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일지십
무르물랑의 식견은 여전히 감탄스러웠다. 그녀는 넓은 지식과 뛰어난 통찰을 발휘해 향후 계획을 수립했다.
그녀가 말했다.
“전장은 지구 밖이 돼야 돼.”
“어째서? 굳이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싸울 이유가 있나?”
“지구에서 싸우면? 우리가 이미 타키넷하고 거래하고 있다고 사방팔방에 광고라도 하려고? 잊지 마. 아갈타에겐 지구가 고립된 원시 차원이란 이미지를 계속 줘야 돼. 그렇지 않으면 놈들 전략이 어떻게 과격해질지 알 수 없다.”
맞는 말이었다.
“그럼 습격 장소는 어디쯤으로?”
내 물음에 무르물랑은 찰랑! 코웃음을 쳤다.
“지금은 그런 논의를 할 시점이 아니야. 일단 거래처부터 뚫어야지. 일주일이면 새로운 거래처 일곱 개는 뚫을 수 있어.”
거래처라고? 갑자기?
“그래. 당장은 전력이 부족해. 쓸 만한 거래처를 뚫어 놓고, 거기서 장비와 물자들을 확충한 다음에야 그에 맞게 계획을 수립할 수 있어. 시간이 많지 않아. 동시에 여러가지 일을 해야 돼.”
“전력 증가…….”
“그래. 하지만 명심해. 당장의 목표는 운송 계획을 저지하는 거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걸.”
“동맹을 만들고 병합되는 거?”
“그렇지. 그러니까 아갈타의 계획을 막고 나면 그 이후 두 달 동안에는 거래처를 50군데 이상 더 늘릴 거야. 그걸 염두에 두고 일단 먼저 일곱 개의 거래처를 뚫는 거라는 걸 알아 둬.”
응? 50군데?
문득 무르물랑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장 거래처를 늘리는 건 전력의 향상을 위해서라고 이해를 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싸움이 끝난 다음 두 달 동안에는 아예 50개를 늘린다고? 숫자도 너무 많고 그렇게 숫자를 정해서 늘려야 한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런 내 의문에 무르물랑은 질문으로 답했다.
“생각해 봐. 똑같이 가난한 두 아이가 있어. 그런데 한 아이는 친구가 많고, 다른 아이는 친구가 없어. 그런데 나쁜 애들이 나타나서 얘네를 괴롭힌다면 어떻게 될까?”
…안타깝지만 뻔한 얘기였다.
친구가 많은 아이는 괴롭힘에서 금방 벗어날 것이다. 그 많은 친구가 나쁜 애들에게 복수를 해 주거나, 최소한 “얘 좋은 애니까 그러지 마” 하고 중재를 해 주겠지. 반면에 친구가 없는 다른 아이는 혼자 그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아,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지구는 가난한데 친구도 없는 상태다?”
찰랑!
내 눈앞에서 무르물랑이 손가락을 튕겼다.
“바로 그거야! 인정받고 사랑받아야 돼. 생존이 달린 절박한 문제라고. 왜 중동이나 가난한 아시아권에서 던전이 터져 200,000명, 300,000명이 죽어 갈 때는 별 관심 없던 사람들이, 파리나 뉴욕에 생긴 불규칙 던전으로 200명, 300명이 죽어 나갈 때는 SNS를 pray for로 도배하겠어? 친구가 많아야 살아남는 거야. 사회적 동물이란 그런 거라고.”
“다른 차원의 존재들도 그래?”
“온 우주를 관통하는 이치지.”
“그러니까… 두 달 동안 오십 군데 이상으로 못 박아 놓고 거래처를 늘리려는 게… 친구를 많이 만들기 위해서?”
“알아들었네.”
“하지만 물건을 산다고 친구가 되나? 웬 촌뜨기가 와서 물건을 사 준다고 하면… 얕보고 호구 잡지만 않아도 다행일 것 같은데?”
내 물음에 무르물랑은 찰랑찰랑 웃었다.
“그러니까 특훈이 필요하지.”
“특훈?”
“너도 상인이니까 알지? 상인들은 10만 원짜리를 100만 원에 사 가는 호구를 존경하지 않아. 오히려 10만 원짜리를 정확히 10만 원으로 알아보는 소비자에게 긴장을 하지. 판매자보다도 물건을 더 잘 아는 전문가, 마니아층이 제일 어렵고 존경스러운 거라고.”
지금 무르물랑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물건 보는 눈이 필요하다?”
“맞아. 물건을 제대로 파악하고 제대로 쓰는 방법을 내가 확실하게 가르쳐 줄게. 상위 시장의 기준까지 널 끌어올려 줄 거야.”
촤아악-
그녀가 손을 들자 허공에서 물결로 이루어진 옷가지들이 나타났다. 쫙 빠진 정장에 커프스 단추, 엄청나게 비싸다는 손목시계에 기묘한 문양을 가진 넥타이가 내 몸을 휘감는다. 물론 그래 봤자 다 투명한 물로 이루어진 것들이지만… 물결이 절묘한 음영을 만들어 꽤나 그럴듯했다.
나는 그것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부자 같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몸을 감싼 물이 꺼지듯 흘러내렸다.
촤아악-
떨어져 나온 물을 손가락 한 번 튕겨 없애 버린 무르물랑이 말했다.
“꼭 부자여야만 부자처럼 보이는 건 아니니까. 우리는 지구를 차원 문명 수준에서 통할 정도로 뛰어나 보이게 포장할 거야. 힘들겠지만 죽을 각오로 따라와.”
무르물랑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인싸가 되게 해 줄 테니까.”
나도 마주 웃었다.
이렇게까지 밑밥을 깔아 놓고 어떤 걸 보여 주려고 하는 걸까?
다른 건 몰라도 ‘물건을 보는 눈’ 이건 내 전공이다.
그녀가 이번에도 날 감탄하게 할 수 있을지 심히 기대가 되었다.
* * *
나타르는 요즘 고민이 많았다.
소시민과 함께 론칭한 브랜드 <테라>의 매출이 큰 폭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작업화 특수가 이렇게 빨리 끝날줄이야…….’
그래도 한 2년은 해 먹을 줄 알았는데 고작 반년 만에 칼로 자른 듯 수요가 뚝 떨어졌다.
‘규모를 줄여야 하나?’
물론 당장 망하는 건 아니다.
작업화 특수가 지나갔다고는 해도 거기에 기대서 탄생시킨 <테라>라는 브랜드는 남아 있으니까. 아우라가 깃든 물건을 찾는 손님들은 꾸준히 방문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렵게 고용한 직원들을 다시 내보내야 하는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주저앉아서는 언제 또 기회를 잡을지……!’
나타르의 꿈은 이것보다 더 컸다. 이대로 매출을 계속 늘려서 1~2년 내로 상위 시장에 진출하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늘어지면 갯펄시장에 얼마나 더 머물러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해.’
그것도 아주 빨리 필요했다. 한 달 내로 답이 나오지 않으면 진짜로 직원들을 내보내고 손절을 해야 했으니까.
하루하루 깊어지는 고민으로 나타르의 기다란 속눈썹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이럴 때 소시민 그 친구가 같이 고민을 해 줘야 하는데… 하필 또 지구는 아갈타 놈 침략으로 난리가 났다고 하고… 미치겠네, 정말. 직접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저런 꼬맹이나 보내 주고 말야.’
나타르 혼자 속을 바짝바짝 태우고 있는 그때, 옆에서 딩가딩가 농땡이를 부리고 있던 까막이가 말했다.
“와… 가게 한산한 것 좀 봐. 나타르 영감님, 이거 괜찮은 거예요?”
까막이의 그 말이 나타르의 속을 더욱더 뒤집어 놓았다.
“아, 심심해 죽겠네. 일이라도 좀 시켜 봐요. 지구 일도 바쁜 와중에 힘들게 도와주려고 왔는데, 막상 하는 일이 없으니 시간만 아깝네.”
결국 나타르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야! 할 일 없으면 지구로 돌아가! 한창 바쁠 땐 지구에서 일한다고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이 갑자기 돌아와서 복장을 긁어?”
“누군 오고 싶어서 왔어요? 우리 형님이 도우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온 거지. 근데, 이렇게 망해 가고 있을 줄은 울 형님도 몰랐나 보네.”
“아니, 어쩌라고?! 애초에 작업화 수요는 한시적인 거였다고! 그 특수가 끝났으니 매출이 줄어드는 건 당연하지!”
“그래서 이대로 망할 거예요?”
“망하기는 뭘 망해! 그냥 규모만 좀 줄어들고 마는 것… 젠장!”
나타르는 말하다 말고 자신이 이미 규모를 줄이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버럭 짜증을 냈다.
정말, 정말 내키지 않는데 자꾸만 머릿속 아이디어는 직원들을 내보내고 시설을 팔아 치우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긴, 방법이 없었다. 파산하지 않으려면 뼈와 살을 깎아서라도 몸집을 줄여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럼 누구부터 내보내지? 옳지! 저 빌어먹을 꼬맹이부터… 무임금 노동자였지? 쳇…….’
나타르가 두꺼운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까막이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어? 형! 웬일이에요? 최소 일주일간은 못 찾아온다고 그랬잖아요?”
내내 빈둥거리던 까막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달려 나갔다.
그걸 본 나타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소시민이 왔어?’
그 순간 나타르는 깨달았다. 자신이 소시민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나타르에 비하면 자본력도 부족하고, 정보력도 부족하고, 인맥과 사업적인 지식 모든 게 부족한 소시민. 하지만 소시민에게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센스가 있었다.
‘소시민이라면 이 상황을 타개하게 해 줄 아이디어가 있을 거야!’
얼른 소시민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나타르. 하지만 그의 시선은 소시민이 아니 소시민의 옆에서 따라오고 있는 이질적인 존재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웬 물 덩이가 사람의 꼴을 한 채로 출렁출렁 소시민을 따라오고 있었다.
나타르의 기다란 눈썹이 휘어졌다.
‘뮤론?’
뮤리온 차원은 타키넷 평의회에서도 상임 이사계理事界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원 문명들 사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강의 차원 중 하나.
‘시벌… 일개 봉급쟁이도 나만큼 번다는 그 차원의 주민 아냐?’
나타르의 고향 차원에서 나타르는 아주 유명한 대상인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뮤리온 차원에서는 평균소득을 약간 넘어서는 정도일 뿐이다. 그런 대단한 족속들이었다.
그런 만큼 뮤론들이 최하위 시장인 갯펄시장까지 발걸음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타르는 긴장과 기대감에 휩싸인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소시민, 지금 이거 기회 맞지? 그렇지?’
심장이 뛰었다.
안개가 걷히고 새로운 먹거리의 지평선이 드러나는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 * *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
하지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다.
무르물랑은 나와 나타르에게 물었다.
“나는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고 잡아요. 여러분은 어때요?”
그렇게 묻는데 약한 소리를 할 사람은 없다. 나도 나타르도 당연히 기회를 잡는다고 대답했다. 까막이는 아직 이런 고난도 배움을 소화할 능력이 안 되었기 때문에 옆에서 구경을 하기로 했다.
준비가 끝나자 무르물랑은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럼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정확히 1시간 뒤, 나타르는 입술을 들썩거리고 큰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며 글썽거렸다.
“아니! 쓰레기라니! 우리 <테라>는 그래도 여기 갯펄시장에서는 꽤 주목받는 브랜드요! 동네마다 특성이 다른 건데, 그쪽 동네랑 여기를 비교해서 쓰레기 취급을 하면……!”
“쉿-”
나는 나타르의 입을 막았다.
나타르가 나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길래 얼른 그를 한 번 더 타일렀다.
“아저씨, 우리 목표가 뭐예요? 갯펄시장에 머무는 게 아니잖아요? 자존심은 상하지만 상위 차원의 시선을 수용해야죠. 그래야 위로 올라가죠.”
“후, 후우… 이미 그 선은 넘은 것 같지만… 그래도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일단은 후우…….”
내 설득에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더니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나타르였다. 물론 나도 나타르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해도 현실과 시장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1,000원짜리 디지털 시계를 파는 사람에게 왜 수억 원짜리 시계를 파는 회사처럼 못 하냐고 다그쳐 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니까. 그런데 우리 물건 하나하나, 우리 홍보 전략 하나하나를 다 지목하며 ‘쓰레기’라고 까 내리고 어째서 쓰레기인지 조목조목 설명하는 무르물랑의 행태가 바로 그랬다.
무르물랑은 그렇게 우리 상품들을 하나하나 다 품평을 하더니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더 몰아붙였다. 이번에는 실기 평가였다.
“여기! 이거 이렇게 손끝으로 만져 보세요!”
“이 부분! 이 부분! 눈에 영력 딱 집중하고 한번 봐요! 몰라요? 그게 안 보여요? 그러면서 무슨 물건을 만들어?”
“잠깐! 느껴 보라니까요? 끝의 각도가 0.002도 틀어져 있잖아! 이런 오차가 테라라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완전 망치는 거라고요! 네? 0.002도를 누가 알아채냐고요? 그걸 왜 몰라요?! 도각계 차원의 주민들을 만난 적 있어요? 거기선 갓 태어난 아기도 0.0002도의 차이를 알아차린다고요!”
무르물랑의 다그침에 결국 나타르는 완전히 넋이 나간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난 이제 아무것도 못 알아듣겠어… 봐도 안 보이고, 만져도 안 느껴진단 말야…….”
“안 느껴져요? 자, 자, 감각이 예민해지게 도와줄게요. 정신 차려요!”
무르물랑은 집중력을 상실한 나타르를 더욱 무섭게 몰아붙였다. 물약을 먹이고, 기억을 전달하는 물방울을 터뜨리고, 억지로 억지로 나타르의 감각을 끌어올리며 계속계속 물건들의 차이를 구분하게 했다.
‘한 번만 더, 아니 세번 만 더. 그렇지, 한 세트 더.’를 외치는 트레이너처럼 가혹했다.
“포기하지 마! 정신차려요! 영력을 집중! 느껴 봐요!”
“아니… 나로서는 도저히…….”
“자자! 이 차이를 느껴요! 영력 끊기잖아, 영력! 정신 차려! 자, 이것 마시고!”
나타르의 두꺼운 입술이 푸들푸들 떨리고 기다란 속눈썹 안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을 때까지, 무르물랑의 다그침은 그치지 않았다.
꿀꺽.
단지 구경하고 있는 까막이마저 겁을 집어먹을 정도였다.
“와… 고문 저항 수업도 저렇게 지독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결국 나타르가 눈을 완전히 뒤집고 부들부들 떨 때쯤 되어서야 그녀는 나타르를 포기하고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내게 당부했다.
“자, 옆에서 혼자 연습 많이 했지? 이제 네 차례야. 집중! 기초적인 수준은 구분할 줄 알아야 넘어가는 거야. 알지? 우리 시간 없다. 잘해야 돼.”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가혹한 품평과 트레이닝으로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전문성에 감탄했다.
‘아, 이거구나……!’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뇌리에 팍팍 꽂혔다.
‘여태 나는 [만상공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가진 초능력, [만상공감]은 대단한 능력이었다. 사물 안에 담긴 모든 감각적 특성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그러니까 무르물랑이 말하는 모든 것은 사실 내가 모두 이미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난 느꼈을 뿐이지 알지 못했어……!’
갓 태어난 아이가 횡단보도와 빨간불의 의미를 알지 못하듯이, 첫 번째 군사훈련도 받지 않은 소년이 별과 무궁화를 보아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듯이, 나는 그저 느꼈을 뿐 그 안의 의미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여태 눈감고 살았구나?’
물건이 가진 미세한 각도가 어떤 문화권에서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가죽 표면의 골을 타고 흐르는 미묘한 공기의 흐름이 또 어떤 문화권에서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는지.
그냥 의미없이 지나갔던 감각들 위로 새로운 언어와 감정들이 나풀나풀 떨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열리고 있었다. 내가 떠올린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얼른 상위 시장으로 가고 싶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건 무르물랑의 말을 통해 전달되는 간접경험뿐.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달리 보인다.
그런데 만약 상위 시장으로 가서 진짜 경험을 쌓아 나가면 어떻게 될까?
그때야말로 [만상공감]의 진짜 포텐이 발휘되는 때일 것이다.
무르물랑이 내게 물었다.
“자, 자, 소시민! 집중해! 이 신발 하고 이 신발이 어떻게 달라? 자, 이 정도는 장비 없이도 구분해야 돼! 영력을 동원해라도 파악해 봐! 자자! 두 신발의 차이가 뭐야?”
묻길래 대답했다.
“각도.”
내 말에 무르물랑이 멈칫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신발의 밑창은 정확한 수평에서 0.005도 정도 앞으로 기울어 있어. 반면에 저 신발은 뒤쪽으로 0.0003도 기울어 있지. 아까 네가 말한 것에 따르면 도각계의 주민들은 기울기가 덜한 저 물건을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할 거야. 맞지?”
무르물랑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다른 신발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작업화였다.
나는 답했다.
“그건 소재의 압축률이 다르네. 무게를 재 보면 왼쪽 게 0.15g 정도 더 무겁겠어. 무게에 예민한 종족들에게 이런 상품의 편차가 신뢰성을 떨어뜨린다는 거지?”
무르물랑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내 옆에서 나타르는 넋을 잃고 나를 바라봤다. ‘정말 이걸 벌써 다 캐치 한 거야?’라고 눈으로 묻는 듯했다.
“그, 그럼 이건?”
무르물랑이 또 다른 신발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그건 발을 감싸는 힘이 문제가 되겠어. 하나는 발목부터 발가락까지 거의 편차가 없이 균등한데, 다른 하나는 살짝 편차가 있네. 압력에 예민한 종족들에게는 컴플레인 사유가 되겠지. 다 오늘 네가 알려 준 거야.”
꿀꺽.
무르물랑이 침을 삼켰다. 액체가 액체를 삼키는 진귀한 광경.
뭐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입술을 뗐다.
“…됐다. 수업 끝났으니까 상위 시장으로 넘어가자. 아갈타를 상대하려면 상위 시장의 물건들이 필요할 거야.”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괜한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