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09화 (109/212)

8. 어깨를 견주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하려면 반드시 어깨를 견주는 과정이 따라온다.

누가 더 잘났는가?

내가 감탄할 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인가?

최선의 시나리오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감탄하는 것이다. 서로를 압도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씩 있어서 둘이 함께했을 때 강력한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상대. 이런 파트너를 찾으면 수익 배분에 있어서도 크게 공평해진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차선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압도하고, 다른 부족한 쪽은 고집 부리지 않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뛰어난 쪽의 일을 더 부족한 쪽이 보조해 가며 나름 나쁘지 않은 시너지를 보일 수 있다. 수익 배분은 불공평하겠지만, 적게 받는 쪽이 그걸 받아들이는 이상 문제될 건 없었다.

최악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은 채 끝까지 간만 보는 것이다. 일을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면 그만인 것인데, 서로 잘난 체를 하며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엎는 것도 아닌 채로 시간만 낭비하는 케이스.

내 생각에 처음 무르물랑은 지구의 열악한 환경을 보고 차선을 선택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상상할 수 없는 재력을 자랑한 것도 그렇고, 내가 인생을 두 번이나 살면서도 전혀 몰랐던 온갖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놓은 것도 그랬다.

그녀는 명백히 나를 기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계약과 향후 협력 관계를 자기 입맛대로 만들어 가려는 속셈이었겠지.

그리고 그 전략은 꽤나 효과적이었다.

‘솔직히 쫄았지.’

무르물랑은 고단수였다. 300만 타키온을 그냥 내주는 배포를 보여 주더니 그보다 훨씬 더 큰돈도 지불할 수 있음을 대놓고 암시했다.

그러고 나서 이어진 건,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겁을 주는 것이었다.

“퀴니세인, 그러니까 아갈타 제637차원강습 연대 사령관이 조만간 본국에 증원을 요청할 겁니다.”

“증원? 여기서 더요? 벌써 그럴 리가…….”

“기정사실입니다. 이번에 지구에서 발견된 고대신의 힘은 내가 파악한 것만 해도 다섯 개. 그걸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습니다.”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들이 마구 흘러나왔다.

“아니 잠깐, 잠깐만. 하나씩 하죠.”

나는 그녀의 말을 잠깐 자르고 물었다.

“고대신의 힘? 그게 뭐죠?”

무르물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튕기자 비눗방울 같은 것이 나를 향해 둥실 날아왔다.

“받아들이세요. 그게 기억을 전달해 줄 겁니다.”

팡!

눈앞에서 터지는 물방울.

그 순간, 어떤 기억이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런 이야기였다.

인간이 화석과 발자국을 보고 공룡의 존재를 알았듯이 차원 문명의 존재들은 유해와 유물을 보고 신의 존재를 알았다. 지금은 멸종했으나 한때는 번성했던 초월적인 존재들.

그들이 왜 멸종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변화한 세상에 적응을 못 했다는 설도 있고, 어비스 게이트 너머에 사는 혼돈의 존재들을 봉인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는 설도 있고, 그들이 죽어 그들의 영혼과 육체가 흩어져 이룬 것이 바로 지금의 세계라는 설도 있었다.

사실 뭐든 좋다. 가장 진보한 사이코메트리나 천리안류의 영능학적 장비를 총동원해도 판독이 불가능할 만큼 아득한 과거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타키넷조차 존재하지 않던, 고대를 넘어서 태초 이전으로 분류되는 시절은, 애초에 규명이 불가능한 상상의 영역이었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공룡의 뼈와 살이 석유가 되어 지구 문명의 근간이 되었듯이, 고대신의 유해와 유물도 아주 강대한 영력의 원천으로서 차원 문명의 발전을 이끄는 근간이 된다는 것뿐.

여기까지 기억을 받아들인 나는 저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이성계의 활도 그렇고 유해의 폭포도 그렇고, 밸런스 붕괴 수준으로 강력하기는 했지… 이걸 이용할 수 있는 기술만 있다면 대단한 자원이 되겠구나.’

상황은 명확했다.

“하… 그러니까 이 상황은…….”

무르물랑이 내 말을 끊으며 아주 적절한 비유를 가져왔다.

“조선 말기의 한반도 전역에서 엄청난 양의 석유와 석탄, 거기에 다이아몬드까지 발견된 셈이죠.”

딱 그랬다.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본, 러시아, 중국뿐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방귀깨나 뀐다 하는 나라는 죄다 달려들어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1945년의 독립마저 없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제서야 무르물랑이 서두르는 이유를 절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게 알려지면… 끝장이군요?”

“네.”

“…그렇다면 차라리 여길 버리고 도망쳐야 되는 것 아닙니까?”

“자기 세상을 버리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더구나 당신 사업은 지구의 뛰어난 장인들이 밥줄입니다. 지구를 통째로 포기하면 너무 미래가 없어요. 설령 운 좋게 뛰어난 장인들 다 데리고 같이 탈출을 한다고 해도, 자기 세계를 잃은 존재들은 영혼에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어지간히 영력 수련을 한 게 아니라면… 그 장인들은 더 이상 아우라가 깃든 물건을 만들지 못하게 될 테고, 당신은 파산할 겁니다.”

하는 말마다 벽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해요?”

내가 앓듯이 묻자 무르물랑의 체온이 후끈 올라갔다. 위험을 즐기는 건가? 이 순간, 그녀는 오히려 즐거워 보였고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방법이 있죠.”

“그게 뭔데요?”

“인수 합병의 계.”

“인수 합병의 계?”

뭐야, 이 되다 만 사자성어 같은 네이밍은?

내가 당혹감을 느끼든 말든 그녀는 자기 말에 심취해 들어 가기 시작했다.

“일단 시간은 있습니다. 꽤 오랫동안은 다른 문명이 끼어들지 않을 거거든요. 아갈타가 지구를 독식하기 위해 고대신의 힘에 대해서는 철저히 기밀을 유지할 거예요. 같은 이유로 놈들의 증원도 제한적일 겁니다.”

“그건 왜죠?”

“이미 아갈타가 지구 침공에 꽤나 신경을 쓰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니까요. 근데 여기서 또 대규모 증원군과 첨단 무기를 배치한다? 너무 티가 나죠. 그러니까, 소수 정예의 병력을 천천히 지구로 들여올 겁니다.”

“…그게 우리의 기회이고요?”

“네. 놈들이 지들 혼자 먹겠다고 시간을 끄는 사이에 압도적인 소비로 방위산업을 제대로 갖추고, 아갈타에 함께 대항할 동맹을 찾으면 됩니다. 물론 우리의 최종 목표는 동맹을 넘어서서 제대로 된 차원 문명이 지구를 합병하게 만드는 겁니다.”

잘 듣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합병?’

지구를 팔아 치운다고? 아니 뭐야, 그러면 결국 지구를 포기하겠다는 것 아닌가?

내 의문에 무르물랑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다르죠. 자, 우리가 직원 3명 규모의 스타트업 회사를 차렸다고 칩시다. 아갈타는 그 회사를 맘대로 빼앗아서 매각해 버리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대기업이 우리 가능성을 보고 통째로 사 버리도록 유도하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대기업으로부터 막대한 대가를 받고, 우리 밑으로 직원도 한 100명쯤은 배정받게 되는 거죠. 구멍가게 사장이 글로벌 대기업 임원이 될 수도 있는 엄청난 기회라고요.”

“아…….”

단번에 이해됐다.

동시에 그녀의 현란한 말솜씨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까는 조선을 비유하더니 이번에는 대기업과 스타트업이야?

이게 진정 지구에 온 지 한 달, 한국어를 배운 지는 이제 3일 되었다는 외계인의 말솜씨라고?

말솜씨만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 내용도 그랬다.

내가 모르는 정보는 한가득이었고, 상상도 못 해 본 접근법과 해결책이 자꾸 쏟아져 나왔다.

사실 나는 지구를 지키는 걸 애초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럴 바에는 좋은 조건에 합병하는 게 나은 것 아닌가? 그런 방법도 있었던 건가?

솔직히 말해서, 이런 존재에게 기죽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무르물랑은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려 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어깨를 활짝 펼치고 내 어깨를 밀쳐 내며 이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보아라. 내가 너보다 재력도 뛰어나고, 정보도 뛰어나고, 판단력도 위에 있다. 너는 내 도움 없이는 곧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르도록 해라. 내가 메인이고 네가 보조다.’

그래. 납득. 너 잘났다.

솔직히 감탄했다. 무르물랑은 내가 보아 온 모든 이계인 중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넓고 능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여기는 지구라고.’

지구 문제에 있어서 최고의 전문가는 무르물랑이 아니라 나다. 지구에서만 인생을 두 번째 살고 있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내게는 [만상공감]이 있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날 휘두르게 하기에는 나도 여기서 겪어 온 일들이 만만치 않다.

‘나도 어깨가 있다, 이거야.’

그 어깨를 활짝 펴고 무르물랑의 어깨에 마주 대 보기로 했다.

“그랬군요… 그럼 이게 도움이 될 거예요.”

내가 꺼낸 것은 만년필 크기의 막대였다.

그 정체는 아갈타의 포병에게서 빼앗은 교신기.

무르물랑에게 휙 던져 주자 그녀는 그걸 받아 들고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 이거 설마 아갈타의 군용 교신기?”

네가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무르물랑은 이내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아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걸 빼냈다는 게 대단하긴 한데… 도움은 안 되겠네요. 암호화되어 있거든요. 이건 특정 영력 패턴을 주입하지 않으면 절대 열어 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우리 뮤리온 차원으로 가져가도 군에 소속된 암호 전문가를 초빙하지 않는 이상은 해독이 불가능합니다. 아쉽군요. 이 내용만 알아도 아갈타를 상대하기가 훨씬 더 수월할 텐데…….”

“이렇게요?”

나는 그녀에게서 교신기를 돌려받아 영력을 움직였다. 이전에 기억해 두었던 패턴을 따라 영력을 움직였다. 내 부족한 영능 지배력으로는 흉내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만상공감]이 교신기와 교감하며 내 영력의 세심한 배치를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부우우웅-

교신기가 떨리며 주변에 사념파를 퍼뜨렸다.

그 순간, 깜짝 놀란 무르물랑이 갑자기 물결을 막 때리고 진동시키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도오옴mmm무르르 chㅏ라th튤썩!”

저절로 튀어나온 그녀의 모국어. 뮤론의 언어로 ‘이런 미친. 이게 무슨 일이야?’ 하는 말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걸 증명하듯 무르물랑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아, 아니… 어떻게 한 거야, 이걸? 도오옴mmm! 아무런 장비도 쓰지 않았는데? 영능 암호학 같은 고급 지식이 있을 리도 없을 텐데? 설마 아갈타의 암호 체계를 미리 알고… 로오옹nggg 그르ch우추르! 아니 그게 더 말이 안 되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존댓말마저 잊어버리고 모국어랑 한국어를 섞어 말하는 무르물랑이었다.

나는 그녀의 경악을 즐기며 교신기에 저장된 정보를 풀어놓았다.

“그쪽 얘기를 듣고 보니 이제야 이 정보가 이해가 되네. 이건, 유물과 유해의 증거들을 아갈타의 본성으로 운송하려는 작전 계획이야. 놈들도 증원군을 아무런 확증도 없이 보내 주진 않을 테니, 전리품과 증거를 같이 보내려는 수작이었네.”

무르물랑이 존댓말을 까먹었으니 나도 슬쩍 말을 놓았다.

“자, 여기에 운송 계획이 다 나와 있어. 7일 뒤 태평양 한복판에 있는 게이트를 통해 지구를 빠져나가고, 포대가 설치된 2번, 7번, 23번 약소 차원을 거쳐서 본성으로 향하는 차원 조류를 탄다… 차원 항해도까지 아주 세세하게 기록돼 있네.”

여기까지 말하고 무르물랑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놀라서 나를 귀신 보듯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설명하는 것을 놓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투명하고 일렁이는 살결이 금방이라도 끓을 듯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찰랑!

그녀의 표면에 파문이 일고 그녀는 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엄청 좋네. 운송 루트와 호위 병력 규모까지 미리 알게 됐으니… 운송을 저지하기만 하면 되겠구만? 그러면 시간을 훨씬 많이 벌 수 있어. 겸사겸사 전리품도 챙기고. 근데… 혼자 몇 명까지 제압 가능해? 혼자서 최소 다섯은 잡을 수 있어야 말이 되는데?”

무르물랑은 아예 존댓말을 포기해 버렸다. 이번에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나를 경계하는 듯도 했고, 흥미진진해하는 듯도 했다.

나는 그 시선을 당당히 마주하며 답했다.

“이미 포대 하나 부숴 봤지. 다섯명이면… 한 10초?”

“뭐……? 하지만 네 영력 수준은…….”

또 당황해서 뭔가 말하려던 무르물랑이 문득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더욱더 흥미진진해하는 눈빛으로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어깨가 맞닿고 어떤 어깨가 더 큰지 견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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