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12화 (112/212)

11. 전쟁

무르물랑은 말했다.

“핵심은 그거야. 우리가 아무리 강력한 무기들을 구해 온다고 해도 적이 침착하게 대응하게 된다면 우리한테는 승산이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적을 침착하지 않게 만들지?”

“계획에서 어긋나게 만들어야지. 우리 힘뿐만 아니라 지구 자체의 저력도 사용하는 거야.”

무르물랑은 커다란 물방울 하나와 작은 물방울 여러 개를 만들어 주르르 늘어놓았다. 그러곤 큰 물방울을 가리켰다.

“이게 지구야. 습격은 놈들이 지구를 빠져나가는 그 순간, 그때 먼저 일어나는 거야.”

무르물랑의 손가락이 가장 큰 물방울을 지나쳐서 주르르 늘어선 작은 물방울들을 가리켰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습격은 반드시 놈들의 운송 본대에 타격을 줘야 돼. 그래서 놈들이 급하게 운송로를 따라 움직이다가 피해를 정리하려고 할 때, 그때를 노려서……!”

철썩!

무르물랑이 작은 물방울을 움켜쥐어 터뜨렸다.

“목표물을 뺏어 오는 거지.”

자리에 합석해 있던 데미안 루드비히가 말했다.

“그냥 처음부터 총공세로 공격하면 안 될까요?”

무르물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절대 안 돼요. 마지막까지 숨겨야 하는 사실이 바로 지구가 외차원과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사실을 들키는 순간 아갈타는 지금처럼 침략 속도를 조절하지 않을 거예요. 즉각 총력전이 벌어질 테고, 그러면 당해 내기 어려워요. 그러니 나랑 시민이 그리고 창신대는 차원 간 해적으로 위장해서 지구 밖에서 습격합니다.”

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무르물랑의 말대로라면 지구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고, 그 중요한 역할을 맡아 줄 적임자는 우리 데미안 도련님뿐이었으니까.

“도련님, 이 일은 도련님이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힘이 닿는 데까지 세력을 결집해서 지구를 떠나려는 아갈타의 운송 본대에 타격을 가하는 것.

나는 그걸 데미안에게 부탁했다.

“도련님만 믿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들의 본대에 타격을 주셔야 합니다.”

데미안 도련님은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이내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카나리아가 커다란 울음을 토해 낸 직후.

무혼 권가는 발칵 뒤집혔다.

티브이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마족들의 준동을 연달아 보도했다.

만안자는 마족들의 기묘한 움직임을 포착해 권승리와 최치국에게 보고했다.

데미안 루드비히는 마족들이 유물과 유해를 유출하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던전 사이렌 카나리아는 시끄러운 알람으로 태평양 한가운데에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던전의 출몰을 예측했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던 정보들이 한자리에 조합되자 단서는 금세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답안지가 되었다.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권승리가 말했다.

“양동작전이군요?”

데미안이 그 말을 받아 씹어뱉듯 말했다.

“네. 이번 던전은 침략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전 세계적인 공세로 우리의 시선을 끌어 놓고 정작 자신들은 태평양 한가운데에 만들어진 던전으로 지구를 빠져나가려는 겁니다. 빌어먹을 약탈자들……!”

권승리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놈들이… 지난 습격으로 확보한 유물과 유해를 외차원으로 유출하려고 하고 있다고요?”

“네. 우리 가문에서 놈들의 지난 습격을 토대로 놈들의 목표를 추산해 본 결과 그렇습니다. 90퍼센트 이상의 확률이에요.”

데미안이 확언하는 순간 권승리 뒤에 서 있던 최치국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휘이이잉- 그의 몸을 휘감고 바람이 불었다. 최치국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한 분노에 휩싸였다. 어쩌면 그건 온전한 최치국 본인의 분노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에게 새로운 힘을 준 한라산 ‘유해의 메아리’가 최치국을 매개로 분노를 표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결론은 같았다.

삐걱!

최치국은 검 자루를 부러뜨릴 듯이 쥐어짜며 내뱉었다.

“좌시할 수 없습니다.

데미안도 그 말에 동의했다.

“물론이에요. 유물과 유해는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되는 지구의 보물입니다. 다만 명심해야 할 건 이게 양동작전이라는 거예요. 마족들이 전 세계적으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는데, 멀리 떨어진 태평양까지 지원군을 파견할 세력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아갈타의 호위 병력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뚫어 내기 위한 전력을 짜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카나리아가 예측한 던전 활성화 시점까진 단 5시간. 시간도 촉박한데 끌어올 전력도 마땅치 않아요. 하지만…….”

그래도 데미안은 황금색 눈동자를 번쩍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힘 닿는 한 가문의 전력을 총동원하겠습니다. 마누스 회랑도 포함해서……! 무혼 권가도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 당찬 다짐에 마주하고 있던 권승리는 깜짝 놀랐다.

마누스 회랑은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잇는 장치로, 아주 멀리 떨어진 물자와 사람을 순식간에 운송할 수 있는 기물이었다. 루드비히 가문의 보물 중 하나로, 지난 생에는 그 어떤 위기에도 남을 위해 먼저 등장한 적이 없는 것.

‘그런 마누스 회랑을 요청을 하기도 전에 대가도 받지 않고 내놓는다고?’

권승리는 데미안 루드비히가 낯설게 여겨졌다. 인류의 배신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들에게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얼어붙은 심장의 소유자. 그게 루드비히 가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 눈앞에 데미안 루드비히는 영웅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고민에 빠졌다.

‘혹시… 그 짐작이 사실이었던 걸까? 데미안, 그녀가 남장을 한 이유는 가문 내 입지를 위해서이고, 그녀 혼자 마지막까지 아갈타와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다가 친족에게 살해당했다는……?’

만약, 만약 정말 그렇다면 회귀한 아틀라스 클럽의 영웅들은 기꺼이 데미안의 편에 서야 하리라.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근거가 없어.’

정보가 철저히 통제되는 루드비히 가문 내부의 사정. 어림짐작만으로 끼어들었다가 더 최악의 결과를 불러올지도 몰랐다. 지구 전체의 운명이 걸린 이상 그런 도박을 벌일 수는 없었다.

결국 아틀라스 클럽이 취할 수 있는 길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적대적 방관.

‘그래. 변한 건 없다. 루드비히 가문이 언제든 배반할 수 있다는 걸 상정하고 지켜본다. 틈이 보이면… 멸문한다. 불쌍해도 어쩔 수 없어.’

권승리는 다시 한번 다짐하며 데미안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은 협력한다. 하지만 언젠가 필요하다면 그녀도 죽일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최치국이 데미안에게 화답했다.

“저희도 가용 가능한 모든 전력과 인맥을 동원하겠습니다. 아갈타 놈들의 계획을 제대로 망쳐 봅시다.”

짙은 각오가 서린 한마디였다.

‘…어라?’

그런데 권승리는 거기서 이상함을 느꼈다.

최치국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만안자 역시 태평양의 던전을 우선순위로 꼽았으니 당연히 아틀라스 클럽은 태평양에서 마족들과 일전을 벌일 것이다. 이미 그렇게 결정되었고, 한 명 한 명이 영웅의 책임을 지는 아틀라스 클럽의 분위기상 최치국이 저렇게 공언을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아틀라스 클럽 내부의 이야기. 반면 지금 이 자리는 표면적으로 무혼 권가의 소가주인 권승리와 루드비히의 직계인 데미안이 대면한 자리였다. 일개 단주인 최치국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당장 데미안 루드비히가 ‘당신이 뭔데 나서죠?’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최치국답지 않은 실수.

그제서야 권승리는 알 수 있었다. 데미안을 바라보는 최치국의 눈동자가 참으로 복잡했다.

연민과 동정

그래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오래된 동료를 보는 듯한 눈빛이네?’

힐끗 돌아보니 데미안 역시 최치국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곧게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모습에서 마찬가지로 신뢰와 걱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 눈동자에서는 ‘고작 단주가 뭐라고 모든 전력이니 인맥이니 운운하는 겁니까?’ 하는 비아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최치국과 데미안은 가문 대 가문이라는 딱딱한 입장을 떠나 아갈타의 침략을 막기 위한 ‘동지’로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권승리는 눈을 깜빡였다.

‘뭐야? 이 사람들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거야?’

그렇게 최치국을 제외한 다른 회귀자들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던 영웅들과 루드비히 가문의 연합 전선이 꾸려졌다.

그리고 힘을 합치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전쟁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 * *

어릴 때 샌드위치 놀이를 해 보았는가?

그 놀이는 다 같이 놀다가 한 명이 바닥에 넘어지는 순간 시작된다. 누군가가 넘어진 친구 위로 눕고, 또다른 누군가가 그 위로 눕는다. 그러다 보면 금세 같은 반 아이들이 죄다 몰려와서 무덤 같은 형태로 층층이 쌓이게 된다.

가장 아래에 깔린 아이를 보자.

한 다섯 명까지는 재미있다가 일고여덟 명이 넘어가면 표정이 바뀌고, 열 명을 넘기는 순간부터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른다.

온 세상이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압력. 몸이 쑥 눌려 버릴 것 같은 공포.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답답함.

전쟁의 감각은 어쩌면 그와 비슷했다.

꽝!

꽈르르릉!

긴장한 채로 다가갈 때만 해도 모른다.

생명을 걸고 살과 살이 부딪치고 능력과 능력이 부딪치는 그 순간에야 감이 온다. 그리고 감이 오는 순간, 그 거대한 압력은 숨 한 번 제대로 쉴 틈도 없이 몰아쳐 온다.

이곳에선 아무리 강하고 재능이 있다고 해도 누구나 한계를 맞이한다.

그 한계 상황을 다루는 집중력과 요령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른다.

“끄아아아아!”

[염동력] 능력자가 온 힘을 다해 쇄도하는 차원강습병을 막아섰다.

찌이이익!

하지만 잠깐 주춤하는 듯했던 아갈타의 차원강습병은 손끝에 백색의 구름 강기를 뭉게뭉게 피워 올리고는 그대로 [염동력]을 찢어발긴다.

“허엇!”

기겁을 한 능력자가 다시 [염동력]을 해일처럼 밀어 내지만, 다가오는 차원강습병을 막을 수 없었다.

“안 돼! 안 돼!”

온몸에 굵은 핏줄이 서고, 뜨거운 땀이 뚝뚝 떨어지고,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에 코피를 쏟아 내면서 버텨도 막아 낼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아갈타의 병사에게 갈가리 찢기는 미래뿐.

그런 능력자를 도와준 게 데미안이었다.

“이 악물고 버텨! 죽는 그 순간까지 능력 사용에 집중해!”

타아아앙-!

시끄러운 총성과 함께 데미안이 쏘아 낸 한 발의 탄환이 달려들던 차원강습병을 저 멀리 튕겨 냈다. 데미안이 사용하는 총은 루드비히의 마탄이라고 불리는 루드비히 직계들만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던전에서 발견된 값비싼 오파츠를 조합해 만든 것으로, 총알 하나하나가 수억 원을 호가했다.

하지만 현대 지구 기술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이 무기로도 차원강습병에게 제대로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쳇… 이걸 맞고도 외장갑이 살짝 찌그러지고 끝이라니…….”

날아가기만 멀리 날아갔을 뿐 실제 타격이 거의 없음을 확인한 데미안이었다.

차원강습병이라면 소시민을 따라다니며 몇 번 상대해 본 적 있었지만, 이상하게 이곳의 차원강습병들은 더 빠르고 더 강했으며 심지어 더 단단했다. 본래 데미안의 총탄은 차원강습병의 외장갑에 실금 정도는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연속 두 번으로 같은 자리를 쏘아 맞혀야 간신히 실금이 생길 정도였다.

“훨씬… 무거워.”

데미안은 아득한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빙하계 능력자들의 활약으로 전장이 되는 태평양 바다 한복판이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그 너머에는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은 보랏빛 게이트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오로라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게이트 근처에는 유물과 유해를 운송하는 본대로 추정되는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고, 그 주변을 호위 병력들이 물 샐 틈 없이 지켰다.

게이트가 완성되기 전에 운송대에 타격을 입혀야 했지만 호위 병력을 뚫어 내기는커녕 거꾸로 잡아먹힐 것 같은 압력을 느꼈다.

“이게 지휘관이 이끄는 군대의 힘인 건가?”

소시민에게 사전에 경고를 받았지만 역시 직접 상대를 해 보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데미안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게 막히는군요…….”

데미안을 가장 가까이에서 수행하고 있던 임훈도 헛웃음을 토해 냈다.

“마누스 회랑을 열두 번이나 가동하며 모은 전 세계의 강자들인데…….”

데미안은 임훈이 다 말하지 않고 삼킨 뒷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정말 놀라운 전력이었다.

루드비히의 이름으로 집결시킨 엘리트 능력자들의 능력이야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은 원래부터가 루드비히가 주는 떡고물을 먹고 성장한 회원들이었으니까.

경악스러운 건 권승리가 불러 모은 전력이었다. 최근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슈퍼 루키들이 모조리 집결했다. 그 전력은 데미안이 가용 가능한 가문의 자원을 모조리 동원해서 모은 전력을 몇 배나 상회할 정도.

소시민이 무혼 권가의 저력을 높이 평가하기는 했지만, 그게 이렇게 전 세계의 루키들을 끌어모을 정도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 루키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 조직이 태동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의구심과 함께 어쩌면 지구 안에서 결판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마저 갖게 하는 전력이었다.

하준광 같은 수준의 절대자는 없었지만 어느 나라를 가도 강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1류 능력자 700 여 명에 1류를 넘어서는 에이스급 능력자가 150여 명이나 되는 전력이었으니 그런 자신감도 당연했다. 사실상 대한민국 전체의 국방력과 맞먹는 수준의 초능력자들이 이 자리에 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로도 부족하다니…….

임훈이 투덜거렸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 소시민 사령관님은 어디로 가신 겁니까?”

“좋은 무기 사 와서 따로 공격한댔어.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처음부터 같이 공격하면 안 되는 겁니까?”

“지구에서는 안 돼. 그가 쓰는 무기들은 마족들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데미안은 일주일 전 소시민을 찾아온 무르물랑이라는 액체 괴물의 당부를 떠올리며 말했다.

던전 앞을 지키는 200명의 호위 병력을 뚫는 일은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본대에 타격을 주기로 약속했는데……!’

그렇게 본대는 구경도 못 하고 호위 병력들과 치고받는 사이, 저 뒷편에서 던전 게이트는 벌써 완성 단계에 진입했다.

오로라처럼 하늘에서 흔들리던 보랏빛이 서서히 땅으로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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