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퀴니세인
꿍!
꾸궁!
기묘한 땅울림이었다.
그 보랏빛은 처음엔 오로라처럼 하늘을 떠돌았지만 이윽고 석양처럼 낮게 깔렸고, 이젠 숫제 땅에 못질을 하는 쿵쿵 소리를 내며 단단히 땅에 자리잡았다. 금방이라도 개화할 꽃봉오리처럼 크게 부풀었다.
아갈타의 병사들… 아니 마족들의 기세가 변했다. 이제 곧 던전이 열린다. 전투도 막바지에 이른 것이다. 일제히 생체 슈트를 크게 부풀리고 흉악한 영력이 맴도는 뿔을 높이 치켜세웠다. 그렇게 철벽 같은 태세를 갖춘 병사들 뒤에는 이 치열한 싸움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 던전 입구만을 바라보는 100여 명의 운송대가 있었다.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는 그 건방진 놈들이 바로 타격을 줘야 할 목표.
뿌드득.
눈에 뻔히 보이지만 손 닿지 않는 그들을 보며 데미안이 분노로 이를 갈아붙이고 있을 때, 연합군 안에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후끈-!
피부로 느껴지는 열기. 하늘을 일그러뜨리는 아지랑이.
‘마누스……!’
수십 명이 일제히 끌어 올린 마누스가 하늘을 뒤덮었다.
소시민이 봤다면 ‘원시적’이라고 비웃었겠지만… 그것도 이 정도로 막대한 규모로 일어나는 걸 보면 그만 숨이 턱 막히게 된다. 손발의 힘으로 원시적으로 쌓아 올렸다고 한들 피라미드를 보고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는 없는 것처럼.
누군가가 외쳤다.
“길을 연다!”
“길을 열어라!”
“달리신다! 보조 맞춰!”
“힘 아끼지 마! 지금 모조리 쏟아붓자고!”
일단의 무리가 앞으로 치고 나오기 시작했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마누스를 두르고 주저없이 앞으로 치고 나가는 능력자들.
‘엄청난 기세……!’
데미안의 시선에 가장 먼저 잡힌 것은 무리의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 권승리였다. 이제 열세 살. 한국 나이로 해 봐야 열네 살로 이제 겨우 중1의 나이가 된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검을 품고 매서운 눈빛으로 달린다. 분명 보이는 건 앳된 소녀인데, 그 위엄이 이해가 안 갈 만큼 무거웠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앞길을 비켜서고 순풍이 되어 등 뒤를 밀어 주며 돌진 속도를 높였다. 최치국이 유해의 메아리에게 받은 바람의 힘을 [굴절]로 더욱 증폭한 것이었다. 권승리의 옆에서 마치 바람의 신처럼 자유자재로 바람을 다루던 최치국이 문득 시선을 돌려 데미안과 눈을 마주쳤다.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함께 가자! 뚫고 나갈 거야!’
데미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권승리가 보여 주는 카리스마와 그녀를 중심으로 한 루키들의 결집이 신경 쓰였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본대에게 타격을 가할 마지막 기회!
“우리도 같이 뚫는다!”
데미안이 나서자 임훈과 호위 병력이 권승리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 앞으로 길이 열렸다.
권승리가 걸으면 그 굳건하던 아갈타의 진형이 거짓말처럼 박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슨……!’
데미안은 충격으로 눈을 치떴다. 하준광 같은 절대자가 오기 전에는 변수를 만들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전장이 단 한 명의 소녀로 인해 바뀌고 있었다.
‘저건 대체 무슨 종류의 힘이야?’
어떤 공격도 권승리에게 닿지 않았다. 모든 것이 권승리 앞에서 굴절된다. 그것만 보면 최치국의 [굴절]과 비슷한 종류의 능력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달랐다. 데미안은 새하얀 구름 강기마저 권승리의 앞에서 흩어지는 것을 보며 그 사실을 깨달았다.
‘구름 강기는 영력 활용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힘! 초능력조차도 가볍게 분쇄하는 그 힘이 저렇게 맥없이 흩어진다고?’
소시민이 해 준 설명의 절반만 사실이라고 해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데미안이 놀라는 사이 권승리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속도 높여! 적의 본대가 코앞이다!”
그 뒤를 따르는 무리의 기세가 한껏 드높아졌다.
하지만 아갈타의 마족들도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쿠쿵!
쾅!
양 떼처럼 흩어지는 아갈타의 마족들 사이에서 늑대 같은 악마들이 솟구쳤다. 일반 병사들보다 1.5배는 큰 몸집은 고급 부품으로 커스터마이징된 장교용 생체 슈트 덕분이었고, 더 굵고 더 긴 뿔은 훨씬 더 강하고 흉악한 영력 탓이었다.
그런 놈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권승리의 기세를 받아 내며 길을 가로막고자 했다.
하지만 권승리의 뒤를 따르던 루키들의 목표는 애초부터 권승리 단 한 명만을 방어선 너머로 보내는 것.
“간부 발견! 제가 맡겠습니다!”
“저 시퍼런 녀석은 제가!”
“그럼 저 뒤의 보라 찐따 같은 놈은 내가 처치하지! 으랴!”
루키들, 그러니까 회귀한 영웅들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췄다.
저마다 능력을 발휘해 길을 가로막은 아갈타군의 간부들을 끌고 경로 밖으로 이탈했다. 처음부터 약속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각자 자기 수준에 맞는 간부들을 붙잡고 일대일 또는 일대이의 상황을 만들어 붙잡으며 앞길을 열었다.
지난 생 내내 수십년 간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싸웠던 만큼 이 모든 과정이 조금의 지체도 없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덕분에 데미안 일행은 크게 놀랐다.
“…주기적으로 모여 훈련을 했던 걸까요? 이 정도 수준의 조직력이라니. 정말 놀랍군요.”
속삭이는 임훈의 목소리가 긴장되어 있었다.
데미안도 그 말에 동감이었다.
얼빠진 심정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꽈과광!
강렬한 진동과 함께 아까 ‘보라 찐따’를 처치하겠다고 나섰던 사내가 피를 분수같이 흩뿌리며 허공을 날았다.
동시에 무리를 뒤따르던 십 대 후반의 여성이 걸음을 늦추고 떨어지는 사내 받아 내더니, 환한 빛과 함께 [회복] 능력을 쏟아부었다.
“군다르, 정신 차려요!”
유독 화려하게 빛나는 그녀의 백금발을 눈에 담으며 임훈은 데미안에게 말했다.
“나타시아입니다. 발군의 회복 능력을 각성한 천재로, 러시아에서는 성녀로 추앙하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워 있는 건… 군다르 같군요. 최근 북유럽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근접전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임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심상치 않은 적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군다르는 최근 실력이 급격히 늘어서 저도 승부를 쉽게 장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피떡이 되다니…….”
그의 추측은 정확했다.
키이이잉-!
영혼을 믹서에 넣고 갈아 버리는 듯한 끔찍한 소음과 함께 군다르를 날려 버린 붉은 악마가 길을 가로막았다.
놈은 달랐다. 일단 덩치부터가 더 컸다. 다른 간부들 사이에서도 우뚝하게 커서 일반 병사의 1.8배는 될 듯한 크기를 자랑했고, 다른 지휘관들보다 무거운 기세를 줄기줄기 뿜어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흉악했는지 여태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정면만 바라보던 권승리가 고개를 돌려 살펴볼 정도였다.
데미안은 권승리의 얼굴에 떠오른 갈등을 읽었다. ‘내가 나서야 하나?’, 그녀는 명백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오르피앙페르……!”
최치국이었다.
그리고 붉은 악마는 바로 지난번 최치국을 사경을 헤매게 한 장본인이었다.
악마의 본명은 리트리안. 직위를 고대 마법으로 번역하면 대위로 번역된다.
아갈타 차원강습 연대 사령관 퀴니세인에 의해서 직위를 박탈당하고 그가 내준 초월 병기 ‘오르피앙페르’와 함께 최치국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남자였다. 나름 잘나가는 엘리트 군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경력에 오점을 남긴 최치국에게 큰 원한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최치국은 이 순간이 자신이 나설 때라고 판단했다.
생각과 함께 최치국은 이미 몸을 던졌다.
콰우우우-!
사방에 태풍을 일으키며 [굴절]과 바람의 힘을 더해 악마 리트리안을 날려 버리고 함께 대열을 이탈했다.
“잠깐……! 혼자서는……!”
권승리가 만류했지만 최치국은 씨익 웃을 뿐 듣지 않았다.
“이기고 오겠습니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리트리안을 끌고 사라졌다.
데미안은 멀어지는 최치국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굴절]과 바람의 힘이 얼마나 강력하게 어우러졌는지 따라갈 엄두도 나지 않는 속도였다. 그들이 이동한 경로를 따라 후폭풍만으로도 마족들이 나뒹굴었다.
흘깃 돌아보니 권승리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할게.”
그렇게 중얼거린 권승리가 오히려 속도를 높여 달렸다. 데미안은 허겁지겁 그녀를 따라 달렸다.
짧은 거리를 달리면서 무리는 계속해서 작아졌다. 튀어나오는 간부들을 상대하고 권승리의 앞을 뚫어 주기 위해 한 명 한 명 대열을 이탈하다 보니 어느새 권승리와 데미안만이 남았다. 데미안의 호위 팀들 마저 다 뒤쳐진 다음이었다.
그 짧지만 격렬했던 돌격 끝에 마침내 아갈타의 운송 본대가 눈앞으로 가득하게 다가왔다.
건방지게 던전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들이 마침내 권승리와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서는 당황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
데미안은 위화감을 느꼈다. 누군가가 때리려고 하면 반사적으로 팔을 움츠리든 고개를 뒤로 빼든 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저들은 바로 앞에서 달려드는 권승리와 데미안을 보면서도 아주 침착하게 서 있었다.
‘마치 우리가 절대 자신들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데미안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주 난폭한 방식으로
기이이이-
꿍!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듯한 기묘한 소음과 함께 강력한 충격파가 덮쳐 왔다.
‘어라?’
눈앞이 빙글 돌았다.
하늘은 하늘색. 땅은 흙색. 빙글빙글 뒤섞여서 누리끼리해지다가 입에서는 흙 맛이 나고…….
턱!
누군가가 받쳐 준 손에 데미안은 그제야 멈출 수 있었다.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둘러보던 데미안의 시선이 자신을 받쳐 안은 여자 앞에서 멈췄다.
“아, 리디아?”
“네. 여기 있습니다.”
평소라면 다정하게 안심이라도 시켜 줬을 텐데. 지금 리디아는 그저 서리가 내릴 듯 긴장한 기색으로 정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제야 데미안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할 수 있었다.
“뭐야, 저 괴물은……?”
처음 보는 생체 슈트였다.
지금까지 본 차원강습병은 하나같이 우락부락한 근육에 뿔이 달린 형태의 생체 슈트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사람들이 마족이니 악마니 하고 부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앞을 가로막고 있는 존재는 전혀 달랐다. 차르르 흐르는 비늘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여 있고, 흉악한 발톱과 기다란 꼬리가 있다. 뿔은 위나 앞으로 솟지 않고 뒤로 누웠으며, 전신을 타고 까만 뇌전과 불길이 일어났다. 그의 한쪽 팔에는 기이잉- 소리를 내며 회전하는 팔찌가 두 개 걸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무슨 방패처럼 거대하고 흉악한 발톱이 삐죽 솟아 있었다. 용인龍人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괴물?
크기도 그리 크지 않았다. 일반적인 병사들의 1.2배쯤 겨우 될까? 하지만 데미안은 눈앞의 괴물에게 완전히 압도당했다.
‘차원이 달라…….’
저 괴물의 공격으로 권승리와 데미안의 돌격이 막히고 데미안은 뒤로 날아갔다. 리디아가 제때 출격해 막아 주지 않았다면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리디아가 나섰다는 것 자체가 현 상황이 ‘데미안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임을 입증했다.
괴물이 말했다. 머릿속으로 직접 의미가 전달되는 방식이었다.
[특이한 힘을 쓰는구나.]
괴물의 시선은 권승리에게 꽂혀 있었다. 권승리는 아까의 강력한 충격에도 데미안처럼 튕겨져 날아가지 않았다. 다만 그 기세 좋던 돌진을 멈추고 뒤로 세 발자국쯤 물러난 상태였다. 그게 괴물의 관심을 끈 모양이었다.
잠시 권승리를 바라보던 괴물은 스르르 고개를 돌려 데미안,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데미안 앞을 막아서고 있는 리디아를 보았다.
[그리고 그쪽… 꽤나 거슬리네?]
권승리도 데미안도 괴물이 말을 한다는 사실에 놀라지는 않았다. 드물긴 하지만 괴물이 말을 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었으니까.
리디아가 중얼거린 것도 그런 이유였다.
“말하는 괴물이라니… 도련님, 우리 목표는 후퇴입니다.”
기록이 전하는 바, 말하는 괴물은 하나같이 무지막지하게 강했으니까.
하지만 괴물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괴물은 어느새 보랏빛이 폭발하듯 활짝 열리고 타원형의 보라색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풍경을 뒷배경으로 깔고 말했다.
[봐. 보라색 게이트야. 지속 시간은 짧지만, 그 잠깐 동안은 그 어떤 인과因果라도 옮길 수 있는 강력한 게이트지. 보라고. 저런 타키온 무진장 퍼먹는 게이트를 열어야 했을 정도로 워낙 대단한 물건을 운송 중이라서… 원랜 나도 잠깐 전송을 해 주려고 했어. 근데 내버려 두면 너희가 이 비싼 게이트를 파괴해 버리겠더라?]
괴물의 시선이 다시 권승리에게 향했다. 두 눈에서 노란 광망이 터져 나왔다.
[맞지? 너, 던전 코어를 부수지 않고도 게이트를 닫을 수 있지?]
권승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괴물은 처음부터 답이 필요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남기로 했다. 계획은 어긋났지만… 그 대가로 이렇게 특이한 권능의 표본을 얻을 수 있다면 그도 나쁠 건 없겠지. 겸사겸사 거슬리는 지구인 능력자도 하나 처치하고.]
거슬리는 능력자를 언급할 때는 리디아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생체 슈트를 완전히 뒤집어써서 용 같기도 하고 에일리언 같기도 한 길쭉한 대가리를 가진 괴물이 커다란 입으로 히죽 웃으니 소름이 끼쳤다.
데미안은 목덜미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반사적으로 쓸어 보았다.
구우우우우-
척! 척! 척! 척!
그러는 사이 아갈타의 운송대는 일사불란하게 보라색 게이트를 넘기 시작했다. 데미안과 권승리는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눈앞의 괴물이 모든 집중을 앗아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괴물은 웃는 채로 말했다.
[아무튼 나는 퀴니세인이라고 한다. 여기 책임자지.]
데미안은 생각했다.
여기까지라고.
처음 계획과는 다르지만 저 무지막지한 괴물을 운송대에서 떨어뜨려놓은 것만으로도 어쩌면 제 역할은 다한 거라고.
‘사령관님, 우리는 할 만큼 했어요. 나머지는… 부탁해요. 어마무시한 병기를 준비해 온다고 그랬으니까, 믿어도 되죠?.’
이제는 자신의 생존을 걱정해야 할 때였다.
저 괴물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찰칵! 데미안은 루디비히의 마탄에 총알을 채워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