟아지는 포탄을 별빛 강기로 후려쳐서 가루를 내 버리며 히카니온은 소시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진형 사수하며 버텨! 조금만 버티면 연대장님이 오실 거다!]
그의 통신이 정찰대원 모두에게 퍼져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포탄은 쉼없이 떨어져 내렸다.
여기저기서 정찰병들이 자빠지고 허공으로 튕겨져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