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카나리아
충분히 서로에게 감탄했으니 이제 일은 속도감 있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현실을 되새길 때면 눈앞이 아득했다.
“운송 작전에 동원될 호위대의 규모는 100명. 그들이 거쳐 가게 될 아갈타의 초소까지 다 고려하면 최악의 경우 200명을 한꺼번에 상대하게 될 수도 있다.”
말이 좋아 200명. 그 하나하나가 국내 랭커 수준을 뛰어넘는 괴물이라는 걸 생각하면 재앙 그 자체다.
“그리고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간부들이 지휘관으로 참가하겠지.”
거기에 지휘관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위협이었다. 지금까지 나와 창신대가 싸워 온 건 기껏해야 아갈타의 병사들. 아갈타의 장교와 부사관들이 얼마나 강할지, 그들이 지휘하는 군대가 어떤 시너지를 일으킬지… 그건 여태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위협이었다.
‘지난 생에 유명한 사건이 있었지. 단 한 명의 아갈타 간부가 세계 랭커 10명을 한자리에서 참혹하게 살해한…….’
아갈타의 병사들이 마족이라 불릴 때 아갈타의 지휘관들은 악마라고 불렸다. 하나하나가 세계 질서를 뒤흔들 만큼 강력한 존재들.
“정면 승부는 불가능해. 상대는 제대로 된 군대. 우리가 아무리 크게 투자를 해도 정공법으로는 이길 수 없어.”
무르물랑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목표는 전투가 아니야. 목표는 어디까지나 고대신의 흔적을 탈취하는 것. 잊으면 안돼. 우리가 구매해야 하는 건 전투를 최소화하고 운송품만 빼돌릴 수 있는 장비야. 상상력을 최대로 열어.”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걸었다.
어둡고 어두운 갯펄시장에서 허공을 내디디며 걷다 보면 우주 공간을 산책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익숙하던 시장이 저 멀리 별들처럼 멀어져 보일 때쯤.
무르물랑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리고 믿어. 지금부터 갈 상위 시장에서 그 해답을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쇼핑은 믿음이야.
그녀는 찰랑 웃어 보이더니 내 손을 잡고 갯펄시장의 경계를 넘었다.
- 사용자 무르물랑이 사용자 소시민을 에스코트합니다. 갯펄시장에서 이동 가능한 상위 시장에는 탑골시장, 등불시장, 조각시장이 있습니다. 어느 시장으로 가시겠습니까?
“탑골시장으로 간다.”
무르물랑이 나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수공예 시장이야. 싸구려 기념품이나 모조품이 가득하지. 그치만 아주 가끔, 최상위 시장에서도 찾지 못할 보물들이 발견되기도 해. 우리가 찾아야 하는 물건들도 그런 거야.”
탁. 그 말을 따라 한 발 내딛는 순간.
웅성웅성.
시장 바닥의 소음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탑이 늘어서 있고, 그 탑들을 서로 연결하는 다리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탑의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고, 땅을 내려다보아도 탑의 시작이 어딘지 보이지 않았다.
휘이잉- 휘이잉-
탑 사이로 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사람들도 보였다.
탁 트이고 어두운 갯펄시장과 달리 이곳은 밝고 미로처럼 복잡했다. 명동 거리에라도 나온 것처럼 소란스럽고 정신이 없다.
이곳이 바로 갯펄시장을 졸업하면 진출할 수 있는 곳, 탑골시장이었다.
가슴이 뛴다.
새로운 거래처, 새로운 장비가 우리를 강하게 할 것이다.
아갈타에게 세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만큼!
* * *
<내면에 깃든 강함을 일깨우라.>
무혼 권가의 연무장에는 박력 넘치는 글씨로 쓰인 현판이 걸려 있었다.
최치국은 그 현판 아래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수련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그때 전언자가 다가와 최치국에게 말을 전했다.
최치국은 송글송글 맺힌 땀을 쓸어 내고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꽂아 넣으며 되물었다.
“뭐? 루드비히 가문에서 사람이 나왔다고요? 나를 찾아요? 왜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대답에 최치국은 눈썹을 찌푸리며 손사레를 쳤다.
“아파서 안 된다고 전해 주세요. 겨우 재활하고 이제야 수련 시작했는데 귀찮게…….”
하지만 전언자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게… 가주님께서 정중이 맞이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뭐? 가주님이요?”
사실 최치국과 무혼 권가의 가주 권도식은 그다지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최치국은 본래 무혼 권가의 사람이 아니다. 그저 권승리를 따라 무혼 권가에 투신한 것인 만큼 그는 소가주 권승리의 직속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가주가 자신에게 직접 지시를 내린다? 심지어 그 내용이 루드비히 가문의 손님을 정중이 맞이하라는 것?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최치국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도 빠르게 샤워실로 움직여 몸을 씻고 응접실로 향했다. 무혼 권가의 밥을 먹고 사는 처지에 감히 가주의 지시를 거역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응접실 문을 여는 순간, 최치국은 어째서 가주가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를 찾아온 사람이 가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물이었던 것이다.
응접실에 있는 사람은 정말 의외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아주 낯이 익었다.
“…데미안 루드비히?”
홀짝-
최치국의 부름에도 데미안은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들고 있던 차를 고요하게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 후에야 흘깃 최치국을 돌아보았다.
“사경을 헤맨다고 들었는데, 멀쩡하군요?”
“가문의 보살핌 덕분이지요. 그런데 웬일이십니까? <카나리아> 대여 건이라면 제가 찾아뵙기로…….”
홀짝-
데미안은 최치국의 질문을 무시하고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병문안을 왔을 뿐이에요.”
“네에?”
최치국이 세상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꼬리를 늘렸다.
데미안은 그런 최치국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생각해 보니 아직 갚지 못한 빚이 있어요. 아시다시피 루드비히의 빚은 비싼 편이라…….”
최치국의 표정이 이상해지다가 돌연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것처럼 아 하며 말을 꺼냈다.
“설마 밤의 괴수 때? 근데 그것 혼자서도 괜찮았을 거라면서요? 빚 아니라면서요?”
예전에 밤의 괴수를 공략하러 갔을 때 발광하는 밤의 괴수로부터 데미안의 부하들을 지켜 낸 건 소시민이 아니라 최치국이었다. 그때 소시민은 밤의 괴수가 품고 있는 던전 코어를 직접 공략하기 위해 날아간 상태였으니까.
그때 생각이 난 데미안은 뺨을 살짝 붉게 물들이고 말했다.
“어른스럽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빚이 맞아요. 이제라도 바로잡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그 모습에 최치국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제 15살이 된 데미안. 어른스러운 척은 있는 대로 다 하지만 이 순간은 어쩐지 귀여운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실은 그때도 그랬다. 부하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입술을 깨물던 데미안의 모습은 그냥 울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보여서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최치국도 이제 고작 17살이었지만… 그는 회귀 전 마흔 중반을 넘겼던 시절의 정체성과 기억을 일부 가지고 있으니 실제로 어린 데미안과는 사정이 달랐다.
하지만 공은 공, 사는 사.
최치국은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루드비히 가문은 인류의 배반자. 우리는 아직도 루드비히 가문에 대한 처분을 어떻게 할지 확정하지 못했다. 데미안은 루드비히의 직계. 경우에 따라서는 내 손으로 그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정들면 안 돼.
최치국은 입술을 단호하게 모으고 말했다.
“그것이라면 제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마 용건이 그게 전부이십니까?”
“그쪽이 안 받겠다고 해도 루드비히는 빚을 갚습니다. 이미 가주님께 충분한 대가를 전달 드렸거든요. 그리고 온 김에 병문안을 왔을 뿐이에요.”
“감사합니다. 저는 건강합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최치국은 깔끔하게 인사하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가 비켜선 빈자리에 문이 나온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홀짝-
하지만 데미안은 일어서지 않았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물었다.
“다만 궁금한 게 있어요.”
“말씀하시죠.”
“그때, 왜 저를 그런 시선으로 보셨던 거예요?”
최치국은 데미안의 황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음 한구석이 뜨끔했다.
“왜, 그때 저를 그렇게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셨죠?”
눈빛이 어쨌다고.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최치국은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미안 루드비히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그것도 아마, 친족인 자크 루드비히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심지어 그 살해당한 시체는 아무렇게나 버려졌고, 심상찮은 힘의 파동을 느끼고 나갔다가 그 시체를 수습한 게 바로 최치국이었다.
그렇게 밝혀진 데미안… ‘그녀’의 비밀.
세간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아틀라스 클럽 내에서 그 비밀은 싸늘하고 가슴 아픈 추측과 추문을 무성하게 남겼다.
회귀의 와중에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녀의 죽음 이후 루드비히 가문의 배신이 구체화된 만큼 그녀를 살리는 게 옳은가 아닌가 하는 논쟁이 있었지만, 추측만이 있을 뿐 구체적인 정황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회귀한 영웅들은 여전히 데미안 그녀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최치국은 그녀가 가여웠다.
몇 번의 전장을 함께 겪으며 지켜본 그녀가 악해 보이지 않았기에 더욱더 가여웠다.
‘만안자가 루드비히 가문의 내부 사정만 파악할 수 있었어도…….’
그러나 가여움만으로 섣불리 움직이기에는 리스크가 너무나 큰 일이었다.
뭐가 암세포고 뭐가 정상 세포인지 구분하기 힘들 때는 어설프게 칼을 대지 않고 단번에 의심되는 곳을 전부 잘라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정들면 안 돼.’
최치국은 데미안의 황금색 눈동자를 애써 외면했다.
그런 최치국을 가만히 바라보던 데미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뭔가…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와 리디아 위트필드뿐. 그게 아버지가 가문을 걸고 데미안을 지키기 위해 내린 결정.
‘그래. 그럴 리 없는데… 그런데 또 날 그렇게 가여운 눈으로 보는 건 아버지랑 리디아 말고는 없었는데…….’
리디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다음번 [모이라이 홀덤]에서는 최치국이 무얼 알고 있을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 갈지 다시 한번 점쳐 봐야겠다고.
탁-
데미안은 탁자 위에 까만색 구체를 하나 올려놓았다.
“<카나리아>…….”
“대여 신청 하셨더군요? 병문안 오는 김에 직접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것.”
데미안은 <카나리아> 옆에 전투화 하나를 마저 올려놓고 일어섰다.
“그게 뭡니까?”
“선물이요. 비용은 내가 대고 디자인은 소시민 사령관이 했어요. 소시민 사령관도 이번에 당신에게 빚을 졌다면서 그러더군요. 신어 보세요. 기가 막히게 맞을 겁니다.”
말은 심드렁하게 했지만 사실 굉장한 보물이었다. 들어간 재료부터가 만만치 않은 데다가 그걸 디자인한 게 소시민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최치국에게 딱 알맞은 신발이리라. 데미안 자신도 탐이 나는 물건이었으니까.
‘이걸로 빚은 정말 없는 거겠지.’
데미안은 그대로 일어나서 응접실을 빠져나가고자 했다.
생각보다 마음이 가볍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었다.
까아아아아아아-!
탁자 위에 올려 둔 던전 사이렌 <카나리아>가 고막을 부술 듯이 크게 울부짖었다.
<카나리아>는 밤의 던전에서 찾아낸 보물. 던전의 생성을 자동으로 감지하는 기능이 있는 오파츠. 당연히 그 울음소리는 던전의 출현을 의미했다.
하지만.
‘알람이 이렇게 크다고?’
<카나리아>를 획득한 후로 들어 본 가장 큰 알람 소리보다도 20배는 더 큰 알람이었다.
‘대체 얼마나 거대한 규모의 던전이 출현하길래……?’
쿵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그때 데미안의 귀로 리디아의 보고가 들려왔다.
- 전세계적으로 마족들이 대규모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와 동시에 최치국도 리프 얀센의 전언을 들었다.
- 아갈타의 마족들이 대규모 작전에 돌입했어! 만안자의 전언에 따르면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는 것 같대!
데미안과 최치국의 시선이 동시에 울부짖고 있는 <카나리아>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