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압도적인 소비로!
무혼 권가의 의무실.
만년 유창목으로 짜인 마루에선 은은한 향기가 올라왔다.
치유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만년 유창목은 팔뚝 길이의 마루 널 한 장만 팔아도 벤츠 한 대를 살 수 있을 만큼 귀한 소재였다. 그런 것이 50평형 의무실 전체에 쫘악 깔려 있었다. 무혼 권가의 위세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의무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무혼 권가에서 차지하는 위상까지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으… 으음…….”
병상에서는 꼬박 이틀을 기절해 있던 소년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소년의 머리맡에는 댕기머리를 곱게 땋은 인형처럼 예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소녀가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탁! 때렸다.
“검웅, 이제 괜찮으니까 일어나세요.”
그 순간 소년, 최치국은 눈을 번쩍 떴다. 누가 버튼을 누른 것처럼 갑작스러운 각성. 잠에서 깨어나는 몽롱한 중간 과정이 전혀 없었다. 그는 또렷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머리맡의 소녀, 권승리를 바라보고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어? 아가씨?”
턱.
하지만 몸을 일으키려던 최치국은 갑자기 허공에 턱 걸린 것처럼 멈춰 서더니 천천히 뒤로 넘어가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겉보기엔 흔한 염동력 같아 보였다. 그저 최치국이 일어나려다가 무언가에 밀려 도로 누운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최치국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염동력 따위가 아니다. 최치국 정도 되는 능력자가 어떻게 저항할 방법도 찾을 수 없는 고차원적인 능력, 법칙 그 자체에 간섭하는 힘이었다.
그가 눈을 반짝거렸다.
“능력을 벌써 이만큼이나 끌어올리셨군요!”
권승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검웅께서 다치지만 않았어도 이것보다 훨씬 더 괜찮았을 거예요. 도대체가 수련에 집중을 할 수가 없네요. 소시민 사령관을 돕겠다고 나간 사람이 도리어 사경을 헤매며 실려 오는 게 어딨어요?”
그 책망에 최치국의 얼굴이 굳었다. 기억이 난 것이다. 자신이 어쩌다가 여기 병상에 누워 있게 되었던 것인지.
최치국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아가씨, 저를 찾아온 마족은… 아니, 그 악마는 달랐습니다. 벌써부터 등장할 만한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유해에게 받은 힘까지 총동원했는데도 당해 낼 수 없었어요. 특히나 오르피앙페르라고 했던가? 놈이 가진 팔찌 형태의 무기는 흡사 발록을 떠올리게 하는 위력의…….”
“그러니까 검웅께서 여기 누워 계신 거겠죠. 이미 다 보고받았어요.”
“아… 그랬군요?”
“네. 검웅께서 놈을 아군이 있는 곳까지 유인하고 놈의 그 팔찌를 봉쇄한 덕분에 간신히 쫓아낼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아, 혹시… 아가씨께서 노출되진 않으셨겠죠?”
“현시점에서 무혼 권가의 힘은 그렇게 녹록치 않습니다. 검웅께서 제일 골치 아픈 팔찌까지 목숨 걸고 봉쇄하셨는데 내가 나설 일 같은 건 없죠.”
“다행입니다.”
환하게 웃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최치국을 바라보다가 권승리는 짧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살아 계셔서 다행이에요.”
그 말에 최치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연한 겁니다. 제 역할을 다하기 전까지는 죽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더 열심히 수련해서 다음에는 제 혼자만의 힘으로도 이겨 보겠습니다. 그 팔찌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을 좀 잡은 것 같습니다. 다시는 이렇게 폐를 끼칠 일 없을 겁니다.”
신이 나서 말하는 최치국을 보며 권승리는 가슴이 답답했다.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역할을 다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그냥 최치국이라는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한다고. 지난 생부터 함께해 온 동료로서, 사람 대 사람으로서 최치국이라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거라고.
하지만 최치국의 눈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런 말이 먹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로지 대계에 성공해 지구를 지키는 것, 그것 외에는 없어 보였다. 세계를 기꺼이 자기 어깨에 지려고 하는 진짜 거인, 영웅이었다.
권승리는 다시 한숨을 뱉고 말했다.
“검웅님.”
“네?”
“끝까지 자기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꼭 명심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자신을 조금쯤은 의심하세요.”
“…네?”
“이번도 그래요. 솔직히 그 강력한 악마를 상대로도 문제없다고 생각했던 거잖아요?”
“네? 아닙니다. 아직은 이기기 힘들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러니 놈을 유인했던 것 아닙니까?”
“문제없다는 게 꼭 이긴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상황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겁니다. 첫째, 이길 수 없으니 유인해야 한다는 판단을 좀 더 빨리 내리셔야 했고, 둘째, 그 팔찌를 봉쇄한다고 마지막에 그렇게 몸을 던지지 않았어야 해요.”
“네? 하지만 그러면 아군의 피해가……!”
“피해가 있겠지요. 슬플 거예요. 하지만 그래야 돼요. 아군들도 검웅님과 같습니다. 목숨 걸고 싸우는 이들이에요. 일방적으로 보호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당신을 그런 장소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잃지 않기 위해 수련하고 그 자리를 지켜 온 사람들을 내팽개치고 혼자 그렇게 나서지 말라는 거예요!”
권승리의 간곡한 어조에도 최치국은 난처한 듯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하기야 검웅에게 먹힐 리가 없는 요구였다.
권승리는 또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당신을 모르나요? 뻔하죠. 결국엔 문제될 게 없다, 내가 뜻한 대로 해낼 수 있다 그렇게 믿고 있는 거죠? 그러니 그렇게 몸을 던지죠. 알아요, 그런 사람이라는 것. 모두가 패배할 거라고 단언해도 기어이 발록과 결투를 벌인 남자. 사람들은 그걸 용기라고 하지만, 당신은 그냥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의심 한 톨 없이 믿고 있는 거예요. 결국엔 자신이 이긴다고, 질 리가 없다고.”
“…그게 잘못된 겁니까?”
최치국의 반문에 권승리는 눈썹을 처량하게 휘었다.
“어쩌면 그 자기 확신이 검웅께서 그토록 강했던 이유였겠지요. 하지만 어떨 땐 바로 그런 걸 만용이라고 불러요. 특히나 우리가 앞으로 상대해야 하는 강대한 적들 앞에서는 말이죠.”
그녀는 최치국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두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다 좋아요. 하지만 부탁이에요. 부디 한 올의 의심과 두려움만큼은 남겨 두세요. 부디 스스로 자신의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짓만큼은 하지 마세요. 때로 당신은 당신 생각만큼 강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최치국은 쓰게 웃었다.
‘내가 내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고?’
그러면 그만큼 더 강해지면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 분명 약하기 그지 없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강해진 사람. 놀랄 만큼 빠르게 강해진 사람.
“아, 그러고 보니 창신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시민 사령관님은… 많이 상심하셨습니까?”
“이겼어요.”
“네, 이겼군요… 역시 어려울 거라고… 네?”
“이겼다고요. 마족 셋을 주살했다고 하더군요.”
“마족 셋……?”
최치국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창신대에는 초능력자도 몇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요. 압도적인 전투력이었다고 해요. 그들이 무장했다고 하는 이차원 장비의 힘이 상상 이상인 것 같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로 아틀라스 클럽 전체가 시끄럽습니다. 어쩌면 소시민 사령관과 이차원의 교류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게 아닌가… 여러 의미로, 아주, 대단한 수준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이 사실에 감탄해야 할까?
짜증 내고 분노해야 할까?
권승리와 최치국은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나란히 미간을 찌푸렸다.
* * *
상선약수라는 말이 있다.
어디에 담겨도 그 형태를 쉽게 바꾸고 제 빛깔을 드러내는 물처럼 뛰어난 도는 물과도 같다는 뜻.
뮤론이라는 종족이 그러했다. 물로 구성된 신체를 지니고 있어서 그런지 무엇이든 빠르게 배우고 아주 깊은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단 3일 만에 한국어를 지금 수준으로 마스터해 버렸다는 그녀의 말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지구에 온 지 한달이 좀 넘었다는 무르물랑은 벌써 10개 국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말했다.
“아아… 이럴 수가… 이렇게까지 낙후됐을 줄은……!”
투자를 하기 전에 생산 시설을 견학해 보고 싶다는 그녀를 데리고 서부 드래곤힐동을 보여 준 직후였다.
까막이와 데미안이 찬탄했던 마화 용광로를 보고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던 그녀는 신발을 만드는 77명의 장인을 보고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탄을 터뜨렸다.
“여기가 정말 갯펄시장에 판매하는 그 신발들을 만드는 공장이라고요?”
“네.”
“하아…….”
그녀는 흘러내릴 것처럼 맥이 빠져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 신발 만드는 장인들이 긴장한 낯빛으로 주춤 물러섰다.
그나마 내가 괜찮다고 잘 타일러 놔서 저 정도지, 그렇지 않았으면 죄 도망갔을 것이다.
이차원 존재와 교류한 적 없는 지구인들의 눈에는 무르물랑이 그저 액체 괴물 정도로 여기질 뿐이었으니까.
내가 그렇게 두려움에 질린 장인들을 타이르고 있을 때, 무르물랑은 속이 움푹 꺼진 것처럼 허탈한 감정과 함께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시스템이 아닌 여기 있는 장인 한 명 한 명의 센스에 기대고 있었다는 거네요.”
“뭐, 그렇죠.”
“여기 있는 장인들이 다 죽으면요?”
“신발 사업은 끝이죠.”
“제품을 고급화하는 것도 쉽지 않겠군요. 아우라를 깨어 낼 정도로 뛰어난 혼을 지닌 장인들이지만… 선진 기술에는 무지하니까.”
“으음… 그럴까요?”
촤아악!
무르물랑이 머리를 털었다. 사방으로 물이 튀겼다.
뮤론이란 종족이 괴로움을 표현하는 방법임에 틀림없었다.
“열악해요. 예상한 것보다 더 열악해요. 아무래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마냥 좌절하고 있지 않았다. 좌절할 만큼 좌절하고 나서는 다시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반짝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특단의 조치요?”
“네. 제가 더 깊숙이 개입할 겁니다. 지금 당장 압도적이고도 신속한 타키온의 소비가 필요하거든요.”
잠깐,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뭘 소비한다고요?”
“타키온을 어마무시하게 쏟아부어서 공정을 신식화하고 장인들을 재교육하겠다고요. 아갈타의 침략을 이겨 내면서 발전까지 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어요.”
그녀의 눈이 번쩍이며 주변을 휩쓸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녀의 눈에 닿는 공방의 장비들을 하나하나 가리킨다.
“저기 지금 생으로 권능을 낭비 중인 장인들에게는 권능 증폭 작업대를 하나씩 마련해 주고, 저기 저 원시적인 마화 용광로는 아예 부수고 새로 짓죠. 그리고 저기 이 공장의 구조도 비효율적인 게…….”
그녀의 입에는 지난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도 들어 보기는커녕 그런 게 있을 거라고 짐작조차도 해 본 적 없는 고급의 영능학적 용어와 기술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근데… 잠깐만.
“지금 그걸 다 사겠다고요?”
진짜요?
방금 받은 300만 타키온으로도 어림없어 보이는데?
그런 나에게 확답을 내리듯 그녀는 말했다.
“말했잖아요? 압도적이고도 신속한 타키온의 투입이 필요해 보인다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녀가 눈이 부셨다.